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에서를 저주하는 아비 이삭. (창27:34-40)

야곱 바로 알기 (4)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창27:34-40)

 

수표에 이서가 끝난 에서

 

고대에는 사법체계가 미숙하고 종이도 귀해서 구두로 약속한 것도 법적구속력을 지녔습니다. 물론 제 삼의 증인이 필요하겠지만 약속의 두 당사자가 말하는 내용이 일치한다면 그것으로 유효한 것입니다. 이삭이 아비의 권위를 갖고 야곱에게 장자권을 물려준 이상 법적으로 장자권 승계문제는 종료되었고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미 끝난 일인지라 에서가 어떤 반응을 보인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거기다 그가 말한 내용 자체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이삭에게 동생 야곱이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36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전에는 야곱이 분명 정당한 거래를 통해 장자의 명분을 양도 받았고, 이번에도 어쨌든 아비가 야곱에게 속은 것이지 야곱이 에서에게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그 양도계약을 어기지 않겠다고 에서는 야곱에게 맹세까지 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수표나 채권증서의 뒷면에 사인해 수혜자의 권리 전부를 확실하게 인계해준 것입니다. 틀림없이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을 텐데 지금 그 맹세를 어기고 있으니 하나님께도 죄를 짓고 있는 셈입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과 내 복”이라고 마치 그 둘이 서로 다른 양 구분하고 있습니다. 은연중에 장자의 명분에 대해선 자기 잘못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 치지만 내가 받을 복에 대해선 법적 분쟁의 소지가 있다는 뜻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는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궤변에 불과합니다.

 

우리말로 장자의 명분이라고 번역되는 바람에 허울뿐인 것 같은 어감이 있으나 원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베코라’는 영어로 ‘birthright’으로 번역되었듯이 장자의 권리입니다. 그 단어 자체로 다른 아들보다 우선적 권리가 있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복(blessing)으로 번역된 히브리 원어 ‘베라카’는 은혜, 축복, 선물을 뜻하는데 장자로서 누리는 모든 축복을 말합니다. 결국 장자의 명분이 바로 장자의 복이지 법적으로나 실제 적용에서나 나눠지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같은 뜻을 반복해서 말하는 습관이 있는데 에서가 그랬다면 장자권을 갖고 계속해서 억지를 부리는 셈입니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둘이 맹세할 때에 약속을 준수하겠다는 기본적인 것 말고 세 가지 조항을 추가했을 것입니다. 첫째 아비 이삭에게 이 계약을 끝까지 비밀로 할 것이며, 둘째 야곱이 어떤 식으로든 아비의 동의를 얻어내어도 결코 문제 삼지 않을 것이며, 셋째는 이 중에 하나라도 어기면 야곱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하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만약 에서가 가뜩이나 아무 실리가 없는 장자권인데다 나중에 자기를 더 좋아하는 아비 이삭이 야곱에게 물려줄 리가 없다고 자신하고 건성으로 맹세해 주었다면 야곱보다 이삭이 더 치사한 것입니다. 성경에 분명한 언급은 없어도 결혼 후라면 야곱보다 아내를 찾았을 텐데 야곱에게 죽을 달라고 했으니 결혼 전의 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 자기가 뱉은 말에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인 이십 세는 넘었을 것입니다.

 

그럼 최하 37년 최장 5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맹세한 당시의 나이로나 그 내용으로 보나 쉽게 잊을 수 있는 성격이 결코 아닙니다. 또 그 오랜 기간 에서가 한 번도 그 계약을 도로 물리려고 시도하지 않았기에 완전히 장자권을 포기했거나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을 만큼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

 

야곱이 아비 이삭에게 형인 것처럼 속인 것은 분명 크게 잘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비가 축복하며 확정해준 것은 비유하자면 에서가 날인한 장자권 양도계약서를 야곱이 법원에 들고 가서 등기를 한 셈입니다. 법적 소유권은 등기와 상관없이 계약서에 서명 날인한 것으로 확정되며 등기는 나중에 분쟁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법적 보호 장치일 뿐입니다. 따라서 에서가 민사소송을 벌려도 에서가 승소할 가능성은 제로일뿐 아니라 그전에 소송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야곱이 잘했다고 칭찬하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주목해야 할 사항은 에서가 야곱더러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는데 그럴만한 자격과 조건이 전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생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36절)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나를 두 번 속였다고 했지만 야곱이 에서를 속인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습니까?

