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0:1-5, 22-24) 역전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야곱 바로 알기 (13)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30:1-5, 22-24)
자녀 많이 낳기 시합
야곱은 지혜와 외모가 뛰어난 라헬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결혼 지참금조이긴 하지만 7년의 무임금 노동을 먼저 제안했습니다. 라헬도 그 오랜 기간 자기만 바라보며 성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야곱을 분명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언니가 공모하여 결혼 첫날밤에 야곱이 만취한 것을 이용해서 신부 바꿔치기가 이뤄졌습니다. 라헬이 그 음모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아무래도 거의 없으니까 그녀는 그날 밤에 재갈이 물려 감금되었을 것입니다.
라반이 다시 7일 간의 잔치를 거행하면 라헬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둘째 결혼 예식에 라헬이 신부 자리에 또 앉자니 라반과 야곱이 손님들에게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사실은 첫 결혼식 때도 그 지방 풍습과 달리 언니보다 동생을 먼저 결혼시키는 이유를 변명해야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레아는 모든 여성의 팽생 소망인 면사포도 써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가족 간에 절대 있어서는 안 될 거짓과 기만으로 인해 라헬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무리 아내들의 신분을 평등하게 대했어도 첫째 아내의 위치는 사뭇 다릅니다. 야곱의 본처는 분명히 자기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지혜나 미모가 많이 떨어져 평소 자신의 경쟁 상대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던 언니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비록 본처 자리는 빼앗겼어도 라헬은 야곱의 사랑은 독차지 할 것이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해보니 도무지 아이가 생기지 않습니다. 반면에 언니가 아들을 낳자 남편의 애정도 언니에게로 조금씩 옮겨가는 것 같습니다. 라헬은 레아에게 큰 시기와 질투를 느끼고 급기야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1절)고 강짜를 부렸습니다.
레아가 이미 아들을 낳았으니 신체적으로 야곱에겐 전혀 하자가 없고 라헬의 태가 닫힌 것입니다. 야곱은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2절)라고 화를 내며 대꾸했습니다. 아무리 사랑스런 라헬이라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니까 순간적으로 화가 났던 것입니다. 아이 못 낳는 것은 네 탓인데 왜 나에게 화를 내느냐는 뜻을 하나님만이 생명의 태동을 주관하신다고 둘러서 대답했습니다. 라헬의 아픈 약점을 찌르지 않으려고 그나마 배려해준 셈입니다.
라헬은 궁여지책으로 자기 몸종 빌하를 야곱에게 첩으로 주어서 자기 대신 아들 둘을 낳게 합니다. 레아도 그에 질세라 자기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바쳐서 똑같이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친자매끼리 아들 많이 낳기 시합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들을 더 많이 낳는 것이 바로 야곱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아 본인이 여섯을, 자기 여종 실바가 둘 도합 여덟 명을 낳는 동안 라헬 쪽은 빌하가 낳은 둘 뿐입니다. 결국에는 라헬도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을 얻었고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고 간구했습니다.(22-24절) 아들 많이 낳기 시합에서도 언니를 꼭 이기고 싶었다는 뜻이며 그래서 빌하가 둘째 아들을 낳자 언니를 이겼다고 스스로 억지로 위로했지만(8절) 결과는 8 대 4 큰 스코어 차이로 패배하는 것을 끝났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종이 낳은 아들까지 포함해서 열두 아들의 이름 전부를 레아와 라헬이 자신들의 심경을 대변하여 지었습니다. 시녀는 주인의 뜻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데다 여주인의 배려로 야곱의 아들을 낳게 되었으므로 여주인이 이름을 붙여도 아무 말 못합니다. 남편이자 아버지인 야곱마저 그대로 따랐는데 두 자매의 신경전이 너무 대단했기에 편을 들며 끼어 들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가족끼리 사기 친 것이나 일부다처제는 하나님 뜻에 위배되는 죄이므로 모든 죄가 그러하듯이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를 연쇄적으로 불러오게 됩니다.
역전된 두 자매의 인생
이 사기 사건에서 주목해야할 사항은 두 자매 모두 결혼 전과 후의 인생이 완전히 역전되었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인생을 개별적으로 따져도 또 두 사람을 서로 비교해도 역전했습니다. 레아는 지혜와 외모에 뒤쳐져 항상 라헬에 비교되었고 열등감과 자기비하에 빠져서 결혼도 포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억지 사기 결혼이긴 했지만 아들을 많이 낳음으로써 결국은 야곱의 사랑도 얻고 언약 가문의 안주인으로 남편의 장자권을 보필하는 하나님의 여종이 되었습니다.
