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8-13) 수동적 하나님 능동적 사탄

조회 수 39 추천 수 0 2022.07.26 05:44:29

(창3:8-13) 수동적 하나님 능동적 사탄

인간 타락 담화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3:8-13)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하나님

 

이브가 사탄의 교묘한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에 빠져서 남편 아담과 함께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 일차적인 결과로 심한 수치심을 느꼈는데 하나님의 경고대로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무화과 나뭇잎 옷으로 가렸습니다. 

 

문제는 최초 인간들이 그렇게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는 동안에 하나님은 뒷짐 지고 수수방관한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로선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은 후의 결과를 상세히 가르쳐 주었더라면 따먹지 않았을 것이라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들로선 아직 죽음이 어떤 상태인지 제대로 몰랐기에 사탄의 달콤한 말에 넘어갈 여지가 많았습니다. 

 

실제로 본문은 그들이 큰 낙담 중에 있는데 하나님은 동산을 거닐고 계셨다고 말합니다.(8절) 그 소리를 들은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잘못 때문에 그분을 뵐 낯이 없어서 나무 사이에 숨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불러내어 선악과 사건에 대해 심문하고 판결까지 이어졌지만 마치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성경독자들도 사탄이 그들을 유혹하기 전에 하나님이 왜 미리 막아주거나 최소한 단단히 주의를 주지 않았는지 많이 아쉽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는데 매우 수동적 소극적이었던 반면에 사탄은 그들을 타락시키는 데는 아주 능동적 적극적이었다고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곧 사탄이 나타나 이렇게 저렇게 말할 것이니까 절대로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칩시다. 아무래도 하나님의 반드시 죽으니 하나라도 먹지 말라는 말은 실감이 나지 않는데 반해  사탄의 절대 죽지 않으니 마음 놓고 다 먹으라는 말이 훨씬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설명해줄수록 영적으로 미숙한 그들은 여러 대체방안을 허락해준 것처럼  오해할 수 있고 그에 따른 변명과 핑계 거리도 생기므로 .타락할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니 먹지 말라는 것 딱 하나일 뿐입니다. 

 

진리란 본질적으로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가(可, yes) 아니면 부(否, no) 둘 중에 하나이지 그 중간의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제 삼의 방식으로 타협 조정 수정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선악과에 대한 진리도 너무 간단한데 먹으면 죽고 먹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굳이 자세하게 설명해줄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이 이 계명에 대한 배경. 목적, 의미, 결과 등을 자세히 설명해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려면 창조에서 완성까지 인류구속사 전부를 신학적으로 가르쳐야 하는데 소귀에 경 읽기밖에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이 완비된 오늘날도 아무리 가르쳐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진리란, 특별히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는 더더욱 지식적으로 깨닫기 이전에 삶에서 체험되어야 합니다. 그분에 대한 온전한 믿음은 강의실이나 교회가 아니라 실제 삶의 현장에서 그분과 동행함으로써만 생성됩니다. 그만큼 그분은 당신의 백성과 언제 어디서나 전지전능하신 은총으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할 바를 다했다.

 

그렇다고 인간더러 선악과를 따먹게 해서 그 진리 됨을 증명해보일 수는 없습니다. 어폐가 있지만 이 계명을 주실 때부터 하나님으로선 큰 딜레마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을 기계나 짐승으로 만들지 않고 이성과 자유의지를 갖춘 당신의 청지기로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려면 인간이 이 금령을 어길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다른 모든 과일을 임의로 먹게 했고 선악과도 동산 중앙에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두어서 꼭 따먹고 싶다는 욕심도 들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에게만 지혜로운 이성과 자유로운 의지를 주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고도 다른 과일로 넘치는 은혜를 누렸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 진리인줄 충분히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죽는 체험은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지만 먹지 않고서 아주 풍성한 삶을 누렸다면 그분의 말씀이 진리임을 간접적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과 계명을 얼마든지 지킬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적극적 능동적으로 충분히 마련해주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하나님과 사탄 둘 중에 누가 더 적극적이었는지 따질  계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만의 방식에서 사탄도 자기만의 방식에서 각자 완전했습니다. 다른 것은 인간을 향한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참 생명을, 사탄은 진짜 죽음을 주려는 것인데 그 목적을 실현함에 둘 다 아주 적극적이었던 것입니다. 