 

정확히 따지면 에서도 지금 야곱처럼 아비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철없는 어린애처럼 자기를 더 좋아하는 아비만 믿고 울고 불며 떼를 쓰고 있는 꼴입니다. 나이가 77세난 된 어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입니다. 야곱이 다섯 번도 넘게 이삭의 추궁에 침착하게 대꾸한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에서는 비록 맹세했지만 뒤늦게나마 정말로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자기를 더 사랑하는 아비에게도 모든 사정을 정직하게 털어놓아야 했습니다. 대신에 야곱에게 억울하게 빼앗겼다고 자기도 아비를 속이고 있으면서 일방적으로 억울하게 당한 피해자인양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두 형제의 성품 기질 행동 등을 상식과 이성만으로 따져도 에서보다 야곱이 장자가 될 자격이 훨씬 더 많아 보입니다.

 

만약에 야곱이 아비를 속이지 않고 형제들끼리 장자권의 양수양도 계약을 오래 전에 맺었다고 이삭에게 이실직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쌍둥이 아들을 불러놓고 아비의 권위를 무시한 잘못에 대해 야단쳤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처럼 아비로서 에서에게 장남이면서도 장자권을 우습게 알았으니까 동생에게 그렇게 당해도 싸다고 더 크게 꾸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쳇말로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아무리 아비라도 자식들의 인격과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해야 하며 이미 자기 손을 완전히 떠난 장자권 승계문제를 새삼 거론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지금 야곱에게 속아 넘어갔지만 이전에 형제들끼리 양도계약을 마쳤음을 알게 되면 어차피 장자권이 이런 식으로라도 야곱이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당신께서 예언한 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어 간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야곱이 아비를 속임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에서가 하나님 앞에 맹세한 것을 어기지 않게 만들어 준 셈입니다. 스스로 의도했든 안 했든 간에 야곱은 형과 아버지의 관계도 변함없이 유지되게끔 했습니다.

 

덕담인가 악담인가?

 

에서는 자기가 행한 잘못이 있는데다 아비가 번복할 의사가 없다는 말을 듣고는 장자권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라고 울면서 매달렸습니다.(38절) 비록 장자권이 동생에게 넘어갔어도 자동적으로 그것의 반이 자기에게 책정되므로. 구태여 다시 말로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에게 주고 남은 복을 다 달라거나, 나에 합당한 복을 달라고 말하지 않고 .“빌 복이 이 하나 뿐”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야곱의 반이 아니라 하나씩 똑같이 복을 달라는 뜻입니다.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끝까지 아버지의 애정에 기대보려는 것입니다.

 

정작 문제는 그에 답하며 이삭이 축복해준 내용이 아주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에서가 간절히 소원한대로 축복해주는 덕담이 아니라 도리어 사실상 저주하는 악담을 했습니다. 우선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39절)라고 했는데 단순히 유업을 적게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에게 축복해준 내용과 정반대입니다.

 

야곱에겐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28절)고 했습니다. 반면에 에서에게는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과 멀다고 합니다.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습니다. 황량하고 척박한 땅이라 곡물 생산을 거의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정적으로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그런 복을 주시기 원한다고 간구했으나 에서에겐 하나님에게 간구 내지 신탁하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두 유언의 결론을 비교해보면 그런 뜻이 더 확실해집니다. 야곱에겐 만민이 섬기고 열국이 굴복하는 복의 근원이 되라고 즉,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의 첫째 수혜자이자 실현자가 되라고 축복해주었습니다.(29절) 이삭도 야곱에게 장자권을 주면서 하나님께 맹세한 셈이므로 더더욱 번복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에서에게는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40절)고 합니다. 여전히l 축복의 선포나 하나님께 간구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단순히 앞으로 일어날 사실에 대한 예언을 말했습니다.

