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4:13-16) 기도응답 잘 받는 최선의 방안

조회 수 25 추천 수 0 2022.07.25 15:40:22

(창14:13-16) 기도응답 잘 받는 최선의 방안

기도 시리즈 (5)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창14:13-16)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만...

 

성경은 독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영적진리와 그것을 계시해주는 중요사건 위주로 기록되었기에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책의 주제와 저자의 의도에 비추어 행간의 의미를 찾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 알아보는 중인데 오늘 본문에는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거나 단을 쌓았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문맥상의 의미를 잘 살펴보면 기도에 대한 소중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아브람이 생명을 걸어야 하는 가나안 연합전쟁에 참여하면서 기도하지 않았을 리는 없습니다. 자신은 물론 동참한 군사들이 무사 귀환할 수 있도록 출전하기 전부터 끝까지 전쟁 승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는 또 가는 곳마다 여호와께 단을 쌓았기에 평소에도 쉬지 않고 기도했다고 봐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작정하고 엎드려도 5분도 채 기도할 수 없기에 매일 꾸준히 기도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실토합니다. 기도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질문하는데 정답은 하나입니다. 무조건 무엇이든, 심지어 의심과 불평도 하나님께 다 아뢰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기도를 능숙하게 규칙적으로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기도 응답의 체험이 쌓여야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도를 잘하게 되는 법입니다.

 

아브람은 애굽에서 아내가 바로의 후궁이 되는 비참한 상황에 빠졌으나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구해주시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오래 전부터 세우신 계획과 자기와 맺은 언약이 실현되는 모습으로 자기 기도에 응답해주었습니다. 애굽에 넘어오기까지 아무리 기도해도 자기 생각과는 사태가 반대로 전개되니까 하나님이 외면 침묵하는가보다 여겼지만 사실은 물밑에서 쉬지 않고 역사하고 계셨다는 진리도 깨달았습니다. 어떤 힘든 고난도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더 선한 결과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철두철미 확인했습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와선 무슨 일에서든 더더욱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의 용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기쁘신 뜻이라고 했습니다.(살전5:17) 수도원 사제처럼 하루 종일 종교적 경건에 잠기거나, 자기 소원대로 응답될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범사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있기에 기도로 분별하여 자기 삶에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또 죄로 타락한 세상과 그것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흑암의 세력들이 쉬지 않고 신자를 교묘하고도 끈질기게 시험 유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자녀답게 살아가려면 불신세상으로부터 비방 멸시 핍박을 겪게 마련인데 자기 믿음과 능력만으로 이겨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평생 동안 더불어 살아가야 할 현실난관들을 담대히 극복하면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려면 쉬지 말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대만 해도 펜데믹으로 인한 육체적 경제적 고난이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너무나 위선적 이기적이고 그 생각은 완악한 분노와 저주로 가득 차있습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도 기도하지 않고 맨 정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문제도 그렇지만 세상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서야하니까 기도할 일이 더 많습니다. 생업을 중단하면서까지 시간 내어 정식으로 무릎 꿇고 기도할 필요는 없으나 자신과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분별 판단 결정 시행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 후에 신자더러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명했습니다.(롬12:1) 현실의 일상적 삶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범사에 쉬지 말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육적생명을 이어가려면 숨을 멈출 수 없듯이 영적생명을 활기차고 경건하게 유지하려면 말씀과 함께 기도가 호흡이 되어야 합니다.

 

가나안 전쟁에 휘말린 아브람

 

아브람이 평소에도 쉬지 않고 기도했다는 증거가 본문에 나옵니다. 바로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13절)는 말씀입니다.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며 죄로 타락한 백성들이 그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고 특별히 우상 신당이 있는 곳에 계속 거주하고 있습니다. 어느 족속에도 소속되지 않는 특별한 신분입니다.

