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3:14-18) 우상의 본거지에 거주하고 있는가?

기도 시리즈 (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창13:14-18)

 

 

아브람은 애굽에서 바로의 후궁으로 간택된 아내를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으로 아무 문제없이 돌려받았고 도리어 거부가 되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엄청난 은혜를 체험했기에 그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이전에 비해 많이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실제로 가나안으로 돌아온 직후 조카 롯과 헤어지는 사건에서 그 성숙된 믿음을 실현했습니다.

 

본문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라고 시작하듯이 아브람의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본 하나님이 우르에서 불러낼 때 주셨던 약속을 더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아브람도 그 계시를 받자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당연히 그의 기도의 내용도 진일보 했을 것인데 어떻게 바뀌었을 지를 간단한 본문보다 롯과 헤어진 사건에서부터 추적해봐야 할 것입니다.

 

서로 win-win 하는 선택

 

롯의 아버지 하란은 아브람의 형제로 그들의 아비인 데라보다 먼저 고향 우르에서 죽었습니다.(창11:27,28) 아브람이 우르를 떠나올 때에 롯도 함께 데려왔고 애굽까지 동행했습니다. 롯도 아브람처럼 상당한 재산을 가졌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 독립적으로 관리한 것 같습니다. 우선 아버지 하란이 일찍 죽는 바람에 그 재산을 상속 받았을 것입니다. 또 아브람이 나중에 가나안 연합전쟁에서의 전리품을 자기 군사들에게 나눠줬듯이(창14:24) 애굽의 바로에게서 사래로 인해 받은 가축과 노비 중 일부를 조카에게도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에굽에서 더 부자가 된 탓에 한곳에서 함께 목축하기에는 물과 초지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같이 거주했다간 목동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서 자칫 삼촌과 조카 사이까지 나빠질 지경이라 헤어지기로 결정했습니다.

 

문제는 누가 어느 곳을 차지할지였습니다. 아브람이 먼저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고 제안했습니다. 롯더러 나를 떠나가라고 했지만 그곳에서 쫓아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롯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우선권을 준 것이며 자기는 남는 땅으로 가겠다는 뜻도 확실히 밝혔습니다.

 

롯은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해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던 소돔과 고모라”(창13:10) 쪽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흔히 롯이 자기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죄악의 땅을 택해서 결국은 하나님께 벌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반면에 아브람은 하나님만 믿고 척박한 땅을 골랐기에 나중에 창대케 되었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을 뿐 롯이 잘못 택했고 아브람이 의로운 선택을 했다고 쉽게 판단해선 안 됩니다. 삼촌이 먼저 택하라고 했다고 해서 롯이 옳다구나 하고 선뜻 그곳을 택했을 리는 없습니다. 나중에 자기 집에 찾아온 천사들을 대접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적으로 의로운 롯이었습니다.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삼촌에게 다시 먼저 택하라고 양보했을 것이고 아브람이 자꾸 권하니까 마지못해 먼저 택했다고 봐야 합니다.

 

