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4:1-4)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
요나서 강해 (9)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욘4:1-4)
분노의 두 가지 원인
요나서의 주제는 하나님이 니느웨 같은 최고로 악독한 이방 족속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느웨에 대한 기사는 3장 한 장으로 그치는 반면에 나머지 세 장은 요나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본문도 니느웨가 진정한 회개를 하자 하나님이 심판을 거두는 모습을 본 요나가 분노에 차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대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요나서의 더 중요한 주제는 요나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과연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화까지 냈는지 정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께 성을 낸다는 것은 겁이 나서라도 감히 하지 못할 일입니다. 요나도 실은 하나님께 직접 대놓고 화를 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화내느냐고 하지 않고 단지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4절)라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어떤 일을 시행했는데 자기 계획이나 기대대로 되지 않고 더 악화되거나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때입니다.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고 자신 만만했던 일이 실패하면 화가 나기 마련입니다. 둘째는 자신이 직접 개입되지 않았으나 아주 불합리하거나 악한 일을 목격했을 때입니다. 예컨대 돈 많다고 갑질하거나 자기 자식에게 폭행을 일삼는 부모를 보면 분노가 치솟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대대적인 회개와 부흥 운동이 일어난 것을 보고 화를 냈는데 두 가지 경우에 다 해당됩니다. 첫째 니느웨가 회개한 것이 자기 기대 밖이었고 둘째 아주 불합리하고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서원하여 다시 생명을 얻었기에 어쩔 수 없이 메시지를 전했지만 니느웨가 회개할 리가 없다고 믿었는데 악에서 완전히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중지만 한 것이 아니라 더 의롭게 만들었는데 여태껏 이스라엘에게도 거의 베푼 적이 없는 은혜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그렇게 역사해선 안 되는 것 아니냐는 뜻입니다.
요나는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따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일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모순되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고국에 있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다시스로 도망갔다는 뜻입니다.
처음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할 때부터 만약 이런 결과가 된다면 너무 싫을 것이라고 예상했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 하시겠다면 니느웨가 살아날 수도 있을 텐데 목숨 걸고 다시스로 도망가면서까지 그것에 반대한다는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자가 많아도 여호와는 이스라엘 편을 들어주어야지 왜 심판 받아 마땅한 악독한 니느웨 편에 서느냐는 것입니다.
요나의 잘못된 분노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께 그렇게 따질 자격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선지자인 주제에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도 거역하고 고국 이스라엘을 떠나 땅 끝으로 도망가려 했습니다. 더 이상 선지자 노릇하지 않겠다는 뜻을 넘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대화마저 단절되어도 좋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로 따지면 당장 심판 받아 마땅했습니다. 실제로 풍랑이 이는 바다에 던져졌을 때나, 또 고래에 통째로 삼켜졌을 때는 심판받아 죽는가보다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래 배속에서도 삼일 간이나 멀쩡히 숨을 쉴 수 있었고 고래가 해변까지 헤엄쳐 와서 토해내었습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를 받았습니다. 역사상 어느 누구도 이런 극적이고도 풍성한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요나로선 결코 잊어서도 안 되고 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동일하신 하나님이 자기와 동일하게 심판 받아 마땅한 니느웨에 동일한 인자를 베풀었는데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니느웨는 절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선 안 된다고 인간인 자기가 판결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인자를 베푸는 기준이 마음에 들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이런 ‘내로남불’이 없습니다. 자기는 인자를 받아도 되고 니느웨는 인자를 받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생각은 고국을 떠나기 전이나 고래 배속에서 살아난 지금이나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기다 요나는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탄원합니다. 이 땅에서 살고 싶은 의욕도 살아가야 할 의미도 다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니느웨가 회개하여 용서받느니 차라리 내가 용서 받지 않고 죽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취소하고 다시 생명을 주었는데도 지금 자신에 대한 심판마저 자기가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아니 신자라면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요나는 지금 거꾸로 더 이상 순종하지 않을 테니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이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니느웨가 심판받는 것에만 자기 목숨을 걸었고 그것이 인생의 목표였던 셈입니다. 그가 현실적 수단과 능력이 없으니 니느웨와 맞서 싸워 이기겠다고 노력한 것은 아닙니다. 대신에 고국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에게 빨리 심판해달라고 끈질기고도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기도의 응답이 니느웨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겠고 그 일을 자기더러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것만은 아니다 싶어서 목숨 걸고서라도 수행하지 않겠다고 다시스로 도망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왕에 한번 죽다 살아났으니 다시 죽는 것은 겁나지 않는다고 덤비고 있습니다.
