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1:6-13) 코로나 사태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야곱 바로 알기 (15)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창31:6-13)
열 번이나 양보한 야곱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상 최초의 유전자 변형으로 야곱은 라반보다 더 부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야곱의 양 떼는 얼룩지고 흠 있는 것들뿐인데도 더 튼튼하고 더 숫자가 많아졌습니다. 라반의 아들들은 이런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을 야곱이 믿는 신인 여호와가 일으켜 주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저 시기 질투에 눈이 어두워져 자기들이 줄곧 야곱의 가축들을 감시해놓고도 야곱이 자기들 양 떼를 훔쳤다고 생떼를 썼습니다.(창31:1)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2절)고 말합니다. 아들들의 억지에 라반이 넘어가서 야곱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것이 겉으로 표가 날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제 외삼촌과 조카, 또 장인과 사위의 관계는 물론 외사촌 형제들과도 완전히 원수 사이로 변했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도망가는 야곱 일행을 추격해온 라반이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창31:29)라고 즉, 사위라도 죽일 수 있었다고 실토했습니다.
야곱으로선 라반과 정상적인 관계를 더 이상 이어갈 수 없고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몰라 도망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내들은 본가와 고향을 갑자기 떠나야 하는데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과 그 배후 사정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녀들도 너무나 신기한 일이 일어났으니 자기 남편이 뭔가 이상한 사기술이나 마술을 사용했는지 의심할 수 있습니다.
야곱으로선 아내들부터 설득시켜야 했는데 놀랍게도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7절) 고 말했습니다. 첫 7년은 라헬을 위해 무료로 봉사했고 지금 얼룩진 양 사건은 마지막 약 6년 동안에 일어난 일로 서로 간에 삯을 계약했습니다. 그렇다면 첫날밤 사기사건 후에 라반이 라헬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하며 한 번 더 7년을 봉사하라고 요구할 때에 삯을 쳐주겠다고 약속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이, 정확히 말해 야곱이 그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지금에야 라반이 열 번이나 삯을 변경했다는 것을 밝히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두 사람끼리만 구두로 약속했고 아무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증인도 문서도 없는 계약이지만 장인이 사위에게 약속한 삯을 열 번 즉, 꽉 차는 숫자만큼 어겼다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시쳇말로 사위를 물로 본 것이며 열 번이나 변경했으니 그 동안 회개는커녕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한 번도 항변하지 않고 묵묵히 장인의 요구대로 양보해주었고 그 억울한 사정을 아내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기 혼자 속으로 담아놓고만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잘못을 딸들이 알게 되면 아무래도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질 것을 야곱은 염려하고 배려해준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라반에게서 함께 도망가야하기 때문에 13년 전에 시작된 일을 처음으로 아내들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야곱이 지금껏 배운 대로 현실적 유익을 밝히는 영악한 사기꾼이었다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야곱의 의로운 성품이 여실히 드러나는 증거입니다.
자초지종을 다 전해들은 레아와 라헬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14-16절)
사위에게 주는 삯은 딸인 자기들과 그 자식들에게 주는 셈인데 아버지가 열 번이나 핑계 대며 주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을 외국인처럼 여겼다고 말했는데 고대사회 관습상 노예로 부려먹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아버지가 딸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고 그럼 또 야곱도 처음 왔을 때부터 똑같은 생각으로 대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어떻게 장인이 눈도 깜박 않고 사위의 삯을 열 번이나 변경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외손자 열두 명마저 당신의 친아들들을 섬기는 종으로 부려먹을 것도 너무 분명합니다.
라반이야말로 천하의 치사한 사기꾼이자 윤리는 물론 체면 의식조차 없는 아주 야비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온유하고 인내심이 많으며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최고로 선한 사위가 최고로 악한 장인을 만나서 온갖 사기술에 농락당하다가 이젠 생명의 위협을 받을 참입니다.
하나님의 이상한 섭리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이어갈 장자로 당신께서 태중에서부터 야곱을 택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백세가 되어 가는데도 이런 곤욕을 치러야만 합니다. 야곱의 하란에서의 20년의 삶이 지금 장인과 원수 되는 것으로 끝을 맺을 판입니다. 사람이 가장 괴로운 것은 현실적 궁핍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종의 일생을 주관하시는 모습이 꼭 이래야만 했을까요?
