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조회 수 853 추천 수 25 2012.08.16 04:48:30



나는 왜 간증형이 아닌가



지난주 금요예배를 마치고 돌아오신 *마미몬께서 웬 종이 패키지를 보여주더니 ‘너도 한 번 해봐’라고 권유하셨다. ‘뭔데?’ 하고 여쭈니 유형별로 ‘어떻게’ 전도와 섬김을 하면 좋을지에 대한 설문지라고 했다. ‘흠? 이건 또 내 전문인데(안겪어본 심리테스트가 없을 정도라는 뜻-물론 과장 200%)’ 라고 중얼거리며 ‘질문지를 내가 훑으면서 답하면 웬지 나도 모르게 우왕좌왕하면서 쓸다리 없는 바이어스가 들어갈것만 같으니까 보지 않을거야, 그냥 읽으면서 하나씩 질문해줘’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답해준 마미몬께서 질문을 하나씩 들려주었다.




세번째 질문이었나, 그 질문을 듣자마자 ‘음, 이건 헷갈릴 이유도 없어. 이걸 빼면 난 내가 아닐걸’이라고 답하자마자, ‘난 벌써 니 유형이 뭔지 알겠어. 넌 우리 담임목사님 유형이야!’라고 단언하는 마미몬이시다. ‘헐… 그건 좀 심한데?’ 라고 웃어 넘기며 차례대로 질문에 답했다. 시리즈로 된 질문들에 답하면서 대충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나누는지, 몇 가지의 유형으로 나뉘는지 파악이 될 정도로 질문 자체는 좀 허접했었던거 같다(미안… 그런데 난 항상 나도 모르는 ‘나’를 알게끔 해주는 그런 설문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과는 단연코 이것이다! 할 정도 자기확신이 목까지 차있지는 않았는데 어느정도 내 예상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내가 이 설문에 답하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 놀랐었던 이유는 세 가지였다. 우리 두 사람 모두이견없이 마미몬의 유형일것이다,라고 예상했던 특정 인물은 오히려 나를 설명하는 유형이었다(첫번째가 아니라 두번째였지만 이것도 나름 억소리나는 결과였다). 그리고 우리 개개인을 설명하는 유형에 체크된 빈도수와 합산결과는 일점도 모자르지 않고 만점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라고 반문하기에도 웃길정도로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도’ 설문에 충실했었나보다(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했으면…). 그렇다. 우린…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매우 다르구나-라는 걸 또 확인하고 그리고 적어도 이 설문에 답하는 과정중에는 평소보다 지나치게 솔직했었던것 같다.




밥도 안나오는 설문에 답하고 난 뒤에 보았던 결과는 내 속에서 ‘싱숭이 생숭이’한 감정들이 오가게 했다. ‘간증형’, 성경 인물로 말하면 ‘눈을 뜬 소경’ 유형인데, 이 카테고리에서 극히 낮은 점수가 매겨져 있었다. 왜 이렇게 점수가 낮아,라며 눈을 부릅뜨고 봐야할 이유가 있는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안에 ‘이게’ 없다잖아, ‘부족하다잖아’여서는 부차적이다. 난 완전체나 진화를 꿈꾸는 건담이나 포켓몬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달리 해서 삶이 좀 더 윤택해지고 반짝반짝해지도록 관점의 업그레이드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나를 달리 설명하는데에 ‘내 안에 2% 부족하시다는’ 간증형의 성향이 새삼 내 안에서 진실로 아기적부터 모자랐던 것인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습득한것인지 내가 나를 다시 보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생각을 하게끔 했다.




내가 혼자 스스로 ‘생각’이란걸 하고 있구나라고 나 자신을 인식할때부터 나는,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이런이런 사람이에요(그 뒷말-요구사항-이 무엇이든간에)’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 가장 어리석다라고 ‘배웠다’. 자문자답으로 배운것은 아니다. 나 스스로 깨우친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언젠가부터 나는 사람 자체에서 나오는 입을 통해서도 사건을 통해서도 결코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과히 좋지 않다라는 것을 체득했고, 그래서 말을 아꼈다. 과묵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과묵하지 않다. 단지 상황을 좋게 보이게끔 하는 매끄럽고 달달하고 재미난 요소들을 적시적소에 끄집어내는 ‘나 아닌 모든것들’을 많이 알고 있으면 사는데 꽤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을 끄집어내지 않고도 대화란 것을 할 수 있으며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덤으로 상대방을 즐겁게 할 수도 있었다. 단지 그 이상으로 관계가 진전되지 않는다는 건 나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에 유희가 끝나고 난 뒤의 나 자신을 온전히 식히는데 거의 모든 정력을 다했다. 나는 포기가 빠르다. 그리고 나름 뛰어난 ‘편집자’라고 스스로 자부했다.




