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2:12-14)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

구원 완성 담화 (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12-14)

 

본문이 구원취소를 부인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 시작과 동시에 천국이 신적 권능을 갖고서 이 땅에 강력하게 도래했으니 제자들더러 침노하여 그 천국을 차지하라고 명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주로 모시는 신자들에게 천국 열쇠를 맡김으로써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거룩한 영적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신자들은 함께 힘을 합쳐서 아직 십자가 구원의 도를 모르는 자들을 그 나라 시민으로 초대하여서 주님이 분부하신 바를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본문은 신자들이 주님이 세운 천국을 어떻게 침노해야 하는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중에 가장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그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 주에 살펴보겠는데 논란이 많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12절)는 말씀의 정확한 뜻부터 따져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뜻 구원이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이뤄지거나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외에 추가적인 선행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일부 교파가 이 말씀만 따로 떼어내어 신자가 구원을 이뤄야 하는 일에 실패하면 구원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한 번 구원을 얻었어도 신자답게 살지 않고 죄를 지으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주장에 대해서 변증할 근거는 너무 많지만 중요한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본문 자체부터 구원취소를 단번에 부정합니다. 구원을 이뤄야 하는 그 일을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일입니다.(13절) 하나님은 내주에 알아볼 어떤 기쁘신 뜻을 신자들이 실현해주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그럼 신자가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일이 죄나 잘못을 범하는 일이 될 수 없고 정반대로 아주 의로운 일입니다. 신자가 주의해야 할 바는 단지 그 선한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게”(14절) 행하는 것입니다.

 

그럼 선하고 좋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구원을 취소하겠습니까? 예컨대 예수님은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명했습니다.(마5:44) 이는 하나님이 신자가 행하기를 소원하는 기쁜 일인데 그 주장대로 따르면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 중에 온전히 실천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당장 저부터 구원이 취소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떠나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자더러 돌이켜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라고 더 강력하게 역사해줄 것입니다. 

 

간혹 ‘너희’라는 복수로 지칭했으니 교회 안에 역사하는 성령이지 개인에게 내주하는 성령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없어질 수 없으나 신자 개인의 구원은 별개라고 변호합니다. 이 또한 문자적 의미만 따지는 말꼬리 잡기에 불과합니다. 이 서신의 수신자는 빌립보라는 교회로 교인들 모두가 회람해야 하니까 당연히 복수 형태로 표현한 것입니다. 

 

한 개인에게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하나님부터 사랑할 수 없기에 그분의 기뻐하시는 일은 더더욱 할 수 없으며 할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선교지에 처음 도착하면 선교사 개인이 교회이듯이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전(고전6:19)으로 교회인 셈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에게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기쁜 일을 하고 싶다는 소망과 열정이 생기므로 함께 힘을 모으려고 자발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바울이 너희라고 복수라고 표현했지만 기본적으로 신자 개인에 대한 권면이며 또 너무나 당연하게 교회 공동체도 한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기쁜 일을 해야 합니다. 

 

저자가 구원취소를 부인한다. 

 

그리고 바울이 빌립보서를 저작할 때 구원취소는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 선언했습니다. 한 저자가 한 가지 주제를 두고 이 책에서 이렇게 저 책에선 저렇게, 정확하게는 정반대로 설명할 리는 절대 없습니다. 그럼 그가 저작한 신약 서신서 전체의 신뢰성이 완전히 무너져버립니다. 

 

바울은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기 바로 앞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로도 수시로 죄에 져서 넘어진다는 고백입니다. 가장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이 계속 죄에 넘어졌어도 그의 구원이 취소되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는 알다시피 율법에 능한 바리새인으로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을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단으로 간주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으로 신자들을 극렬하게 핍박했고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처형을 주도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신자들까지 체포하려고 기세등등하게 가다가 하늘의 찬란한 빛 가운데 임재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흘간 죽음과 방불한 봉사가 되는 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옛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고 예수님 십자가 구원 은혜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 

 

그로선 예수님을 믿으려고 의도는커녕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몇 가지 이적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로 정죄하고서 그 일당들을 말살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흘 간 장님으로 만들었다가 또 당신께서 보낸 평신도의 한 번의 기도로 광명을 되찾을 정도의 권능을 가졌다면 예수는 당신이 선언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틀림없습니다. 그 전에 하늘의 빛 가운데 강림한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엄청난 영광과 권능 앞에 꼼짝달싹 못하고 이미 하나님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럼 당신의 철천지원수인 자기를 그 자리에서 죽였어야 마땅한데도 잠시 흑암 속에 가두었다가 다시 빛을 보게 해주고 나아가 이방인의 사도라는 중책까지 맡겨주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려는 자신의 진실한 마음은 인정해준 셈인데 주님이 자기 전부를 속속들이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를 택하여 자기에게 그 직분을 맡기려고 처음부터 끝까지 준비 훈련 시켰다는 사실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다메섹에서의 이 구원 체험을 통해 자신의 지난 모든 인생을 되돌아보고선 이렇게 선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으로 구원을 베풀 자를 선택해 그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기로 택하여 성령으로 간섭하기까지 모든 삶을 인도하셨는데 그 후에 조금 잘못했다고 구원을 취소할 리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병 주고 약 주는 변덕스러운 존재이므로 인간이 믿고 따를 분이 절대 되지 못합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을 얻는데 그 후로 신자에게 성령은 내주해서 끝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거기다 성령은 신자가 간혹 죄를 지으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기도까지 해주십니다.(롬8:26) 