요나의 진짜 불만
자신을 죽여 달라는 요나의 간구를 너무 불경하다고 쉽게 정죄해선 안 됩니다. 엘리야도 바알 선지자와 갈멜산의 대결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세벨이 죽이려 들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광야로 도망쳤으나 탈진해서 자신을 차라리 죽여 달라고 여호와께 탄원했지 않습니까? 우리도 온갖 고난과 세파에 시달려서 어서 빨리 천국에 갔으면 싶을 때가 많고 실제로 가끔 그런 기도까지 하지 않습니까? 엘리야의 경우는 그 대적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왕비였고 엘리야 한 사람만 죽이려 들었으며 아직 광야로 추격해오기도 전이었습니다. 우리도 개인적으로 고달픈 일이 겹칠 뿐 외부의 핍박을 받는 것도 아니며 실제로 죽음의 문턱에 이른 것도 아닌데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반면에 니느웨는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였고 당시 세상의 최고 악한 나라였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니느웨는 일본이고 그 왕은 임진왜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니느웨는 나치 제국이고 그 왕은 히틀러인 셈입니다. 그런 자를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대대로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들을 단순히 살려만 주지 않고 천국까지 보낸다면 여러분은 그런 하나님을 기꺼이 믿고 따를 수 있습니까? 아니 수용 혹은 이해라도 할 수 있습니까?
원수를 보면 미운 생각이 드는 것은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정치적으로 거창하게 애국심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회에 암적인 존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도저히 형통해선 안 되는 사람들이 정치권력과 결탁하여서 재물과 권세를 함께 누리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괄시 천대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따져도 자기 인생을 망가트렸거나 큰 장애가 되었던 한두 명의 원수는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원수가 아니라도 평소에 남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챙기므로 상종하기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바꿔 말해 지금 요나의 불만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항상 품고 있는 불평이었습니다. 일차적으로 하박국이 여호와께 따진 질문과 같습니다. 악인은 온 세상을 장악하여서 활개치고 있고 반대로 의인은 억울하게 손해 보며 핍박 받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왜 가만 버려두시느냐는 것입니다. 요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왜 그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나서의 결론대로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당신이 지으신 당신의 자녀이니까 사랑하시므로 신자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렇게 행했으니 신자도 그와 똑같이 행해야 한다면 솔직히 뱁새가 황새를 쫓다가 가랑이만 찢어지는 셈 아닙니까? 아담의 타락으로 원죄 하에 태어난 모든 자들은 죄악으로 달려가는 걸음은 아주 빨라도 선을 향해선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도 느리기 짝이 없습니다.
거기다 인간은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존재입니다. 여러 감정 중에서도 더 강렬한 것이 더 힘을 발휘합니다. 원수에 대한 분노만큼 센 감정은 없습니다. 도덕적 종교적 의무감으로 원수를 사랑하려 해선 거의 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실제로 우리가 매번 체험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베푸신 긍휼의 참 뜻
여호와가 니느웨에게 베푸신 긍휼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는 기사가 하나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개인적인 일로 우셨다고 유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11장의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울었다는 것은 당신의 긍휼이 최고로 드러난 일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그 경위를 살피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지만 곧바로 그를 되살릴 것이므로 사실은 죽은 나사로 때문에 슬퍼한 것이 아닙니다. 그 누이들 마르다와 마리아가 슬피 우는 모습을 보고 우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위 사람의 격해진 감정이 함께 느껴져서 우신 것도 아닙니다. 육신의 죽음 앞에 너무나 무력한 모든 인간의 상황을 슬퍼하신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지난 삼 년간 그렇게 가르치고 사역하면서 보여주었는데도 영생의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그곳에 함께 계셨더라면 나사로의 병을 고쳐서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내심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치유의 은사를 가진 한 능력 있는 선지자로만 알고 있는 것이 당신께서 너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 본체이신지라 예수님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전혀 문제될 것 없었습니다. 실제로 베다니에서 온 종에게서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주님은 그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이틀을 더 지체해서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후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죽은 후 나흘이 지나면 그 영혼이 완전히 음부에 들어가서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무한정 아무 의식 없이 잠만 잔다고 믿었습니다. 주님이 나사로를 되살리면 영계인 음부마저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아가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무덤에서 살아날 것이라는 예언도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가시적인 증거가 됩니다.