 

그럼에도 가나안 족속들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고 평안히 살고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경제적 손해를 전혀 끼치지 않고 특별히 윤리적 잘못을 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들 중 가난한 자들에게 종종 구제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인근 주민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목적은 현실 형통과 안락입니다. 그러니까 돈이 많고 군사들까지 거느린 아브람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브람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려고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지 않고 우상의 본거지에서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기에 하나님이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매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지 않았다면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전쟁은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온 지 약 9년 뒤 그의 나이 84세 때에 가나안 북부의 강대국 4나라와 사해 인근의 약소국 5나라의 연합 사이에 일어난 것입니다. 약소국들이 12년간 엘람 왕에게 조공을 바치다가 십삼 년째에 배반했습니다.(창14:4) 격분한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주변 3개국과 동맹을 맺어 배역한 5개국을 응징하려 한 것이라 처음부터 소돔 동맹군에게 승산은 거의 없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박해를 당하는 약소국들의 독립 투쟁이라는 의로운 측면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역사에 따르면 홍해의 아카바 만을 통한 광산물 교역로를 확보하려는 이권 다툼이 주목적이었습니다. 피지배국이라 해서 지배국보다 도덕적으로 의로웠던 요소가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는 더 철저히 부패 타락했기에 나중에 하나님의 유황불 심판으로 진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이었던 아브람이 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소돔에 거주했던 조카 롯이 함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제 롯은 사형 아니면 노예가 되어야 하고 그 아내와 두 딸도 전승국 남자들이 차지하거나 노예나 창녀로 팔릴 것입니다.

 

아브람으로선 조카와 그 가족이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집에서 기른 군사 318명 외에 그와 동맹한 마므레, 에스골, 아넬이 아브람과 함께 출발했습니다.(창14:13,24) 엘람 왕 연합군에 정식으로 맞설 만한 군사력이 안 되므로 야간에 전격적으로 기습하여 롯을 비롯해 사람들과 재물을 모두 다시 찾았습니다. 기습작전도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은 지혜에 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가족이 우선인가?

 

문제는 조카 롯을 구원하려는 선한 목적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심판하신 소돔에게 유익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을 구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뜻을 위반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라고 정죄했지만(창13:13) “멸하시기 전”(10절)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시려는 계획을 아브람으로선 전혀 알 수 없었고 한참 후 천사들이 찾아와 통보해 줄 때(창18,19장)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가나안 족속들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누가 선하고 악한지 구별 할 수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로 아브람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늘날도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분을 앞세워서 특정한 불신자 그룹이나 개인을 정죄 응징하려해선 안 됩니다.

 

신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에게 복음을 알게 해줄 책임이 막중하지만 육체적 죽음에서 구해주는 것은 그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살아 있어야만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끝까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다음으로 그분께 받은 육신적 생명입니다. 당장 가족의 생명이 위급한데도 당신의 일에 헌신하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절대 아닙니다. 작금의 코비나 사태도 교회와 신자는 함부로 남을 정죄하지 말고 무엇보다 다른 이의 생명을 중히 여기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아브람이 평소에 쉬지 않고 기도했다는 또 다른 증거는 도망한 자가 아브람에게 롯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러 들렀다는 것입니다. 롯에게서 부탁을 받아 그랬겠지만 아브람이 인근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기에 소돔 백성을 구해달라고 도움을 청하려는 목적 또한 컸을 것입니다.

 

결국 소돔을 비롯한 5개국 동맹이 무참히 패배한 4개 강대국 연합에게 나라도 없이 자기들 속에 우거하는 아브람 군대가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제 아브람의 이름에 가나안의 모든 왕들보다도 더 높은 권능이 붙었습니다. 반대급부로 그에게 패한 강대국들에겐 원수가 되어서 언제 응징을 당할지 모르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아브람에게 복수하러 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군대를 훈련시키며 빈틈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꿔 말해 아브람이 쉬지 말고 기도했다는 것은 사실상 기도한 그대로 삶에서 실천하며 살아갔다는 뜻입니다. 집안의 종들은 물론 이웃 주민들도 이 전쟁에 기꺼이 참여했습니다. 아브람의 군대가 318명이면 그들 가족까지 합치면 약 이천 명이 되는데 그들도 가장이 전쟁에 참가해도 좋다고 허락해준 것입니다. 평소에 아브람이 그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망을 얻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아가 그들 모두가 아브람이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자리에 동참했을 것입니다. 이번 전쟁을 위해서도 합심해서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는 아브람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아브람이 목사로 있는 여호와 공동체의 승리였습니다. 마땅한 회당, 성경, 예배 의식이 없었으니 전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의 승리였습니다.