신앙상의 의문이 생기면 수학문제처럼 그 반대로 역산해 보면 의외로 쉽게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라반이 인자하고 합리적이며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야곱으로선 하란 사람들도 서로 믿는 신만 다를 뿐 선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란을 떠나자고 설득할 명분이 약해지고 아내들도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가뜩이나 라헬에게 빠져있어 그곳에 눌러앉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야곱은 조용하고 의롭고 신실한 성품을 갖고 있었고 여호와를 따르는 믿음도 뛰어났습니다. 그럴수록 만사가 잘 풀리고 환경이 평온하면 여호와의 은혜인줄 아니까 구태여 새로운 일에 도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시고 그의 삶을 심술궂을 만큼 오래 동안 크게 흔들어대었던 것입니다. 조용하고 착하기만 한 야곱이 사람들뿐 아니라 표현에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에게마저 계속 시달림을 당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맡긴 종들의 인생을 평탄하게 지내게 하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도리어 가장 가까운 곳에, 야곱처럼 심지어 가족 사이에 원수 같은 자를 붙여서 오랫동안 환난을 겪게끔 합니다. 오늘날도 중병을 앓거나 핸디캡 자녀를 둔 사역자들을 종종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어서 심령은 타들어가고 여호와에 대한 의심 원망 불평이 끊이지 않다가 불신 분노까지 튀어나오게 만듭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받는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반역한데다 그 아들이 백주에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후처들을 겁탈하는 수치까지 겪습니다.(삼하16:20-23) 한나라의 왕으로, 자식을 가진 아버지로, 그 여인들의 남편으로, 아니 한 남자로써, 도무지 씻을 수 없는 모멸입니다. 그가 시편에서 어떻게 고백합니까?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13:1-3)
다윗의 삶은 청소년 때에 골리앗에게 승리한 이후로 줄곧 너무나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장인인 사울이 두 번이나 자기를 죽이려 시도했고 이젠 아들마저 그러고 있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35년이었는데 다윗에게 여호와는 줄곧 숨어있던 것과 방불했을 것입니다. 야곱도 지금 장인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장인에게 살해당할 위험에 처했습니다. 만약 야곱이 시편을 지었다면 다윗과 똑같은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사방을 막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당신의 종 야곱에게 그런 일을 허용한, 더 정확히는 계획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반대로 생각하면 그 답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따르는 자로선 아무리 끊임없이 괴롭혀도 가족을 원수로 대할 수는 결코 없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 양쪽에서 시달리는 고달픈 삶을 살게 되더라도 하나님에겐 얼마든지 원망 불평해도 되지만 사람들에겐 절대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얼마든지 불평해도 된다는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려면 야곱이 아내들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본문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 아버지가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지만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7절) 그렇게 된 연유를 꿈에서 여호와가 얼룩진 양들이 네 소유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양들이 수태할 때에 양떼를 탄 수양이 다 얼룩진 것임을 보여주었다고 설명합니다.(8-12절)
우선 야곱이 라반에게 자기 삯으로 얼룩진 양떼만 주면 된다고 제안한 것이 본인의 계책이 아니라 여호와의 계시를 따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야곱도 목축의 전문가인지라 얼룩진 양이 열성 인자로 새끼를 잘 번식하지 못한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양떼를 정성껏 사랑하며 튼튼히 키울 자신이 있는 야곱이라도 하나님의 이런 계시를 받지 않고는 섣불리 그런 양들만 자기 삯으로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전에 두 번째 7년의 봉사기간 동안 라반이 열 번이나 삯을 변경했기에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장인에게 요청했습니다. 라반이 함께 살자고 간청을 하면서 틀림없이 앞으로는 절대로 삯을 어기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은 하나님께 계시 받은 대로 얼룩진 양으로 삯을 쳐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확연히 구분되는 얼룩진 양이 삯이니까 라반은 더 이상 삯을 변경하지 못합니다. 아니 그 약속을 어길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 어차피 얼룩진 양은 새끼들이 번창하지 못하니까 야곱의 삯은 적은데다 그마저 점차 줄어들 것입니다. 라반은 너무나 매력적인 조건이라 흔쾌히 받아들였고 자식들로 감시까지 시켰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기발 난 계획이 있고 그분이 완전히 역전을 이루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 라반이기에 현실적으로 영악하게 반응한 것입니다.