 

예수님이 구원취소를 부인한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구원취소를 절대적으로 부인합니다. 주님은 당신과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있는 사형수가 당신을 겸손히 구주로 영접하자 바로 내일 낙원에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눅23:43) 그 사람의 내면을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한 성자로 바꾸어 구원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그래서 사도가 된 후에도 수시로 드러나는 자신의 영적 가난에 대해 한탄했던 것입니다. 

 

구약 율법의 짐승 제물로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는 제사는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행해야만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오시지 않고 계속 그런 시대가 이어졌다면 당연히 죄를 짓고 온전한 회개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구약 제사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예표일 뿐이라고 자세히 설명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1,12) 단 한 번의 십자가 죽음으로 영원한 속죄가 완성되었습니다. 계속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고 그분의 대속 구원을 온전히 믿는 신자들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언제 어디서나 있는 모습 그대로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히10:19) 

 

요한 사도는 이런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에 미쁘신 하나님은 신자가 자기 죄를 진심으로 자백하며 회개하면 용서해주신다고 했습니다.(요일1:9) 만약 신자가 죄를 지으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주장이 성립되려면 두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첫째 몇 가지 죄를 짓고서 회개하기 전에 죽었거나 둘째 평생 착한 행위를 심사하여 구원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전자는 구약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후자는 행위 구원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 둘 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혀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의 유대주의자들은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외에도 할례 같은 율법의 정결례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님의 죽음만으로는 구원에 부족하다는 뜻이니까 십자가를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그래서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라고 선포했습니다. 바울 개인의 극단적인 의견이 결코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서두의 일곱 교회에 주신 편지에서 예수님은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를 사탄의 회당”이라고 두 번이나 정죄했습니다.(계2:9,3:9) 요한이 이 서신을 저작했을 때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가 완전히 이뤄졌고 유대인들이 교회 주류를 차지했던 초기의 사정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유대 사회로부터 가해지는 사회 경제 종교적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믿음을 버리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굳이 교회 안에서 자칭 유대인이라고 자랑할 필요도 의미도 없어졌습니다. 

 

자칭 유대인은 추가적인 선행을 강조하고 죄를 지으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 같은 자들을 뜻합니다. 베드로가 십자가 죽음을 극구 만류하자 주님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야단쳤습니다.(마16:23) 마찬가지로 당신의 영단번의 구원을 퇴색 왜곡 부인하려는 거짓 교사들을 사탄의 부하라고 꾸짖은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이신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구원취소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를 오히려 야단쳤습니다. 신자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충정은 이해하지만 구원취소를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매다는 엄청난 죄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당신의 목숨까지 죄에 찌든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내어주었습니다. 그것도 인류 역사상 가장 불공평하고 억울하며 최고로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해서 말입니다. 나아가 계속 살펴봤듯이 아담의 타락 때의 원시 복음에서부터 당신의 백성들과 여러 번 언약을 갱신해가며 십자가 구원을 예언했습니다. 태초부터 삼위 하나님이 마련한 계획대로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다가 때가 차매 이루신 구원인데 신자의 한두 번의 죄로 취소시킬 수는 결코 없습니다. 

 

성화를 이루라. 

 

신자가 이미 얻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느냐는 질문은 그 출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에게 성령이 떠나는 법이 없으니까 신자가 된 후의 구원의 취소는 아예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에 성령으로 거듭났는지 여부만 따져야 합니다. 말하자면 본문처럼 언뜻 구원이 취소되거나 선행 구원을 표방하는 것 같은 성경 말씀들은 구원의 세 단계 중에 성화의 권면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신학적으로 세 단계로 나눕니다. 첫째는 칭의(稱義, Justification)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믿는 단계인데 신자는 죄의 형벌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이미 믿은 신자에겐 과거에 일어난 일회성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살펴본 대로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던 죄인을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만 해주지 인간적 본성은 그대로 두고 구원받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된 후로는 죄악과 싸워 이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는 죄의 권세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평생토록 신자가 의지적으로 노력 실천해야 하는 진행형 구원으로 성화(聖化, Sanctification)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신자답게 살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예수님처럼 신령하게 변화하게 되는데 영화(榮化, Glorification)라고 합니다. 하나님 보좌 앞이라 죄악이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곳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신자의  이 땅에서의 삶이 천국을 침노하는 과정이라면 더 이상 침노할 필요 없이 완전하게 충족되는 구원입니다. 

