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가장 어둡다.
새벽기도 설교 (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9:11-15)
히브리서의 제목은 문자 그대로 “히브리인들에게”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다. 동족들이 신자를 나사렛 이단이라고 핍박하며 유대사회에서 추방시키려 드니까 유대교로 다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일부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우월성을 변증할 목적으로 쓰여진 서신이다.
본문은 모세 율법의 전통적 제사보다 예수님의 대속 제사가 완전함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영단번(永單番-all at once)의 제사로 드려졌다는 것이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 한 번으로 모든 이의 영원한 죄 사함이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우리로선 익히 아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지만 이 서신을 읽는 당시 유대인 신자들로선 너무나 피부에 와 닿았을 것 같다.
레위기 규정대로 아침저녁으로 양을 죽여 상번제를 드려왔다. 모세가 율법을 계시 받은 이후 예수님이 십자가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질 때까지를 대략 1500년으로만 잡아도 상번제로만 백만 마리 이상의 양이 제물로 바쳐졌다. 일 년에 한 차례 드리는 대속죄일에는 제물로 양 두 마리가 필요하니 그것만으로도 삼천 마리가 넘게 희생되었다. 이제 예수님 이후로는 그 모든 번거로운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제사인 두 가지 까닭
본문은 주님의 제사가 완전하다는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더 크고 완전한 장막에서 드려진 제사였기 때문이다.(11절) 장막이 다르다. 제사가 드려진 ‘장소’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름의 뜻마저 해골이라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화려하고 장엄한 예루살렘 성 중의 성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곳이다. 성 밖의 처형장으로 초라하고 적막하고 음산한 곳이다. 그런데도 더 크다고 했다.
그 이유를 손으로 짓지 아니하여 이 창조에 속하지 않는 곳 즉, 시공간으로 제한 받는 물질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늘의 장막에서 천상의 성부 하나님께 드려졌다. 그래서 또 온전한 장막이라고 했다. 지금껏 예표, 그림자, 상징으로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때가 차서 온전히 실현되었다는 뜻이다.
둘째는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이다.(14절) 제물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물로 바쳐진 동물로선 자기가 왜 죽는지, 그 죽음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른다. 단순히 상징이요 모형이었다.
반면에 주님은 성령으로 충만해서 자발적으로 기꺼이 당신의 의지로 죽음을 감수했다. 또 십자가 구속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계셨다. 거기다 흠이 전혀 없는 제물이었다. 죄에 찌든 인간이 제물로 바쳐질 수 없다. 자기 죄 값만 치르기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 사람마다 지은 죄가 다 다르기에 다른 인간을 완전히 대속해 줄 수 없다.
인간은 무엇보다 죄와 허물이 있기에 제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죄가 전혀 없는 하나님 당신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바쳐져야만 했다. 어떤 죄인이라도 그 은혜 앞에 진심으로 겸허히 무릎 꿇을 때에 온전한 죄 씻음의 역사가 가능하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시기에 본문의 설명대로 성부, 성자, 성령의 합동 사역인 십자가만이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이다. 창세전부터 삼위 하나님이 계획하신 영원한 구원의 경륜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실현되었다. 한 번 뿐이었으면서도 그 한번만으로 영원히 충족되는 제사였다. 더 이상의 다른 제사는 필요 없다.
완전한 제사의 두 가지 결과
이 완전한 제사의 결과도 본문(14절)은 크게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해주었다. 죄 사함이 완벽하게 이뤄졌다. 죽은 행실이라고 말한 뜻은 인간의 어떤 행실로도 깨끗케 할 수 없고 대신 그 앞에 죽음만 기다리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겉으로 보기에 아주 선하고 의로웠다. 하나님의 율법을 열심히 준행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 양심이 전혀 깨끗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식과 위선과 기복만으로 가득 찬 껍데기 종교 행위에 불과했다. 진정으로 순전한 마음이 전혀 따라오지 않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 겸손히 엎드리면 그 죽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았기에 그분의 구원의 은혜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에게 임한다. 그 추해졌던 양심이 하나님이 창조했던 당시의 모습으로 되돌려 주신다. 그렇다고 양심이 백 프로 거룩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이 가르쳤듯이 마음으로 짓는 죄가 더 많고 추악함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음이 깨끗케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죄에 대해서 아주 민감해졌고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된 것이다. 거기다 하나님을 거역하였던, 유대인의 경우는 이용했던, 본성이 뒤집어져서 진심으로 그분을 따르게 된다.
