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가진 첫째 증거

창세기 강해 (9)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이 가장 먼저 훈련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어쩌면 영어를 숙달하는 것보다 더 우선이라고 할 수 있다. 매사에서 기다릴 줄 아는 것이다. 미국의 관공서나 회사의 업무 처리가 너무 느긋해 속이 터질 정도다.


예컨대 이곳 로스앤젤레스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가장 중심 프리웨이가 정체가 심해 확장 공사를 하고 있다. 제 기억에만도 10년을 넘게 하고 있다. 앞으로도 몇 년을 더할지 모르겠다. 정체가 심하면 더 빨리 공사를 해야 하지 않는가?


미국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법 규정대로 철저지 지켜서 더 튼튼하고 완전하게 만드는 장점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성질 급한 한국인이 볼 때는 갑갑해 미친다. 한국의 “빨리 빨리” 정신은 효율적으로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게 한다. 반면에 감정에 치우쳐 졸속적 부정적 결과를 종종 맺는다.


왜 한 순간에 창조하지 않았나?


하나님이 창조에 부여한 일곱 가지 의미 중에 마지막을 살필 차례다. 이 외에도 하나님은 창조에 당신의 무궁한 은혜와 권능을 계시해 놓았다. 창세기 1장이 강조하는 내용이 일곱일 뿐이다. 본문이 기술하는 대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몇째 날이더라는 것이다.


성경은 창조 6일 내내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완벽한 계획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창조하셨고 마지막 6일 째에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할 수 있도록, 특별히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릴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충분하고도 완전히 마련하셨다.


본문이 하나님이 날짜 별로 창조하신 내용이 달랐다는 너무나 당연한 기록으로 그치지 않는다. 본문의 반대되는 경우를 상정해보면 순차적인 창조가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알 수 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선 꼭 이렇게 여러 날에 걸쳐서 여러 대상을 창조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 순간에 “뿅!”하고 모든 피조물로 존재케 할 수 있는 분이지 않는가? 어차피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이니 말이다.


매일 일부씩 창조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격하시킬 이유는 없다. 또 각 개체에 모든 정성을 쏟아 부었다고 일부러 그분을 높여드릴 필요도 없다. 시간은 물질계 안에 제한되어 있는 인간에게만 적용된다. 넷째 날에 큰 광명과 작은 광명으로 나눈 후에 징조, 사시, 일자, 연한을 형성한 영향을 받는 것이다. 해와 달은 물론 우주 전체를 초월해서 영계에 계신 하나님에겐 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에게 시공간은 아무 의미가 없다.


구태여 시간에 끼워 맞추자면 그분은 영원한 현재 안에 거하신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태초와 무한대의 미래도 그분에게 단순히 현재일 뿐이다. 또 그래서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것이며 인간을 향한 당신의 은혜와 사랑에도 영원토록 수정과 변개가 없이 신실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에 전혀 구애받지 않으시는 유일하신 그분이 지구 시간에 맞추어 6일 간 순차적으로 창조 활동을 하셨다. 인간 세계와 유기적이고도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 또 지속하겠다는 뜻이다.


음양오행이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마술처럼 한 순간에 모두를 창조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으셨다.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아무런 연결 고리가 형성되지 않는다. 흔히 타종교나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조물주가 영겁의 세월 전에 물질을 만들어 그 물질이 진화되고 운행되는 법칙만 부여한 후에 손을 완전히 떼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럼 뉴에이지 같은 이단이 그런 법칙 혹은 우주를 감싸고 있는 기(氣)나 힘을 신으로 간주하거나, 동양철학에서 음양오행이 지구와 인간을 운명을 주관하고 운행한다는 주장이 타당성을 갖게 된다.


반면에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6일간 각기 다르게 창조했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신 후에 심히 흡족해했다고 선언한다. 그 의미는 하나님 쪽에서 인간과 온전하고 친밀한 인격적 교제와 동행하기를 소원한다는 뜻이다. 또 지금도 그런 뜻에 한 치의 변하도 없다는 것이다.