만약 이번에도 라반이 삯을 변경하면,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지만,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로 야비한 장인이라고 손가락질당할 것입니다. 그 동안 라반이 부자가 된 것이 야곱 때문인 줄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위에게 얼룩진 양을 삯으로 준데다 그마저 빼앗으려 한다면 그 동네에서 얼굴 들고 살 수 없습니다. 성경말씀이, 사실은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흥미롭고 정미한지 실감할 수 있습니까? 짓궂을 만큼 야곱을 힘들게 하는 것 같아도 인간의 지혜로는 꿈도 못 꿀 만큼 너무나 오묘하고 완전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꿈에서 얼룩진 양이 수태하는 모습을 야곱에게 보여주면서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보았다”고(12절) 말씀했습니다. 지난 7년 간 열 번이나 삯을 변경하여 받지 못하는 것을 내가 대신 받게 해주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대로 삯을 넘치도록 받은 야곱도 아내들에게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자기에게 주었다”고 말했습니다.(9절) 자신의 기발한 목축기술과 성실한 노력으로 이뤄낸 성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인이 내 삯을 열 번이나 변경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내 것을 빼앗은 줄 하나님은 다 아시고 다시 그에게서 빼앗아 나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야곱은 이 위급한 판국에도 당장 떠나지 않고 다시 라반과 관계를 회복시켜볼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살피니 전과 같지 않다고 여겼을 때에 여호와가 고향의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는 계시를 주셨습니다.(2,3절) 여전히 떠날까 말까 망설여졌기에 여호와께 기도를 했고 그 기도에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그만큼 야곱에게 인자와 인내가 넘쳤던 것입니다. 여호와도 그래서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고(13절) 다시 상기시켜준 것입니다. 이십 년 전에 고향을 떠나올 때 반드시 돌아오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있으며 반드시 그대로 성취시켜 줄 것이니 망설이지 말고 떠나라는 뜻입니다.
야곱에게서 전후사정을 전해들은 두 아내에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16절)고 반응했습니다. 이번 사건을 비롯해 야곱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남편이 따르는 여호와가 큰 권능과 은혜로 역사했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미안해 할 것 전혀 없으며 우리도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비열하고 탐욕적인 아버지에게 더 이상 미련이 없으니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전적으로 동의해주었습니다.
야곱은 형의 살해 위협 때문에 77년간 살았던 밧단하람을 떠났는데 부모가 먼저 하란으로 가라고 지시했습니다. 지금 이십여 년 간 도피했던 하란에서 또 다시 외삼촌의 살해 위협 때문에 떠나야 하는데 이번에는 여호와가 먼저 지시했습니다. 야곱이 가는 곳에 온전한 거처가 없습니다. 인생 말년에 죽음을 앞두고도 기근과 요셉 때문에 또 다시 애굽으로 도피해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에게는 그 어느 곳도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영원한 본향이 하늘에 있으며 그곳에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음을 믿기에 이 땅을 나그네 같이 살았다고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야곱의 지난 이십여 년 간의 삶은 물론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전혀 몰랐고 급기야 죽음 일보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역전시키고 거부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역전 인생으로 바꿔주는 것 자체에 당신의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뜩이나 심성이 착한 야곱으로선 장인이자 외삼촌과 또 외사촌 형제들과 원수가 되었는데 마음이 편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비록 아내들도 동의해주었지만 친정 식구들에 대한 염려가 평생 따라다닐 것입니다.
그동안 야곱으로선 야비한 장인에게 말도 안 되는 억울한 경우를 겪어도 사위라는 위치와 본인의 성품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 말고는 그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방안이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야곱의 이십 년 도피 생활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난 것입니다. 베델에서 꿈에 예수님을 일대일 인격적 체험적으로 처음 대면한 후로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달라고 쉬지 않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사방이 막혔기에 여호와만 붙들고 쉬지 말고 기도한다는 의미를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사방이 막혔으니까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간섭으로 구원해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구원해주던 그대로 따라야만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여호와 한 분이면 충족하다는 믿음의 고백이 됩니다.
