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http://youtu.be/qHjkSiEz-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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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창1:9-13)
흥미로운 표현
창세기 1, 2장의 창조 기사는 육하원칙에 따라 기록하는 신문기사나 과학논문이 아니다. 첫째 날에 무엇을 어떻게, 둘째 날에 무엇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구체적 일정을 따질 필요와 의미가 없다.
대신에 일곱 가지 반복되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반복된다는 것은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가 내포되었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기록된 까닭은 실제로 모든 사물의 창조가 동일한 양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잘 짜인 구조에 의해서 질서정연하게 창조된 것이다. 오늘 살펴보려는 두 번째 반복되는 표현인 “하나님이 가라사대”(9절)에는 그런 의미가 더 돋보인다.
창조의 셋째 날에 하나님은 땅과 바다를 나누셨다. 땅에 각종 채소와 과일 나무를 나게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이 가라사대” 즉, 당신의 말씀으로 창조했다. 말이란 무심결에 튀어나오는 감탄사나 비명을 제외하고는 사전에 갖고 있던 어떤 생각에서 나온다. 최소한 평소의 사상이나 가치관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창조에는 하나님의 생각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즉 그분의 사전에 마련된 계획에 따른 것이다. 계획이 있다는 것은 즉흥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많은 시행착오와 수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계획대로 완벽하게 지어졌으니까 창조의 과정은 물론 그 결과도 질서정연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표현은 참 흥미롭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절대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특정한 현실 상황을 그분의 고유 속성에 연결하여 가장 적합한 별칭을 지어서, 예컨대 아도나이나 엘로힘 등으로 대체한 이름으로 불렀다.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배척한 중요한 이유가 바로 주님이 하나님을 아버지, 심지어 아빠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인간 주제에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은 불경을 넘어서 자칫 잘못하면 신성모독 죄로 간주되어 처형까지 되었다.
그런데도 창세기 1,2장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50회가 넘게 등장한다. 성경전체에서 가장 그 빈도가 높다. 창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는 뜻이다. 또 인간은 개입되거나 영향을 줄 여지는 도무지 없고 한갓 연약하고 제한적인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모세를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신 하나님
문제는 창조를 직접 목격한 인간이라곤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이 여러 형상으로 이 땅에 현현(顯現-theophany)했다. 주로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가 인간들을 대면했다. 그런 때에 들은 말씀은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표현해도 아무 하자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창조마저 직접 목격한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까지 정확하게 인용했다. 그것도 추측, 가정, 상상의 낌새는 전혀 없이 말이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한가?
창세기는 모세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승을 집대성한 책이다. 아담이 타락하자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지어 입혔는데 그 사건은 아담 부부밖에 모른다. 그런데 두 아들 중에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에 짐승을 잡아 희생으로 바쳤다.
무슨 뜻인가? 아담의 가죽옷 사건을 아버지에게서 전해 들었던 것이다. 가죽옷 뿐 아니라 그 전의 선악과 금령을 어긴 타락 사건과 그럼에도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언약을 받았음도 들었을 것이다.
히브리어는 리드미컬한 운율이 있고 아주 서술적인 평범한 언어로 이뤄졌다. 암송하기에 용이한 문법과 발성을 가진다. 지금도 유대인 자녀 교육은 모세 오경을 암송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이 핵심이다. 아담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창조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이 아벨과 셋과 노아와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경건한 자녀 계열을 통해 전승되었다. 구두로 전해지던 것이 문자가 발명되면서 차츰 기록물로 보관 되었을 것이다.
모세에게도 창조에서 시작해 자기 당대에 이르는 동안 하나님이 인간역사에 개입한 사건들의 전승이 가감 없이 전해졌을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죄악과 우상이 관영하는 불신 세상에서 유일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믿음의 조상으로 세웠다. 그 후로 하나님은 믿음의 후손들과 당신 쪽에서 주도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고 교제를 이어오셨다.