 

먼저 칼을 믿고 생활할 것이라고 했는데 농산물이 없으니까 무력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장자권의 이양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릴 것이라고 했는데 멍에는 장자가 된 동생을 섬겨야 하는 책임을 뜻합니다. 그것을 벗어버리니까 에서가 스스로 이삭의 가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장자가 된 야곱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 아래 남아있을 수 있는.가능성마저 자기가 떨쳐버린다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 힘만 믿고 세상에서 형통하고 쾌락을 즐기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과 달리 에서에겐 여호와의 언약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거기다 스스로 언약 밖으로 뛰쳐나갔으니까 알기 쉽게 말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버지가 아들을, 그것도 자기가 더 사랑했던 아들이 사탄의 수중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저주하는 셈입니다.

 

이삭이 장남 에서에게 너무 크게 실망해서 거꾸로 화를 퍼붓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으로 에서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나 성령이 간섭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중에 에서의 후손은 이 예언대로 이스라엘의 즉, 하나님의 큰 대적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의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30절)고 말합니다. 너무나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향한 축복이 조금만 늦어졌어도 사태는 정반대로 흐를 뻔했습니다. 그 전에 에서가 사십 여년이 지나도록 도로 물릴 생각도 않을 만큼 장자권을 우습게 알았고 이삭에게 이실직고 하지 않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기 사건의 배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셨던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가장 크게 다른 점

 

야곱이 기질과 성품이 차분하고 냉철해서 장자가 될 자격은 나을지 모르나 아비 이삭을 속인 잘못은 아주 큽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떠나 아비와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날아간 것에 대해 화를 낸 것입니다. 말하자면 윤리적으로 따지면 둘 다 불완전하고 죄가 많은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도덕과 종교의 기준으로 따지면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누가 더 선하고 더 악하고 없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이 절대적 선과 절대적 악이 없기에 절대적으로 착한 자도 절대적으로 악한 자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세상 사람들 스스로 도덕과 종교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차원은 그와 전혀 다릅니다. 본문이 계시하는 바도 하나님은 인간을 윤리로 점수를 매기지 않고 당신을 진정으로 따르는 자와 당신을 의도적으로 거역하는 자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여호와를 알고 따르는 자들 사이에서도 알곡과 쭉정이로 영원한 운명이 갈라진다는 것인데 쭉정이 신자도 사실상 불신자이니까 결국은 두 부류의 사람뿐입니다. 그 중간에 속한 자는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 안과 밖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럼 그 두 사람의 차이가 모든 사람을 둘로 나누는 기준이 되는 셈입니다. 에서가 어떠했기에 하나님의 언약 밖에 떨어지게 되었는지부터 정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서는 자기가 거짓말을 했음에도 야곱이 사기꾼이라고 전부 뒤집어씌우고 자기 잘못은 아비에게 전혀 실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에서가 자기가 잘못하고 있는 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주 정당하고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야곱을 반드시 아비에게 벌을 받게 하거나, 이 유언을 뒤집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을 것입니다. 자기도 거짓말하고 있다고는 전혀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에서가 행하는 모든 모습을 잘 살펴보면 성격이 아주 급해서 감정 조절이 거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차분하게 생각하며 사리 분별을 하지 않고 매사에 아주 즉흥적입니다. 뚜렷한 주관 중심이 없이 외부 자극에 곧바로 반응합니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환경에 따라 생각과 감정이 큰 폭으로 오르락내리락합니다. 모든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이 일시적, 표피적, 상대적, 세속적, 물질적입니다.

 

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야곱이 아비에게 여호와가 사냥감을 순적하게 만나게 해주었다고 자연스레 둘러대는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의 몸은 이삭 가문 즉, 하나님 안에 있으나 정신은 가나안 족속의 세속적 관습 즉, 하나님 밖을 떠돌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아서 구원을 얻으려 시도합니다. 그들의 도덕성과 종교성이 결코 열등한 것이 아니며 아주 큰 열성으로 진리를 발견해 따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결정적 오류가 되는 딱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인생과 세상의 모든 문제는 자기 밖에서 생긴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모든 잘못의 원인이 외부에 있으며 그것을 자신이 스스로 노력하여 고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세상과 사람이 나쁜데다 여러 환경 요인이 작용해서 인간의 모든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외부를 인간이 선하게 바꾸면 인간의 모든 문제도 해결하여서 유토피아를 이 땅에 건설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에서가 바로 그러한 모습입니다. 동생 야곱이 잘못했고, 아비 이삭도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은 전혀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오직 외부의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 시행되고 있습니다. 당장에 아비로부터 현실적으로 만족할만한 유산상속을 받지 못한 일에만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 분노가 친동생을 죽이려는 데까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뻗쳤습니다. 카인이 아무 잘못 없는 동생 아벨을 자기 제사를 하나님이 축복해주지 않았다고 죽인 것과 동일한 죄입니다.