거기다 성경이 “여호와께서 멸하시기 전”(창13:10)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롯은 아직 소돔과 고모라에 가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까지 죄악으로 타락한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단순히 그쪽을 보니 물이 넉넉해서 비옥할 것이라고 여겼고 아브람과 함께 애굽에 넘어갔다 왔으니 애굽과 비슷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지금 롯이 아브람과 헤어지는 이유는 한 곳에 계속 동거하면 물과 초지가 모자란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지 서로 사이가 틀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옮겨 가고 삼촌이 혼자 그곳에 남게 되면 물과 초지는 다시 넉넉해집니다. 둘 다 손해 볼 일이 전혀 없이 서로 win-win하는 현명한 방책입니다. 나아가 이미 거처로 삼고 있는 익숙한 땅을 삼촌에게 양보하고 자기가 새 땅을 개척하겠다는 선한 의도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람도 의도적으로 손해를 자초하면서까지 척박한 땅을 고른 것이 아닙니다. 롯이 먼저 선택하고 남는 땅을 차지하겠다고 했으니 어느 땅이 되어도 좋다는 뜻이었습니다. 만약 롯이 남기로 결정했으면 아브람이 소돔과 고모라 쪽으로 갔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롯더러 먼저 선택하라고 한 것은 사실상 모든 선택권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자기가 어느 땅을 차지하더라도 바로 그 땅이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신자들이 자꾸만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을 미리 구체적으로 알려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직접적인 음성이나 계시를 받으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성경 66권이 정경으로 완비된 오늘날도 비상한 경우에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음성으로 들려주기도 합니다. 성령의 미세한 내적 음성을 인지하게 해주거나 기도응답에 대한 징조나 예표를 보여주면서 성령이 간섭하여 신자로 분별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침묵하시기에 신자 스스로 자신의 선한 소망과 계획에 따라서 최선의 결정을 하면 됩니다. 지금 같은 경우도 자신들의 판단으로 얻은 땅이지만 삼촌과 조카가 분쟁하지 않으려는 선한 의도이므로 당연히 하나님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기 판단에 따라 잠시 우거한 애굽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는데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자기가 간구한 것보다 더 선하게 결말지어주신 큰 은혜를 체험한 직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소원했던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미리 마련된 당신의 계획대로 완벽하게 실현시킨다는 진리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지금도 어느 땅을 차지해도 하나님의 동일한 역사가 임할 것이라고 온전히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현실적 대안보다 가장 먼저 당신을 택한 아브람의 결정에 부합하여 네가 눈을 들어서 보이고 종과 횡으로 밟는 모든 땅을 주겠다고 진일보된 약속을 주셨습니다. 트럼프처럼 부동산 재벌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디로 가든지 당신께서 함께해서 어떤 위험에서도 지켜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시종일관 그를 믿음의 조상이자 열방이 받을 복의 근원으로 세운 당신의 목적대로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람 개인뿐 아니라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이 땅의 모든 세대의 죄인들을 구속하려는 계획을 그에게서부터 그를 통해서 시행한 것입니다.

 

인간적 의인으로 그친 롯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아주 정교한 기록이라 곳곳에 그분의 오묘한 은총이 풍성히 숨겨져 있습니다. 범사에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실제로 역사하신 일들을 성령의 영감으로 저작케 했기에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저작 당시에 비해서 엄청나게 격변한 오늘 날에도 똑같이 놀라운 은혜와 절대적 진리로 다가옵니다.

 

이 사건에서 크게 두 말씀이 그러한데 우선 롯이 자기가 택한 소돔 땅을 애굽과 비교했다는 구절입니다.(창13:10) 롯도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함께 건너가서 그곳의 지리, 기후, 문물, 종교 등을 똑같이 보고 듣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도 아브람과 함께 나눴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나안으로 돌아와 그 경험을 삶에 적용하는 차원에선 두 사람은 큰 차이를 드러내보였습니다.

 

먼저 롯은 소돔 땅을 외적조건으로만 애굽과 비교 판단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목축하기 좋은 땅을 고르려는 목적의 합리적인 결정이자 삼촌을 배려한 측면마저 있었기에 절대 잘못되었다고 탓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 인생 전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에 관해서 아브람처럼 깊이 숙고하고 기도해본 적이 없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성경은 그가 소돔 땅을 선택한 후에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13:13)고 말합니다. 비록 그가 소돔에 가본 적은 없어도 이미 소돔의 타락상에 관해선 가나안 지역에 소문이 파다했고 롯도 들었을 것이라는 힌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가 택한 평지 성읍에 거하다가 점점 장막을 옮겨서 결국에는 소돔에 정착해버렸습니다.(12절) 아마도 롯은 처음부터 들판에 장막을 치고 목축을 하는 것보다 생활여건이 편리한 성읍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화려한 도시문명을 부러워했고 땅을 고를 때에 그런 점도 감안했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롯은 인생의 목적을 현실적인 풍요와 안일에 두었고 모든 사고와 행동도 그에 따라 행했던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하나님의 기적도 직접 당사자가 아니고 간접으로 전해 들었던 터라 크게 실감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면 반드시 지켜주시고 큰 복도 주신다고만 여겼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뒤늦게 깨달은 사실

 

반면에 아브람이 애굽에서 깨달은 여호와에 대한 인식은 전혀 달랐습니다. 현실적 대책이라곤 전혀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정말로 자기 전부를 걸고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그의 입장이 되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이가 거의 80이 되도록 함께 살아온 조강지처가 남의 후처가 되어버렸고 그 대가로 큰 재물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당시의 윤리의식이 지금보다 열등했어도 아내와 그런 식으로 헤어질 수는 없습니다. 요즘 같으면 폭탄을 들고 가서 왕궁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하든지 바로의 왕자를 납치해서 교환하자고 인질극이라도 벌여야할 판입니다.

