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4:18) 예수님이 행하신 마음 치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후에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침으로써 본격적으로 공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고향 나사렛에 이르자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서”(16절) 이사야서의 상기 말씀을 펼쳐서 읽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21절)고 말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므로 고향 사람들 앞에서 당신께서 바로 그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펼쳤던 이사야서 61:1,2의 말씀과 누가복음이 기록한 말씀이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서의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가 빠진 대신에 누가복음에는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가 추가되었습니다. 후자가 추가된 원인은 예수님 당시에 회당에서 사용했던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이었고 그 역본에는 장님을 고친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이 인용한 구약성경 말씀은 거의 다 70인역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가 빠진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순전히 제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의사 누가로선 70인역의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을 묘사하는데 더 합당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런 기적을 일으킨 일이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말하자면 상한 마음을 고치는 심리적인 치유는 최근에서야 발달되었기에 당시로선 생소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사야서의 히브리 원전대로 따르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던 십자가 복음에 대한 깊은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메시야가 와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면 상한 마음이 고쳐지고 포로 되고 눌린 자들이 자유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상한 마음’을 원어로 따지면 산산조각이 나서 완전히 망가진 마음입니다. 도무지 회복 불가능한 마음입니다.
주님이 고치시려는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는 공교롭게도 그 문구를 뺀 누가복음의 이어지는 본문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라는 예수님의 선포를 들은 나사렛 사람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며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너희가 바로 의원이 필요한 죄인이라고 풀어서 설명하자 분노에 차서 산 낭떠러지로 끌고 가 밀쳐 내리려고 했습니다.
나사렛 고향 사람들의 그런 마음이 상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의사가 필요한 환자라고 하니까 화를 낸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부서지지는커녕 아주 견고한 진을 쌓고 자기 의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정서적으로 상처받은 것과도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비교하여 정말로 마음이 상한 두 사람을 예로 들었습니다.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과부와 수리아 사람 문둥이 나아만입니다. 당시에 과부도 문둥이도 많았지만 그들 둘에게만 각기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구원의 은혜를 베풀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과부는 죽은 아들을 슬퍼하고 있었고 나아만은 문둥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심리학적 치유가 필요한 우울증이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아니라 인생사에 누구나 겪는 죽음과 병환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둘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의 방식으로는 전혀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나아만의 경우는 온전한 믿음과 순전한 동기라는 차원에선 많이 부족했으나 하나님의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외면하면 정말로 아무 소망이 없다는 그들의 생각은 순전했습니다.
메시아가 와서 싸매줄 상한 마음이 어린 시절의 혹은 인간관계의 상처로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슬픔과 낙심에 빠진 자들에게 일시적 정서적 심리적 치유를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생의 심오한 진리를 가르치는 선각자도 육신의 병환을 고치는 의사도 마음의 상처를 따뜻하게 위로 격려하는 상담사도 아닙니다. 우리의 죄에 찌든 존재 전체를 완전한 절망에서 완전한 소망으로 바꿔주십니다. 그분은 완전히 죽어있는 자를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해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우울증이나 스트레스를 외면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산산조각 난 마음이 다시 회복되면 포로 되고 눌린 것에서 자유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사탄에 미혹되었던 영혼이 성령의 간섭으로 풀려나는 것을 뜻하지만 믿은 후에 생기는 마음의 상처에서도 자유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산산이 부서졌던 마음이 어떻게 회복되었는지 다시 회상해 보면 됩니다. 세상에선 아무 소망이 없었기에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만 온전히 의탁하여 치유함을 얻었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들 즉 세상에서부터 생깁니다. 구원 이후에도 옛 본성이 되살아나 자꾸 세상에 소망을 두었거나 최소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상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뭔가 나에게 돌아올 보상을, 나를 알아봐주는 대우를 기대했는데 그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처를 치유하려면 다시 역으로 세상과 사람들에 두고 있는 소망이나 미련을 완전히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현실 삶을 포기하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신자도 세상에서 열심히 성실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나를 기쁘고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은 싸그리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전혀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 받아놓고 다시 세상에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 어리석고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자칫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허사로 만들고 그분을 다시 욕보이게 하는 죄가 됩니다. 주님으로선 우리의 그런 잘못마저도 아무 문제 삼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러는 신자입니다. 세상에 계속 기대했다간 상처 받은 마음을 회복할 길도 없고 사소한 일에도 마음에 상처는 계속 생길 것이니까 말입니다.
7/31/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