 

기독교신앙은 세상 모든 종교와 정반대입니다. 인간세상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바로 인간 자체이지 인간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8)고 선언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완악하여서 자신의 욕심과 감정과 자존심을 채우기 바쁘기에 죄악을 비롯한 모든 문제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에서에 비해 야곱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도 세상 안에서 살아야하므로 모든 말과 행동이 외부의 여건에 합당하게 반응했으나 그것들에 좌우되거나 영향 받지 않고 일관되게 한 가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있습니다. 야곱은 마음속에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는 자기 가치관에 따라 말과 행동이 따라갔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심어주신 아브라함 언약의 계승자가 되겠다는 소망이며 그것이 야곱의 일생을 이끈 절대적인 소명이었습니다.

 

야곱은 여호와의 언약이 수백 년 뒤에나 달성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 언약에 장자로 참여하고 싶다는 목표 하나만으로 살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장자가 아니라도 그 언약에 어떡하든 동참만 하겠다는 소원 하나뿐이었습니다. 형에게 장자권이 넘어가면 언약이 완전히 무효가 될 것 같으니까 그런 모습으로라도 막아선 것이지 장자권 자체가 그의 일차적 목표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에서의 말과 행동도 일관된 자기 주관에 따랐습니다. 그것은 외부를 풍요롭게 하면 자기 내면도 풍요롭게 될 수 있다는 가치관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혹은 괴롭게 만드는 모든 자원과 힘이 자기 밖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에서의 내면에는 자기만 있었고 하나님은 자기를 보조해주는 시종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하나님만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고 자기는 그분의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독선적인 하나님인가?

 

인간의 모든 문제가 인간 자신이요 인간의 내면에서 도출된다면 인간 사회의 문제도 결국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인간의 내면에 작동해주어야만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섭리해준 예가 바로 본문의 이삭입니다. 그의 이성마저 잠시 작동하지 못하게 해서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오기 직전에 야곱에 대한 장자권 인계 조치를 마치게 만드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장남이자 사랑하는 에서에게 아비로선 해선 안 될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하게 했습니다. 세상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하나님의 은혜 밖에, 아니 그분의 저주 아래에서 일생을 마칠 것이라고 선언할 수 있습니까? 자식이 아무리 큰 잘못을 범해도 최소한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기도는 대신 해주는 것이 부모입니다.

 

지금의 상황에선 이삭은 에서의 거짓말을 모르고 대신에 자기가 야곱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에서는 억울한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에서가 자기 형편을 과장하고 억지를 부렸으나 그 심정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주의 신탁을 한 것은 성령이 간섭하여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게끔 이끌었다는 말 외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이삭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이삭은 자기 주관은 하나 없이 자동적 기계적으로 그분에게 조종당한 것이 아닙니다. 이삭도 에서의 이방여자 두 며느리로 인해서 약 사십년이나 골치를 앓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도 에서는 영적으로 분별력이 모자라서 약속의 씨앗이 아닌 이스마엘의 딸들을 다시 후처로 얻었습니다.(창28:9) 그 때 이삭은 장자권이 뒤바뀌게 된 것은 자신이 실수였지만 틀림없이 야곱에게 장자권을 물려준 것이 백번 잘한 일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리브가에게서 야곱이 장자가 된다는 하나님의 예고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비 아브라함처럼 인간적 윤리와 정서를 극복하지 못하고 에서에게 장자권을 물려주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잘못을 미리 막아주시는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도 벌써부터 철저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사건 후의 야곱과 에서의 인생이 어떻게 진행 되었습니까? 야곱은 20년이 넘게 죽도록 고생만 했습니다. 말년에 조금 평안히 지내나 싶었는데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은 큰 슬픔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지금껏 그래 왔듯이 온 가나안 땅을 누비며 사냥꾼으로서 마누라를 셋이나 두며 즐겁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중심에 모시고 하늘의 영원한 가치를 실현하려는 신자의 인생은 고난으로 점철하게 하고,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 세상을 향해 살고 있는 자는 형통하고 안일하게 지내게 만들었습니다. 신실한 신자에게 오히려 고난을 더 많이 허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믿음의 맺집을 불려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을 그런 방식으로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차적으로 그런 고난 중에도 거룩한 열매가 맺히게 함으로써 인간의 노력으로 행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그들이 겪는 고난도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허용했고 그 고난 안에도 거룩한 은혜와 권능이 넘치도록 포함되어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위대한 전환점에는 반드시 신실한 한두 명의 종의 수많은 땀과 눈물은 물론 피가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야곱도 인류역사 대대로 천하의 사기꾼이라는 오명을 덮어쓰게 허용했지만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가 되는 영광을 베풀었습니다.