 

당시로선 아브람만한 의인이 없었습니다. 하란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브람을 따라 나왔는데 단순히 돈을 준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집사인 엘리에셀을 후사로 세우려 할 만큼 그를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그러니까 이삭의 신부 감을 구하러 갈 때 주인을 위해서 정말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나중에 아브람의 종들이 가나안의 연합전쟁에 목숨 걸고 함께 참전하는 것을 보면 아브람의 사람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애굽으로 넘어간 것도 그 일행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에 현명한 결정이었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일도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무조건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애굽에선 바로가 곡물을 직접 관리하는 줄 몰랐을 뿐입니다. 대신들이 아부하려고 바로에게 사래의 미모를 칭찬했고 바로도 할렘에 자기 위세를 과시하려고 사래를 데려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입니다.

 

당대의 최고 의인이 최선의 결정을 내렸어도 여전히 어리석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완벽한 방식으로 죄 많은 인간들이 헝클어트린 모든 것을 더 선하게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아브람의 거짓말을 용인해 준 것이 아니라 당신의 종으로 불러내면서 맺은 언약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아브람에게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해주실 줄 알았다면 바로가 사래를 취할 때부터 자기 생명이 위험해질까 두려워서 누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아내라고 솔직히 실토했어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바로를 만나보니 상당히 양심적이고 온유한 사람이라고 느꼈을 테니까 더더욱 후회되었을 것입니다.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자기 체면과 자존심이 있어서 함부로 사악한 짓은 범하지 않습니다. 사래의 나이가 많이 들어서 할렘에 둘 목적만으로 취했는데도 그렇게 많은 보상을 한 것을 보면 아브람을 죽여가면서 빼앗지는 않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바로가 완악한 자였다고 해도 성령님이 바로에게 긍휼한 마음을 심어주었거나, 최악의 경우 자기를 죽이려 들어도 하나님은 곧바로 바로에게 벌을 내리며 막아주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애굽에서 동일한 사건을 겪고도 하나님을 인식하는 차원이 서로 달랐고 그 후의 반응도 서로 달라졌습니다. 롯은 인간적 윤리 기준에 따라 현실상황을 합리적으로 판단 결정 시행했기에 인간 사회의 의인으로 그쳤습니다. 삼촌으로부터도 단순히 식솔들을 살리려고 애굽으로 건너갔고 또 그곳에서 얻은 재물을 나눠주는 의로운 모습만 배웠지 그가 겪었을 영적인 갈등과 믿음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아브람은 사건이 선하게 해결되자 뒤늦게나마 하나님의 광대하신 권능을 제대로 깨달았고 그래서 지금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한 것입니다. 모든 상황을 하나님 중심으로 분별 판단 결정 시행하면서 전적으로 그분께만 의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이는 제 삼자로서 곁에서 고난을 지켜보기만 한 사람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직접 빠져본 사람의 차이였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도, 사실은 대부분이 아브람처럼 자신의 판단 미스를 비롯한 욕심과 죄악 때문이지만, 반드시 당신만의 선한 뜻이 있습니다. 아브람처럼 하나님에게 매달리고 씨름한 만큼 당신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럼 또 그만큼 더 당신의 뜻에 더 헌신 순종하게 되며 하나님은 신자의 그런 수고와 희생에 반드시 선한 보상을 하시며 본인도 성장하도록 해주십니다.

 

사고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 아브람

 