왜 관계라는 틀 안에 ‘나’의 이야기를, 그리고 너와 관계된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려했을까? 애써서 즐겁게 열과 성의를 다해 토닥거려 만든 두꺼비집을 스스로 허무는 기분이 들어서(괜한 논쟁거리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은 착한아이라서)? 그건 아닌것 같다. 나는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다리를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관계 안에서의 특정인이 열받아 까무러칠만한 짓거리를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 소위 말해서 ‘미운짓을 거리낌없이’하는데 주저함이 없다는 것이다(요점은 내가 개개인이 갖는 선호도를 잘본다는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 탁월하지도 않다 단지 마음만 먹으면 미운짓을 하는데 망설임이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부처님 반토막의 유형이든 아니든간에 누구나 ‘못견뎌하는’ 어떤 구석은 있게 마련이고 나는 유난히 그런 것들을 잘 보는 듯 하다. 그리고 나는 몇 안되는 관계들을 ‘쫑내고 싶을때’ 미련없이 그 카드를 썼다. 외면당하는 것보다 외면하는 것이 더 빠르고 쉽고 또 편하니까. 그리고 무서우니까. 시작은 누가 했든지 끝은 이쪽에서 내지 않으면 안된다. 아이였을때는 ‘니가 사람이라면 당연시 해야하고 또 오고 가야하는 이것, 저것, 그것’에 무지해서였다면 지금은 알고도,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들의 속을 헤집어내는데 거리낌이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경악까지는 아니더라도 놀라워 하고 의심한다. 나의 마미몬은. 내가 초중고시절을 어떻게 보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 ‘설마 그랬겠냐(막나갔겠냐)’며 나는 으흐흐 웃지만 나는 그렇게 눈에 띄게 반사회적으로 행동한 적은 결코 없었다. 단지 이미 충분히 ‘사회+교회화’되어서 내 나이와 성별에 맞는 적절한 페르소나를 갖추어야 할 나이에 ‘마미몬의 기준’에서 벗어나 ‘반항 아닌 반항’을 온몸으로 보였을때에 받은 충격이 잔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겠지. 그래. 모든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놀라운 편집자의 능력을 타고 났다(고 나는 믿는다). 아홉가지를 채운다한들 소용없다. 한 가지를 잘못했을 경우에-특별히 그 타인이 가장 거슬려하는 그것을 헤집었을 경우-그 충격으로 여태까지 좋았던, 혹은 별 문제없이 잘 굴러갔던 시간과 기억들 전부를 부정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안타깝게스리 나 역시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튼 이런 시한폭탄같은 나를 드러낸들 받아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또 온전히 그걸 다 맞아주는 이인칭의 누군가를 꿈꾼다는 것은 참, 나쁘다. 그래서 나는 불가능한 꿈을 꾸지 않는다. 대신 나는 어울리지 않는 짓거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나를 드러내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단지 의사표현을 위한 스킬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귀 있는 자는 알아들을지어다’라는 아주 오만하고 못된 마음으로 시작한것들이다. 넌 예수님도 아니면서. 어리석고 못되먹은 저를 용서해주세요라고 말하기보다 이 불민한 제자를 한 번만 너그럽게 보아 넘겨주세요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몰랐을 때부터 이미 이런 짓거리를 시작했다!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나도 안다. 이것이 정말 바보같다는 걸. 하지만 난 이것을 쉽게 내려 놓을 수가 없다. 왜냐면 '나는 너가 아니고 너는 내가 될 수도 없잖아요'.




정신차려보니 이미 마미몬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나는 뭐가 가장 좋은 선택인지 혼란이 왔다. 울고 싶지 않았던건 아니다. 단지 지금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 여자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두루마리 휴지 *셔틀을 했다. 한 장씩 한 장씩 뜯어주었다. 아무리 뜯어줘도 계속 운다. 아… 아빠가, 아빠몬이 빨리 왔으면. 아 맞다. 아빠몬이랑 싸워서 우는 거였지… 난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난… 부족해. 충분하지 않아. 이 사람의 눈물을 그치게 하기에는…




