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의 신기한 능력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갈5:12)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 거짓교사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들을 아주 신랄하게 풍자한 말로서 참으로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 갈라디아 일부 지역의 이교 제사장들이 여신 아티스의 숭배 의식 때에 거세(去勢)하던 풍습에 빗대어 말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거세한 사람의 생식 능력이 완전히 상실 되듯이 그들의 거짓 가르침도 완전히 무력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의미에 그치면 솔직히 그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표출한 것밖에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10절)고 아주 당당하게 선포한 바울의 복음에 대한 자신감과도 영 어울리지 않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구원 얻기 위해 복음만으로 부족하고 특별히 할례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할례도 거세와 마찬가지로 생식기의 일부를 베어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할례를 거세와 비유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풍자적 의미는 그들이 할례를 하면 결국 거세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스스로”라는 수식어를 붙였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스로 할례를 하는 것은 스스로 거세하는 것과 같지 않느냐고 힐문한 셈입니다.
한 마디로 거세로 생식능력이 사라지듯이 할례도 복음의 능력이 자동적으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더 확실하게 얻으려고 시도한 것이 오히려 구원 밖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구원에 보태려 시도했던 것입니다.
복음 안에 들어와 온전한 주님 은혜 안에서 살지 않는 한에는 인간의 어떤 능력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특별히 영적인 면에선 더더욱, 썩어빠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에 힘을 보태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멀어지게 됩니다. 십자가 복음 외에는 전부 거짓이며 거짓은 스스로 거짓을 양산할 따름입니다. 요컨대 거짓은 가만히 놓아두어도 스스로 거세되는 법입니다. 현실적으로 아무리 풍성하고 화려해 보여도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으므로 비록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권세를 누려도 이미 스스로 거세된 상태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십자가 복음은 그 반대입니다. 온전하고도 순수하게 전해지기만 하면 스스로 생식능력이 더 풍성해집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에 현혹되지 않으리라 큰 소리 친 그대로입니다. 복음은 스스로 왕성해집니다. 신자는 십자가만 바라보면 됩니다. 처음 구원 받은 이후로도 어떤 문제나 환난이든 주님 앞에 내려놓고 그분의 구원을 아주 큰 소망을 품고 기다려야 합니다. 스스로 할례(해결)를 하려고 들수록 더 힘들어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작금 많은 신자들이, 특별히 교계 지도자들이 십자가 복음에 대해 너무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기독교를 인간적으로 부흥시키려 할례를 강조하다가 스스로 거세되어 개독교가 되어버린 꼴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저 다른 종교에 대해 분노나 적대감을 표출하거나, 거꾸로 일부러 찾아가기까지 해서 타협하기 바쁩니다. 바울 같은 당당한 자신감이 없어졌습니다. 십자가만 바로 전해야 하는 본분과 책임을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타종교인에게 관심을 쏟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분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요13:1)하셨습니다. 할례는 스스로 거세되지만 복음은 스스로 참 생명력을 늘입니다. 신자가 할 일은 오직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그 외의 어떤 길도 스스로 거세하는 지름길일 뿐입니다.
9/3/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