나사로가 되살아나자 베다니 온 동네에 큰 잔치가 열렸을 것입니다. 인간이 갖는 최고의 슬픔으로 가득 찼던 장례식이 인간이 갖는 최고의 기쁨으로 충만한 새 생명의 잔치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이 곧바로 퍼져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계획을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실은 주님이 의도적으로 이틀을 지체했듯이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당신의 죽음을 계획하여서 주관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당신의 장례를 당신께서 기꺼이 거행하고 무덤에 들어가시면서 무덤 속에 있던 인간에게 당신의 생명을 심어주어 걸어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오묘하고도 크신 긍휼입니까? 어떤 인간 철학자 사상가 종교가라도 상상도 못할 하나님만의 은혜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한다”(요11:25,26 )고 선포했습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인간에게 지어진 죄의 삯인 죽음의 형벌을 벗길 것입니다. 그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는 나사로가 이 땅에서 소생한 것보다 더 귀한 참 생명을 얻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어 마땅한 천하의 죄인입니다. 세상의 권력, 재물, 명예의 많고 적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인간 사회에서 최고 악독한 죄인이나 모두가 칭찬하는 최고 의로운 사람이나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며 겸비하게 엎드리는 것 외에 그 죽음의 심판에서 벗어날 길은 전혀 없습니다.
나사로 무덤 앞에 모인 모든 사람은 육신의 죽음으로 인생이 완전히 끝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의 생명 연장에만 급급했습니다. 이제 죽었으니 장례식을 경건하게 치르는 것이 고인에 대한 예의라고 여길 뿐입니다. 주님은 인생들이 천국의 부활 생명을 모르는 그 영적 무지함이 너무 안타까웠고 그러니까 이 땅에서만 아등바등 다투며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우셨든 것입니다.
니느웨를 용서하신 까닭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팔복 강화에서 불치병과 불구에서 당신께 고쳐주신 자들을 상대로 그보다 엄청 더 귀한 좋은 복을 알게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첫째 복이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인데 너희부터 십자가 앞에서 죽어 마땅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시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덟 번째에 가서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자가 받을 복을 말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도 한참 후에 신앙이 제대로 성숙되어져야 원수를 사랑하는 단계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도망간 제자들이나, 당신을 세 번이나 저주하며 부인한 베드로나, 당신의 백성들을 죽이려고 외국까지 기세등등하게 가고 있는 바울에게 화는커녕 도리어 크신 긍휼로 용서해주셨습니다. 심지어 당신을 은 삼십 냥에 팔러나가는 가룟 유다를 전혀 제지하지 않고 네가 하려는 일을 빨리 하라고 했으며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유대 지도자들의 용서를 위해 기도까지 해주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알기 전에는 당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고 또 그럼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쉽게 비유하자면 사형이 확정되어서 같은 감방에서 다 함께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것은 오직 하나 언제 사형이 집행되느냐 뿐입니다. 사형수끼리는 먼저 처형당한 자를 두고 더 악독한 죄인이라고 절대 비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전에 원수 사이였다 해도 사랑까지는 못해도 저나 나나 참 기구한 운명이라고 여기고 저주와 분노를 그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아니 최소한 미워하지 않으려면 원수가 더 이상 원수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가 나에게 행한 지난 악독은 결코 지워지지 않고 쉽게 잊혀지지도 않습니다. 용서하려 들면 들수록 원수와 그가 행한 일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데 그럼 오히려 미움만 늘어납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나도 원수 못지않게 너무나 치사하고 추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절감해야 합니다. 똑같은 사형수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시시비비 따질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최고로 불쌍하다는 사실이 실감나야만 원수 또한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을 조금씩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인간의 이 땅에서의 삶과 죽음은 오직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각 개인이 가장 먼저 행할 일은 자기가 그분의 긍휼의 품 안에 들어가 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미워하는 원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들의 죽고 사는 문제도 하나님의 주관하실 문제입니다. 그들이 벌을 받아야 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벌을 주실 것이고 그들을 살려내야 한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살려낼 것입니다.