두 번째로 그리고 더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말씀은 본문 18절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람 일행이 주님의 지시에 따라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 도착한 세겜의 모레처럼(창12:6) 상수리 수풀이 있는 마므레에서 단을 쌓고 거주했습니다.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는 대체로 우상의 신당이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처음 모레에 왔을 때는 그곳사람들의 냉대는 물론 우상 신전이 있는 것이 싫어서 동쪽 산으로 옮겨갔습니다. 이때까지는 롯처럼 그곳이 살아가는데 편리한지 생업을 더 풍부하게 키울 수 있는지만 따졌습니다. 눈앞의 여건과 당면한 문제만 보고선 흡족하지 않았기에 스스로 판단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이곳이 하나님이 주신 곳인지 물었으나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애굽에서 돌아와선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으로 기꺼이 장막을 옮겨서 거주했습니다. 땅을 선택할 수 있는 무제한의 자유를 허락받았는데도 들판에 장막을 치거나 우상 신당이 없는 곳으로 옮기지 않았고 아예 우상의 본거지에 들어가 살기로 했습니다. 이전과 달리 우상의 신전이 있어도 전혀 두려워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습니다. 세계 최강국 애굽의 살아있는 신인 바로와도 맞상대를 해봤고 여호와가 그를 얼마나 무력하게 항복시키는지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약속한 부족국가의 우상 신들이야 신경 쓸 만한 대상이 전혀 안 된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조카 롯과 헤어지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눈으로 보이고 종과 횡으로 밟는 땅을 다 주겠다는 동일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받는 순간 이전에 모레에서 여호와가 재확인해준 약속을 자기 임의로 무시했던 잘못이 새삼 떠올랐던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애굽에서 돌아오면서 모레에 이르러 다시 단을 쌓을 때에(창13:4) 이미 그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이번에는 회개로 그치지 않고 자기를 열방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세우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행동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이방 앞에 하나님을 증거하려면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성경기록에 없지만 롯과 목초지를 나누며 헤어질 때에도 아브람은 분명 속으로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자기는 이제 어느 곳으로 가도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함께 해주실 것을 전혀 의심치 않지만 아직 그런 믿음이 없는 롯이 더 좋은 땅을 택할 수 있게 하고 그에게도 굳건한 믿음이 생기도록 해달라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람이 여호와께 단을 쌓고 이름을 불렀던 세 경우를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조금씩 더 넓어졌고 그에 따라 기도하는 내용은 물론 하나님께 반응 내지 순종하는 모습 또한 더 성숙해졌습니다. 특별히 이 세 번째 단계에선 하나님이나 세상 앞에 배짱이 아주 든든해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체험했던 그분의 광대하신 섭리에 맞추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몰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의탁할 만큼 믿음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요컨대 그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이 끝까지 절대적으로 자기편이라는 사실에 전혀 의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후에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종종 믿음에 실패해 넘어지는 모습을 보였지만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과 믿음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숙되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 그 바뀐 믿음대로 살려고 노력한 것도 분명 사실이었습니다.

 

롯에게 선택권을 먼저 양보하는 정도는 아버지가 일찍 죽어서 대신 아비 노릇을 해준 삼촌으로선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은 그런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을 주는 책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높일 수 있는지 깨우쳐주는 그분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가 오묘하고도 풍성히 계시되어 있는 책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정독하며 진지하게 묵상하고 실제 삶에 적용하되 아브람처럼 하나님과 기도로 씨름하면서 비록 시행착오와 실패를 많이 겪더라도 그분을 더욱 깊이 알아나가야 합니다.

 

기도의 네 번째 핵심

 

살펴본 대로 아브람이 여호와께 단을 쌓은 본문기사에서 기도의 네 번째 핵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전부 맡기면서 그분의 뜻이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구원해주신 후에 분홍 카펫이 깔린 길을 거쳐 유토피아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죄로 타락해서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고난이 겹칠 수밖에 없는 세상 속에 여전히 연약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남겨둔 채 구원하십니다.

 

세상 속에 신자를 그대로 두신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알기에 그분을 증명하는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분을 증명하려면 그분이 역사하도록 온전히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죄 많고 연약한 인간이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당신을 증명해 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살아가는 장소는 여전히 이방 우상의 도성이고 생업을 영위하며 살아가는 방식도 똑같습니다. 그에게 변한 것은 하나님을 모든 사고와 행동의 중심에 두게 된 가치관과 인생관뿐이었습니다. 신자에겐 더 착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첫째 과제가 아닙니다. 그분께 받은 세상 앞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근원이 되라는 소명을 이루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어야 하고 기도도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간혹 신자는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사악한 세상과는 완전히 담을 쌓아야 한다고 믿는 분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기도 찬양 말씀에 헌신하는 수도원의 사제처럼 살아야 온전한 믿음이라고 여깁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는 세상 속에 살아가되 세상에 속하지만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려면 하나님을 가장 모르는 곳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지금 아브람이 어디든 갈 수 있는데도 상수리나무 수풀로 갔지 않습니까?

