소설가 이외수 씨는, “종교 때문에 싸우고 있는 그대에게”라는 글에서, 속 좁은 종교인들을 향한 지성인다운 권고를 합니다. 점잖은 쓴소리입니다(별지).
피상적으로 읽으면 나무랄 곳이 없을 듯합니다. 대범한 인간애가 무척 아름다워 보입니다. 무종교인들이나 다원주의자들은 ‘좋은 글’이라며 흔쾌히 동의할 것입니다.
반면 성도들의 반응은 어떨는지요. 동의할 수 없는 세상이론에 불과하다며 거부하기 십상입니다.
이 씨의 ‘참 종교와 사이비 교리논쟁으로는 아무도 설득시키지 못한다.’는 논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의미는 기독교만 참 종교라는 주장에 대한 비꼬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의 실제 삶의 모습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말로써 아무리 반박해 봐야 헛일입니다. 오직 삶의 모습으로 변론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 어떤 반론도 제기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말과는 다르게, 실제의 삶에서는 견딜 수 없는 냄새만 풍길 뿐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염치로 무슨 말로 변명하려는지요.
신도들의 알량한 종교심을 자극하여 막대한 돈(이것에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라는 찬란한 겉옷 입히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을 긁어모은 다음, 세상 기업체를 만들어서 아들들에게 주어버리고 자신은 골프채 휘두르기에 여념없는 목사들.
역시 같은 수법으로 모은 돈으로 웅장한 건물(이것에 ‘성전’이라는 거룩한 이름 붙이기도 잊지 않습니다)을 세워, 아들과 사위 등에게 대물림해주곤 잘했다고 거들먹거리는 목사 일당들.
담임하는 교회의 사례비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인지 후원회까지 모집하겠다고 설레발치는 고질(高質?) 코미디언 목사들.
에어컨 목사를 비롯한 성도착자와 방불한 무수한 성달인(性達人)목사들.
감성적 종교심을 빌미삼아, 엉뚱한 세상이론을 성경말씀으로 포장하여, 그저 달콤하게 요리하는 데만 땀 뻘뻘 흘리는 목사들과 목사들.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고개 주억거릴 줄만 아는 동일한 수준의 장로들과 권사들과 집사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운 모습들이 차고 넘치는 데, 상당수의 성도들은 어설픈 변명 늘어놓기에만 급급합니다. “그런 사람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안 그런 사람이 훨씬 더 많다.”라며 얼굴까지 붉히곤 합니다.
어찌하든 기독교와 성도를 보호하고픈 충정은 이해되지만, 이는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이며 허무한 짓입니다. 여기서 이 문제를 다루기는 적합하지 않겠기에, 논리적 모순 한 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격언의 논리를 따져야 합니다. 물 밖의 1할만 보고 크기를 단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최소한 그보다 9배 큰 빙산 정도는 그려낼 줄 압니다. ‘일각’을 보고 전체를 유추해 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위의 예로 든 사람들(스스로 참 성도라 주장하지만 삶의 모습으로 보증되지 않는 듯한 목사들과 장로들과 권사들과 집사들)도 빙산의 일각일 수 있습니다. 일각이라면, 한국교회 전체가 이들과 같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역으로 말하면 이 현상은 성경이 제시하는 참 성도들의 숫자가 오히려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현실은 이 우려를 뒷받침하는 것 같고요.
기독교의 심각한 타락상 - ‘빙산의 일각’이라는 격언에서 얻어야 할 뼈아픈 교훈입니다.
우매한 기대에 마취되어 위기감을 느끼지 못할 때, 그곳에는 소생의 희망이 아니라 죽음의 절망만이 존재합니다. 극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한이 있더라도 썩은 환부는 반드시 도려내겠다는 결단이 절실하다 할 것입니다.
‘막무가내 옹호’는 성경의 진의에서 멀리 떨어진 허구임을 직시하고, 작은 포기를 두려워하다 더 큰 상실을 초래하지 않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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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지> : “종교 때문에 싸우고 있는 그대에게 (이외수, 청춘불패 중에서)
그대여.