 

왕들에 대해 달라진 아브람의 반응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제자들더러 진리를 몰라 썩어가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서 사람들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라고 가르쳤습니다.(마5:13-16) 아브람은 우선 자기 공동체 내에서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았습니다. 이어지는 설명(17-24절)에 따르면 전쟁에 승리한 후에 자기를 영접하러 나온 두 왕들 앞에서도 실천했습니다.

 

인간사회 모든 분쟁의 궁극적 원인이 그러하듯이 최초의 세계대전도 오직 돈을 누가 더 차지하느냐의 다툼이었습니다. 아홉 개 나라의 백성들이 돈에 자기 목숨을 걸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람의 입장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한 명이라도 살리려고 객관적으로 승산이 희박한 싸움인데도 자기 목숨을 걸었습니다.

 

아브람이 조카를 구하려 참전했지만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같았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가면서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고 선포했습니다. 아브람도 그와 동일한 믿음으로 전쟁에 임했던 것입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힘도 엘람 왕 군대에겐 인간의 칼과 창이었고 아브람에겐 여호와의 의로운 개입이었습니다. 기드온의 용사 300명이 미디안의 13만5천 명(삿8:10)에게 대승했듯이 가나안 강대국 연합이 아무리 강력해도 여호와의 정예부대인 아브람이 승리할 것은 이미 하나님이 보장해 놓았습니다.

 

아브람은 이 승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이뤄주신 것이라고 또 다시 절감했을 것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에 관해선 본문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표현했고 히브리서 5-7장의 설명대로 예수님을 예표 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그에게 감사의 고백으로 십일조를 바친 것입니다. 여호와를 향한 순전한 믿음을 표현하는 그의 경건한 모습을 본 다른 이들도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반면에 소돔 왕을 대하는 아브람의 반응은 영 딴판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소돔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창14:11,12) 야간 기습작전을 성공하고 나중에 네 강대국들과 원수지지 않으려면 비밀리에 롯만 살짝 구출해도 됩니다. 그런데도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소돔 백성들이 처형당하고 노예로 혹사당하게 버려둘 수는 없어서 전부 구출해주었습니다.

 

소돔 왕이 먼저 전쟁을 치르느라 수고했으니까 소돔 사람들만 돌려주고 재물은 다 가지라고 제안했으나 아브람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창14:23,24)고 대답했습니다.

 

먼저 아브람은 비록 자기 힘으로 다시 찾았으나 모든 것이 원래 소돔의 소유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래서 자기 군사들이 싸움을 치르느라 허기져서 이미 먹은 것만 양해해 달라고 합니다. 오직 돈을 목표로 영토와 백성과 재물을 늘리려는 세상 사람들의 전쟁과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군사들도 자기를 보고 따라온 것이지 재물을 얻으려 싸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싸웠음에도 군사들이 그 조치에 전혀 반대가 없었으니 아브람의 평소 인격이 또 다시 드러납니다.

 

대신에 자기 부하가 아닌데도 함께 따라와 준 가나안 주민 셋의 몫은 챙겨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아브람의 그 의로운 행실을 보고 받은 감동은 대단했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여호와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나중에 주변 가나안 족속들에게도 전쟁의 경과와 아브람이 소돔 왕을 어떻게 대했는지 자세하게 전해줄 것입니다.