여호와는 요나에게 네가 내게 화를 내는 것이라고 하지 않고 단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고 반문했습니다. 네가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은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니느웨를 원수처럼 미워하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며 오죽하면 당신에게 원망을 퍼붓는지 그 이유도 다 꿰뚫어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를 야단친 까닭은 “너도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니느웨가 아무리 최고로 악독한 죄인 같아도 너도 그들과 하나 다를 바 없는 악독한 죄인일 줄 제발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요나더러 원수를 미워하기 이전에 네 자신의 영적 실상부터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니느웨를 용서하고 재앙을 내리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그들도 당신이 지어셨기에 사랑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당신의 대적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면서 성부 하나님에게 어떻게 간구했습니까? 저들이 자기들을 하는 것을 모른다고 했습니다.(눅23:34) 니느웨 백성들이나 요나나 똑같이 자신들이 당신께 원수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똑같이 불쌍하게 여긴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죄를 도무지 씻을 길이 없는데도 서로를 비방 정죄 심판하면서 인간끼리 원수 삼는 것이 너무 어리석고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나나 니느웨나 똑같이 무덤 속에 누워있는 영적 시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갖는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구원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최악의 상태로 있는데 그 위에 또 심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누구를 언제 어떤 방식으로 구원해줄 지는 오직 당신의 절대적 권한과 은총에 달렸습니다. 아무리 선지자라도 요나가 하나님이 니느웨에 은혜를 주시는 일에 대해서 싫어서 화를 내는 것은 아예 말도 안 되며 그만큼 큰 죄도 없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지금 말로만 자기를 꾸중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긍휼을 자기에게 베풀고 있는지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할 선지자인 주제에 그마저 모르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입니다. 사실은 요나가 더 어리석고 불쌍했으며 그래서 요나서의 3/4이 요나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작금 한국이나 미국을 보면 정치적 색깔과 종교적 믿음과 교육수준과 관계없이 지도자들부터 요나처럼 ‘내로남불’ 천국이 되었습니다. 불과 수십 년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구나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 간음 동성애는 죄다”라고 말하면 거의 다 동의했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죄들이 다 없어졌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비방 멸시 정죄하고 있는 죄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데 남에게만 해당됩니다. 내 마음에 안 들거나 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죄인입니다. 지금은 절대적 진리가 없어진 것을 넘어서 자기만 절대적 진리가 된 시대입니다.
그 필연적인 결과로 세상은 지금 누구나 피부로 느끼듯이 끝이 없고 어디로 튈지 모를 분열과 대립에 휩싸여 있습니다. 쉽게 말해 모두가 모두에게 원수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더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정죄 심판하지 못해서 난리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 하나인데 나는 절대 선이고 너는 절대 악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와 선과 구원을 전부 자신이 판결하고 시행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리타분한 기독교의 신조일 뿐입니다. 모든 종교들이 하나님의 점수에 합격하려고 노력하라고 가르치기보다는 자기들에게 충성하면 복을 받는다고 세뇌교육하고 있습니다. 이단 교주가 하나님 행세를 하거나 종교적 광신자가 재림 예수라고 말하던 시대는 그나마 순진할 때입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정상적인 정신 상태로는 도무지 못 살 것 같아서 하루 속히 천국을 가고 싶은 생각이 종종 듭니다.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절로 나오고, 아니 기도할 것도 없이 가끔은 지금 바로 재림하여 몽땅 심판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러나 본문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요나가 바로 그런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라는 꾸중만 들었지 않습니까? 이미 한 번 사면 받은 요나이므로, 아니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속한 구원과 심판에 대해 시시비비를 따질 수 없습니다. 요나는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집어내고 있습니다.
