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4;1-7)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죄인 구원 담화 (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4:1-7)

 

무너진 바울의 기대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유대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준행하며 의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처럼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믿었고 스스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빌3:6) 반면에 율법을 어기거나 창기와 세리 같이 악한 직업을 가졌거나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기에 선민인 유대인들은 그들과 상종도 해선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지방에서 유대교와 다르게 가르치는 색다른 종교운동이 일어나더니 유대 대중들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은 연약하므로 상황에 따라서 율법의 세부 규정까지 일일이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특별히 그 운동의 주모자 예수는 유대 사회가 엄격히 금지하는데도 안식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병자의 치료행위를 했고 세리 이방인 창녀들과도 거리낌 없이 식사하며 교제했습니다. 

 

그 예수가 온갖 질병과 불구를 치료해 주는 등 많은 이적을 베풀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 가운데 임했다고 하니까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장로들이 정한 규율이 먹혀들지 않아 유대 지도층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예수가 성전의 제물 장사꾼과 환전상을 강도라고 야단치며 쫓아내어 경제적 수입도 줄어들었습니다. 그동안 유대 사회를 지탱해온 사법적 종교적 체계가 뿌리째 흔들리니 예수는 그들 눈엣가시가 되었습니다. 결국 유대 공회는 거짓 증인들을 사주하여 로마 반역죄를 덮어씌우고 빌라도 총독을 협박하다시피 해서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이단의 주모자 예수가 죽으면 그 운동은 당연히 시들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제자들에 의해서 로마제국 전역으로 불같이 번져나갔습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개종하는 자들이 나오고 로마의 귀족들이 자기들이 부리던 노예와 함께 서로 형제자매라고 호칭하며 그들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황당한 것은 인간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해서 하늘 보좌로 올라갔는데 그가 독생자 하나님이며 그를 믿으면 천국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인 토요일 대신에 그가 부활했다는 주일에 여호와 대신에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서 동물 제물은 전혀 바치지 않고 성경을 강독하며 예수에 대해 간증을 하며 예배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동안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헬라 등의 식민지가 되었었고 지금도 로마의 지배 아래 있어도 여호와의 택한 민족이라는 정체성과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백성이라는 자부심은 절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겐 지금까지도 정통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아브라함, 모세, 다윗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에만 특별한 복을 주셨던 분으로 영원히 남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처단하여 이스라엘의 무너진 종교 질서를 조속히 회복시키는데 자신의 전부를 걸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색출하여 투옥했고 그중에 본보기로 예수의 제자 스데반을 하나님을 모욕한 죄로 정죄하여서 돌로 쳐 죽이는 사형을 주도했습니다. 자신의 그런 노력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예수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이 신흥 이단 교파를 완전히 파괴해 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수고와 기대와는 정반대로 아무리 핍박해도 예수 운동은 염병처럼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습니다. 진리는 그 자체로 능력을 발휘하는 위에 성령이 함께 역사하고 있기에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이 완전히 역전된 바울

 

가장 극렬하게 예수를 반대했던 그가 일순간에 가장 열렬하게 예수님만 찬양 경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흔히들 사람이 갑자기 너무 변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고 말하듯이 바울은 실제로 죽었다가 새로 태어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귀해서 그때까지 자신이 자랑하던 전통 교양 문화 종교 등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했습니다. (빌3:8) 비유이긴 해도 배설물은 너무 더러워서 당장 멀리 버리고 그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하는 법입니다. 한마디로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자랑했던 예수 믿기 전의 자기 인생이 그런 배설물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처참하게 실패했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극적인 인생 역전은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려고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아 시돈의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엄청나게 밝은 빛이 무대 조명처럼 바울에게 내리비춰서 자기도 모르게 땅에 엎드렸습니다.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사울은 헬라 이름인 바울로 개명하기 전의 유대식 이름이었는데 그가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는 단순히 타인을 높이는 존칭이지만 하늘에서 찬란한 영광중에 웅장한 소리가 들렸으니까 천사 같은 영적 존재라고는 짐작했을 것입니다. (행9:1-4) 