본문의 기술로 6일 간의 창조 동안에 하루가 과연 오늘날의 24시간을 의미하는지? 또 첫째부터 셋째 날까지 3일 동안에 수십억 년의 지층대가 형성되고 동식물이 출현했다 소멸 될 수 있는지? 쉽게 말해 인간이 이 땅에 있기 시작했을 때 공룡이 있었는지? 등등을 논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과 교제 동행하겠다는 그 뜻 앞에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분에게 시간은 없다. 단 일초 만에도 지금의 지구를 만드실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이 더 중요하다. 그분은 시간은 물론 그 흐름까지 계획하시고 조성하셨다. 그 일정표대로 맨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했다. 창조의 최종 목적이 인간이었다.


역으로 말해 인간이 이런 하나님의 뜻을, 그런 뜻 안에 내포된 차고 넘치는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인간으로 실존하고 있는 의미와 가치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이 땅에는 껍데기 육신만 입고 살아가면서 그 삶의 목적과 소망이 없다. 자신의 정체성마저 파악하지 못해서 항상 헛되고 헛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예수를 믿기 전의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창조에 부여하신 하나님의 일곱 번째 의미는 시공간을 만드시고 그것과 초월하신 하나님이 물질계의 시공간 안으로 자신을 제한하여 속박 받을 만큼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 땅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어 시간과 역사의 주관자이자 주인공이 바로 하나님 그분이라는 것이다. 영어로 역사(history)가 의미하는 바가 His Story이듯이 말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두 종류로 나뉜다. 우선 인간 만사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음을 알고 그에 적절히 반응하며 사는 신자다. 반대로 인간의 자력으로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 불신자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후자의 사람들도 “신의 장난이다”, 혹은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종종 실토한다. 곡(哭)을 받아야 할 대상인 귀신이 거꾸로 곡을 한다면 귀신도 전혀 예상치 못할 너무나 엉뚱한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인간이 모든 것을 스스로 행하는 것 같아도 인간 이성, 논리, 계획, 예상, 기대는 물론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인간이 결코 만사를 주관하지 못함을 불신자들도 인정한 것이다.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고도 한사코 하나님을 외면 거부하고 있다.


실제로 인류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인간이 의도는 물론 상호 계획하고 협력하지 않았는데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역사가 흘러간 적이 많다. 또 그런 흐름이 결국은 인류 전체에 아주 긍정적이고 유익한 효과를 나타냈다.


근대에 들어서 계몽주의가 태동되고 그 영향을 받아 신대륙을 발견하고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진화론마저 등장했다. 인간의 양심과 이성만으로 이 땅에 유토피아를 얼마든지 건설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팽배해졌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종교를 갖고 기도하는 것은 못 배우고 의지가 약한 자들의 세상 도피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사조에 완전히 찬 물을 끼얹는 일이 일어났다. 잘 알다시피 1, 2차 세계대전이다. 그렇게 선하고 만물의 영장이며 고상하다고 자부했던 인간들끼리 수백만 명의 무고한 생명을 비참하게 죽였다. 특별히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터 비극과 군국주의 일본의 생체실험은 당신의 낙관론자들에게 인간이 얼마나 사악하고 냉혹하며 잔인한지 그 실상을 똑똑히 알게 했다. 인간끼리의 낙원이 한갓 일장춘몽임을 깨닫게 했다. 또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들조차 그 배경에는 악마의 교활하고 흉악한 힘이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인간이 취한 탈출구가 무엇이었는가? 인간 자력으로 낙원 건설이 불가능해졌으니까 하나님께 겸손히 되돌아왔는가?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부인 거역하는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인지라 더욱 길을 잃어버린 상태에 빠졌다. 인간이 알 수 있고 붙들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인간이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라고 결론지었다. 말하자면 이 땅에선 인간은 껍데기만 살고 있을 뿐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허사라는 것이다. 시간과 역사의 주관자가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그 자리에 그냥 계속 머물려는 것이다.