 

지금 여호와가 그를 불러낼 때부터 주신 약속대로 아브람의 이름은 날로 창대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아브람의 삶이 자기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의로울 것이므로 가나안 족속들로선 그가 믿는 신도 우리들 신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라고 짐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겐 비록 왜곡되었어도 창조주에 대한 향수가 있습니다. 무엇이 정말로 옳은지에 대한 양심도 조금은 남아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조상대대로 내려온 종교를 버리고 당장 개종하지는 않겠지만 여호와와 그의 종 아브람을 절대로 경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준비해 온 것에 비해 소돔 왕은 빈손으로 왔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아브람에게 빼앗길까봐 헐레벌떡 찾아와선 나름대로 자기 백성들 보라고 큰 선심을 쓰는 척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소돔 왕에게 나중에 네가 나로 치부하게 하였다고 생색을 내지 못하게 하나도 받지 않겠다고 딱 부러지게 잘랐습니다.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또 다시 아브람으로 모든 전후사정을 정확히 분별하게끔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소돔 왕에게 보인 아브람의 반응이 아주 흥미롭지 않습니까? 애굽에선 바로에게 자기 생명을 건지려고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고 비굴하게도 큰 재물을 받았습니다. 고대전쟁에선 승리한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것이 관례였고 소돔 왕이 백성들을 구해준 대가로 재물을 다 가지라는 제안을 했는데도 아예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나중에 북부 강대국들이 복수할 때에 소돔 왕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아브람이 꾸중이나 다름없는 말로 대꾸했으니 소돔 왕은 왕으로서 자존심이 크게 상하고 반감만 생겼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마땅히 행해야할 바를 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종으로서 아무리 세상 최고 권력자들 앞이라고 해도 그분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이번 전쟁을 통해서 가나안 모든 나라 왕들에게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대했습니다. 애굽에서 여호와께 받은 엄청난 은혜의 체험이 그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주었습니다. 그의 믿음도 조금 더 좋아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도약했습니다. 신자가 아무리 고난을 겪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하여 함께 이겨내게 되면 믿음도 그 고난의 크기만큼 커지는 법입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이제 아브람에 비추어 우리의 기도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 밝혀졌습니다. 아브람은 기도한대로 실제로 말과 행동으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며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대부분의 우리 모습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애굽에서 돌아온 후로는 자기 인생을 여호와께 완전히 의탁하고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라는 기도를 하면서 실제로 자기 전부를 바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전쟁에도 전혀 주저하지 않고 참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도 전쟁의 승패는 여호와께 있다고 선언한 후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데도 골리앗을 향해 돌진해 갔습니다. 누가 봐도 승산이 없었지만 여호와께 자기 전부를 맡겼습니다. 할례 없는 백성이 할례 있는 자신이 대리하고 있는 여호와를 맞서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반드시 그 교만과 죄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신자들이 기도와 삶을 따로 분리해서 대하고 있습니다. 기도한 후에는 기도한 내용과 아무 관계없는 삶을 살고 심지어 되어져 가는 상황을 기도했던 내용과 비추어서 분별해볼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이는 아주 잘못된 습관으로 신앙을 가장 자라게 하지 않는 요소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의 힘을 빌려 해결하는 절차라고 너무나 초보적으로 이해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한 후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도록 가만히 손을 놓고 기다리는 것이 최고의 믿음이라고 오해합니다. 말기 암에 걸려 병원에서도 완전히 손을 놓은 상태가 아닌 이상 그래선 안 됩니다.