 

곧바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5, 6절)라는 대답이 들렸습니다. 바울은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사십 일간 지상에 머물다 승천했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제자들이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대면했으니 그들의 모든 가르침이 엄연한 사실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럼 또 예수가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공로를 믿기만 하며 구원 얻을 수 있고 또 그런 신자에게 성령이 임재 내주하여 부활 영생을 보장해주신다는 가르침도 당연히 진리가 됩니다. 예수가 생전에 세리 창녀 이방인들과 교제하며 그들에게도 구원을 약속하신 것도 하나님 그분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그 현장에서 평생 붙들고 있던 자신의 종교관을 곧바로 바꾸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큰 두려움에 휩싸여서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기에 그럴 겨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심령에 성령이 강력히 역사하여서 예수가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최소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진리 하나만은 온전히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바울이 스데반을 처형시킬 때 그가 “하늘이 열리고 인자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행7:55, 56)라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이 죽기 직전에 얼이 빠져서 헛것을 보았거나 거짓말로 종교적 허풍을 친다고 여겼는데 똑같은 일이 자기에게도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의인 스데반을 죽여 버렸으니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려다 오히려 율법으로 따져서 절대 용서받지 못하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성경 기록상 예수님을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고 지금껏 그 제자들만 핍박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스데반은 물론 당신의 제자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당신을 핍박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신자들과 항상 함께하셨다는 것이며 사실상 바울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핍박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로선 하나님을 최고로 섬긴다고 최선을 다해 수고 희생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직접 핍박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그동안 쌓았던 모든 공로는 완전히 수포가 되었습니다. 

 

구약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는다고 믿었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을 핍박했으니 바울이 아무리 황당한 중이라도 자기는 구원은커녕 살아날 방도도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고 하면서 거기서 행할 일을 가르쳐 주겠다고 합니다. 혹시 다메섹의 신자들을 체포하러 가는 중이니까 그곳의 신자들로 자기를 돌로 처형시키게 할지도 모릅니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앞이 전혀 안 보이는 봉사가 되었습니다. 사형수를 처형하기 직전에 공포심을 덜어주려고 검은 안대로 눈을 가리는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습니다. 사방을 전혀 볼 수 없으니 무덤에 갇힌 죽음과 방불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상황을 유추해보면 바울이 식음까지 전폐했으니 반쯤 시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다고 했으니 신자들의 노예가 되어서 평생을 고생해도 좋으니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실 날 같은 희망을 품고 계속 기도했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보낸 생면부지의 예수 믿는 신자 아나니아가 안수해주자 광명을 되찾고 현실 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행9:17,18) 그도 예수님처럼 사실상 완전히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입니다. 예수에 의해 완전한 죽음과 방불한 처절한 영적 절망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예수에 의해서 육신적 생명을 얻었고 무엇보다 이전과 전혀 다른 영적인 안목이 열렸습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아나니아가 전해주기를 예수님이 자기에게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당신의 이름을 전하라는 소명을 주었고 앞으로 그 일을 행하면서 거꾸로 바울이 박해당할 것이라고 예언해 주었다고 합니다. (행 9:15,16) 바울로선 목숨을 건졌으니 어떤 큰 박해가 닥쳐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입니다. 그 전에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했을 것이므로 기꺼이 고난을 감당하리라 결심했을 것입니다. 

 

원시 복음을 깨달은 바울

 

본문은 바울이 예수의 극렬한 핍박자에서 열렬한 옹호자로 바뀜으로써 극적으로 변화된 신앙관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중에 핵심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는 말씀입니다. (4절)  

 

“때가 차매”라는 것은 하나님이 이전에 약속하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을 여자에게서 났다고 합니다. 바로 창세기에서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아담에게 주신 약속을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 아래 난 것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율법 아래 나게 한 것은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5절)고 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당연히 유대인들이므로 마치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하지 않으며 또 그래서 유대인들만 아들로 삼고 이방인들은 종으로 부려 먹는다고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유대 사회가 엄격히 금지했는데도 이방인과 식사 교제를 했고 또 로마 백부장과 그 하인 같은 이방인들도 구원해준 예수님이 그럴 리는 절대 없습니다. 