 

사탄으로선 절대적인 죽음을 거꾸로 더 좋은 생명이라고 교묘하게 위장해야 하니까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말은 오래 끌수록 들통 나기 쉬우니까 진실인양 위장해 단 번에 매료시켜야 합니다. 가뜩이나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도록 체험한 후니까 비상한 방안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는데 그것을 싫어해서 하나님이 금지시켰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땅의 물질계에 살아가는 인간에겐 신적존재가 된다는 것 이상으로 구미가 더 당기는 유혹은 없습니다.  

 

이브도 사탄이 던져준 미끼의 달콤함에 빠져서 의도적 능동적으로 그분에 대한 원망과 불신을 키워나가다 불순종의 행동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이브는 우선 자기들부터 뭔가 더렵혀져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다보니 부부 사이도 이전과 같지 않게 서먹해지고 서로를 바라보기에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들로선 죽는다는 상태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니까 이런 정도로 아주 기분 나쁜 부정적인 감정인가보다 여겼을 것입니다. 더 심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반쯤은 안도했을 것이나 문제는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 쪽에서 침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보자마자 그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인간을 이미 하나님을 싫어하다 못해 미워하는 상태에 밀어 넣었으니까 더 이상 유혹할 일도 없습니다. 인간은 사탄이 나타나기 전과는 전혀 다른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완전히 충족되지 않고 공허하며 금방이라도 더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았을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해 전전긍긍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따뜻한 첫마디

 

그런 상황 아래 드디어 하나님이 찾아왔습니다. 개역개정판은 “바람이 부는 날”이라고 번역했지만 정확한 계절과 날짜와 시간은 모릅니다. 원어는 단순히 하루 중에 바람이 불어서 서늘해진 때에 여호와가 먼저 그들을 찾아왔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지어 입었어도 그들이 여전히 따뜻함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뭔가에 결핍을 절감하고  있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서 그들이 나무 사이에 숨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직접 대면해 대화할 경우는 대체로 성육신하기 전의 성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렇다고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 소리를 듣고서 비로소 두려워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제 직접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내릴지 조마조마하고 있던 차에 바로 곁에 오셨다는 사실을 알고 덜컥 겁이 더 크게 난 것입니다. 이제 직접 하나님과 맞대면해서 반드시 죽어야 하는 그런 벌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첫 마디는 그들이 조마조마하며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를 리 없었을 텐데도 하나님은 곧바로 죽음의 벌을 내리겠다고 선포하기는커녕 전혀 꾸중하지도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그 말투나 억양도 따뜻하고 부드러웠을 것입니다.

 

먼저 아담의 이름을 부른 후에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만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에 숨었는지 모를 리 없습니다. 평소에 그들과 자주 만났던 장소로 찾아와서 아이와 숨바꼭질 하는 아버지처럼 짐짓 모른척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항상 네가 나와 함께 만났던 이 장소에 왜 없느냐는 뜻입니다. 지금 네가 있는 곳은 반드시 네가 있어야만 할 곳이 아니니 어서 내 앞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아담도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오셨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텐데도 숨은 이유로 선악과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숨어 있는 이유로 두 가지를 내세웠는데 어느 정도 자신의 진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인데 자기들 잘못에 대해 어떤 벌을 줄까 두렵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벗었으므로 두려웠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벗었다는 것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지어 입고 서로를 가렸으나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고 시인한 셈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그분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어떤 죄라도 짓는 순간 자신이 매우 더렵혀져 얼룩이 묻었다는 것을 느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형벌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가장 먼저 수치심이라는 감정적 반응이 나타나고 바로 이어서 반드시 하나님의 벌로 이어질 것이라고 이성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옷으로 가릴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인간끼리의 수치심은 겉으로 온갖 치장을 하여서 자신의 진짜 내면을 보여주지만 않으면 됩니다. 자신을 감출 수 있는 방안도  외모, 건강, 재산, 지성, 권력, 심지어 공교한 거짓말까지 얼마든지 많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저 스스로 느꼈던 수치심도 그렇게 감추다보면 자책감까지 없어져 버리고 오히려 의롭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인간끼리 통하는 방식으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전혀 없고 일단 잘못을 범하면 어떤 형식으로든 그분과 해결해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그분의 처분에만 맡겨야 합니다.  

