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6:1-13 하나님을 두려워하고도 믿지 않는 이유 11/23/2017
“모르드개가 과연 유다 사람의 후손이면 당신이 그 앞에서 굴욕을 당하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그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6:13)
본문은 신하중의 으뜸이 된 하만의 “교만이 패망의 선봉”(잠16:18)이 되는 내용이다. 유대인 몰살 계획을 왕이 허락해줘 신이 났지만 자기 멸망의 덫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시발은 ‘마침’ “그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한”(1절) 까닭이었다. 왕국을 바로 세우고 자신의 위를 지키려니 이런 저런 염려가 끊이지 않았고 에스더의 잔치에 갔다가 왕비가 근심에 가득 차있어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혹시 왕비에게 잘못한 일이 있나 싶어 참고하려 역대일기를 읽는 중에 ‘마침’ 모르드개가 암살모의에서 자기를 지켜준 부분에 시선이 꽂혔다. 당시는 경황이 없어 아무 보상도 해주지 못한 것을 기억하고는 신하의 조언을 얻으려는데 또 ‘마침’ 하만이 곁에 있었다. 일일이 여호와가 간섭하지 않고는 이럴 수는 결코 없다.
왕이 하만에게 던진 질문은 더 그렇다.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6절) 코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은 하만으로선 당연히 자기라고 오해할만하다. 왕이 모르드개라는 이름을 들먹이지도, 암살을 막아준 자라고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하만의 대답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왕이 질문하는 말과 그 의미를 착각하는 하만의 마음까지 하나님은 아신다. 이제 하만은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도리어 왕의 수레에 왕복을 입혀 태우고 자기는 마부가 되어 성중의 모든 사람 앞에 그에게 절하라고 소리쳐야 했다. 백성과 신하들의 절을 받아야만 할 자는 하만이 아니라 모르드개다. 선악을 반드시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이 정반대로 역전, 아니 정상화시킨 것이다. 놀랍게도 하만은 자기가 왕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왕이 고귀하게 여기는 자를 자기라고 착각하고 왕과 똑 같은 대우를 해주라고 대답했다. 정작 왕의 명령을 어기는 반역자는 하만이었다. 모든 이의 심령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도 결코 없다.
정작 본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구절은 따로 있다. 하만이 당한 수치를 알게 된 그의 아내 세레스가 “모르드개가 유다 사람이고 당신이 그에게 굴욕을 당하기 시작했으면 능히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진다”(13절)고 예언 내지 선언을 했다. 아내가 남편에게 할 소리가 절대 아니다. 히브리인들의 신의 권능은 세계에서 최고라고 출애굽 때부터 소문났던 것이다. 약 천년의 시차가 있는데도 그랬다. 이후로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또 가깝게는 다니엘과 그 세 친구의 기적으로 여호와의 엄청난 권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고 권능의 신이라고 인정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개종하지 않는 이방족속의 완악함도 대단하다. 현실의 삶을 윤택하고 풍요롭게 해주는 이왕의 기득권을 죽어도 놓기 싫은 탓이다. 돈만 주인으로 삼았기에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탓이다.
실은 그들을 탓할 문제가 아니다. 자기들이 택한 길로 걸어가는 것뿐이다. 이방인이었던 우리 또한 그 심령이 완악하기는 그들과 똑 같았음에도 이제 여호와 앞에 무릎 꿇게 된 은혜는 대체 어떤 연유인가? 오직 한 가지 이유 하나님의 셀 수 없는 ‘마침’이, 그만큼 다함없는 긍휼이 내 인생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 우리가 보일 반응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 가지 만으로도 평생을 감사 찬양 경배해도 모자라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