솔직히 작금의 사태에서 기독교 신자라고 특별히 의로울 것 하나 없습니다. 다른 종교들처럼 행위구원을 넘어서 원시적인 기복신앙으로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거기다 세상에서 편 가름하고 원수를 무찌르는 싸움에 간접적으로 편승하다 못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난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지 못했더라면 천하의 비겁하고 치사한 요나를 넘어서 최고로 악독한 니느웨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나사로의 장례식에서 단순히 육신의 죽음만 붙들고 서글피 우는 문상객들과 같아서 예수님이 우리를 보고 계속 울고 계셨을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바울, 베드로, 스데반, 빌립보 감옥의 로마 간수,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남편을 다섯이나 두고도 다시 젊은 남자와 사는 여인 등등 성경의 모든 인물이 다 그분의 원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만의 긍휼로 다시 살려주었고 다시 요나처럼 당신의 메신저로 세상으로 돌려보내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유일하게 바라는 사항은 이 짧은 시간의 땅의 삶에서는 서로 사랑까지는 몰라도 절대로 원수 삼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악인들에게 화가 나고 그래서 당신에게 원망을 터트릴 수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다시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이 자신에게서부터 눈곱만큼도 없다는 진리 아니 사실을 다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란 그래서 다른 사람을 절대로 원수 삼을 수 없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신자 본인부터 다시 하나님의 원수 자리에 떨어지지 않는 것만도 하나님의 너무나 큰 긍휼임을 매일 매순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세상에서의 악인들에게 분을 내거나 불쌍히 여기기 전에 신자에 대해서 먼저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지금 하늘에서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모든 인간에겐 이 땅에서 육신의 형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죽음 후의 심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이미 영생을 소지했기에 세상에서 아무리 손해보고 핍박 받아도 하나님 안에선 가장 형통한 자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것이므로 세상에서 아무리 형통하고 권세를 누려도 하나님 안에선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이 땅으로 인생이 전부이기에 사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구태여 원수를 사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 세상에선 도리어 원수를 갚는 것이 최고의 선으로 칭찬 받습니다. 그러나 죽어 마땅한 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 받은 신자는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사랑까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광스런 부활생명을 받지 못한 그들을 향해 최소한 불쌍히 여기고 분을 내지는 말아야 합니다. 원수를 자기 의지와 믿음으로 사랑하려고만 노력하면 종교적 의인입니다. 자기부터 하나님의 긍휼이 가장 절실하기에 더 이상 원수가 남아있지 않아야 신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합니까?
11/15/2020
요나에게 니느웨가 있듯 저에게도 니느웨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끊임없이 부정과 타락과 내로남불과 거짓된 영과 거짓말과 속임수와 회개치않고 악한 노선으로 모두를 괴롭히는 전 세계의 정치 세력들입니다. 그들의 행보를 매일 뉴스에서 볼 때마다 한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내가 그들의 자리와 그들의 입장에 있었더라면 과연 지금처럼 주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 나도 저들보다 더 악하고 추한 모습으로 전락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걸 생각하면 불붙는듯한 의분과 심판을 간구드리는 마음이 조금 누그러듭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치 못한채 영벌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하나님의 꾸지람을 듣고 돌이킬 수 있도록,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나아가 나 자신과 교회부터 악한 습관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솔선수범하는 것이 우선임을 느끼게 됩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확실히 나부터가 하나님 앞에 정죄받아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절감할때 비로소 마음속 원수로 여겼던 이 역시 하나님의 긍휼만 바랄 수 밖에 없는 나처럼 불쌍한 사람일뿐임을 인식하게 되어 더이상 원수로 여겨지지 않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솔직히 사랑까지는 아직 모르지만 전처럼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그저 따르려고 안되는것을 내 의지로 하려고 했던것과는 달리 이제는 긍휼한 마음으로 원수로 여겼던 이를 위해 편히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원수가 없어진 것이 신자라는 말씀에 너무나 공감됩니다. 요즘 일상에서 부딪히며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물론 그순간 그일 자체에 화나기도 분해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전처럼 그 사람자체가 미워지지 않더군요. 그 가장 큰 이유는 위에도 언급했듯 죄인중의 괴수가 바로 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저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 다시 또 감사드리며 그역시 나처럼 주님께서 만나주시길 기도하게 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