마미몬은 ‘뭐 이런 애가 다 있지’라고 생각했(었다). 보통 엄마가 눈물 흘리면 선택지가 두 개 아니냐고. 따라 울던가. 엄마 울지마, 라고 말하든가. 아님 둘 다 하든지(마미몬은 이 선택지를 바랬다 내 예상이지만). 그런데 나는 어느쪽도 하지 않고 계속 휴지만 뜯어주었다. 나도 알아. 내가 기억못할거라고 생각하고 말했겠지만. 그런데 나는 눈 앞에서 우는 이 여자를 따라 운다면 분명 이 사람은 꼬마인 나를 들쳐업고라도 이 집을 나갈지도 모른다는 감이 있었던것 같다. 그건… 내가 바라는 선택지가 아냐. 난 끝까지 울지 않겠어. 내가 따라 운다면 분명히 이 사람은 내 행동이 도화선이 되어서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 결정을 내리겠지(아니 적어도 내가 원하지 않는). 절대 안돼. 그러니까 난 울면 안된다. 그리고 난… 결정적으로 엄마가 왜 우는지 잘 모른다. 그냥 엄마가 힘들고 또 아빠도 힘들어보인다. 왜 힘든지는 사실 (나에겐) 중요하지도 않고 귀기울이고 싶지도 않고. 다 알려고 든다면 나는 이미 ‘내가 아닐거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없고, 그저 바램이겠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온전히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흘러들어 온다면 난… 선택지고 뭐고 ‘다음’이란 상태조차도 손에 쥐기 힘들것 같다... ‘편가르기’는 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이미 그 때부터 내가 알든 모르든 하고 있었지만(부모님의 눈에는).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 ‘모두를 위한 선택’을 했다고 믿고 싶었고 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건 살면서 참…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금도 틈틈히 아주 잘, 배워 나가고 있다.




글을 쓰면서도 지금 내가 ‘나 자신으로 가득차’ 사건 자체를 뻥튀기처럼 부풀려 확대하고 이미 지나간 썩은 떡밥을 재생산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안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훌륭한 편집자이니까. 그리고 난 요새 교회 안팎으로 히트중인 내 안의 숨은 나를 발견하기, 그 안에 있는 상처받은 어린아이를 치유하지 않으면 인생의 다음 챕터로 넘어갈 수 없어요_ 아니면 마음껏 울어라 지금 안울면 언제 울겠냐_’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힐링의 방법들을 선호하지도 않는다. 단지 난 내가 기억할만한, 기억해낼만한 어떤 기억을 끄집어내었을 때 아마도 저 때 ‘내가 아닌 이인칭, 그리고 삼인칭의 사람들’을 내가 나의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한 것이구나라는 걸 온몸으로 알았던것 같다.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난 포기가 빠르니까. 그래. 예수님보다도 ‘깊고 넓고 높으신’ 개개인의 마음을 내가 다 어떻게 그들 모르게 파악해드리고 또 그걸 다 일일이 맞추어 나가겠니.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일생을 다바쳐 나를 연구대상 삼아서라도 그런 헌신과 봉사를 해주길 바란다는건… 너무하다. 그럼 난… 이제 뭘 어떻게 하면 좋은걸까…… 부적절하고 불가능하고 부차적…이라고 믿고 싶은 소망은 이렇게 스스로 메말라간다.




맞춤서비스를 하라고 부르신 것은 아닐텐데(역량의 문제도, 마음가짐의 문제도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어렵다. 하지만 내게 없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라고 하시진 않았을것 같다. 아니, 사실 나에게 이런건 그다지 필요없는 말과 생각일뿐이다. 나는 자신에게 ‘없는 것’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빼앗기거나, 잃거나, 박탈당하거나’해서 뭔가 부족해진 그 상태로 만족해하며, 그리고 놀랍게도 그 상태 자체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기독교 식으로 은혜를 끼치는 많은 타인들을 안다(사람들은 흠없이 완전한 타인을 보고 꿈을꾸진 않는다. 감탄사는 날릴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공감이 주는 힘이란건 바라보며 꿈꾸고 싶으냐 아니냐가 기준이 아닌가 한다). 신문을 통해서든 일대일 만남을 통해서든. 왜냐하면, ‘잘하라고, 일등하라고’ 하신게 아니라 그냥 ‘충성’하라고 하셨으니까(솔직히 충성의 의미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잘하는 것을 통해서든 아니든, 나는 이미 이 걸음을 걷고 있는 상태여야 한다. 잘하는 것이라면 ‘넘겨짚기’가 있고 잘 못하는 것이라면 ‘곱고 예쁜 말’하기가 있다. 두 가지를 애써 절충할 필요는 없는것 같다. 남들이 보기엔 이 두개가 엄청난 장점뿐일수도, 단점뿐일 수도 있고(그러니까 나는 애써서 나를 지우고 싶지도 않고 그게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 안되는건가요...?) 단지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예쁘지 않은 말로 삼인칭의 누군가에게 내가 늘 하고 싶었던 ‘질문’을 시작할 것이다. 무슨 커피 좋아하세요? 저는 그냥 설탕맛으로 먹어요. 입맛이 *초딩입맛이라. 그래도 약간의 소망은 남겨두기로 했다. 어느정도의 ‘특별한 타인’이 들어올 여지를 위해서. 아니 사실은 내가 먼저 ‘쳐들어가기’ 위해서. 그러려면 무조건, 연습, 뿐이다. 기회는 늘 있지만 날 위해 기다려주진 않으니까.



Fin.



