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b> 인생을 어리석게 망치는 지름길</font></b>
“<font color=brown>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악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font>.”(갈4:8-11)
기독교인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특정한 날에 출생, 결혼, 이사, 개업을 하면 행운이 더 따를 수 있다고는 절대 믿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비과학적인 미신이라든지 점쟁이한테서 택일을 받으니 우상숭배라든지 하는 상식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것을 넘어서는 신자들만의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 많은 유대인 신자들이 예수를 믿고도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켰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했던 까닭과 불신자들이 현재 날을 지키는 이유는 서로 다릅니다. 불신자들은 특별한 날이라야 특별한 복을 더 많이 받으리라 기대합니다. 반면에 유대율법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 외에 율법에 규정된 특별한 절기도 따로 준수해야만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날을 지키는 목적이 불신자는 현실의 형통을 바라는 것이라면 유대인 신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소망하려는 차이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 사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 오늘날로 치면 불신자 시절의 관습과 생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나아가 “다시 악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한다.”고 심하게 야단쳤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제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경은 예수 믿는 신자가 다른 종교인 내지 불신자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믿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타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또 믿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처럼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었다고는 절대 알지 못합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인간 스스로 착해져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노력합니다. 죽은 후 생전의 성적표에 의거해서 영원한 운명이 갈라진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인간은 평생 동안 하나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행과 공적을 열심히 쌓고 또 정성과 치성을 최고로 바치기만 하지 구원받을지에 대한 확신은 아무리 해도 생기지 않습니다. 인간의 부족하고 연약한 능력으로 감히 하늘에까지 올라가겠다고 덤비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인간 스스로는 죽을 때까지도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속에서 탐욕, 시기, 질투, 저주, 음란, 위선, 죄악이 솟아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셨기에 그 체질을, 즉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간은 모두가 스스로는 절대로 죄에서 자유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하나님 당신 되시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러 이 땅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그분의 능력으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내려 왔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그분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 자는 그 순간 성령이 역사하여 이름이 천국의 생명책에 기록되고 그 후로 죽을 때까지 하나님 쪽에서 개인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자신의 운명이 죽을 때까지 결정되어지지 않기에, 즉 인간이 하나님을 알기만 하지 그분이 자기를 알지 못하므로 평생을 두고 공적을 쌓아야만 합니다. 기독교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이 나를 알기에 환심을 따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따로 살 필요는 없이 단순히 부모에게 순종하며 그 사랑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예수 믿는 신자마저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다 이루신 공로 위에 또 다른 인간의 공적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처럼 정성과 치성을 바쳐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의 모든 날을 복되게 하시고 영원한 계획 가운데로 인도하고 있기에 신자는 단순히 그분 뜻대로 살기만 하면 됩니다.
특별한 날에 특별한 복이 있다면 그 날을 주관하는 것은 신자도 하나님도 아니라 정해진 숫자가 능력을 갖는 셈입니다. 심지어 인간이 특정한 날을 정해놓고 더 복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훼방하고 그분의 위치에 올라서는 죄입니다. 상식적으로도 부모의 자식 사랑이 일 년 중에 특별히 더 강해지는 날이 따로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럼 설날에 따로 예배를 드려서 특별한 절기로 지키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날에 특별한 복을 더 받아내려고 즉 자기가 정한 날에 하나님의 환심을 더 얻어내려고 인간의 정성과 치성을 바치는 것은 기독교에선 절대 금물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특정일을 기념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더욱 그분께 순종하려 헌신하는 것은 얼마든지 권장할 일입니다. 아니 많이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한 크리스마스, 죽음에서 부활하신 부활절 예배가 그 좋은 예입니다.