이와 정반대로 라헬은 결혼 전에는 그 지방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신부 감으로서 언니 레아와는 아예 비교할 대상이 안 되었습니다. 그녀의 미모는 애굽의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가 그녀의 첫째 아들 요셉을 일방적으로 짝사랑했던 사건으로 증명되고도 남습니다.
고대 사회에선 아이를 못 낳으면 큰 수치이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까지 간주되었습니다. 반대로 자식을 많이 낳으면 현실적 유익은 물론 하나님께 복 받은 여인으로 우대 받았습니다. 오래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한 라헬은 사람들로부터 팔자 사나운 여자라는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너무 화가 나고 또 크게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이젠 거꾸로 그녀가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하며 눈물과 한숨으로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을 낳자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심지어 빌하가 첫째 아들을 낳자 여호와가 내 억울함을 풀어주었다고(6절)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원했던 또 다른 아들 베냐민을 낳고는 곧바로 죽었습니다.(창35:16-18) 그녀의 자궁이 아이를 갖기에 부적합할 정도로 병약했음에도 하나님은 그녀의 눈물겨운 소원은 들어주었습니다.
레아의 인생은 불행하게 출발했으나 행복하게 끝났고 라헬의 인생은 행복하게 시작해서 불행하게 끝났습니다. 이런 역전이 일어나리라고는 두 사람이 계획은커녕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라헬은 태가 닫혔는 줄 몰랐고 레아는 결혼을 포기하다시피 했습니다. 야곱도 얼떨결에 친자매끼리의 격렬한 경쟁의 와중에 휩쓸려버렸습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 자매의 결혼은 외부인들이 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해피엔딩 희극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물론 다른 세 당사자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큰 실망과 상처와 원한을 주고받는 비극이었습니다.
라반은 자기 계획대로 현실적으로 큰 유익을 얻었고 골치 아픈 큰 딸을 시집보냈으나 사위와 둘째 딸에게 아비로서 신용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야곱은 본의 아니게 일주일 사이에 친자매 둘을 아내로 얻었으나 호의로 시작한 삼촌과 조카의 관계가 의심과 불신으로 발전했습니다. 첫 아내 레아는 상당 기간 더 마음에 차지 않았을 것이며 계속해서 두 자매의 시기 질투에 골머리를 썩었을 것입니다. 레아도 야곱의 첫 아내가 되었지만 오래 동안 남편의 마음은 자신에게서 더 멀어졌고 동생의 큰 미움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인간이 이 땅의 해 아래에서 자기 생각과 능력으로 아무리 수고해도 헛되고 헛되며 헛될 뿐입니다. 희극과 비극이 교차해서 발생하며 한 사건 안에서도 동시에 그 둘이 교차해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인생 전체를 마감해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쳇말로 웃프고 웃픈 즉, 우습지만 동시에 슬픈 것이 인생입니다.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
야곱이 두 자매 중에 외모 뿐 아니라 지혜도 뛰어난 라헬을 아내로 택한 것은 아주 현명한 선택으로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7년을 며칠 같이 여길 정도로 꿈에 부풀게 만들었던 라헬과의 결혼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라헬의 인생은 더 불행하게도 아내나 엄마로서 제대로 역할도 못해 보고 일찍 끝났습니다.
이런 인생의 비극이 당사자로선 실패로 여기겠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전혀 다릅니다. 아니 판단을 한다기 보다는 당신의 계획을 이루려는 섭리입니다. 야곱의 선택과는 정반대로 그의 아내감으로 라헬이 아니라 레아를 이미 선택해 놓았습니다. 인간사회 질서로는 장자권은 장남의 몫이며 신부의 선택도 신랑의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연달아 출산하는 쌍둥이 중에 동생이 형 발뒤꿈치를 잡게 하여 장자권을 차지할 자를 차남으로 바꿨습니다. 이번에는 두 자매의 결혼식을 연달아 두 번 거행케 하면서 야곱이 선택한 본처를 바꿔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물론 그 선택을 실현해나가는 모습 또한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야곱이 아비를 속인 죄를 징벌하는 의미가 있지만 그 방식이 오묘하다 못해 아주 짓궂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간의 것과 달라서 그분은 무조건 인간 선택의 반대로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불쌍하고 연약한 사람 위주로 택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공사역 중에 행하셨듯이 약한 자를 강한 자보다, 가난한 자를 부자보다, 궁핍한 자를 풍요한 자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까?