반면에 그 참극이 기독교에는 아주 큰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인간 이성으로 성경의 진리를 심사 선택 결정하려는 진보자유주의 신학이 쇠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절대적 생명과 진리 됨을 재확인하는 신보수주의가 태동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흐름들이 절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세계 대전 전에는 수직상승해 최고조의 교만에 빠졌던 인간이 아유슈비츠 수용소로 수직낙하 하여 최고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다. 인간 스스로 상상도 못한 일이다. 미국대통령이 하루 밤 자고 나니 백악관 앞뜰에 홈리스 알콜 중독 거지로 바뀐 것과 마찬가지인데 자기가 그렇게 계획할 리는 없지 않는가? 미치지 않고는 아예 불가능하다.


 그  모든 일들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인도가 있었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그분께 항복은커녕 그것을 인정도 감지도 못하는 것이 불신세계다. 그러나 오늘도 앞으로도 하나님만이 역사를 주관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가 된다. 불신 세상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외면 거역하면 일이차 세계 대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더 비참한 참극이 사람들이 꿈도 못 꾸는 시기와 방식으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성경이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적그리스도 대환난과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듯이 말이다.


신자가 된 의미


신자는 다르다. 하나님의 역사를 주관함을 철저히 믿기에 그분이 인도하는 흐름에 자신의 전부를 철저히 내어맡길 수 있다. 인류역사 전체뿐 아니라 신자 개인의 일생도 그러하다. 출생해서 성장하고 교육받고 취직하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양육하다 노쇠하여 생을 마감하는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의롭고 거룩하신 그분의 손을 붙들고 걸어간다.


비록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판단 결정 시행하는 것 같아도 자기 인생을 궁극적으로 이끄는 이가 따로 있음을 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다.(잠16:9)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분의 의지에 상충이나 모순은 전혀 없다. 하나님은 광대하시고 완전하시다. 그분의 뜻 안에서만 인간의 사고활동이 가능하다.


쉽게 말해 그분이 나의 않고 일어섬은 물론 혀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멀리서 내 생각까지 통촉하신다.(시139편) 신자를 눈동자 같이 지키며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신자의 마음의 생각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 생각을 심어주시는 이가 바로 그분이다. 따라서 신자는 불신자의 정반대의 위치에서 서서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고 있어야 한다.


불신자는 최고의 절망에 빠져 있다. 단순히 힘만 빠졌기에 개선될 소망이 남아 있는 상태가 아니다. 절대적 진리의 완전 반대편에 서있다. 미로에 빠져서 헤맨다. 앉으나 서나 나아질 전망이 전무하다. 완전히 빈껍데기의 삶이다. 나면서 부모가 없는 고아 신세다. 끝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를 사랑으로 보살펴 줄 부모가 없다. 부모가 환생해서 돌아올 수는 없지 않는가? 자신의 뿌리가 뽑혀져 나갔다. 항상 그 발이 공중에 떠있어서 허전하고 공허한 일생을 보낸다.


신자는 그와 정반대다. 단순히 최고의 절망에서 빠져 나온 정도가 아니다. 이미 독생자 예수와 맞바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들어와 있다. 내 힘이 아닌 전지전능하신 그분이 나를 붙들고 있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를 알고 소유한다. 미로 같은 인생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완전하고 의로운 계획에 따라 내 삶이 이끌려가고 있다. 그 궁극적 영광은 이미 확보되어 있다. 절대로 고아같이 버려진 인생이 아니다.