 

그 앞 3절에서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다”라고 말합니다. 문맥의 흐름을 보면 초등학문이 율법을 뜻하므로 바울처럼 유대교를 따르는 유대인은 종의 신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가 속량해줌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유업을 받을 수 있다고 결론 지은 것입니다. (6절)   

 

바울이 율법을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격하시킨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와 같이”(3절)라고 시작하니까 앞의 1-2절에 기초하여서 해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일부다처제가 성행하여서 한 아버지 아래 배다른 아들이 많던 당시의 관습에 비유해 율법과 유대인의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 많은 아들들이 후견인이나 청지기의 감독 아래 훈련받다가 성인이 되면 그중에서 아비의 기준에 합격한 일부만 아비의 유업을 받을 수 있는 아들로 호적에 올리고 나머지는 종의 신분이 됩니다. 

 

자기 몸에서 난 아들조차 심사 판단했던 세상 관습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미 선택받은 유대인들끼리 율법 기준에 합격하는 자만 그분의 아들이라고 간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기지 않는 일에만 모든 신경을 쏟아야 했고 자기들을 세상 앞에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줄 규범이 오히려 스스로를 종으로 묶는 멍에가 된 것입니다. 또 그렇게 제사장 나라로 서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고 초대했어야 함에도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아예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판단하고 구원에서 제외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은 자기들 율법 아래 묶어둔 셈입니다. 

 

유대인들은 신명기 토라의 말씀대로 엄마 젖을 뗄 때부터 모세율법으로만 교육받고 자랍니다. 그 가르침에는 전혀 하자가 없이 선하므로 모든 생각과 행동이 율법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인들이 저희 세대까지도 유교적 가르침이 인생관과 가치관의 핵심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여러 번 하나님을 배역하여 큰 벌을 받았지만, 선지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계속 경고했고 백성들도 자신들의 그 잘못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 후로는 에스라의 개혁을 필두로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무엇보다 헬라의 지배에서 독립을 쟁취한 메카비 혁명에 영향을 받아 율법을 더욱 철저하게 지키려는 바리새파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너무나 선한 운동이고 그리심 산에서 율법대로 살면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약속까지 받았으므로(신 28장) 율법 없는 이스라엘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인 바울로선 율법 외의 다른 방식의 구원이나 성전 제사 외에 하나님을 섬기는 법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상상 못 했던 것입니다. 

 

광야의 불 뱀 사건

 