흔히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이참에 분명히 해 둘 것은 하나님의 선택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선 야곱이 에서보다 조용한 사람이긴 했어도 결코 연약하거나 불쌍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가난하고 소외 받는 사람들을 주로 만나서 치유하고 은혜를 베풀었지만 바리새인과 부자도 멀리한 적이 없으며 아주 사악한 죄인들까지 사랑하며 구원해주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연약하고 불쌍한 자를 택하여 우선적인 은혜를 준다고 하면 그것이 하나의 규칙이 되고 하나님이 그 규칙에 얽매인다는 뜻이 됩니다. 우주 전체에서 하나님만이 스스로 자존하십니다. 시공간이 있는 물질계의 어떤 것에도 절대로 영향 받지 않기에 그분에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당신의 피조물이며 그 피조물 전체를 당신의 뜻에 따라 통치함으로써 세상만사가 진행되는데 그분이 거꾸로 인간이나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건과 사물에 제한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분적이고 사소한 일에 관한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어떤 조건에 따라 기계적으로 역사한다고 하면 그분을 어떤 특성 안에 가두어버리는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그것만큼 그분에게 큰 죄는 없습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선 궁핍하고 연약한 자들이 그분의 사랑을 더 먼저 더 많이 받는 것 같을지라도 그것을 빌미로 그분에게 특정한 규칙을 부과 적용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이 불쌍한 자를 도와주고 교만한 자를 벌한다고 쉽게 해석해버리면 자칫 인간이 행함에 따라 상벌을 비례해서 주는 율법주의나 기복주의의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본문의 야곱의 고백이 바로 그분에 대한 절대적 진리입니다. 레아와 라헬 중에 누구에게 아들을 많이 낳게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결정하고 시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오직 당신의 뜻 하나만이 기준입니다.
그분은 한마디로 광대하신 분입니다. 인간의 말로서 결코 그 전부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십니다. 광대하다는 것은 완전히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께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그분만은 모든 면에서 어떤 제한도 없이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그분에겐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으며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 반대로 모든 가능성이 닫힐 수 있으며 결코 하지 않는 일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인생 만사는 오직 그분의 뜻과 의지에, 쉬운 말로 당신의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그렇다고 신경질적 충동적 감정적이지는 않습니다. 불완전하며 어리석고 죄에 찌든 인간이 상상해서 지어낸 그리스신화의 신들과 그분은 전혀 다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신들은 인간의 본성을 반영할 수밖에 없기에 인간처럼 웃픈 일생을 살아가며 심지어 죽기까지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단 한 치의 부족함 없이 영원토록 거룩하십니다.
그분의 역사는 당신의 거룩하신 뜻과 결코 상충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당신께서 모든 면에서 자유로워도 당신의 뜻이 실현된 열매 또한 선하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 같은 재앙들이 아무리 생겨도 그분의 이 땅에 대한 통치에 단 하나의 하자사항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심과 자유로움과 완전하심 셋을 동시에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선택하지 않으신 뜻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은 인간과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것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 전부를 인간을 위해 만드시고 인간에게 그 전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인간더러 서로 최선을 다해 돕고 진심으로 사랑하여서 이 땅을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하게 꾸미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합당한 사람을 택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은 후에 그의 일생을 주관해주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신자에게 천국입장권만 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당신의 동역자로 세우려고 택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선택의 기준을 미처 모르면 인간의 눈에는 최고의 선으로 보여도 그분의 뜻 안에서는 최고의 악이 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하자 베드로는 너무나 선한 인간적 충정으로 절대로 그런 일이 주께 미치지 않게 하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 때에 주님이 그를 어떻게 꾸짖었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탄에게 미혹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당신이 받으실 영광을 훼손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인간의 눈에는 최고의 악으로 보여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최고의 선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야곱과 라반의 희대의 사기사건 둘입니다. 아버지가 선택 결정할 수 있는 장자권을 아들이 아버지를 속여서 취득했습니다. 사위 될 사람이 7년을 하루 같이 기다렸던 첫날밤을 장인이 완전히 망쳐버렸고 그 뒤에도 자기 탐욕을 채우려고 치사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 배경에 역사하여 인간의 선택을 뒤집고 관련자들의 일생도 역전시켜버렸습니다. 