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1:1,2 & 4:10,11) 하나님께 받을 신자의 진정한 복.
요나서 강해 (12-完)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1:1,2 & 4:10,11)
열린 결론에 이어질 두 마디
요나는 아주 특이한 선지자였습니다. 다른 모든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대적들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요나만 반대로 원수 니느웨의 구원을, 그것도 그 나라로 가서 선포하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요나로선 우여곡절 끝에 니느웨에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기는 했지만 끝까지 진심으로 승복할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또 그래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니느웨 백성을 아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요나서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열린 결론으로 끝나버립니다. 후대의 신자더러 하나님이 꾸중하신 의미를 잘 헤아려서 그 다음 구절을 연결해보라는 뜻입니다. 그 결론이 의미하는 바부터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니느웨 같은 악한 백성을 진정으로 회개시켜서 살려내는 것이 하나님의 이 땅을 다스리는 아주 중요한 목표라는 것입니다. 또 그 일을 당신이 미리 택해 은혜를 베푼 종을 통해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신자로 부름 받은 목적도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로 좌우를 분변하게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 일을 게을리 하면 하나님이 신자에게 마련해준 은혜를 보류 내지 회수하고 이 땅은 그만큼 박 넝쿨처럼 시들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꿔 말해 요나는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원망을 터트리거나 억울하게 여기기 전에 그분의 종으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부터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니느웨의 악행을 묵인한 목적도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징계하여서 당신과 온전한 관계로 회복시키려는 뜻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자녀들을 산 채로 불에 살라 우상 신에게 바칠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니느웨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의 매로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판국에 요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대우를 받아야 하고 니느웨는 절대로 용서해주면 안 되며 그럼 차라리 자기가 죽겠다고 두 번이나 대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적을 속이 시원하도록 철저히 멸망시켜야만 하나님이 자기들을 사랑하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절대로 회개할 리 없다고 속으로 비하 멸시했던 니느웨를 진심으로 회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네가 성을 내는 것이 전혀 합당치 않다고 두 번 다 야단쳤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는 나의 택한 백성이니 내 모든 관심과 사랑을 넘치도록 쏟아 부어주었다. 너희의 정작 더 크고 좋은 복은 바로 나의 일에 이렇게 쓰임 받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십이만 명이나 악에서 떠나 진정으로 회개하는 역사상 최대의 부흥이 그 비천하고 연약한 요나 한 사람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원수였더라도 그 경이로운 모습을 사십 일간 지켜보게 되면 그들을 향한 증오심은 점점 줄어드는 대신에 감동이, 최소한 그 크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서서히 밀려오지 않겠습니까?
이 열린 결론에 이어질 첫마디는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심고 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따로 택한 내 백성 이스라엘은 하물며 얼마나 더 아끼겠느냐? 곰곰이 잘 생각해보라. 니느웨도 악에서 떠났기에 용서해주었다. 너희도 우상숭배에서 떠난다면 구태여 니느웨를 들어서 너희를 징계하는 그런 수고는 당장에 그칠 것이다. 이 간단한 진리를 요나 너는 왜 사십 일이 지나도록 깨닫지 못하느냐?”
하나님이 박 넝쿨을 시들게 한 후에 열풍까지 불어제친 뜻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당장 장막을 걷어치우고 조국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가서 그 악독한 니느웨가 회개하니까 여호와가 재앙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상을 파괴하고 여호와께 순전한 제사를 드리며 율법대로 거룩하게 살면 하물며 더 큰 복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그럼 니느웨에서처럼 하루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에서 떠나는 부흥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니느웨의 이 부흥은 한 번으로 끝나고 얼마 안가서 다시 이전의 사악한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부흥은 사실상 니느웨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로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려는 반면교사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서의 열린 결론에 이어질 마지막 마디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처음 계시(욘1:2)와 같되 그 대상만 달라질 것입니다. 자기 동족을 향해 “너희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으니 회개하라.” 외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니느웨 같은 이방족속을 동일하게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그 사랑을 이스라엘에게 먼저 베풀었고 그들로 이방에게 전하라고 했으며 신약시대는 로마서9-11장이 말하듯이 이방이 먼저이고 이스라엘이 뒤입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단순히 구원의 순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신자들부터 순전한 믿음으로 세상 앞에 빛과 소금으로 서지 않으면 이 땅은 흑암의 세력에 넘어가 썩는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요나의 차이
성경에 요나의 경우와 여러모로 대비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이 삼차 전도여행을 마감하면서 에베소를 비롯해 두로와 가이사랴 등에 들려서 성도들과 교제를 나눈 후에 오순절에 맞춰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사건입니다.(행20,21장) 그런데 바울이 가는 곳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성령의 증거를 받았습니다. 바울 본인이 아니라 각 교회의 형제들이 똑같이 그런 계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다시는 바울을 보지 못하리라 여기고 울면서 함께 기도했고 바울더러 올라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 앞으로 어떤 환난과 핍박이 기다릴지라도 죽음을 각오하겠다고 합니다.