감히 짐작해보자면 바울이 다메섹 이후 사흘간 깊은 영적 갈등에 빠졌을 때부터 이 갈라디아서를 저작할 때까지 구약성경을 다시 깊이 연구하면서 민수기의 불 뱀 사건도 회상했을 것입니다. (민21:4-9)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야의 반역으로 마땅히 심판을 받아 죽었어야 했으나 하나님은 일 세대들을 살려주는 대신에 사십 년간 광야를 방황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고도 이스라엘은 계속 척박한 광야 생활에 대해서 불평을 하자 하나님은 불 뱀을 보내어 물려 죽게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백성을 대표해 회개의 중보기도를 하자 하나님은 불 뱀과 똑같은 모양으로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 불 뱀에 물렸어도 다른 어떤 치료행위를 하지 않고 장대 위에 달린 놋 뱀을 쳐다만 봐도 낫게 해주었습니다. 심판받아 죽어야 할 자들이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방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뱀의 맹독에서 생명을 건져주었습니다. 바울은 그 장대가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비로소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하나님이 그 천오백 년 전에 이미 자기들 선조들의 삶 속에 실현했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도구로 보낸 불 뱀은 사탄을 상징하는데 예수님을 상징하는 놋 뱀을 바라봄으로써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약속한 오실 여자의 후손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지칭하지만, 문맥상 하나님의 백성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이 다메섹에서 사울에게 당신을 핍박한다고 신자와 당신을 일체화시켰지 않습니까? 불 뱀 사건에서도 사탄은 하나님 백성들의 발꿈치만 상하게 했습니다. 장대에 달린 놋 뱀 즉, 예수님이 이미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사건이 원시 복음을 서서히 실현해나가는 과정이라는 또 다른 의미도 깨닫고 새삼 더 놀랐을 것입니다. 또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여 원시 복음을 구체화시켜 나가다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 모두 율법으로 따지면 저주받아야 할 자들인데 도리어 그들과 언약을 맺고 당신의 큰 종으로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어떤 큰 죄를 지었어도 당신의 사랑의 품을 끝까지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구원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준행과 구원과는 정작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인데 바울은 왜 지금껏 이 간단한 진리도 몰랐을까 탄식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율법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제사장 나라로서 하나님을 아는 백성답게 사는 모습을 이방 족속들 앞에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밝혀 놓았는데도 바울은 구원의 기준으로 적용하는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종교 생활은 물론 일상생활마저도 율법의 테두리 안에 묶었습니다. 그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의 기준은 명문화된 율법과 자기들이 정한 규정과 유대 사회의 전통과 관습뿐이었습니다. 오직 그것만 잘 지키면 인생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믿었으며 자신은 그래서 남들 앞에 항상 떳떳했고 선악 간의 판정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타락하자 선악을 아는 일에 당신들같이 되었다고 탄식한 대로 바울은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자 재판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도 율법의 이름으로 얼마든 죽여 버릴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나 선하고 하나님도 기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자신이 아담과 똑같은 정녕 죽어야만 할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그래서 천하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소유요 제사장 나라로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택했습니다. 아담에게 주신 원시 복음에 따르면 그들은 사탄의 후손과 맞서야 할 여자의 후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후손은 당연히 부모의 유업을 이어받는 아들의 신분을 가집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택해주었고 나아가 그들의 남편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은커녕 그분의 종도 아니라 스스로 율법의 종이, 아니 자기들이 고안한 종교체계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바울은 구약 역사 내내 하나님이 원시 복음을 실제로 구체화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구약성경의 전문가가 아니었고 오직 모세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전문가였을 뿐입니다. 구약성경의 중심이 모세의 율법이 아닙니다. 예수님 한 분입니다. 정확히 말해 장차 오실 예수님이 그 주제로 왜 주님이 꼭 오셔야만 하는지 그 배경과 이유를 설명한 책입니다. 율법은 원시 복음이 예수 십자가에서 완성될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교육시키는 필연적 교과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율법으로는 누구도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서 십자가 복음으로 이끄는 몽학선생의, 본문이 말하는 후견인과 청지기의 역할만 한 것입니다. 

 

속량(redemption)은 노예의 몸값을 지불하여 자유로운 신분으로 풀어준다는 뜻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형제로서 서로 사랑해야 할 유대인들끼리는 노예로 부릴 수 없고 빚을 지게 되면 종살이해서 그 빚을 갚도록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같은 형제들을 종교의 노예로 묶었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율법 아래 종노릇 하는 사람들을 풀어주려고 당신의 목숨으로 그 값을 다 지불했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세우려 했던 아들의 위치로 회복시켜주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선언한 것입니다. 무거운 짐이 현실적 고난이 아니라 유대교의 종교적 의무가 사람을 묶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당신의 멍에인 십자가를 매고 당신께 와서 배우라고 했습니다. 현실적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뜻이라면 내게 기도하라고 했어야 하지만 당신께 와서 배우라고 했습니다. 모든 세대의 타락한 죄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반드시 알아야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가?