오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당신의 스케쥴에 따라 한 치의 차질 없이 당신의 방식으로 이뤄나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시공간에 제한되는 인간의 눈은 외적 현상과 당시의 상황만 보니까 라헬이 최고의 신부 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인생 전부를 보시기에 야곱의 본처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전지전능하시기에 나중에 당신을 믿고 따를 자가 누구인지 미리 아셨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정신이상자나 귀신에 붙들리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반드시 자기 주관과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고 바로 그 중심이 자신의 일생을 좌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외적인 상태보다 그것들을 결정 짓게 만드는 인간 심령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중심을 보시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라헬의 중심은 어디에서 드러납니까? 그녀도 여호와께 감사했고 또 다른 아들을 달라는 간구도 응답 받았지만, 그녀의 중심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는 집안의 우상인 드라빔을 훔쳐 나온 사건입니다.(창31:17-42) 라헬은 아버지가 추궁하는데도 끝까지 숨겼으며 라헬이 훔친 줄 모르는 야곱은 도리어 라반에게 외삼촌의 신을 훔친 자가 발각되면 죽여도 좋다는 맹세까지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부모와 남편을 속인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고대의 우상 신은 다산과 풍요를 빌 목적으로 인간이 고안하여 나무나 돌로 깎아 만든 것입니다. ‘드라빔’이라는 용어도 “편안하게 살다”는 뜻의 ‘타라프’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나무로 사람 모양으로 작게 조각한 각 가정의 수호신이었는데 그것이 없어지자마자 라반이 알아챈 것을 보면 매일 드라빔에게 복을 빌고 있었던 것입니다.
라헬도 아버지와 집안의 우상 숭배를 열렬히 따랐던 것입니다. 그녀에겐 오직 아들을 더 많이 낳아서 언니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야곱의 사랑을 결혼하기 전처럼 독차지 하겠다는 뜻뿐이었습니다. 부부사이의 사랑을 회복하려는 선한 뜻은 사줄 수 있지만 그보다는 언니에게 크게 손상 받은 자기 자존심을 되살리고 세상 사람으로부터 호응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라헬의 중심은 세상에서 자기만 높이는 형통과 출세에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영혼에는 육신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충족시키려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요일2:16) 아담이 사탄에게 넘어간 원죄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상태입니다.
여호와가 내 수치를 돌아보셨다는 그녀의 고백에 어느 정도 진심어린 감사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는 목적으로만 남편의 신앙에 형식적으로 동참한 것입니다. 여호와도 자기 삶을 형통케 해주는 여러 신들의 하나라고 여긴 것입니다. 입술로만 여호와를 찾았고 세상으로 향하는 자신의 완악한 중심은 전혀 바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레아를 택하신 뜻
야곱과 에서가 그랬던 것처럼 레아는 라헬과 모든 면에서 정반대였습니다. 결혼 전에는 물론 억지 사기 결혼 후에도 한 동안은 정말로 사방이 다 막히는 절망에 처했습니다. 인간적 수고와 노력으로 자기 인생을 역전시킬 방도라곤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아들을 많이 낳게 해주는 것 말고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자기 전부를 여호와께 바쳤습니다. 그녀가 바라볼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야곱의 말대로 자기에게 임신을 시켜줄 자는 하나님뿐입니다. 아버지 라반이 결혼하고 싶다는 소원을 억지로 이뤄주었어도 이 일은 도와줄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야곱뿐인데 첫날 밤 이후로는 장인과 자기에게 속은 줄 안데다 예쁜 라헬이 아내가 되었으니 오래 동안 관계를 맺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의 첫날밤도 야곱이 시쳇말로 술에 떡이 되어 관계를 맺었기에 수태가 되었는지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야곱의 아들을 가지려면 야곱이 믿고 따르는 신인 여호와에게 매달리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 전부터 야곱의 신실함으로 인해 그분을 믿고 따르고 싶었던 차라 진심으로 열과 성을 다해 쉬지 않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여호와만 두서너 달을 붙들었더니 임신의 징후가 나타났습니다. 그 때 그녀가 느꼈을 감사와 기쁨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그 후로는 더더욱 순전하게 여호와만 믿었을 것입니다. 집안의 드라빔이 더 이상 자신의 신이 될 수 없었고 아비 라반에게 개종 선언을 했을 것입니다. 당시는 여호와도 그냥 여러 신들 중의 하나로 여긴데다 결혼하면 남편 뜻을 따라야 하므로 라반도 개종을 허락해주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 여호와 언약의 가문을 세우려고 이십 여년의 처가살이를 마치고 라반과 헤어졌습니다. 바로 그 거룩한 시기에 라헬은 도리어 드라빔을 야곱의 가문에 들여놓으려 한 것입니다. 그럼 그녀의 아들 요셉과 베냐민도 엄마의 신앙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에서가 헷 족속의 여인 둘을 아내로 취했던 세상으로 향한 중심을 여호와는 잘 아셨기에 장자의 선택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라헬에게 아들 둘을 주며 그녀의 수치는 씻어주었으나 그녀의 두 아들의 신앙 교육은 레아에게 맡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에서와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두 자매를 도덕적으로 따지면 성품과 행동에서 오십보백보였습니다. 유일한 차이는 레아는 언약의 가문의 안주인에 합당한 중심을 가졌고 라헬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뿐입니다.