 

일회성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는 신자 쪽에서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오직 성령의 간섭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화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도록 신자의 책임으로 맡겨져 있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그 내면에 남아 있는 인간 중심적 본성과 세상의 온갖 시험 죄악으로 인해서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거듭나게 한 후에 신자를 떠나지 않고 내주해주시는 이유는 칭의와 동시에 성화의 구원도 성령님이 이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성령의 인도를 구하면서 말씀을 묵상하고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혹시 잘못하더라도 예수님의 긍휼로 용서해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수시로 죄에 져서 넘어지는 자신의 곤고한 영혼에 대해 한탄했던 로마서 7장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기를 건져주실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롬7:24,25) 빌립보서 서두에선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고 전제했습니다. 칭의의 구원 이후에도 성령님이 신자와 함께 성화를 이뤄나가다가 마지막 육신의 부활까지 이뤄서 구원이 영광스럽게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구원을 이루라는 헬라어 동사 ‘카텔카조마이’는 꾸준히 일해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농부가 씨를 뿌려서 추수할 때까지 세심하게 돌보며 가꾼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신자더러 자기 심령에 심긴 생명의 씨앗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닮게 자라나 그분의 뜻에 순종하도록 평생을 두고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구원을 취소한다는 것은 과거의 일회성 구원인 칭의가 무효가 된다는 뜻인데 본문의 이루라는 단어는 칭의가 아닌 성화에 해당됩니다. 굳이 십자가 구원 진리, 바울의 저작 의도, 문맥상의 의미 등을 따질 필요도 없이 이룬다는 단어 하나로 구원취소는 곧바로 부인됩니다. 

 

날로 늘어나는 신자의 죄악 

 

저도 바울처럼 극렬한 안티 크리스천으로 예수 믿을 생각은 아예 없었습니다. 오직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이 자리에까지 이르렀기에 한 번 얻은 구원은 결코 취소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지 40년이 되어가고 목사가 된 지도 30년이 지났음에도 수시로 죄에 져서 바울처럼 “오호라 곤고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지랴?”는 통한의 고백이 절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확신코 말씀드릴 수 있는 절대적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라면 날이 갈수록 죄를 깨닫는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더 크고도 세밀하게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넘어가는 아주 사소한 죄들도 가슴 깊숙이 찔러 옵니다. 심지어 예전 같으면 아주 의로워서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던 일들에도 교묘하게 숨겨진 정욕, 이기심, 고집, 편견, 거짓, 불법 등을 발견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라고 그런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집니다. 

 

저는 30대 40대 50대 등으로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죄의 종류와 숫자가 늘어났고 한 가지 죄에서도 다양한 측면의 잘못들을 깨달았습니다. 제 내면의 추악함과 치사함과 비겁함과 특별히 위선적인 행태들이 제 영혼을 처절하게 파괴하여 완전히 누더기가 되어 있는 모습을 계속해서 발견했습니다. 세상 만물 가운데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성경의 진리 앞에 어떤 다른 반발도 변명도 통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자신에게 실망할수록 예수님의 십자가의 조건 없는 긍휼 외에는 어떤 소망도 없음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 전부를 드리며 처분만 기다리게 됩니다. 그럼 미쁘신 하나님이 내 죄를 사해주시고 하늘의 위로와 권능으로 일으켜 세워주셨고 여전히 미약한 모습의 저를 당신의 일에 다시 쓰임 받게 해주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8,19)고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고 전제했으니 교회 생활 열심히 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는 날이 갈수록 육신적으로 연약해지므로 자신의 무지와 무능은 당연히 더 많이 깨닫게 되지만 어쩔 수 없는 창조 섭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죄로 찌든 추악한 자신의 모습을 더 세밀하게 많이 발견하면 신앙생활을 그만큼이나 오래 했는데도 그러니까 정말로 부끄러워지면서 십자가에 엎드리는 것 외에 다른 방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많이 깨달을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더 넓고 길고 높고 깊게 신자에게 부어지는 법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현실 형통에서가 아니라 십자가 구원을 온전히 깨달아야 더 많이 누릴 수 있으니 그렇게 하라고 기도해준 것입니다. 

 

바울의 또 다른 권면들을 보십시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문맥에서의 의미는 각각 조금씩 달라도 공통적으로 신자가 이뤄나가는 성화의 구원은 완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침노 시킨 천국은 완성되었으나 신자가 침노해야 할 천국은 주님 나라 가는 날까지 미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구원취소를 부인해야 한다. 