그 절정이 모세와 출애굽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 이스라엘을 구원할 소명을 주었다. 실제로 그를 통해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일으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시내 산에서 거룩한 율법을 전수했다.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이 모세의 지도에 시샘을 느끼자 하나님이 어떻게 야단치셨는가? 모세에겐 이상과 꿈이 아니라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신다고 했지 않는가?(민12:8)
모세도 지난주에 살펴본 다윗의 시편 19편처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그 손의 하신 일을 증거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창조를 목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줄 알았다. 거기다 하나님이 직접 자기와 말씀하셨던 체험이 풍부했기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했다고 당당히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한 사도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선언했다. 그는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제자로서 분명 주님을 직접 대면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모세도 동일한 맥락에서 보고 듣고 만지는 만물과 사건을 통해 태초부터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어쩜 요한이 자신과 동일한 모습의 인자로 오신 예수에게서 태초의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모세가 만물에게서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해서 큰 우레와 같은 소리로 발성했다는 뜻이 아니다. 또 도깨비 방망이 흔들며 수리수리마수리 주문을 외웠다는 뜻도 아니다. 창조에는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이 있었고 그것이 반드시 실현되도록 당신의 의지를 발동하셨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이 땅에 전혀 존재하지 않던 것들을 실존케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창조는 그 전에 존재하고 있던 기존의 물체를 수정 가감한 것이 결코 아니다. 부재(不在 un-being)하고 있던 것을 실재(實在 being)케 한 것이다. 첫날에 빛이 있으라, 본문 셋째 날에 채소와 과목을 내라고 했다. 우주에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무생물과 생물이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의지가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코에 당신의 영을 부어넣어 주셨다. 한 개인이 탄생하고 성장하고 쇠퇴하여 죽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마스터플랜에 따른 것이다.
세상 모든 종교의 기원
진화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가? 이론으로 정립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동식물 각 개체에는 복잡하고 정교하며 고급한 방향으로의 발전이 스스로 가능한 유전자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내재된 진보하려는 성향을 이기적 유전자(밈)라고 부른다.
문제는 진화론자들이 그 유전자가 왜 생겼는지? 특별히 모든 생명체에 하나 예외 없이 다 가지고 있게 된 근거는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진화는 존재(being)의 실존 자체에 대해선 전혀 해답을 주지 못한다. 그 존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doing)만 관찰하여서 극히 표피적이고 부분적이며 정확하지 않는 법칙을 발견한 것뿐이다.
혹시라도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진화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그렇다는 뜻일 뿐이다. 대신에 강조하려는 초점은 이것이다. 어떤 것을 있어라 없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관사항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그렇게 해서 있게 된 것을 고쳐 나가는 것은 인간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창조를 믿지 않고 언급도 하지 않는 모든 타종교는 결국 인간이 고안해낸 것이라는 뜻이다. 또 그래서 인간의 성품과 능력으로 수정하여 진보가 가능한 계명을 고안해서 교육 훈련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책임 하에 성취가 가능한 일들뿐이다.
그래서 구원마저도 인간이 회개, 참선, 득도, 선행으로 평균점 이상이거나 어떤 경지에 다다르면 사람이 자력(自力)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정서적 논리적 공감을 쉽게 얻고 감동과 유익도 제공한다. 어떤 인생사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고, 모든 일을 인간 능력으로 가능하며, 분명한 현실적 목표를 세우기에, 사람들로부터 그 종교 내지 신앙을 갖고 싶은 동기부여 또한 확실하다.
그러나 그 모든 종교는 결국 인간의 행위(doing)만 다룰 뿐이다. 선행 내지 율법적 구원관을 견지한다. 자기들 실재(being)의 뿌리는 전혀 다루지도 알지도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 실재의 뿌리가 따로 있음을 알고도 일부러 끝까지 완악하게 거부 외면한다. 하나님의 “무엇이 있으라는 가라사대” 음성을 듣기 싫어한다. 그러고는 기독교는 보지도 못했고 증명도 되지 않는 창조를 불합리하게 기록했다고 반발한다. 창조는 인간이 지어낸 설화일 뿐이라고 비방한다.
그들 모두가 진화를 믿으니 그 모든 종교들 또한 진화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하기 전에 이미 선행 구원관을 가진 종교 안에 진화론이 씨앗을 듬뿍 뿌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혼자서 얼마든지 잘하고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는 원죄의 뿌리가 모든 사람들 안에 가득 차 있다가 때가 차매 다윈의 진화론으로 나타난 것뿐이다.
행위와 실재의 불일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씀하신 것이 모세나 그의 유대 선조들이 깨우친 종교적 사상이 결코 아니다.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자기 실존의 뿌리를 처절하게 고민하다 성령의 간섭으로 찾게 된 해답이다. 나의 실존이 언제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육하원칙으로 따져갔더니 궁극적으로 마주친 곳이 바로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신 말씀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자기 being의 뿌리를 탐구하게 된 계기는 모세, 아브라함, 요한 등 모두가 동일했다. 내 doing과 being이 도무지 일치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의롭고 선하게 발전시키려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안 되더라는 것이다. 최소한 그 둘이 일치하길 바랐는데도 성공보다는 실패한 일이 비교가 안 되게 훨씬 많더라는 것이다.
