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뜻은?

조회 수 3419 추천 수 13 2010.11.12 01:38:24
(3)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뜻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율법과 연계된 개인적 진술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사도됨을 시비하면서 복음 외에 율법도 지켜야만 구원을 온전히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서신입니다. 그래서 2:14까지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증을 한 후, 2:15부터 마지막까지는 율법과 복음을 대조한 변증입니다. 본문이 속한 큰 문단은 2:15-21까지인데,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만 책의 내용을 분해해도 벌써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던 “나”는 이전에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원죄하의 옛 자아”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구절 전체로는 성령의 간섭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결과를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동일한 원리를 설명하면서 못 박힌 것은 “옛 사람”이라고 밝혔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롬6:5-7)  

그런데 본문만의 특유한 뜻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선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하는 15-19절과 21절 사이에 본문(20절)이 복음을 힘겹게(?) 변호하는 모습으로 끼워있습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율법과 연관된 못 박힘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또 15-17절까지는 의로워지는 주체를 “우리”라고 표현하다가, 18-21절에선 “내”로 바뀌었습니다. 본문이 속한 후자는 바울 자신이 거듭났던 체험에 바탕을 둔 진술이라는 뜻입니다.

이 둘을 종합하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은 개인적으로 중생한 후에 율법에 대해 갖게 된 생각을 십자가 복음과 대비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의 경우에는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은 구체적으로 “도덕적 죄를 넘어서 율법에 따라 행했던” 옛 자아라고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회심 체험

바울이 스스로 예수 믿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다고 고백했습니까?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5,6)

그는 정통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의로 따져도 흠이 없다고 자부했던 자였습니다. 도덕적으로 따져 크게 하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이미 하나님을 아주 열심히 믿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고 선을 행하는 기준도 틀렸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깨어진 옛 자아는 생판 불신자였던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전 제사를 지내며 율법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자라야 하나님의 구원에 들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로선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나사렛의 젊은 사형수 랍비를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것은 처단하여 없애야 할 이단 중의 이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열심이 지나쳐 스데반을 돌로 처형토록 주도, 최소한 적극 가담했었습니다.

틀림없이 그는 스데반이 돌로 맞아 죽는 순간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던 모습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5,56)는 말은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여겼던 자기에겐 없는 그런 신비하고도 견고한 믿음이 못내 궁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신자를 핍박했던 것도 그런 안타까움, 시기, 궁금증을 해소해보려는 그만의 몸부림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다 산헤드린에서 허가를 맡아 다메섹까지 신자를 잔해하러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광채가 비취자 삼일 간 봉사가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자 일생일대의 위기였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가장 먼저 깨달았던 점은 이단 중의 괴수라 여겼던 예수는 정말로 부활하여 승천하여서 스데반이 말한 대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서계신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거기다 삼일 후에 자기와는 전혀 일면식도 없는 한 이름도 없는 예수 믿는 신자가 찾아와서 기도해주자 다시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의 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것도 핍박을 받아 마땅한 이단이 도리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자신의 상태와 있는 곳까지 정확하게 알고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이 사건 이전까지는 그는 세상에서 가장 큰 자, 사울이었습니다. 지식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그보다 나은 자는 아마 실제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껏 자기가 세상 앞에 자랑하며 쌓아왔던 모든 것이 예수 앞에선 정말 아무 짝에도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지성적 영적 판단으로는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죽어 마땅한 한 신자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 것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력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고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하늘 보좌에 있는 전지전능하신 예수가 신자들을 죽이려 그렇게 설쳤던 자기를 삼일 간의 죽음 체험만 시키고는 죽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오히려 왕과 방백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사도로 세워주었습니다. 한순간에 당신의 철천지원수에서 열렬한 전도자로 당신께서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대체 이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자기 자신의 모습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반면에 예수님에 대해선 그저 엎드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로선 정작 죽어야 할 자는 예수 믿는 신자가 아니라 자기였고, 정작 이단도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율법의 의를 자랑하는 유대교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 꿇어 엎드려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에 완전했다고 자랑했던 자기의 의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로 덧입혀졌던 것입니다. 이제 이름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인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고 한 후에 바로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 세상에서 모든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2:7,8) 또 자기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바울처럼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자는 자기를 그리스도에 못 박는 동일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부인 내지 외면하고 만사를 자기 소견대로만 살았던 것이 얼마나 큰 죄인 줄 깨닫게 됩니다. 이 땅이 전부인줄 알아 현실적 형통과 일신상 안락만 추구함으로써 윤리적 죄도 수없이 범하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 자기라는 존재 전부가 썩어서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데 깨끗케 할 방도는 도무지 없음을 절감하고 애통하며 진정으로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에 머물 틈이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곧바로 너무나 큰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 죽음이 바로 자기를 위한 것임을 체험적 진리로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집니다. 자기 속에 새 생명이 창조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예수만 증거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옛 자아가 죽어 없어지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것입니다.