 

불행하게도 오늘날 예수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여전히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람만이 천국 갈 수 있어야 옳지 어떻게 십자가에 죽은 유대인 사형수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느냐고 반발합니다. 나아가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다른 길이 전혀 없다고 고집하니 기독교야말로 이단 중의 이단이라고 비난합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의 생각과 똑같습니다. 또 그래서 예수님이 속량해줄 율법 아래 있는 자들 중에 이방인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착한 자가 천국 가야 한다는 명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그렇게 생각하듯이 너무나 옳아서 누구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죄의 종류가 많으며 같은 종류의 죄라도 당시 상황과 그 폐해가 천차만별입니다. 누구도 평생을 두고 이런저런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거기다 죄를 짓게 되는 동기 여건 이유 등도 각기 다릅니다.

 

겉으로는 선행이지만 그 깊은 속내로 따지면 엄청난 악행도 많습니다. 그중에는 순전히 자기가 의롭고 남보다 자기는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목적만으로 남을 도와주는 일도 많습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남들을 예사로 죽입니다. 실제로 종교적 박해로 피를 묻힌 종교는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으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죄를 두고 상호 비교해서 점수를 객관적으로 매긴다는 것은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에게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선행 구원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의 생각은 오직 하나입니다. 자기는 남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종교적 의로는 세계 최고이므로 누구든 자기가 판단할 수 있다고 덤볐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솔직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깊은 속마음까지 다 꺼내놓았을 때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자부하면서 자기가 구원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잘못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또 완전한 사랑으로만 채워진 예수님의 이 땅의 삶 앞에서 고개를 떳떳이 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아니 참 인간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감히 자기 선행으로 구원해 달라고 절대 요구할 수 없으며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번 가정해 보십시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다면 알코올 중독 조선업자요, 아브라함은 마누라를 남에게 팔아서 자기 혼자 살려 했던 뚜쟁이요, 야곱은 유산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배고픈 형의 약점을 이용한 영악한 사기꾼이자 불효자요, 모세는 젊었을 때는 운 좋게 적국의 왕자로 지냈고 감정에 격해 살인하고는 후진국의 우상숭배 제사장 사위가 되어 도피 생활로 지새다가 늘그막에 동족의 지도자가 되려고 나타난 마술쟁이가 됩니다. 다윗도 목동 시절에 익힌 돌팔매 기술로 적국의 장수를 운 좋게 이겨서 벼락출세해 왕이 되었고 왕이라는 권세를 이용해 전쟁 중인 부하의 아내와 간통한 바람쟁이요 거기서 아들이 생기자 숨기려고 그 남편을 부하를 시켜 죽인 사악한 폭군입니다. 

 

무엇보다 아담의 경우가 가장 황당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윤리적으로 잘못한 것 하나 없고 과일을 따서 아내와 사이좋게 나눠 먹은 아주 착한 남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 땅과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마음먹었다가 최고 최악의 죄인이 되었고 모든 인간의 죄에 근본적 책임을 져야 할 원흉이 되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선 당신의 자녀들이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는지 하나만 보시고 그에 따라서 개인의 인생은 물론 인류 역사를 이끄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당신에게서 고의로 벗어나는 것만큼 그분에게 죄가 되는 것은 없다고 선언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창조 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이 당신과 철천지원수임에도 먼저 바울을 찾아와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럼 바울 자신의 인생도 태초부터 그분의 거룩하고 완벽한 계획에 따라서 지금껏 이끌어져 왔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에 정확히 말해 종교에 가장 철저했던 그였기에 그 철저함이 오히려 하나님에게 가장 큰 죄가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구원은 오직 여자의 후손이 은혜를 베풀어야만 한다는 진리를 가장 정확히 깊이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번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훈련 준비시키다가 그에게도 때가 차매 다메섹에서 원시 복음을 정확히 풀어서 정확하게 가르칠 자로 당신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 바울이 지금 모든 신자더러 자기처럼 하나님의 모든 유업을 받을 주인(1절) 즉 그분의 아들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여전히 율법에 종노릇하고 있는 신자들이 꽤 많습니다. 교회의 기독교적 활동에 열정적으로 따르지 않는 자를 판단 정죄하는 의로운 교인들입니다. 그들에겐 하나님의 유업을 하늘에 이미 확보한 그분의 아들이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바울처럼 언제 어디서나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솔직히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아니면 기독교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9/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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