요나와 바울 둘 다 하나님의 일을 행해야 하고 그러면 고난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또 두 사람 다 음부의 문턱에까지 갔다 온 경험들이 있어서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듣고도 자기 생각과 달라 전혀 수긍하지 않고 죽어도 좋다고 고집 부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자기 스스로 계획하고 서원한 일인데도 죽어도 좋으니 빨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했습니다.
사역의 자세가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요나는 믿음이 약해 불순종했고 바울은 믿음이 강해 순종했다고 쉽게 판단해선 안 됩니다. 믿음을 그렇게 만능통치약으로 무슨 일에나 갖다 붙이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지 않고 게으름 부리면서도 믿음이 약해서라고 변명하면 끝입니다. 지금껏 우리들이 계속 써먹은 허울 좋은 핑계입니다. 평생 그러다가 나중에 천국에서 주님을 직접 대면해서도 그 핑계를 대다간 주님의 게으로고 악한 종이라는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천국 보좌 앞에는 숨을 만한 쥐구멍이 없습니다.
바울은 성령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형제들이 만류하는데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바울도 요나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고집을 세운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이사랴의 전도자 빌립의 집에서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선 이 띠의 임자인 바울을 동족인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손에 넘겨준다고 예언했습니다.(행21:11)
알다시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극적으로 회심하고 사도로 세워졌습니다. 그 때 주님께 받은 평생의 소명이 바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행9:15) 세 번의 선교 여행으로 각지에 세운 교회에는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 교인들이 더 많았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도 이방인 선교와 관련된 목적이 둘이나 있었습니다. 첫째 당시 기근 등으로 큰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헌금을 마게도니아 지역의 교회들로부터 받아서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방 지역의 교회들에 맺힌 선교의 열매들에 관해 교단본부 격인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할 작정이었습니다. 모교회와 곳곳의 이방인 교회들이 땅 끝까지 선교하는 일에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넘겨질 것이라는 아가보의 예언을 듣자 앞으로 닥칠 핍박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는 없지만 그런 가운데도 이방인 전도의 소명을 실현할 기회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실제로 결박당할 것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 계기가 되어서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비록 자택에 연금되었지만 이년 동안이나 로마의 이방인 지도층들에게 복음을 자유롭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형제들이 성령으로 예고해준 것을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환난과 핍박을 각오하라는 사랑어린 경고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니느웨를 아끼는 여호와의 마음을 바울도 품고 있었기에 담대히 핍박에 맞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족이 자기를 결박해서 이방인에게 넘긴다는 경고를 들었을 때에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이 땅의 공사역을 마감하고 십자가에 올라가셨던 모습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주님처럼 십자가에 바로 달리는 것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넘치는 은혜이므로 자원해서 거꾸로 달려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바울도 자신의 사역을 주님과 동일한 모습으로 마감할 수 있다면 그만한 영광이 없다고 여기고 가슴이 떨렸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눈물어린 만류에도 주 예수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요나도 처음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받자 가까운 지인들과 의논했을 것입니다. 동료들은 틀림없이 이구동성으로 원수 니느웨는 심판 받아 마땅하니 그 명령에 따르지 말라고 권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랍시고 자기들끼리 니느웨는 절대 용서 받지 못할 천하의 죄인으로 정죄하고 심판을 확정해버린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의 뜻을 이해 못했을 리는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끝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니느웨를 아끼는 마음에 자기 마음이 도무지 따라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요나는 바울과 달리 하나님의 불신자들을 향한 그 안타까운 마음을 자신의 소명으로 실현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서가 말하는 진짜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자기 가슴에 가득 채운 자만이 소명자로서 충성된 삶을 살 수 즉, 주의 자녀로서 최고의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죄송하지만 이는 아주 잘못된 신앙으로 목회자들이 믿음에 대해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탓입니다. 모든 신자에게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서 그대로 행하게 하라는 소명을 다 주셨습니다. 그 동일한 소명을 실현하는 방식만 사람마다 다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크게 둘로 나눠지는데 직업으로 삼아 평생 동안 헌신하는 사역자와 세속의 직업을 통해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실현하는 일반신자입니다.