바울은 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자기가 능동적으로 자기를 못 박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믿을 생각이 전혀 없었지 않습니까? 주님이 나타나 그를 단번에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육체 가운데 그리스도가 와서 사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내주하여서 평생 떠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으로 당신께서 주도적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울의 중생 체험은 예수 믿은 모든 신자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됩니다.

율법과 십자가

그럼 서두에 말씀드린 자신의 체험에 입각하여 율법과 관련된 “십자가 못 박힘”의 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신념을 완전히 버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이미 교회에 출석한 신자들을 대상으로 율법, 행위, 육체 등과 은혜, 믿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일관되게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그런 신념을 가지게 된 배경이 무엇입니까? 물론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행위언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이기에 당연히 지켜야 했습니다. 이미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그분이 주신 법을 지킨다면 누가 뭐래도 구원은 확실히 보장된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는 자들이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도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몰랐던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스스로 자신했지만 사실은 율법으로도 의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단지 문자적으로 지켰을 뿐입니다. 거기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는 마지막 계명은 온전히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단지 이웃의 물건, 부동산, 돈을 훔친 적이 없었기에 의롭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 의미라면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과 사실상 중복되는 셈입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등 모든 범죄는 이웃을 탐내는 데서 기인합니다. 이웃의 생명, 아내나 남편, 재물, 인격 등을 탐했던 마음이 실제 행동으로 드러난 것들입니다. 대신에 ‘탐내는’ 것은 아직은 죄가 마음속에 머물고 있는 상태입니다. 말하자면 율법도 마음에 탐하는 것마저 죄라고 분명히 지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며, 또 형제를 보고 바보라 욕해도 살인과 같은 죄라고 가르쳤듯이 말입니다.  

바울이 스데반을 죽이고 또 신자를 핍박한 것은 물론 이단이라는 종교적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을 내린 원인 중에 시기 질투심도 분명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어떤 위대한 인간도 이 마지막 계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썩어빠진 죄인이기에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주지 않고는 구원의 방도가 없습니다. 율법은 죄의 저주를 깨닫게 만들어서 십자가 복음으로 이끄는 몽학선생인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에 자신의 모든 지난 어리석음을 깨닫고 자기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였음을 고백했습니다. 세상에선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의인이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어보니까 가장 추한 자였음을 철두철미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깨어져 엎드려야만 한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도 드디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았던 것입니다.

익히 알고 있는 구원의 원리를 계속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이 새사람이 되고 난 후에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이 여겨집니까?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주님을 경배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주님께 구원해달라고 비니까 당연히 그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까?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은 자기는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착한 자가 천국 가고 악한 자는 지옥가야 한다는 불신자와 여타 모든 종교인들의 신념입니다.  뒤집으면 자기는 착하고 남은 악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반드시 착한 자에게 그 착한 만큼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 인간이 뭔가를 바치면 하나님은 그에 비례하는 것으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선행 구원을 강조하는 것은 선행이 신에게 바치는 것 중에 가장 의로워 보이기에 보상을 가장 크게 받으려는 욕심의 발로일 수도 있습니다.  .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당연히 이와 정반대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은혜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보시기엔 도무지 열 번째 계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너무나 추하고 불쌍한 죄인임을 매순간 자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분 앞에 내세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음을 진심으로 실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인가 바쳐선 그 바친 만큼 되돌려 받으려는 생각은 바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고 여전히 의인이라고 자랑하는 꼴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착한 자가 천국 가고 악한 자가 지옥가야 옳다고 큰소리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교만이자 죄인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어 인간의 모든 죄책을 대신 감당하신 예수님의 의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이 사랑 앞에 진정으로 항복하고 나오라는 초대입니다. 언제 어디서 아무리 죄 많고 후패한 모습으로 있더라도 무한하고도 일방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율법적, 기복적, 독선적, 인과응보적인 하나님 개념을 갖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철저히 깨달아서 완전히 버리라는 것입니다. 또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의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었어도 할례를 꼭 받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거나 더 확정적으로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할례 또한 행위로 갖다 바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복을 더 받거나 그분 앞에서마저 자신들은 남보다 뛰어난 자라고 자랑하려는 생각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용지물로 만들며 그분을 다시 죽이는 짓입니다.      