육신의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도 있다. 영원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취소는 물론 줄지도 않는다. 그런 사랑 안에 들어온 신자의 발은 더 이상 공중에 떠있지 않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서있다. 아무리 심한 광풍이 불어도 그 인생이 약간 흔들릴 수는 있어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육신의 생이 마감해도 하늘에는 이곳과 비교도 안 되는 아름다운 장막이 바로 하늘의 법원에 내 이름으로 등기되어 마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창조의 첫날부터 마지막 여섯째 날까지 당신의 사랑과 권능을 빈틈없이 충만하게 이 물질계에 채우셨다. 신자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부터, 아니 하나님의 남은 자로 택함 받은 때부터 영원까지 그 동일한 사랑과 권능에 거하게 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내 존재와 삶과 인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완벽함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완벽함이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나를 향한 계획에 대체 방안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분은 나에게 A라는 계획을 시행하다가 실패하자 다시 B나 C로 변경하지 않으신다. 또 내가 아무리 도덕적 종교적 열심을 보인다고 해서 그에 비례해 내 계획을 수시로 변경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에겐 영원한 현재 뿐이다. 신자의 일생도 그분의 영원한 현재 안에 있다. 신자 일생의 먼 앞날을 미리 볼 수 있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신자의 전부가 그분의 마음 안에 영원토록 품어 안겨져 있는 것이다. 물질계 안의 시공간에 있는 신자에겐 그 인식 안에서 순차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창조가 6일 간에 걸쳐 질서 있게 이뤄졌듯이 말이다. 인간에겐 마치 실패, 수정, 개선, 성공으로 그분의 시행착오가 반복되는 것처럼, 그래서 제이, 제삼의 대체방안으로 바뀐 것 같아도 광대하시고 완전하신 그분에게 실패로 인한 수정은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자의 일생 동안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가지 직업에만 종사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신자답게 빚어 가시는데, 그를 정말로 거룩하고 의롭고 새로운 존재로 바꿔주심에 그분에게 절대로 부족함과 실패함이 없다는 것이다.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로마서 8:28은 신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약속하셨다. 본문에서의 뜻은 죄에서 구속하여 성화와 영화를 아우르는 구원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신자의 일생이 바로 칭의, 성화, 영화의 연속이이게 현실의 삶에 적용해도 된다.


이 구절을 흔히 자기가 행한 나쁜 일, 실패, 악하고 추한 것까지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어서 그 최종 결과는 신자에게 유익하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겉모습은 그럴지 몰라도 완전한 해석이 아니다. 실패한 것이나 악하게 보이는 것 모두가 신자의 인식한 범위 내에 속할 뿐이다. 그것은 어리석고 정욕과 죄에 찌든 인간의 한계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실패나 추한 것이 있을 수는 절대로 없다. 아예 그런 것과 공존조차 하지 않는다. 지금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를 향해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과 계획을 수시로 바꿀 리가 없지 않는가? 실패나 악한 것이 그분의 계획에는 아예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절대로 없다.


신자가 이 말씀을 현재 내 처지가 아무리 궁핍하고 고난 가운데 비참할지라도 하나님이 결국은 승리로 이끌어주신다고, 즉 악한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으로 단순히 이해해선 안 된다. 그럼 믿음은 고난을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인내력과 동의어가 되어버린다.


불신자들은 두고 봐라. 언젠가는 하나님이 나를 더 떵떵거리며 살도록 형통시켜 줄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력한지 아느냐? 이런 식의 세상에 대한 복수심리가 내포될 수 있다. 심지어 내가 지금 곁길로 빠져 잠시 쾌락과 죄에 찌들어 있어도 하나님이 나를 언젠가는 믿음이 좋게 만들어주실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둔갑할 수도 있다. 이는 믿음이 아니다. 그럼 의지력이 강할수록 믿음이 좋아지고 하나님의 복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이상한 논리가 성립된다.


하나님 하시는 일은 모두가 선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선한 것들을 다 모아서 최종적으로 더 크고 모든 선의 합계인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추하고 더러운 것은 물론이고 불완전하고 부족하며 불능인 것은 영원토록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에겐 절대로 선하고 옳고 아름다운 것만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분은 언제 어디서나 선하기에 고난을 끝까지 견디어 내는 것이 믿음의 목표가 되지 않는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고달픔과 궁핍 가운데도, 자칫 하나님의 실수나 시행착오처럼 여겨질지라도 그 자체가 선임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그분은 무조건 옳고 언제나 선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에서, 특별히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부터 찾게 된다. 신자는 자기 일생을 멀리 보아야 한다. 자기 인생 전체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특별히 자기라는 인간, 존재를 그분이 어떻게 아름답고 거룩하고 새롭게 바꾸시고 이끌어 가실지 찾고 찾아서 그에 자신의 전부를 맡기며 순응해야 한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신자는 환난 중에 항상 기뻐할 수 있다.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아뢰면 그분의 평강으로 내 마음에 채울 수 있는 것이다. 환난의 긍정적 결말만이 아니라 시작될 때부터 끝까지 당연히 그 중간과정을 포함해서 그분의 크나큰 선이다. 그래서 신자는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할 수 있다. 세상 사람과는 삶의 방식과 인식의 차원이 완전히 달라져야 신자다.