도대체 내 속에 있는 나를 내 스스로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왜 내 의지와 뜻과 계획대로 내 행위가 따르지 않는지 그래서 내 삶과 인생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는지 이유와 과정을 도무지 알 수 없어서 너무 괴로웠던 것이다. 인간 스스로 자의식으로는 doing 밖에 그것도 아주 드물게 극히 일부만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내 인격체 전부를 주관하는 이가 따로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또 그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고 나니까 내 인생에 대한 특별한 뜻과 계획으로 그분이 이끌고 계심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이 시대, 이 장소, 이 모습으로 반드시 있게 해야겠다는 의지에 따라 내가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분의 태초부터 영원까지 나를 향한 기쁘시고 선하신 계획이 있기에 앞으로의 나의 삶과 인생도 절대적으로 그분의 뜻대로 될 것임을 확신케 된 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무엇이 있으라는 말씀은 그분 쪽에서 먼저 계시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분 앞에 겸비하게 항복하여 자신의 전부를 헌신하겠다는 그분 자녀 쪽에서의 자발적이고도 기꺼운 고백이기도 하다.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께 거역했고 그 벌로 40년 간 광야를 방랑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들을 낮추시고 시험한 것은 마음이 어떠한지 시내 산에서 수여한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지 알려는 뜻이었다고 말씀하셨다. 벌로 주신 광야에서도 생수와 만나와 메추라기로 굶기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를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신8:3)는 것이라고 했다.
불신 세상의 사람들은 떡으로만 충분하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없고 자기에겐 스스로 좋은 모습으로 발전하는 이기적 유전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모든 세대 모든 민족이 그냥 발전 못한 정도가 아니라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한국 사람들에게 정말로 솔직하게 답하라고 물어보라. 현재 한국 사회가 떡이 풍부한 것으로 치면 역사상 최고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라면 마땅히 이 땅에서 인간답게 영위해야만 할 의미와 가치 있는 삶은 이루고 있는가 말이다. 그 답은 십중팔구 역사상 최악이라고 할 것이다. 이곳 미국 땅도 동성애와 마약이 보편화되다 못해 의롭다고 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 않는가?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율법과 계명을 철저히 준행하는 종교생활을 잘 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인간의 문제는 스스로 행위를 바르게 한다고 절대 해결되지 않음을 철두철미 깨달으라는 것이다. 삶과 인생의 문제, 고난, 모순, 불합리, 허망, 갈급한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being)를 실존, 성장, 발전시킬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생기뿐 임을 아는 것이다. 그 힘이 떨어지고 또 그분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모든 문제가 발생함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범사에서, 특별히 고비가 닥칠 때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떡 대신 하나님 말씀으로 살라고 하신 신명기에선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의 배후에 여호와 하나님이 있음을 기억하라고 했다. “재물을 얻을 능”을 주신 이가 따로 있음을 절대 잊지 말라고 했다.(신8:17,18)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내 현재의 외적 doing이 잘 풀릴 때에 그렇게 되도록 힘을 주신 이가 하나님임을 아는 것이며, 나아가 당신의 온전한 뜻과 계획 가운데서 당신께서 주도적으로 그렇게 이끌고 있음도 잊지 않는 것이다.
모세와 요한은 창조주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대면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하는 태초의 생명의 말씀도 분명히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이단처럼 하나님의 직통계시 즉, 직접적인 음성으로 들은 것은 아니다.
우주와 인류는 물론 자신의 개인적 인생에도 하나님의 완전하고 선하신 뜻과 계획이 있음을 절대 부인하지 않게 되었고 또 그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지금도 그 계획 가운데 실제로 참여되고 있음을 알고 그 사실이 너무나 경이롭고 감사하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나머지 전 생애도 그 계획에 헌신 순종키로 한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온전한 의지 안에 자신의 전부를 맡긴 것이다.