두 번째 7년의 봉사 기간 동안 라반이 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는 것을 겪은 후에 내가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일차적으로 라반더러 가족은 남겨두고 혼자만 가라는 또 다른 억지는 부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지난 십사 년의 수고로 당신은 아무 것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열 번이나 삯을 변경했으나 하나님은 내게 이 사랑스런 가정을 이루는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뜻입니다. 가족 외에는 아무런 소유가 없으나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하란으로 올 때에 맨몸으로 왔으니 다시 맨몸으로 가도 좋다는 것입니다. 지난 14년도 남들이 볼 때는 현실적으로는 아무 남는 것이 없는 실패일 수 있으나 야곱 스스로는 하나님과 교제 동행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세월이었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열두 명의 아들이 생겼으니 여호와 언약의 장자로서 가나안을 기업으로 물러 받을 후손의 씨를 충분히 얻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차지한 장자권의 열매를 비로소 하나님이 아름다운 결실로 맺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야곱에겐 현실상황과 무관하게 여호와를 더욱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 더 큰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사태가 완전히 역전된 후에 라반과 그 아들들의 심경이 어떠했겠습니까? 야곱이 무슨 일을 하던 관심도 두지 않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자기들보다 소유가 훨씬 많아졌습니다. 야곱을 향해 시기 질투를 넘어서 분노와 저주가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비유컨대 랭킹에도 들지 못한 무명선수한테 제대로 대응도 못해보고 케이오당한 챔피언인 셈인데 그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 위에 까닭모를 두려움도 엄습했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배후에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힘이 작동되었고 그 힘의 원천은 당연히 야곱이 매일 기도하는 여호와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쉽게 얻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전처음 보는 일이 일어났고 그 힘의 세기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무섭고 기괴한 모습을 보고 생기는 공포와는 달랐습니다. 신에게 기도해서 이런 일까지 일어나다니 자기들로선 전혀 알지 못하는 차원이 있음에 저절로 소름이 끼치도록 놀라고 두려워졌을 것입니다.
그럼 그들로선 당연히 야곱에게 지난 잘못을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도대체 어떻게 해야 얼룩지고 흠 있는 양들에게서 더 튼튼한 양들이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비법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정반대로 야곱을 죽일 모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도무지 질 수 없는 게임에서 자신들이 무참하게 진 것이 너무 분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소유가 적어진 것도 아닙니다. 단지 야곱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어졌을 뿐인데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것입니다. 나는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쾌락과 풍요만이 삶의 목적이므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거짓과 술수에 능했던 자들입니다. 야곱의 끝까지 양보하고 인내하며 묵묵히 정직하게 일하는 성품을 실컷 이용해먹었지만 사실은 그런 선한 모습에 자기들이 비교되어서 마음에 안 들고 싫고 미워진 것입니다.
인간이 그것도 자기에게 선하게 대하는 가족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물이 터지도록 고기를 잡아준 예수님을 아직 그분이 누구인지 모르고 십자가 대속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던 베드로는 도리어 자기를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눅5:8) 예수님이 오직 선한 일만 베풀어 주었음에도 동족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배불리 먹여주지 않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창조주 여호와를 거역하여 타락한 인간의 비참한 영적 실상입니다. 지금도 라반과 그 아들들이 사탄에 미혹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는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의 어두움을 더 사랑했기에 야곱에게서 새어나오는 여호와의 참 빛을 너무 싫어했던 것입니다.
야곱보다 믿음이 못하지 않는가?
본문에 비추어서 우리의 신앙을 정말로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우리는 과연 라반 같이 치사하고 탐욕적인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나 야곱처럼 인자하게 인내하는 위치에 서있습니까? 혹시라도 잘 믿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며 교회 봉사도 많이 하며 기도도 뜨겁고 간절하게 하는데도 왜 나는 아직도 이 꼴이며 라반 같은 자만 형통 출세해서 떵떵거리며 살게 하느냐는 불평을 자주 하지는 않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이 거저 주는 선물이며 그분 한 분만으로 행복하며 충분하다는 인식이 철저히 세워져 있습니까? 그런 믿음의 바탕에서 어떤 억울한 일에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품어주려 합니까?