 

사탄의 수법을 배운 인간들

 

하나님은 시치미를 뚝 떼고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인간이 벗었음을 알게 되는 것은 당신께서 정한 창조의 경륜입니다. 그럼 먼저 그 과일을 먹었느냐라고 물어야 하는데 먼저 누가 네게 벗었음을 알렸느냐고 물었습니다. 너희가 지금껏 선악과를 먹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누군가 너희를 시험에 빠트렸고 또 사탄이 그랬다는 것도 알지만 과연 아담이 어떻게 대답할지 지켜보시겠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지금이라도 너희가 있었던 사실 그대로 이실직고하라는 뜻입니다.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당신께 용서를 구하라고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최초인간들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너무나 어리석고 비겁하게도 가장 먼저 부부 사이에도 서로 헐뜯는 모습부터 드러냈습니다. 더 심각한 잘못은 그러는 가운데 부부가 똑같이 하나님에게 최종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신 뜻대로 간교한 뱀에게 속았다는 말부터 해야 하는데도 아예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모든 동식물을 그들더러 다스리라고 명했고 지금껏 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교묘했어도 뱀에게 인간이 다스림을 받은 꼴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껏 뱀에게 속아 넘어간 자신들이 너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첫째 문화 명령을 어긴 잘못인지라 하나님의 벌이 두려워 쉽사리 실토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에 엉뚱하게도 하나님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이 이브를 함께 살도록 주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당신의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면서 진실을 빙자해 교묘하게 거짓말하는 수법까지 그에게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이브를 주신 것도 이브가 자기에게 먹으라고 권한 것도 분명한 진실입니다. 그런데 이브를 자신을 돕는 배필로 주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진정으로 찬양 감사했던 일은 아예 모르는 척 했습니다. 그리고 일차적으로는 이브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당신의 책임이라고 거꾸로 덮어씌웠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한 번 추측해보십시오. 형제끼리 아빠 말 듣지 않고 노느라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아 아빠가 왜 이렇게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형이 동생만 없었으면 나 혼자 조용히 공부 잘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즉, 동생을 낳지 말았어야 한다고 대답한 꼴입니다. 형으로서 전혀 책임지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형으로서 자존감도 완전히 버렸습니다. 비유로 말했지만 이런 일은 오늘날도 예사로 일어납니다. 모든 인간이 첫째 인간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담의 그 배은망덕한 죄에 대해서도 당장 꾸짖지는 않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아담이 말한 그대로 받아서 이브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너는 돕는 배필인데 왜 네가 나서서 과일을 따먹고 남편에게 먹으라고 주었느냐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브도 똑같이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뱀의 꾐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대답의 형식과 그 안에 숨겨진 의미가 아담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뱀 때문에 이렇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뱀만 만들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동생도 형과 함께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서 아빠가 장난감만 사주지 않았으면 공부 열심히 했을 것이라고 답하는 꼴입니다. 거기다 남편이 바로 곁에 있으면서도 뱀이 속일 동안에 애써 말려 주지 않았고 선악과를 따먹을 때도 가만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남편이 사실상 먼저 허락해준 셈이니까 남편의 책임이 더 크다고 덮어씌운 셈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너무나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우선 자기 잘못을 조금이라도 줄여서 벌을 적게 받으려는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투가 부드러우니까 어쩌면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인 그런 변명이 통할 수 있다고 가볍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는 회색지대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나아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긴 했지만 하나님이 자기들을 싫어해서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했다는 원망과 의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번 일에 하나님도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도 자꾸 죄에 넘어지니까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으면 죄도 안 지을 텐데 의심하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입니다. 다시 한 번 모든 인간이 원죄 아래 있다는 사실이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짜로 잘못한 것은?