예수 믿는 특권과 영광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절대로 인류는 물론 어느 개인 한 명도 방치 외면은커녕 침묵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도 계속해서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과 인간과 특별히 당신의 자녀에게 한 순간도 중지하지 않고 가라사대 말씀을 하고 계신다. 신자는 마땅히 그분의 뜻을 알기를 소원해야 한다. 그리고 신자 쪽에서 그분의 뜻을 알고자 하는 소원보다 그분 쪽에서 당신의 뜻을 알려 주고자 하는 열망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이는 우리 모두의 지난 체험을 통해 알게 된 분명한 진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싫었다. 당연히 그분의 뜻을 알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마냥 그분을 외면 거부 대적하며 원수의 자리에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 심령의 문을 노크하고 계셨다. 당신의 뜻을 보여주길 소원하셨다. 때가 차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게 하시고 그 앞에 온전히 겸비하게 엎드리도록 해주셨다. 결국 우리도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듣고 보고 만지게 된 바 된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과 축복과 영광인가? 예수 믿는 것이 단지 여러 종교 중에 기독교가 가장 올바른 것 같아 선택한 정도가 아니다. 예수를 믿어 영생이 확보되고 이젠 열심히 믿고 착하게만 살면 복을 받거나 최소한 나쁜 일은 생기지 않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그러는 것을 믿음이 아니라고, 구원을 못 받는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엄밀히 따지면 전부 신자 쪽의 필요만 충당하려는 것이다. 현재의 나의 행함(doing)을 수정하고 개선하는 데만 그 믿음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신자는 그보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계획과 뜻에 일차적이고도 중점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나라는 존재(being) 전부를 그분에게 온전히 내어 드리고 그분의 종으로 쓰임을 받고 있어야 한다. 그런 열망이 더 커야 온전한 믿음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 파, 아볼로 파 같이 분파가 생기자 바울이 어떻게 권면했는가? 사도들은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뿐이요 그 씨앗의 주인이자 물을 주어 자라게 한 이는 하나님 한 분이라고 했다. 자기들 사도는 하나님의 동역자(고전3:9)라고 했다. 하나님과 함께 이 땅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그분의 동업자(coworker)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전권대사라는 것이다.
사도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지상명령을 주시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했다. 그 모든 족속의 스승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다. 제자가 제자를 양성해도 모든 신자의 스승은 예수님이다. 신자 모두 제자이자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하나님의 일을 대행해야 한다. 그래서 신자들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고 그 모임은 그분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고전3:16, 6:19/20)
너무나 심각한 이야기
지금 너무나 엄청나고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동역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이 중지된다는 것이다. 한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는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고전1:21)으로 구원 주기를 원하시고 기뻐하신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천함에 당신의 동역자인 신자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아니 성령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미련한 인간에 불과한 신자를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이다. 신자가 전도의 미련한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그분의 동역자로서의 기능을 다 발휘하지 않으면, 성령의 능력이 발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과연 신자들에게 이런 인식과 실천이 있는가? 세상의 군왕들, 대통령, 정치가, 재벌 등이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이 땅의 물질만 조금 풍요롭게 만들 뿐이다. 인간의 doing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줄 뿐이지만 도덕적 영적으로는 타락만 부추긴다.
이런 악으로 치닫는 세태를 하나님의 거룩한 흐름으로 바꾸고 그 물꼬를 틀 수 있는 자는 신자뿐이다. 신자만이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이다. 세상에서 형통케 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일 뿐이며 그 주인공들도 불신자다. 인간끼리 만의 역사로 달성한 결과가 전부 어떠했는가? 또 그런 역사마저 궁극적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이는 누구인가?
신자는 아침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 등을 보고 듣고 만질 때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달아야 한다. 또 그 깨달음에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야 한다. 그래서 자기 주변부터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누룩처럼 번져 나가도록 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중요 고비마다 거룩하게 뒤집은 주인공은 하나님의 택하신 소수의 혹은 단 한 명의 남은 자였지 않는가?
모세는 나이 80에 이르러서야 살아계신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자신의 소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 죽을 때까지 40년은 완전히 그 소명에 따라 행동했다. 소명에서 벗어난 적이 한 순간도 없었다. 바울도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베드로도 부활하신 주님께 세 번의 용서를 받은 후에 그랬다.
인생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자는 누구인가? 자신의 평생을 바쳐 꼭 해야만 할 일을 발견해서 그 일을 완전히 성취한 자다. 둘째로 성공한 자는 그 일을 다 달성은 못했어도 수행하는 중에 죽은 자다. 셋째로 성공한 자는 그 일을 발견이라도 한 자다.
세상의 모든 불신자는 자기 평생을 걸만한 그런 일을 발견조차 못하고 죽는다. 솔로몬이 전도서에 말한 그대로다. 해 아래서 수고하고 수고한 모든 일이 헛되고 헛되게 끝날 뿐이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그분과 아무런 관계없이 일생을 보냈으니 그렇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 한 결 같이 고백하는 외마디는 “무(無)”다.
신자는 다르다.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가라사대 음성을 들은 자다. 예수를 믿는 순간 자신의 평생을 바칠 소명을 받은 자다. 그 소명을 받은 자의 인생은 절대로 실패가 없다. 한 번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계획에 실패가 있다는 것이 말이라도 되는가 말이다. 하나님에겐 그럴, 그렇게 방치할 의사라곤 추호도 없다. 매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삶과 인생을 영위할 수 있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나 점검해야 할 사항은 내가 과연 지금 그런 최고로 성공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여부여야 한다.
3/22/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