그래서 본문 뒤에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절) 예수 믿고 나서도 하나님께 율법적, 기복적, 독선적, 인과응보적인 개념을 갖고 나아가면 바로 그분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은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복음에 장애되는 것은 전부 못 박으라.

“내 몸을 쳐 복종케 한다는 것”(고전9:27)과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함”(고후10:5)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다”(갈2:20)는 세 구절은 그 문자적 서술만 보면 언뜻 비슷한 뜻 같이 여겨집니다. 말하자면 자기 속의 죄의 본성, 물질적 탐욕, 세상에 대한 미련, 이기적 성향 등을 의지적으로 죽여서 죄를 안 짓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 말입니다.

물론 세 구절 다 그런 초보적이고도 넓은 뜻으로 적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전체 문맥과 당시 상황과 저자의 의도 등과 대조하면 각기  다른 뜻입니다. 첫째는, 복음에 방해된다면 사도로서의 선한 자유와 권리마저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복음을 대적하는 인간적 관습, 지식, 철학, 종교 등 어떤 견고한 진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과 함께 역사하면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는 옛 자아가 죽는 것은 물론, 믿기 전에 갖고 있던 율법적인 하나님 개념을 완전히 없앴다는 뜻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만 주는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 있든 십자가를 통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깨닫는 것입니다. 또 그분의 용서는 신자로 신의 성품에 참예시켜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기에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나면 그분께 바친 만큼 되돌려 받는다는, 그 바침이 구제 선행 봉사 예배 헌금 전도 심지어 기도와 믿음이라도, 기대와 예상과 믿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대신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이 절대 신자를 떠나지 않으므로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를 안 짓고 거룩하게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불신자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나아가 어지간한 신자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믿음으로써 구원 얻은 은혜 가운데 있음도 확신합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고의로 계속해서 죄 짓거나 하나님을 다시 외면 거부하지는 않기에 구태여 그런 측면을 성경이 계속 강조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되 그 보상을 바라는 미련은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선행과 믿음에 보상해주지 않거나 일부러 고생만 시킨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첫째 이유가 절대로 그분이 주시는 선물 때문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바꾸어 당신의 뜻을 이루는 일군으로 들어 쓰시는 하나님이 너무 좋아 기꺼이 그분과 동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더러 자기를 부인하며 날마다 십자가를 지라는 것도 단순히 죄를 안 지으려 노력하라는 도덕적 계명이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 대신에 자기가 주인이 되려는 생각부터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서도 자기중심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원대로 잘 응답해 주지 않으니 결국 자기가 나서서 해결하겠다는 뜻입니다. 그와 동시에 자기 소원대로 응답을 받기 위해선 아무래도 뭔가 바쳐야겠다는 이전의 잘못된 생각이 다시 발동하게 됩니다. 구원 이후 날마다 십자가에 정작 못 박아 죽여야 할 것은 바로 이 하나님에 대한 미심쩍음과 오해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신자가 날마다 자기를 죽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동일한 뜻이 됩니다. 십자가 복음과 위배되는 모든 생각, 말, 행동을 죽이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신자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을 수 없음을 확신하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모든 일에서 넉넉히 승리하는 것입니다.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 앞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 대신에 그것들에 묶이어 신음하는 영혼들을 복음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또 바로 그러하기 위해서 복음 전파에 위배된다면 신자의 자유와 권리마저 포기하고(첫째 구절의 뜻), 예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은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무너뜨리고(둘째 구절), 마지막으로 율법적 기복적인 신관(神觀)을 완전히 버리고 복음 안에서 새롭게 된 참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셋째 구절)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이자면 이미 살펴본 대로 모든 성경은 오직 예수라는 키로 풀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세상의 어떤 철학, 사상, 도덕, 윤리, 종교와도 그 차원이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직접 이 땅에 보내시어 죽여야만 했던 이유와 의미와 결과를 적은 책입니다. 또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그분의 직접 대놓고 말씀하시는 살아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을 읽은 후가 아니라 전부터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파한 상태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1/1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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