구정은 비록 음력설이긴 하지만 새해가 시작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해가 바뀜에 대한 감사와 헌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해가 바뀐다는 것은 새로운 사계절이 다시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사계절이 규칙적으로 있게 된 것은 인간이 살기에 가장 적합하며 예측 가능한 환경과 기후를 하나님이 미리 고안해서 마련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계절이 제 마음대로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컨대 여름이 일 년쯤 있다가 가을은 일주일 겨울이 단 한 달 그리고 봄은 없이 여름이 일주일 가을은 몇 년 가면 말입니다. 도대체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삶을 예측하고 계획을 짜서 인생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해 미래라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적 미래는 있지만 그 미래에 소망을 걸어야 할 의미와 가치가 전혀 없기에 미래 자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진 날에 새해가 규칙적으로 시작되게 만든 것은 결국 인간에게 당신의 뜻 안에서 그 삶과 인생을 계획하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또 당신의 뜻이란 당연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따로 시킬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식물이 사계절에 따라 발아, 성장, 열매 맺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인간 또한 그렇게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땅의 관리를 당신 대신에 인간에게 맡긴 것입니다. 요컨대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반드시 그분의 거룩한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계절과 기후가 전혀 예측 못할 정도로 뒤죽박죽이면 아예 생존 자체가 안 될 것입니다. 즉 지구가 태양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으면 다 타죽고, 조금이라도 멀리 있으면 다 얼어 죽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생존이 된다 해도 행성의 자전 공전 주기가 엉망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인생사를 계획할 수 잇다는 것은 해와 달과 지구와 별들이 반드시 있어야 할 위치에서 꼭 돌아야할 주기를 동일한 속도로 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속에 사는 인간 또한 꼭 있어야 할 위치에서 꼭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이 하나님 품 안에서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구정을 어떻게 보냅니까? 조상 전래의 명절로만 알고 풍성한 음식을 나눠 먹고 즐거운 놀이를 하며 지냅니다. 또 조상의 음덕으로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감사의 표시로 제사도 지냅니다. 죽은 귀신에게 절한다는 종교적 이유를 떠나서 인간이 인간에게 감사하는 셈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끼리만 즐겁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해선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사계절이 규칙적으로 새로 시작하고 태양과 지구가 정확하게 위치하지 않았다면 생존 자체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사하기 좋은 날, 결혼하여 복 받는 날, 개업하면 사업이 번창해지는 날 등은 따로 점쟁이한테서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택일 받으려 합니다. 또 신문을 펴서 그들의 시선이 가장 먼저 가는 곳 중의 하나는 “오늘의 운세” 난입니다. 띠에 따라 그날의 운을 예언한 것을 보고 일희일비하거나 미리 조심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같은 띠를 가진 남녀노소 예컨대 한국 인구가 5천만이라면 그 12분의 1인 417만 명이 자신이 처한 특유의 여건과 관계없이 그날 하루의 일과가 똑 같다는 예언을 믿는 셈이지 않습니까?
자기 인생을 스스로 계획, 추진,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가 불신자입니다. 세상만사에 영향을 미치는 제 삼의 미지의 힘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뜻과 아무 상관없이 미리 정해진 운명이 어떠한지 궁금해서 그날의 운세 혹은 특별한 길일에 관심을 쏟는다면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입니다. 자신의 믿음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자가당착적 모순입니다.
만약 정말 불신자가 불신자답게 살려면, 즉 신의 존재를 부인하려면 인생살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연의 일치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 땅에 태어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자기 인생 전부가 우연의 일치로 이뤄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아무리 자기 생각과 계획으로 이끌어 간다고 싶어도 그 생각과 계획 자체도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우연의 일치라는 것은 아무런 목적과 최종 지향점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살다가 바람 부는 대로 죽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자기들 믿음대로라면 구태여 아등바등 자식 잘 되라고 수고할 필요조차 전혀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정말로 인간다운 행위는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가 결코 아님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 자리에 이르게까지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신 분이 자기도, 부모님도, 주위 사람도 아니라 눈에 안 보이지만 따로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자는 사계절이 뒤죽박죽 할 수도 있다고 믿는 것과 같으므로 그 인생도 자연히 럭비공처럼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나고 죽는 것조차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하루에도 죽 끓듯 변죽 부리는 자기 마음도 올바르게 통제하지 못하면서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고 큰소리치는 것은 너무나 비겁하고 치사한 짓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생사를 기껏 재수로만 판단합니다. 운수 좋은 날만 찾습니다. 운수를 따지는 것은 기실 세상살이가 자기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인데도 끝까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우기고 하나님이 없다고 큰소리칩니다. 필연적으로 그 인생은 시시로 세상 유행이나 쫓으며 이리저리 쏠릴 뿐입니다. 허공을 치며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하다가 죽을 때에는 허무했다는 한 마디로 마감하게 됩니다.
이 구정 아침에 신자라면 정말로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고 새롭게 다짐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신 바가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하고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나를 엄마의 태중에서부터 택하여 당신의 거룩하고도 영원한 계획 가운데로 인도하는 인생임을 잊지 않고 감사하셔야 합니다.
다윗이 시편 139편에서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1-10절)
그래서 올해는 정말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알아나가시기 바랍니다. 단순히 기독교란 종교를 택해서 막연히 어떤 절대자에게 자신의 소원을 빌면 복 받으리라 기대해선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체질이 너무 진토인지라 도저히 내 죄를 내가 씻을 수 없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모든 피를 흘리시고 내 대신 죽으신 그 은혜의 깊은 뜻을 생생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이미 기록되어 있음을 확신하는 바탕 위에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셔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나를 진정 거룩하고 신령한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실제 삶에서부터 세밀하게 체험하며 그 은혜를 누리며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같은 시편에서 다윗의 이어지는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찌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가운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을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11-16절)
다윗은 내가 그분의 아시는 바 되어 하나님의 책에 이미 다 기록이 되어 있기에 따로 특별한 날에 특별히 더 은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법은, 아니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법은 창조주 하나님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것 외에 없습니다. 그분의 자녀답게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분께 기도로 모든 것을 아뢰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 인생은 너무나 어리석게도 반드시 마지막에 가서야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됩니다. 이 새해 아침에 하나님으로부터 지난해보다 복을 더 받으려는 소원보다는 그분께 지난해보다 더 귀한 헌신을 드리려는 소망을 키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미 우리는 그분의 아시는 바 되어 그분의 무한한 사랑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길 외에 인생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승리하는 길이 절대로 없기 때문입니다.
2/7/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