모든 신들은 한결같이 인간이 사랑하고 자비로워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셨다. 사랑하고 사랑하며 사랑하라. 자비롭고 자비로우며 자비로워라. 사랑 더하기 사랑, 자비 곱하기 자비, 빼기로 계산하는 놈도 용서하고 나누기로 계산하는 놈도 용서하라. 어떤 교리도 실천하지 않으면 닭 우는 소리나 개 짖는 소리와 무엇이 다르랴.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에는 그 가르침을 실천하기보다는 재단의 세력을 확장하고 재물을 비축하는 일에만 눈알이 충혈된 종교인들이 부지기수로 널려있다. 그들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미워하고 배척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내가 믿는 종교만이 참 종교요, 네가 믿는 종교는 사이비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들은 아직 종교적으로 부화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배타와 이기의 껍질을 탈피하지 못한 채 영원히 무정란으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신은 전세기를 통틀어 단 한 번도 배타와 이기를 가르친 적이 없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만약 예수님과 부처님과 공자님이 한 자리에서 만난다면 서로를 어떤 마음으로 대할까를. 서로를 마귀나 사이비로 몰아붙이며 멱살잡이를 불사하거나 아니면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폭들을 불러 모으실까. 또 아니면 높디높은 성전이라도 신축하겠다는 명분으로 한바탕 설교설법을 펼치시고 서로에게 재산 헌납을 종용하실까. 천지개벽을 골백번 하더라도 절대로 그런 코미디는 연출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기와 배타의 껍질에 싸여 있는 분들은 대답해 보시라. 왜 그대들은 거룩한 분들의 이름을 빙자해서 그분들이 한 번도 가르치거나 실천해 본적이 없는 코미디에 혈안이 되어 있는가.
그대여.
나는 종교의 본질을 사랑과 자비로써 모든 것을 포용해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신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진정한 종교인은 모든 종교를 포용할 수 있다.
그는 세상만물을 사랑할 수 있으며 끝없이 자비롭고 또 자비로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원하지 않은 것, 부처님이 원하지 않은 것을 결코 행하지 않는다. 높고 거대한 것에 눈을 돌리지 않으며, 보다 낮은 곳에서 작고 가까이 있는 것부터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살고 있다.
테레사 수녀를 보라. 그녀는 한평생을 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쏟았지 가르침에 대해 논쟁하거나, 이교도를 굴복시키기 위해 힘을 쏟은 적이 없었다. 힌두교를 믿는 병자라고해서 문을 걸어 잠근 적이 없었으며, 자신이 돌보는 병자에게 예배 참석과 헌금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신의 가르침대로 끝없이 사랑하고 끝없이 자비로웠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그대여.
신은 모든 이에게 임해 있고 모든 생명에게 임해 있다. 우주의 어떤 기운도 혼자만의 것은 없으며 그것은 모두 서로 나누고 베푸는 데에 쓰여 지게끔 존재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코로 들어갔던 공기가 우주의 순환을 따라 예수님의 코로 들어가는 것이며. 공자님의 코로, 그대와 나의 코로, 저 골목에서 뛰어노는 강아지의 코로 들어가는 것이다.
진정한 종교에는 네 것과 내 것이 없으며, 증오와 미움이 없다. 그것은 따지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다.
나는 그대가 어떤 종교를 믿는지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대가 어떤 가르침을 깨우치고 그것을 실천하며 사는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대로 이제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혀온 종교전쟁이 세상에서 종식되기를 글로써 간절히 기도한다.
이 기도에 그대 역시 함께 손을 모아주리라 믿는다. 봄날 개천을 건너가는 저 나비들은 교회를 다니 적이 없어도 어째서 저토록 아름다우며, 가을 날 들에 핀 저 풀꽃들은 절간을 다닌 적이 없는데 어째서 저토록 아름다운가.
그 진흙탕의 부끄러움 속 한 가운데 제가 있음을 알고 무릎을 꿇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