역전된 인생을 살려면?
흔히들 잘 믿고 열심히 충성 봉사하면 하나님이 엎질러진 물 같이 도무지 회복 방도가 없는 처참하게 실패한 인생도 회복하고 역전시켜준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원칙적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 당사자의 중심만 보십니다. 단순히 자기 인생의 역전만을 목표로 하는 자는 외면하십니다. 그런 자일수록 그 역전이 더 드라마틱해야 하고 또 그래야 역전된 줄 확인할 수 있으니까 평소에 소원하던 목표를 더 크게 정해서 뜨겁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시고 이미 외면하였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헛수고이며 오히려 그분의 심판 내지 징계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전시켜주는 인생은 당신의 뜻에 순종할 것을 반드시 전제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역전시켜주더라도 순순히 따르며 오직 그분의 영광만을 드러내겠다는 중심으로 바뀌어져 있는 자입니다. 요컨대 이 땅에서의 현실적 풍요와 출세에 대한 욕심과 미련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당신의 뜻에 따라 나를 들어 사용하여 달라는 열망이, 최대한 양보해서 내 인생을 향한 당신의 거룩한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소원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크게 역전시킨 인생은 바울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극렬한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예수님의 열렬한 옹호자이자 최고로 위대한 사도로 바꾸어주었습니다. 바울에겐 누구도 갖지 못한 하나님 보시기에 최고 좋은 중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훼손을 하는 자는 절대로 그대로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은 최고였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을 경배하니까 천하의 이단이었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교묘한 사술로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적이 없었던 그로선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예수야말로 바알세불의 종으로 가장 먼저 무너뜨려야 할 하나님의 가장 큰 대적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과 십자가 구원 진리를 몰랐다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엔 주님의 대속 은혜를 제대로 알면 그만큼 복음을 열렬히 목숨 걸고 잘 전할 자도 없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은 미리 그를 택하시고 율법에 대비한 복음의 진리를 가장 잘 전할 자로 훈련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광대하심과 자유로움을, 그러면서도 완벽하심을 여러분의 실제 삶에서 얼마나 실감하고 또 체험하고 있습니까? 골고다 십자가 구원만큼 인간의 선택과 다른 하나님의 선택이 따로 없습니다. 예수님 당신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에 인간, 그것도 당시에 가장 의롭고 경건했던 자들의 선택과는 정반대로 귀신 들린 자, 창녀, 세리, 과부, 고아, 불치병자, 문둥병자 등을 만나고 치유하고 사랑하며 구원을 베풀었습니다.
헛되고 헛되다 못해 웃프기까지 한 인생은 오직 그분의 십자가 긍휼 안에서만 역전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은 희극과 비극이 계속 교차하다가 결국은 비극으로 끝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는 신자의 인생은 천국영생과 부활승리가 보장되었기에 이미 역전을 이뤘습니다. 이제 신자가 이 땅에서 행할 일은 자신의 매일의 삶을 절대로 웃프게 흘러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과 정반대로 기쁨 자유 평강 활력 감사가 넘치도록 역전시켜야 합니다.
그 길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혼자서 말씀 기도 찬양에 몰입하여 종교적 충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처럼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난 역전 인생이 되어서 자기를 대신해서 죽은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아야 합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정말로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습니다. 그가 예수를 알기 전에 비해 후에 역전된 삶이 너무나 보람차고 의미와 가치가 있었고 실제로 기뻐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권능과 은총에만 마음의 중심을 두고 그분이 가시는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하나님 관점에선 역전시킬 필요가 있는 소외되어 절망에 빠진 자들이 주변에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이 각 신자에게 이미 붙여주셨습니다. 그들을 주님 대신에 찾아가서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광대하신 권능과 자유로운 은혜와 완벽한 선하심이 레아나 야곱처럼 그 당시에는 구체적으로 몰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과 그들의 인생에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해주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런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역전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7/26/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