 

따라서 정말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죄와 날마다 처절하게 싸워본 신자라면 절대로 구원이 몇 번의 죄로 인해 취소된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성화의 체험에 근거해서 예수 십자가 안에서 더 이상의 정죄가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해야 신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생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어도 모든 인간에겐 절망적 죽음밖에 남지 않습니다. 이 주제는 절대로 기독교 교파 간의 교리 싸움이 될 수 없는데 불신자들도 그 진리를 입증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이 들어 아주 쇠약해질수록 “내가 죽을 죄인이지, 모두 내 잘못이야. 죽어서라도 내 죗값을 갚을 수 있을지 몰라.”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그들도 사회적 관습과 법률은 물론 윤리적 양심에 따라 죄를 안 짓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럼 죄를 덜 짓게 되어야 하는데도 그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실상이 정반대였다는 뜻입니다. 모든 이가 인간의 영적 부패를 스스로는 평생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예수님의 조건 없는 십자가 사랑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막상 전도 받는 당시에는 다른 이가 공짜로 주는 구원은 받을 필요 없다고 버팁니다. 자기에게 죄가 많다는 사실은 인정해도 자기를 높이려는 자존심은 죽으면 죽었지 버리기 싫다는 것입니다. 인간더러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고 부추기는 사탄의 거짓에 계속해서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칭 영적으로 건강하다고 자랑하며 예수 십자가는 필요 없다고 우기는 자는 사탄의 회당에 속한 것입니다. 제가 바로 그랬으며 그러니까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으로 택하여 성령으로 간섭하게 해서 구원의 은혜를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신자가 된 후에도 영적으로 가난한 상태에 있긴 마찬가지로 날이 갈수록 죄가 많음을 인정하지만 세상 사람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령이 깨우쳐 주신 영적 지혜로 문제의 진짜 원인과 진짜 해결책을 즉, 죄의 본질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라는 진리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의 긍휼을 구하여 잠시 비뚤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대로 조금씩 성화의 구원을 이뤄나가는 것이 신자 된 특권이자 매일 하나님께 받는 은혜입니다. 

 

신자가 이뤄나가는 구원이란 역설적으로 말해 날이 갈수록 죄를 더 세밀하게 많이 깨닫고 그에 비례해서 주님의 긍휼을 더 많이 찾는 것입니다. 그러다 죽을 때는 자기 죄를 최고로 많이 발견하여 회개하면서 오직 주님의 긍휼만 구하게 됩니다. 그렇게 완전히 겸손해진 그 영혼을 주님께 완전히 맡깁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이 완성 시킬 구원을 진실로 소망하게 됩니다. 그럼 스데반처럼 어떤 고통 가운데도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운명할 수 있습니다. 이제 잠시 눈을 감지만 곧바로 눈을 뜨면 예수님을 얼굴로 맞대면할 것이라는 소망이 극대화되는 것이 신자의 이뤄야 할 구원의 종착점입니다.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주장은 나는 언제든 영적으로 온전하게 설 수 있고 일단 서면 절대 넘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주님의 십자가 긍휼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은 언제 죽어도 죄가 없이 깨끗할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를 요한이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 스스로 자기에게 속고 있는 것은 사탄의 미혹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십자가 구원의 진리가 없다고 즉,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과는 교리 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바울처럼 십자가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나도록 기도해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정작 문제는 정반대로 자신이 평생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진리만 너무 강하게 붙드는 신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다는 고백만 입에 달고서 자기가 구원을 이뤄나갈 생각을 전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땅과 자신이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헛되기에 “마라나타 주님 어서 오십시오!”라는 구호가 신앙의 첫째 목표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땅끝까지 천국을 침노하는 신자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함께 해주신다는 약속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물론 주님을 따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고 온갖 유혹 시험 핍박 멸시 등은 물론 현실적 고난도 따릅니다. 그러나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12:3)고 했습니다. 신자가 낙심해 있어도 될 것 같으면 주님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즉,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죗값을 다 갚았기에 이제는 신자가 성화를 이뤄나가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는 이미 천국 백성이 되었고 그 시민권을 완전히 확보한 것입니다. 본문이 가르치듯이 구원의 취소가 없다는 차원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침노시킨 천국은 완성된 것입니다. 간혹 죄를 짓거나 교회 생활에 등한히 해도 구원취소는 몰라도 혹시 벌을 받지 않나 염려할 필요도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에겐 다시는 심판이 없으나 징계는 받을 수 있는데 대부분 징계 이전에 성령이 회개토록 인도해주십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이자 축복입니까? 요컨대 본문이 말하는 바는 거듭난 신자인지 판단하는 아주 간단한 기준은 실천이 더디더라도 성화의 구원을 이뤄나가고 있는지 여부라는 것입니다. 

 

(11/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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