 

결국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혼자만 살아남아보려고 아내도 남편도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서로 간에 숨길 것 하나 없이 그렇게 사랑하던 부부가 자기 혼자 살려고 상대를 죽이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이 에덴에서 거짓으로 살인했다고 말씀하신 대로 이제 인간들이 그런 수법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섬뜩하지 않습니까? 부부가 서로를 헐뜯느라 함께 의논하지 않았을 텐데도 똑같이 하나님이야말로 이 사태에 책임져야 할 당사자라고 몰아갑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잘못했다고 대들었으니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타락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는데 실제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비록 이들의 죄는 나중에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용서받았지만 최초 인간 부부가 똑같이 사탄의 속성을 자기 심령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 셈입니다. 그 이후로 모든 인간들은 자기는 지구상에서 최고가는 존재이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일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라도 무조건 싫어하고 미워하겠다는 본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안 보이거나 소극적 수동적으로 행하는 것 같으니까 그분을 아예 외면 대적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 사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땅과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제 멋대로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자기를 최고로 높이기 위해서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은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 뜻에 맞게 돌아가야만 한다고 평생토록 주장하는 고집불통이 된 것입니다. 인간 공동체적으로는 인류 역사 내내, 개인적으로는 일생 동안 죄 자체가 살아있는 벌레처럼 각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다 갉아먹고 있습니다. 죄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인간을 손쉽게 끌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죄가 가장 먼저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어느 누구도, 설령 평생 벌거벗고 살을 맞대며 살아가는 배우자라도 자기를 훼방하면 끝까지 배척 대적하는 것입니다.  거의 유일한 예외는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여 희생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엄격히 따지면 자기 몸에서 난 자신의 분신을 사랑하는 것이니까 자기를 높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하나님이 당신의 대리인으로 세워서 이성과 자유의지를 준 인간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래서 그분을 거역 대적하는 것이 첫째가는 가장 큰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인간에겐 짐승과 달리 하나님께 받은 인격이 소중하게 여겨지니까 자존심 명예 감정 등 내면에 상처를 받으면 더 못 견디고 목숨까지 던지며 복수하려 듭니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 전과 후의 서로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

 

죄의 본질을 창세기의 타락기사처럼 가르치는 윤리나 종교는 단 하나도 없고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성경은 과일 하나 먹었다고 천하의 죄인이 되었고 그 후손들 모두가 한 명의 예외 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선포합니다. 세상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설화를 믿고서 예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소리치는 기독교인들이 어리석다 못해 불쌍하다고까지 여깁니다.  

 

인간의 타락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전에 말씀드린 대로 부부가 과일을 따서 나눠먹은 아름다운 모습밖에 없습니다. 거기다 인간이 더불어 살아야 할 다른 피조물인 뱀과도 사이좋게 지낸 셈입니다. 세상의 윤리나 다른 종교의 관점에선 문제 삼을 건더기라곤 단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선행이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진리는 스스로 증명하는 힘이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윤리적 죄를 범하더라도 가장 먼저 자신부터 추하고 더러워졌다고, 최소한 그 전과 달리 뭔가 나빠졌다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느끼게 됩니다. 자꾸만 자신의 실체를 남들 앞에서 감추려 듭니다. 그러다 자기 잘못이 드러나 막상 부모나 선생이나 사회로부터 추궁을 당하면 공범에게 때로는 아무 관련 없는 제 삼자에게 책임을 돌리며 온갖 핑계를 대기 바쁩니다.  