그런 확고한 소명 의식을 갖고 헌신하는 목회자와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현실적 고난과 세상으로부터의 핍박까지 포함해서, 당연히 주님께서 그 소명이 달성될 수 있는 모습과 방향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신자는 그래서 바울처럼 현재의 모든 상황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중심으로 묵상 판단하면 하나님의 징조, 뜻, 계획 등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와 고난을 두고 기도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그 기도의 응답을 위해 역사해주십니다. 문제는 그 응답되는 시기와 방식이 우리 생각과 다를 뿐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기도한 대로 응답되어야만 한다는 고집을 완전히 버리고 오직 그분이 인도하시는 모습이 어떠한지 천천히 잘 따져보면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는 것은 요나처럼 모든 사건과 여건을 자기 욕심과 감정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를 어디로 이끌고 싶어 하는지 그분의 관점에서 천천히 따져보면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그분의 길과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찬란한 빛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는 삼일 간 눈이 멀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방불한 체험을 통해서 그의 옛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은혜였습니다. 특별히 눈을 멀게 한 것은 율법의 최고 권위자였지만 막상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대해선 영적으로 봉사라는 사실을 깨우쳐준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어리석고 지혜가 없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관계 속에 반드시 드러내주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아니하며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 뜻대로 살기로 헌신하고 있다면 다른 모든 길은 다 막으시고 한 가지 길만 열어서라도 당신을 따라가게 만들어 수십니다. 요나처럼 고집스럽게 거역해도 당신의 뜻에 필요하다면 강제적으로도 당신의 일에 참여시킵니다.
말하자면 작금의 코로나 사태에도 우리에게 계시하려는 하나님의 뜻도 그로 인해 발생한 여러 현상 가운데에 특별히 가장 두드러진 일 안에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다 깨닫고 계시고 그간의 강해에서도 조금씩 말씀드렸지만 크게 네 가지만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코로나 사태의 네 가지 특성
누구나 알 수 있는 가장 뚜렷한 현상은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는 언택트(Untact) 시대가 된 것입니다. 최대한 외출하지 말아야 하며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 마스크를 쓰고 6피트 이상 떨어져서 잠시 만나고 치워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피부를 맞대고 교제하고 함께 일을 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두 절감했습니다.
미국에서 애완동물 사업이 코로나로 인한 극심한 불황 가운데도 크게 성장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니까 동물과도 교통하고 싶었던 것이며 애완동물은 주인에게 순전한 사랑과 충성을 보이기 때문에 더 그럴 것입니다. 지난 추수감사절에 미국 정부의 전염병관리 총책임자가 올해만은 제발 가족들 만나러 여행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으나 한국의 추석처럼 예년 수준으로 전국적인 대이동을 감행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 되자 죽음의 냄새에는 둔감해지는 대신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냄새가 너무 그리워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잠복기간이 지난 지금 폭발적으로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으며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또 큰 걱정입니다.