 

잘 믿으면 큰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에 없는 가르침으로 거짓이자 사기입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믿고 가르치는 목사와 신자들 모두가 속이는 자라는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서 마땅합니다. 나아가 자기가 잘못해도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르는 에서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합니다.

 

고난당하는 신자만 억울한가?

 

혹시라도 신자만 억울하게 당하고 불공평한 것 같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무조건 일방적 독선적으로 인생사를 조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하도록 그냥 놓아둡니다. 그러고도 당신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가 완벽하게 이뤄지게 할 만큼 그분은 광대하십니다. 신자로 하늘의 영원한 가치를 이 땅에 실현하게끔 이끌어줍니다. 반면에 불신자는 이 땅에서 아무리 신나고 재미있게 살았어도 전부 썩어 없어질 일로 인생을 허비하게 만듭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는 것만이 간절한 소원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살 때에 즐겁고 활력이 넘쳤습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언약을 그렇게까지 간절히 좋아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를 그렇게까지 비열하게 속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또 가나안의 그 음란하게 타락한 속에서 77년을 독신으로 살아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그와 똑같은 부모 밑에서 똑같은 환경과 여건에서 똑같은 신앙교육을 받았음에도 에서는 스스로 정반대의 길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는 정말로 세상에서 쾌락을 즐기고 자기 인생을 자기 버킷리스트 대로 살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과 소원대로 행한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 보듯이 신자가 오히려 더 고난을 많이 겪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줄 실감할 수 있습니까? 바울처럼 자기 능력이 약해짐이 하나님의 권능이 더 크게 역사할 수 있는 엄청난 영광의 기회가 됨을 알기에 기쁨으로 가슴이 설렐 수 있습니까?

 

발뒤꿈치를 잡고 한 몸으로 나온 쌍둥이인데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시느냐 인간을 주인으로 모시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인생으로 나뉜 것은 리브가의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자기들 스스로가 판단 결정 시행한 삯입니다. 자기가 정말 소중하다고 믿고 선택한 의미와 가치대로 삶이 따라간 것입니다. .

 

우여곡절 끝에 야곱에게 승계된 여호와 언약은 예수 십자가의 대속 구원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 은혜는 하늘에서 주신 복이자 선물입니다. 그 은혜는 하나님이 주셨기에 썩지 않을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지닙니다. 또 그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 자유 평강은 세상의 어느 것에도 방해 받지 않고 성령님이 속에서 저절로 넘치게 해주십니다. 요컨대 신자는 정말 너무 좋고 신이 나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며 그 삶과 인생이 실제로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에 여호와의 언약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듯이 신자에게 예수님만이 알파와 오메가가 되어야 합니다.

 

에서는 인간 부모에게 거짓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 것, 그것도 개별 행동으로만 최고의 가치를 삼는 불신자의 대표입니다. 그렇게 하는 일이 절대 나쁘지 않고 선합니다. 반면에 야곱은 하나님에게 절대 거짓말 하지 않는 것, 그것도 개별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일생 전체를 통해 그런 자가 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신자의 대표입니다.

 

인간은 야곱형과 에서형의 두 부류로만 나뉩니다. 그 사이의 중간은 결코 없습니다. 여러분은 에서입니까, 야곱입니까? 혹시라도 실제로는 에서임에도 야곱인 것처럼 흉내 내고 거짓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하자면 잘못은 자기가 다 벌려놓고 하나님더러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떼만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니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 야곱이 되어있음에도 세상이 그립거나 고난만 닥치면 다시 에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5/2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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