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4:28,29 핍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

조회 수 625 추천 수 27 2009.09.20 01:14:23
핍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4:28,29)


바울은 십자가만으로 구원이 충분하다는 참 복음과 율법의 요구도 함께 지켜야 한다는 다른 복음을 약속과 육체로 구분지어 변증하면서 아브라함에게서 난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듯이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유대주의 추종자들이 사도와 성도를 핍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부터 십자가 복음을 따르는 자들은 교회 내에서부터 핍박을 받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동일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듯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핍박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다고 약속한 자녀로 당신의 때가 차매 아예 임신이 불가능한 노부부에게 당신의 방법으로 주신 아들입니다. 반면에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기다리다 못해 자신이 생각한 인간의 방법으로 약속 안에 들지 않았던 하갈에게서 스스로 낳은 아들로서 유업을 받지 못하고 그 가문에서 쫓겨났습니다. 따라서 육체는 인간이 스스로 선해져서 하나님의 유업을 충분히 받아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믿음입니다. 반면에 약속은 수태가 아예 불가능했던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죽을 죄인이 하나님이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믿음입니다.  

다른 말로 약속이 육체로부터 기독교가 존재하는 한 언제 어디서나 핍박 받는 까닭은 그 둘의 본성상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는 스스로 선하다고 자신하기에 선을 쌓으려 열심히 노력하고 언젠가는 그 쌓은 선으로 하나님의 합격점에 충분히 들 것이라고 기대하는 자입니다. 반면에 약속은 자기 공로 하나 없이 죄에 완전히 찌들었음에도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주셨고 자신은 믿음으로 그 긍휼을 받았을 뿐이라고 겸비하게 엎드린 자입니다.

선하다고 자부하는 자는 응당 그러지 못한 자를 업신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인간은 본래부터 선하기에 얼마든지 스스로 구원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일개 로마의 사형수의 죽음과 자기 죄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개신교 외의 자기 생각과 같은 모든 종교를 다 옳다고 여깁니다. 선한 자는 선한 자끼리 통한다는, 즉 까마귀는 제쳐두고 백로끼리 놀겠다는 뜻입니다.

그와 정반대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만 붙들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는 자는 약속 밖에 있고, 죄 많음을 자랑하는 자는 약속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본문은 교회 밖에서 교회를 향한 핍박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핍박을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내의 유대주의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되 예수 외에 다른 길을 더 보태거나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날로 치면 기독교 내에서 예수는 동일하게 믿되 십자가 외에 더 붙이거나 다른 것도 인정해주자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핍박은 항상 힘이 세거나 숫자가 많은 쪽에서 약하고 적은 쪽을 향해 이뤄집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부터 십자가만으로 구원에 충분하다고 믿는 자의 숫자가 훨씬 적어졌다는, 아니 항상 수적으로는 열세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좁고 협착한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바꿔 말해 성경의 기록된 내용이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그분의 가르침이 역사적, 실제적으로도 하나 틀림없이 그대로 실현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문제는 신자 각자가 개인적으로도 그대로 되었는지 여부입니다. 과연 내가 교회 안에서부터 소수파인지, 그래서 다수파로부터 공격받고 있는지 말입니다.  

목사 혹은 장로파 식의 인간적 분류가 아닙니다. 십자가 진리를 사수하는지, 십자가 외의 길도 인정해 주려는지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반대파로부터 마땅히 핍박 받고 있는지, 또 그 핍박이 아무리 심해도 그들과 타협 내지 전향할 의사가 조금이라도 있는지 여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를 진리답게 온전히 확신하기에 비진리에 속해서 그것이 옳다고 주장했던, 즉 나는 예수 없이도 선하며 더 선해질 자신이 있다고 큰 소리쳤던 이전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정말 솔직하게 자신의 실체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약속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핍박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아무 하는 일 없이 아니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면서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니까, 아직도 구원 얻기 위해 스스로 죽도록 노력하는 자들의 눈에는 꼴 보기 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위선으로 비췰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선해지려는 노력 자체가 나쁘다거나, 신자가 그들보다 더 선해서 구원 얻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 앞에 완전히 겸비해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할 뿐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내의 소수파를 바울은 성령을 따라 난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동정녀에게 나셨고 아브라함과 사라도 육신으로 아예 불가능한데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삭을 잉태했습니다. 신자 육신의 출생은 그러하지 않지만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와 의에만 의존하여 한 죄인을 거듭나게 해서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믿음마저도 그분이 주십니다.  

그런데도 교인들 중에는 성전에서 기도한 바리새인 같은 경우를 종종 봅니다. “저는 불신자들처럼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니까 복을 더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 열심히 믿어서 경건해지고 선해졌기에 그에 따른 차별 대우를 해달라고 합니다. 여전히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반증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약속 밖의 사람입니다. 심지어 “십자가 진리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저런 자와는 달리 저는 마음 문을 열고 복음을 듣자마자 이해하고 바로 회개했습니다. 저는 일등 신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십자가마저 약속과는 전혀 무관하게 아예 육체를 따라 받아들였다고 실토 하면서도 자기가 말하는 바가 무슨 의미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합니다.    

참 복음 안에 들어온 참 신자라면 자신의 추하고 더러움을 날마다 순간마다 발견해야, 최소한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 다수파의 비방과 멸시를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자기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너무나 확실한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어떤 핍박이나 환난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그분이 바로 자기 아버지요 자기는 그분의 유업을 응당 이어받을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유일성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신자만이 이삭처럼 약속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십자가를 조금이라도 희석, 호도하는 신자는, 다른 말로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자는 이스마엘처럼 영원토록 약속 밖에 던져질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능욕 받은 까닭은 예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선포했기 때문이며 또 그들을 능욕한 자는 공회, 즉 여호와 하나님을 동일하게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가 유일한 길임을 확신하는 자는 당연히 그렇게 선포할 수밖에 없으며 또 핍박을 얼마든지, 아니 오히려 기쁨으로 감당해 냅니다. 그것이 유일한 길이라면 다른 어떤 길도 바른 길이 아니니까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7/10/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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