언택트 시대를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은 온전한 사랑의 컨택트(contact) 시대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신자부터 교회 안에서 분쟁한 것, 이웃은 물론 성도들과 화목하지 못한 것, 그래서 세상 앞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크게 훼손되게 만든 것, 요나처럼 하나님의 마음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원수를 용서하지 못한 것, 이방에 복음을 제대로 전파하지 못한 것 등등 철저하게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언택트로 본의 아니게 교회가 소규모 모임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된 것도 이웃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요나서의 가르침을 실현하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이번 사태의 궁극적인 원인은 국가 간의 무한 경쟁으로 인해 자연을 훼손시킨 것입니다. 지구온난화로 최근 북극지방의 얼음이 녹으면서 그동안 냉동되어 있던 고대 바이러스가 녹아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백신이 드디어 개발되어 금주부터 접종이 시작되었기에 이 사태는 언젠가 종식될 것이지만 오염된 자연을 빨리 회복시키지 못하면 더 심한 바이러스가 또 나타날 것입니다.
교회가 영혼 구원만 행하면 된다는 폐쇄적인 종교기관으로 남아 있어선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 가장 먼저 지켜내야 할 것은 생명의 고귀한 의미와 가치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주신 명령도 당신을 대신하여 이 땅을 아름답게 다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세계관은 성경에만 명시된 기독교 특유의 소명입니다. 교회와 신자는 지구를 아름답고 활기차게 보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합니다. 특별히 또 시급하게 젊은 청년들에게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르쳐서 무신론과 진화론에 따라서 돈이 최고이자 전부가 된 이 완악한 세태에 맞서도록 양육시켜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이 땅을 외면하고 천국으로 도피하려는 시도가 아니며 남이야 어떻게 되던 나 혼자 구원 받으면 된다는 이기적이고 영악한 종교 수단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진심으로 겸비하게 자기 전부를 바치는 순간 천국은 이미 보장되었습니다. 성령님이 평생토록 함께 해주셔서 우리를 거룩하고 신령한 인생으로 반드시 바꿔주십니다. 신자가 행할 일은 이 땅을 정말로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기에 아름답고 의미가 있는 사랑의 공동체로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셋째는 많은 이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인생에 대한 무상함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자들마저 자신의 삶의 안전을 염려하고 믿음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허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드디어 코로나가 미국의 사망률 일등으로 올라섰고 이번 주는 하루 사망자가 911사태나 진주만 기습 때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누차 강조한대로 십자가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단순히 그들에게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서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우선 저는 가능한 빠른 시간에 백신을 맞을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아니고는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없습니다. 죽음을 뛰어넘어서 영생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뿐입니다. 그 은혜가 실감나게 전해지려면 바울처럼 옛 자아는 완전히 죽고 예수님의 십자가 새 생명으로 살고 있어야 합니다. 궁핍하든 부요하든 주님의 권능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도 힘들고 때로 외부 핍박도 받지만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겪는 환난이나 죽음이라면 기쁨으로 감당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 흑암의 세력에 맞서 싸워라.
넷째로 두드러진 현상은 불신 세상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도 우울증 같은 심각한 정신 질환이 많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미 그런 현상이 만연하고 있었는데 코로나 사태로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고 또 대폭 늘어난 것입니다. 일 년 가량 언택트가 지속되니까 믿음이 좋은 신자마저 정서적 불안이 심각해지고 일부는 실제로 심각한 증상을 겪고 있습니다.
뇌도 피가 통하는 세포로 구성된 육신으로 분석과 실험이 가능한 생체조직입니다. 외부에서 지속적이고도 강한 스트레스를 받고서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면 뇌 안의 호르몬 분비에 불균형이 발생합니다. 생각과 마음을 관장하는 생리적 체계에 잘못이 생기면 당연히 정신적으로도 이상 현상이 발생하여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으로 발전합니다.
지금까지는 정신질환을 무조건 사탄의 장난에 의한 영적 현상으로 여기고 기도와 말씀으로 이기려 했습니다. 비유하자면 맹장염을 기도로 고치려는 시도와 다름없기에 그럴수록 시간만 낭비하여 증상을 더 악화시키게 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현격한 증세 중의 하나도 환각과 환청으로 밤새 고통을 겪는 것이라고 합니다. 뇌에까지 바이러스가 침투했거나 종합적인 생리활동의 부조화로 뇌 조직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신적으로 이상한 증상은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엡4:26)고 경고한 대로 사회에서 고립된 채로 한 가지 감정이나 생각에 예민하게 함몰된 사람들에게 훨씬 많이 일어납니다. 또 그런 우울증이 생기면 필연적으로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하고 스스로 사회와 단절합니다. 이웃끼리 예수님의 온전한 사랑으로 섬기지 못하면 사회에서 격리되는 정신질환자들이 자꾸만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주로 누구를 만나서 진정한 교제를 나눴는지 신자라면 잘 알지 않습니까?