 

순전히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아이들 교육에 적합할 것 같다는 제 개인적인 단순한 판단에 따라 미국 유타 주 솔트레이크 시로 이민가려고 결정했습니다. 주변에서 이단인 몰몬교의 본산지에 왜 가느냐고 말리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악한 영향을 받을까 염려해주는 선한 의도는 고맙지만 이미 그런데 좌우될 정도는 지났으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로선 오히려 그들을 전도할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실제로 한인 몰몬교회의 교인 명부를 입수해서 그들에게 몰몬교의 실상을 고발하는 소책자를 발송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지만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아서 중지했습니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저를 말씀 사역자라는 너무나 귀한 직분을 맡기려는 이전부터 마련한 당신만의 계획을 당신만의 방식으로 착착 진행시켜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람과 동일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고 이단의 본거지에서 제 믿음은 물론 삶에 적용과 실천이 더욱 성숙해졌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5:10) 악한 세상 사람들과도 교제해야 하되 헬라인에게 헬라인의 방식으로 유대인에게 유대인의 방식으로 접근하여서 어떻게든 그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라고 권면했습니다.(고전9:19-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라(살전5:22)는 말씀도 멀리하라가 아니고 버리라고 했으니 외부보다는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밖 죄인들과는 교제하되 교회 안의 죄를 범한 성도들은 엄격하게 치리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최근 교회에 문제가 너무 많다고 아예 집에서 혼자 예배 보는 신자들이 꽤 있습니다. 교회와 목회자들로 인해 받은 상처와 영적 갈등이 매우 힘들었을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공동체라도 멀리하겠다는 것은 엄격히 말해 본인에게만 좋을 뿐 하나님에겐 전혀 좋은 일이 아니고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혼자 고립되어선 예수님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가르친 이웃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이웃이란 당연히 불신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해주는 자를 사랑하면 하늘에서 아무 상급이 없다고 했습니다.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는 가지 않겠다는 속담처럼 혼자만 거룩해지겠다는 것은 자신도 똑같은 죄인임을 망각하고 남들을 더 추하게 여기는 큰 교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가장 야단친 사람들이 종교적 경건으로 위장해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자들이었지 않습니까?

 

믿음이 연약할 때는 교회가 시끄러우면 잘못된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빨리 올바른 교회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교회에 무엇이 잘못된 줄 판단할 정도라면 이미 믿음이 상당한 것입니다. 그럼 오히려 교회에 계속 남아서 그리스도를 바르게 증거해야 합니다. 분쟁이나 권력 다툼에 참여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비방과 음해를 받더라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의 삶이 어떠한지 성도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왕에 혼자서 거룩하게 지내려면 교회 안에서 그러는 것이 서로 간에 더 유익할 것 아닙니까?

 

아브람은 처음에는 자기에게 적합한 주거지를 주지 않는다고 의심 불평하면서 어서 빨리 그런 곳을 인도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사방이 완전히 막힌 환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전화위복되는 체험을 하고선 오히려 우상의 본거지에 들어가서 여호와 복의 근원으로 사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그의 기도도 분명히 주님께 자기 전부를 맡기며 그 소명에 온전히 순종 헌신할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솔직히 지금 어느 곳에서 어떤 믿음으로 어떤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수도원 내지 교회 안에 머물고 있습니까? 세상 죄악의 한 복판으로 기꺼이 뛰어 들어가 있습니까?

 

(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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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창:25:19-23) 불신자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는가? master 2020-10-23 47
181 (창35:1-5) 세상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어보았는가? master 2020-09-07 185
180 (창32:24-31)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겨보았는가? master 2020-09-04 1021
179 (창32:7-12) 하나님이 나에게 진 빚을 청구할 수 있는가? master 2020-09-04 44
178 (창31:26-32) 야곱의 반의반이라도 따라가자. master 2020-09-04 107
177 (창31:6-13) 코로나 사태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master 2020-09-04 46
176 (창30:25-32) 정말로 바보처럼 살고 있는가? master 2020-09-04 243
175 (창30:1-5, 22-24) 역전된 인생을 살고 있는가? master 2020-07-26 76
174 (창29:31-35) 교회 밖 구석진 곳에 계시는 예수님 master 2020-07-25 264
173 (창29:21-27) 야곱보다 더 영악하신 하나님 master 2020-07-25 110
172 (창29:15-20) 하나님의 스토커가 되어있는가? master 2020-07-25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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