 

그런 수치심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신적 존재에게 벌을 받을 것 같은 공포심이 생깁니다. 종교적 개념이 전혀 없더라도 이번 잘못으로 인해 더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은 두려움이 자신을 짓누릅니다. 죄로 인해 수치심과 공포심이 생기는 것은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실체적 진실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체험하고 있는 이런 증상의 원인을 교육 훈련을 받지 못했고 열악한 환경과 다른 사람들의 잘못 등 외부요인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선할 수 있는데 제대로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을 알기도 전의 어린 시절부터 누구나 이런 증상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런 윤리적 가르침을 최초로 고안할 수 있었던 사람들도 분명히 교육을 받기 전 본성적으로 죄에 대한 수치심과 공포심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열악한 외부 환경을 만든 것도 인간들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의 책임을 돌리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 문제라는 뜻이 됩니다. 

 

성경은 모든 죄는 인간 본성에서부터 발현된다고 선언합니다. 그 의미가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와 부르신 한마디 말씀 안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가 나를 떠나 숨었지만 그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네가 지금 절감하듯이 갈수록 부끄럽고 두렵지 않느냐? 내가 너를 지었고 이성과 자유의지를 주었다. 제발 내가 말하는 이 진리를 외면하지 말아라. 내 품을 벗어나는 순간 영적인 죽음이 반드시 임한다. 이제 그 사실을 깨달았다면 제발 어서 빨리 내 품으로 돌아오너라.” 

 

선악과 계명의 신학적 의미

 

선악과 계명을 신학적으로 간단히 정리하면 하나님과 분리가 일어나면 자기 자신과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부터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 빠지니까 필연적으로 주변의 자연과는 물론 이웃 사람들과도 분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 모든 죄악과 모순과 불행의 원인은 인간 본인들에게 있고 그 기원은 하나님을 부인 대적한 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구원의 길도 가장 먼저 하나님에게 진심으로 겸손히 모든 잘못을 시인하고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쉽게 말해 요한 사도의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고 있다면 신자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사탄이 아니라)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오늘 본문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 이와는 정반대이지 않습니까? 만약 지금이라도 그들이 자기들 죄를 자백했다면 인류의 역사는 물론 인간의 본성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죄의 본성이 인간의 심령에 깊이 각인 된 것입니다. 

 

실제로 작금 평생을 살아온 부부가 노후에 이혼하는 일이 빈번하지 않습니까? 본문처럼  부부끼리도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자기만 살아남으려고 서로 상대를 죽이는 셈입니다. 이런 판국에 인간이 과연 본성적으로 선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신이 평생 노력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서 떳떳이 설 수 있겠습니까? 인간 스스로 선행하여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야말로 얼마나 헛되며 어리석습니까? 

 

거짓의 아비 사탄은 지금도 자기 모략이 진리처럼 보이게 하려고 적극적 능동적으로 현실적 안락과 쾌락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창조 때부터 적극적 능동적으로 인간에게 모든 좋은 것을 다 베풀었습니다. 특별히 당신의 독생자를 당신과 원수 된 죄인들을 살리려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일만큼 적극적 능동적인 사랑의 실현은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 유일무이한 사랑으로 세상 어느 것으로도 견줄 수 없으며 비교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지금도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도 단 한 치도 줄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작금의 모든 상황은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이 너무나 억울한 입장에 몰리고 있습니다. 물에서 건져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세상 전부를 다 주었는데도 이젠 당신이 전혀 필요 없으니 절대로 어떤 간섭 권면 충고도 하지 말고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도 말라는 꼴이 되었습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럴수록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죽음의 은혜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진리를 최선을 다해 삶으로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의 믿음부터 다시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죄를 지어도 갈수록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더 많이 생깁니까? 그렇게 된 원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와 동행을 게을리 해서 내 자신을 치장하고 높이려는 끈질긴 욕심 때문이라고 인정합니까? 그래서 다시 거룩해지기 위해서 스스로의 도덕성을 연마하기 이전에 주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와서 하나도 숨기지 않고 고백하고 회개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선악과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는 셈입니다.

 

(6/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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