그럼으로써 당연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이 둘째 결과다. 이전에 죽은 인간의 행실을 따르는 형식적 위선적 유대교의 종교 행위와는 다르다.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뜻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순종함으로써 매일의 삶이 살아 있는 제사가 된다.
실제로 주님과 교제 동행하고 있다. 자신의 일상생활 안에서 예수 십자가 죄 사함의 선물로 받은 영생의 모습이 드러난다. 종교적인 형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지녔기에 세상에 당당히 맞서는 모습이다. 깨끗한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한다.
주님이 십자가에 드린 영단번의 제사는 모든 죄를 완전히 영원히 사해주신 제사다. 일 회로 완성이 되었기에 더 이상의 정죄란 없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 가운데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는데 그 마음에 할례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마음속에 심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렘 31:33,34] 새 언약이 예수님의 제사에서 실현되었다. 그래서 “새 언약의 중보자로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우리를 속량하여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15절) 해주셨다.
새 언약은 쉽게 말해 하나님을 따르는 자로 하여금 그분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한 것이다. 친 자녀의 신분과 특권을 얻은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이 무슨 일에서든 신자를 보호 인도하실 뿐 아니라 당신의 일에 동참시킨다. 아들은 때로 아버지를 거역해도 아버지가 아들을 정죄 심판 포기하는 법은 결코 없다. 끝까지 마음으로 사랑하시고 오직 아들의 유익만을 생각하신다.
고난 주간이 기뻐야 한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인데 대부분의 신자들이 너무 엄숙하고 경건하게만 보내려 든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마치 부모님 제사 드리는 것 같은 모습이다. 기독교 신앙으로 세워진 나라인 미국에선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금요일을 Good Friday라고 부른다. 주님의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의 속죄가 없고 영생도 없다. 여전히 절망 가운데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율법에 묶여 매일 상번제를 드려야만 한다. 죽은 행실을 깨끗케 할 수 없고 순전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헛되고 헛된 껍데기 종교만 붙들고 있어야 하며 그 안에 참 생명이 없다. 당연히 예수님이 죽으신 날은 우리에겐 너무나 좋은 날이다.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면서 그 때까지 진심으로 주님만 따르기로 결단 헌신하는 주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마침 오늘 토요일은 주님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속에서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 날이다. 반면에 무덤 밖에 주님의 제자들에겐 어둠뿐이었다.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 잡혀 숨어있었다. 골고다 언덕이 하늘의 크고 온전한 장막이었음을 전혀 몰랐다. 앞으로 있을 박해에 대한 염려에 빠져 암울해 있었다. 유대 사회에서 추방당하거나 스승처럼 잡혀가 곤욕을 치를 것이 확실하니까 어쩔 줄 모르고 떨고만 있었다. 주님이 “장래 좋은 일”(11절)을 위해 죽으셨음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다.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컴컴하다. 인간이 절망에 빠져 죽음과 방불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하늘의 크고 온전한 장막에선 상상도 못할 크고 온전한 선물이 준비되고 있다. 인간이 바랄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고백이 기도다. 사방이 막혀 완전히 캄캄할 때에, 고난이 겹쳐 기도할 힘조차 없을 때에, 더더욱 기도해야 한다. 영원한 부활이 준비되고 있고 얼마 안 지나 자신의 삶에 영광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인간이 이젠 끝인가 보다 여길 때에 주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도리어 새 언약을 실현시키신다. 겉으로는 연약한 모습이지만 이 새벽 기도회를 통해 부활의 권능이 저희 공동체와 성도들에게 실현되리라 확신한다.
3/31/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