*마미몬 – 마미몬스터(엄마+몬스터)의 준말입니다. 어떻게 부모님을!이라고 말씀하시면 드릴 말씀은 없구요. 제가 부덕한 탓이겠지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속으로만 쓰이는 애정어린 호칭입니다.
*셔틀 – 갖다주다를 말하는 거구요. 넷상 은어입니다.
*초딩 – 아시죠? 초등학생의 은어입니다. 초딩입맛이라는 건 짜고 달고 기름지고를 떠나서 재료 고유의 맛을 즐기는 것이 아닌 지극히 어린이스러운 입맛을 말합니다. 버거류, 스파게티, 피자, 콜라…등등. 예시) 고기와 케찹이 없으면 밥을 못먹는다든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 뭔가 언짢으신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수정+삭제하겠습니다.





사라의 웃음

2012.08.16 05:42:12
*.235.51.228

무슨 커피 좋아하세요? 전, 아무거나~~,
커피는 무조건 다~~,
좋아요 ㅋㅋ
두런 두런 들려주는 말에 간증도 살짝 살짝 보여요.

쌀로별

2012.08.27 22:00:04
*.220.228.246

유형론을 이젠 애써서 믿고 싶지도 않지만
믿음의 문제가 과연 스타일/성향/취향대로 살아가고 살아질 수 있는지 아직도 알길이 없네요.
더불어 절충/타협의 문제가 될 수 있는지두요. 물론 아닌거란걸 알지만...

전 제사상에 올려진 동태전은 아무 거리낌 없이 집어먹을 수 있지만
생각없는 저 때문에 시험들지도 모르는 '이름없는 누군가'를 위해서 동태전을 포기해야겠죠.
믿는 사람들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흠을 잡으려 눈에 불을 키는) 아니면
기독교에 관심이 1그램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든.

동태전이 먹고 싶으면 집에서 부쳐먹어도 되고 마트에서 사먹어도 되니까요.
왜 굳이 그 자리에서 먹느냐고 따져 물으면 전 할 말이 없거든요. "먹고 싶어서..." 밖에는;;
그렇다고 동태전이 하필 그 순간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해서요" 라고 할 수도 없구요.
'우리 주님은 먹어도 된다고 하셨어'라고 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팔 수도 없습니다(하고 싶지만).
전 그냥 그런 생각이 드네요. 내가 누리고 싶은 것을 위해 주님을 방패막이 삼는건 아니지 않느냐.

혹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거라면 그 이름없는 누군가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전 어떤 상황에든 따져 묻지 않고 저 자신을 참아야 하는건지도 궁금하구요.
그 '이름없는 누군가'를 위해서 저의 욕구(욕구라고 하니까 굉장히 단선적인 사람이 되네요)
를 내려놓는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면요.
물론 전 동태전이 없어도 '살아갈수는' 있어요. 즐겁게. 하지만 매일매일이 주님의 날이라고 하셨는데
굳이 제사날에는 먹지 말아야지,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도 들고요.

아 하나님~ 왜 절 이렇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누리고 싶은 것도 많은 양으로 만드셨는지!
열명 아니고 다섯명 아니고 단 한 사람이라도 나 때문에 시험이 든다면 나는 아무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설령 제가 스스로 만든 극기훈련을 통과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공로삼아서 주님께 뭔가를 바랄 수도 없습니다.
스스로가 기준이 되어서 산다는 것이 이렇게도 고단한 삶인가 싶어 날은 밝고 화창한데 괜시리 우울합니다.

동태전은 지극히 단적인 이야기구요. 실제로 저런 일이 있었던것은 아니랍니다.
신자라면 으레 술과 담배를 지양해야 한다고 교회 안팎에서들 그리 말씀하시지만
신자를 포함한 현대인에게 술과 담배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정도는 타협(?)의 이름이 되기도 하는 커피란 것도 있어요.
현대인에게 커피는 잠이 덜깨서 몽롱한 머리를 두드리는 약이 되기도 하고 만남의 시작과 끝이 되기도 합니다.
이토록 일상적인 문화, 삶으로 자리잡은 어떤 것, 굳이 커피가 아닌 어떤 것에 필요악(?)이란 이름으로 매여 있는
나 자신을 볼 때에, '이것이 있을 때'와 '없을 때' 갖는 간극이 주는 마음이 나 뿐아니라 타인에게도 불편함으로 남아서
예수라는 본질이 아닌 어떤 껄끄러움만 남아 있는 상태를 보게 될 때 그나마 '아 내가 하나님의 영광은 뒷전이구나'
라는 것을 슬몃 깨우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가 곧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어떤 예수'의 옥외 광고판이라는 것을 알 때마다 오히려 이것이 늘상 짐이 되곤 했습니다. 왜 나는 기쁨이 먼저가 아닌가, 하고.
이러니 저러니해도 오늘 하루만큼은 적어도 이 시끄러운 꽹과리와도 같은 저를 참는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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