바울은 또 그렇게 하는 자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했다. 열심과 정성을 많이 바쳐서 하나님께 복을 받아내려는 자는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 마당만 밟고 갈뿐이다. 마당만 밟았으니 예배도 안 드렸고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지도 않았다. 당연히 그가 얻은 형통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또 그럼에도 성전 한복판에서 고개를 들고 자신의 종교적 도덕적 업적을 하나님께 자랑하며 복을 받아내려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를 스스로 치장하려는 자아도취증 환자다.


믿음의 첫 걸음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우리 체질은 여전히 연약하고 진토 같다. 욕심과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신자는 없다. 수시로 하나님에게조차 욱하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며 항상 기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완전한 때와 방식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마지막 여섯째 날에 가서야 인간을 창조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시공간과 무관하신 분이 이 땅에 스스로를 속박하시어 나와 친밀하고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교제하고 동행하길 그분이 더 열망하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결국에 가서야 선으로 이끄시는 분이 아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직 선으로만 나의 인생에 채워주시는 분이다. 그분에게 완전하지 않는 순간, 선하지 않는 사건, 아름답지 않는 장소는 절대로 없다.


그래서 믿음의 첫출발은, 아니 핵심은 너무나 간단하다. 하나님의 때와 방식을 기다릴 줄 아는 것이다. 사실은 이것만 해도 믿음이 너무나 성숙된 모습이다. 내 때와 방식을 고집하는 것부터 버릴 줄 아는 것이 믿음의 첫 걸음이다.


이곳 엘에이의 체증이 가장 심한 프리웨이 확장 공사를 가장 오래 걸려서 하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은 기다릴 줄 안다. 대륙적인 성격과 기질 탓이긴 하지만, 이전부터 체증이 막히니까 더 잘 고쳐야 하고 또 항상 법대로 철저히 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지금 심하게 정체된 부분이 있는가? 욱하는 조급증 때문에 믿음 생활이 피폐해져 있는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가? 아니다. 정체하고 있는 그 부분이 바로 하나님의 크신 선이다. 더 완벽하고 더 크신 선으로 가는 선한 출발이요 과정이다.


믿음으로 무작정 버티기만 해선 안 된다. 말씀과 기도로 그 답답함, 염려 초조, 조급함부터 씻어내야 한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부터 깊이 살펴야 한다. 그럼 어느 순간엔가 모든 문제가 이미 해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지금껏 큰 골치요 고통이었던 것이 상황 하나 바뀌지 않았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고 오히려 즐겁고 자기에게 더 큰 유익이 된 것을 깨닫고 스스로도 놀라게 될 것이다.


5/10/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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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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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가진 첫째 증거 (창세기 강해 #9 - 창1:31)

믿음을 가진 첫째 증거 창세기 강해 (9)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이 가장 먼저 훈련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어쩌면 영어를 숙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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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10
  • 조회 수 479

환난을 기뻐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강해 #8 - 창1:20-23)

환난을 기뻐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8)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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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03
  • 조회 수 454

한국교회의 양날 선 검 (창세기 강해 #7 - 창1:9-13)

한국교회의 양날 선 검 (창1:9-13) 창세기 강해 (7)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물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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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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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이 남아 있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6 - 창1:14-19)

열등감이 남아 있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6)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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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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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롬1:1-4)

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롬1:1-4) 부활절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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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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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 창1:9-13)

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http://youtu.be/rMSIX3C2UK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 창1:9-13)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http://youtu.be/qHjkSiEz-O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 창1:6-8) [2]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http://youtu.be/opQj6Y6sXw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 창1:1-5) [2]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http://youtu.be/ASb2eX056xc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 창1:1)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http://youtu.be/eCSGTueOyA4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창조적 진화론? 저는 서른세 살에 완전 무신론자 집안에서 ...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2) (마태복음강해 #258-完: 마28:17-20) [2]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2) 마태복음강해 (258-完) http://youtu.be/IiltnYNxUe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 마28:17-20)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http://youtu.be/lEzdZEu44x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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