 

누구에게나 기도하는 제목은 현재 삶에서 당면한 문제들입니다. 세상에 속하지는 않지만 세상 안에 살아야 하니까 세상에서 일어나는 힘든 일과 또 현실 삶을 개선시키고 싶은 자신의 계획과 소망부터 우선적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는 내용을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그렇게 이뤄지도록 노력해나가야 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더러 롯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가만히 있었다면 어떻게 됩니까? 당신의 천사를 보내어 눈에 보이지 않게 탈출시켰을까요?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 그런 일이 불가능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초대 교회 때에 두 번이나 바로 그런 모습으로 베드로를 옥에서 구해주셨습니다.(행5;17-26, 12장) 또 바울일행이 빌립보 감옥에서 한밤중에 찬양하자 지진이 나서 옥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행16:19-34) 두 경우 다 현실적 방안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베드로와 바울은 기독교를 설립하는 책임을 진 두 사도였기 때문이고 또 본인들도 그런 기적의 은혜를 입자마자 다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반면에 롯은 하나님에게 그런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더욱 믿음의 선진들의 발등상에도 미치지 못하며 솔직히 매주 교회에서 하나님 면전에 서기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적을 기대하듯이 기도하고 손을 놓고 있다면 평소의 우리 위치에 비추어서 마찬가지로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 아닙니까?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이 약해질 때에 온전해진다고 고백했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하게 발휘될 기회가 생기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를 설립하고 양떼들을 돌보았고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진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기 고질병만 고쳐지면 더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는데 그 자체가 큰 교만이었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는 무력하지만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역사해 달라고 기도하고 이전보다 더 열심히 사역했습니다. 자기가 약한데서 하나님 능력이 온전해졌다는 말은 실제로 바울이 자신은 연약한데 과연 이 일이 이뤄질까 염려했지만 하나님이 완벽하게 이뤄주신 체험을 많이 했기에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영적으로 어리석은 우리로선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무엇이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원이나 계획을 두고 기도한 것은 그렇게 되도록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꼭 그대로만 되어야겠다고 고집하니까 기도한 후에 계속해서 가만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께 내어맡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문자적으로만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 결실 없는 짝사랑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한 후에 가만히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자신의 고집과 욕심을 끝까지 내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대신에 그분이 어느 때에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는지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자신이 기도한 대로 열심히 실천을 해봐야 그분의 응답과 비교 대조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럼 또 당연히 그분이 응답해나가는 방식에 따라 내 생각과 실천을 하나님의 생각에 맞춰서 수정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브람의 기도와 삶을 배워야 한다고 해서 목숨 걸고 다른 사람 생명을 구하라거나 하나님을 위해 순교하라는 요구는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이든 도움을 청하러 오게끔, 아니 상담이라도 요청하게, 아니 기도라도 해주길 바라게, 아니 내가 행하는 말과 행동을 온전히 신뢰라도 하게끔 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자신의 믿음은 물론 기도에 혹시 잘못이 없는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본인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분께 기도한 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이웃들도 나를 신뢰해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기도가 자기 뜻을 아뢴 후에 하나님이 스펙터클하게 이뤄줄 역사를 여유 있게 가다리는 영적의식이 아닙니다. 그분의 충성스런 동역자로서 적극적으로 그 역사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 전부를 내어드리며 실제로 그분 인도대로 실천에 옮기는 행동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그대로 실천해야만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목격하면서 기도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1/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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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창35:1-5) 세상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어보았는가? master 2020-09-07 186
180 (창32:24-31)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겨보았는가? master 2020-09-04 1026
179 (창32:7-12) 하나님이 나에게 진 빚을 청구할 수 있는가? master 2020-09-04 44
178 (창31:26-32) 야곱의 반의반이라도 따라가자. master 2020-09-04 107
177 (창31:6-13) 코로나 사태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master 2020-09-04 46
176 (창30:25-32) 정말로 바보처럼 살고 있는가? master 2020-09-04 244
175 (창30:1-5, 22-24) 역전된 인생을 살고 있는가? master 2020-07-26 76
174 (창29:31-35) 교회 밖 구석진 곳에 계시는 예수님 master 2020-07-25 265
173 (창29:21-27) 야곱보다 더 영악하신 하나님 master 2020-07-25 110
172 (창29:15-20) 하나님의 스토커가 되어있는가? master 2020-07-25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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