신앙연륜으로 따지면 죄의 본성이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이라는 변명만 하고 있을 단계는 이미 지났습니다. 우리가 거짓말에 능한 사기꾼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야곱의 믿음의 수준에는 이르러야 할 것 아닙니까? 과연 우리 인생을 그처럼 빈 몸으로 와서 빈 몸으로 떠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십시오. 과연 하나님 한 분이면 만족합니까? 그래서 어떤 문제와 환난 중에도 그분에게 감사와 경배는 돌리지 못해도 최소한 원망과 불평은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신자로 야곱 같이 사방이 막히는 고난으로 밀어 넣어서 사람들에게 억울한 손해를 당하게 만드시는 뜻이 단순히 역전 인생으로 바꿔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의 기적을 눈으로 목격하고도 그분을 이유 없이 배척 대적 분노 저주하는 자들로 가득 찼음을 알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문제와 고난을 없애고 풍요와 쾌락을 찾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나 신자는 문제 고난들이 어떻게 결말이 나든지 하나님 당신만을 찾아서 교제 동행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앞에 자기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틀렸고 신자가 사는 모습이 옳음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구태여 도덕적 종교적으로 열심히 노력할 필요까지 없습니다. 야곱 스스로 계획하고 자기 능력으로 실현해 낸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달리 정직하고도 신실하게 살았을 뿐입니다.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여호와가 대신 갚아 달라고 간구만 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라반에게 직접 복수를 하지 않고 체불된 임금만 받았으면 좋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만이 행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기도에 응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과 그가 하는 일을 통해 당신의 거룩한 권능과 은총을 확연히 드러내 준 것입니다. 야곱은 내 언약의 장자로서 그가 밟는 땅마다 내가 그의 것이 되게 해준다고 당신께서 당신의 당신 되심을 하란의 이방 땅에 증명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 또한 야곱처럼 순전하게 신실하게 주님 말씀대로만 일상에서 꾸준히 살아가면 됩니다. 정말로 여호와 한 분으로 족한 모습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럼 하나님이 정말로 이 사건처럼 오싹할 정도로 신비한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어 주십니다.
작금 코로나 사태가 신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정말로 좋은 기회입니다. 사람들은 전혀 살아보지 못한 세상에 처음으로 살게 되었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지금껏 믿고 의지하던 것은 물론 삶의 재미를 느끼던 것들 마저 모두 못하고 있습니다. 직장을, 고정수입을 잃었습니다. 여행은 물론 외식도 못합니다. 친구들과 만나지도 못하고 심지어 가족마저 만날 수 없습니다. 신자들도 함께 모여서 예배는커녕 성경공부나 기도모임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끊겼습니다. 사지가 잘려나간 느낌입니다. 집안에서 인터넷 하나만 붙들고 있습니다. 온라인 교회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더러 오직 여호와만 붙들고 살며 그분만으로 남들보다 더 행복하고 기쁘게 사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기독교 부흥의 더할 수 없는 기회이고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 예수 안에 들어오면 그들에게도 가장 큰 축복입니다.
야곱 당시는 성경이 없어서 단을 쌓고 기도만 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계시 해놓은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는 통로이자 세상 앞에 그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더 강력한 수단입니다. 설령 신자의 현실적 삶이 완전히 망가져도 하늘에 더 아름다운 장막이 예비 되어 있으며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은 영원토록 살아 역사하십니다.
작금의 코로나 사태 가운데도 당신의 세상과 나를 향한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선하신 뜻과 계획을 당신께서 지금 오묘한 방식으로 실현하고 있습니다. 신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들 하나 없어도 얼마든지 기쁘게 살며 최소한 평강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야곱을 본 라반과 그 아들들이 너무나 섬뜩해진 것처럼 불신자도 신자에게서 비춰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눈이 부시게 만들어야 합니다. 신자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면 앞으로 코로나보다 더한 재앙이 더 자주 닥칠 것입니다. 반대로 신자들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신자는 물론 그 주변 사람의 인생을 하나님은 반드시 거룩하게 역전시켜서 세상을 아름답게 바꿔주실 것입니다.
8/9/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