작금 사람들이 까닭도 대상도 확실하지 않는 미움과 증오를 쌓고서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우리 편 너희 편으로 나눠 원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거짓의 아비이자 참소자인 사탄이 배후에서 작동한 것입니다. 사람들로 소외감 자격지심 공허감 무력감 등을 심어주고 그것에 묶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포도원을 흔드는 여우처럼 공동체마다 사탄이 개입해 사람 사이를 교묘하게 이간시키고 있습니다. 정신적 질환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궁극적이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원인입니다.
사탄이 교회 안에서 설친 것은 항상 있었던 일이지만 이젠 본격적으로 정신질환에까지 마수를 뻗은 것입니다. 미국에선 정신질환이 사망률 일등이 되었기에 미국교회들은 그에 대한 교육 상담 치유를 정식 사역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그 부정적인 이미지와 소문날까 두려워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정신질환자들이 꽤 많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전문적인 사역으로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교회와 신자들에게서 순전한 십자가 복음의 생명력이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문화와 타협하고 세속의 인본주의적 가르침들이 설교나 성경공부를 대체했습니다. 예컨대 코로나 사태에 대해서 신자들마저 조금만 합리적으로 따져보면 말도 안 되는 거짓 뉴스나 음모론인 줄 알 수 있는데도 무작정 SNS로 퍼서 나르고 있습니다. 사탄이 마음 놓고 설칠 수 있는 바탕을 교회와 신자들이 자진해서 깔아주고 있는 셈입니다. 순전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만 의지해야 합니다. 거짓의 아비요 참소자인 사탄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진리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넷 외에도 코로나 사태로 신자 개인에게 또 각 개별교회에 주는 은혜, 각성, 가르침, 회개, 감사, 경배, 기도할 내용들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가 서있는 자리에서 십자가 복음의 소명의식으로 살펴본다면, 아니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만 해도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뜻을 안다면 어떻게 그대로 순종 헌신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믿음이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요나서의 결론대로 하나님이 불신 세상을 아낀다는 그 마음에 동참하고 그 마음을 실제 자기 삶에서 구현해 내는 씨름입니다. 목회자이든 일반 신자이든 그 대상이 동족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다른 모임에 비해서 유독 교회모임만 통제 관리 받는다는 억울하고 불공평한 측면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장 죽어도 마땅한 요나를 진리의 말씀으로 타이르기만 하고 열린 마음으로 요나서를 끝마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활짝 벌린 두 팔 안에선 세상의 모든 죄악을 녹여버릴 수 있습니다.
신자도 세상을 향해서 열린 마음으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교회는 절대적 진리에선 끝까지 세상과 타협해선 안 되지만 그 외의 일상적 삶에선 예수님처럼 모두를 품고서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바울처럼 손해 보며 희생할 수 있으나 바로 그것이 하나님에게 신자가 받을 진정한 복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 정말로 감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앞으로 더 심한 바이러스가 나타나겠지만 이번에 예방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잘 대처할 수 있는 방안들을 훈련한 셈입니다. 신자들로선 이번 같은 전 지구적인 재앙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고쳐나가면 앞으로 언젠가 닥칠 대환난도 십자가 복음으로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12/13/2020)
게으르고 이 악한 종 주님앞에 회개합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시고 자유로운 신체를 허락하시고 무엇보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다른 불신자들보다 먼저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음에도 주신 그 신령한 복과 은혜를 내안에만 가두어 안도하며 안일했던 지난날의 어리석고 미련했던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
빛과 소금으로서 주님의 향기를 품어내는 복의 통로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그 영광된 특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내 주위에 담대히 전하는 그 영광스러운 일, 그 진정한 복을 감사와 기쁨으로 순종토록 저를 항상 이끌어 주옵소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