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3:1-5) 단답형 믿음인가? 논술형 믿음인가?
요나서 강해 (7)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욘3:1-5)
온전하지 않는 니느웨의 순종
고래 배속에서 삼일 간 죽었다 살아난 요나에게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이 임했습니다. “내가 네게 명한 바”(2절) 즉, 그가 거역했던 첫째 명령대로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처음 그 계시를 받았을 때는 이스라엘 민족의 악독한 원수를 하나님이 용서해주신다는 것이 너무 싫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직통계시를 받고도 니느웨의 정반대 편이자 당시로선 땅 끝인 다시스로 도망간 것은 대놓고 당신을 아주 우습게 여긴 꼴입니다. 이번 일만은 뭔가 하나님이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죽으면 죽었지 따르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막상 고래에게 산 채로 삼켜지자 죽음이 너무 두려워졌습니다. 하나님에게 이번 한 번만 살려주면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서원했고 그대로 응답받았습니다. 요나로선 기도한 대로 제2의 인생을 살 기회를 허락받았으니 군말 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복했을지는 의문입니다. 니느웨에 대대적인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자 요나는 “매우 싫어하고 성냈습니다.”(욘4:1) 서원까지 해놓고 하나님의 명령을 또 거역했다간 당장 심판받을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순종은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여전히 요나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능력에는 완전히 항복했어도 그분의 뜻에는 완전히 수긍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나의 생각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봐주자면 니느웨를 회개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은 선하다고 수긍했으나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날 리는 없다고 본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옳은 절대적 진리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 진리대로 세상이 돌아가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도 인간 사회에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 같은 모습이 너무 많이 나타나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첫째 명령은 “니느웨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기에 쳐서 외치라”는 것이었기에(욘1:2) 구원보다 심판이 강조되는 메시지였습니다. 요나로선 하나님이 어차피 심판할 것이지만 불시에 심판하면 너무 잔인하니까 40일 간 준비 기간을 주겠다는 사전 통보로 그치겠거니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요나의 당시 심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긴 전하되 완전히 수긍하지 않고 마지못해 수행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진정성이 부족한 메시지인데도 어떻게 니느웨가 단 번에 회개할 수 있었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니느웨에 임한 초자연적인 징조들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읍”(3절)이라 걸어서 한 바퀴 도는데 사흘이 걸렸습니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니느웨는 둘레가 약 96킬로미터이고 1500개의 탑이 있었고 성벽 위로 전차 세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성읍에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라고 말했습니다.(욘4:11) 하나님이 아낀 사람을 두고 니느웨 백성들 전부, 이성적 분별력이 없는 아이들, 도덕적으로 의롭지 못한 자들 등으로 해석합니다. 셋 중에 어느 경우가 되었던 성 안에 수십만 명이 살고 있었고 고대에서는 엄청나게 큰 도시였습니다.
그 큰 성읍에서 요나가 딱 하루만 메시지를 전했는데도 니느웨 백성들이 대대적으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었습니다.(5절) 원어로 따지면 단순히 심판이 두려워서 회개하는 시늉을 한 것이 아니라 요나가 전하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금식을 행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 것도 진정한 회개의 표시였습니다.
억지로 전해진 메시지가 마음에 찔림을 줄 수도 없을 텐데도 참으로 놀랍고 신기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 배후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진리는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가장 원론적이고 간단한 설명입니다. 그 권능이 어떻게 실현되어서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 구체적으로 따져봐야 합니다.
니느웨에 BC 765 년 큰 역병이 일어났다고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위생 상태와 의료기술이 열악했던 고대에는 전염병이 일어나면 엄청난 희생자가 생깁니다. 정상으로 회복되려면 상당한 기간이 걸립니다. 오래 동안 죽음이 일상사가 되었기에 사람들은 영생을 소망하면서 죽음 이후의 구원이 염려되었을 것입니다.
마침 그 2년 후인 BC 763 년에는 일식 현상까지 생겼습니다. 고대에는 일식 같은 신비한 자연현상은 신의 특별한 .움직임이 곧 있을 것이라는 징조라고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때에도 동방의 현인들은 별의 특별한 움직임을 보고 메시야가 도래했다고 확신하고 예루살렘까지의 그 먼 여행길에 나섰습니다.(마2:1,2) 니느웨 백성들은 일식을 보고는 그 때까지도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전염병이 신이 자신들을 심판한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물론 이 일들이 요나가 도착하기 전에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나는 북왕국에서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한 BC 782년에서 BC 753년 사이에 활동했으니까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학자들은 니느웨의 회개가 여러 역사적 정황상 앗수르의 앗수르단 3세 치하 BC 771-754 년에 일어났다고 즉, 역병과 일식이 있었던 시기와 겹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요나 본인에게 드러난 권능
미국의 존 맥아더 목사가 자신이 저작한 스터디 바이블에 본문에 대해서 흥미롭게 주석해 놓았습니다. 고래 배속에서 삼일 간 있는 바람에 그 위액에 포함된 위산으로 인해서 요나의 얼굴과 손이 표백되어서 아주 희었을 것이라고 했는데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거기다 다시스로 가는 배에서 일어났던 일이 니느웨 백성에게 이미 전해졌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고대의 배들은 항구마다 기항해서 선객과 화물을 내리고 태웁니다. 요나가 제물로 바쳐지자마자 풍랑이 곧바로 멈췄기에 인근항구에 내린 니느웨 사람이 그 신기한 사건을 사람들에게 이미 이야기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요나로선 여러 힘든 일로 탈진한 상태에서 기력을 정상으로 회복해서 니느웨에 도보로 도착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테니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 선객이 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제철이 아닌데 갑작스런 태풍으로 모두 죽음 직전까지 몰렸기에 누군가 신의 노여움을 샀다고 판단했습니다.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제비를 뽑았더니 여호와를 믿는 유대인 요나가 걸렸고 그가 바다에 던져지자마자 풍랑이 잠잠해졌다는 것입니다. 큰 고래가 갑자기 나타나 여호와를 거역한 죄인인 요나를 통째로 집어삼킨 일도 말했을 것입니다.
니느웨로선 초자연적으로 신비한 일인지라 유대인의 신은 엄청난 권능을 지녔다고 인정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믿는 우상 신들은 아무 능력도 없고 직접 교통도 되지 않기에 여호와와는 아예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어쩌면 다들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말도 안 된다고 무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소문으로 듣던 요나라는 사람이 하얗게 변색한 얼굴로 성중에 나타났습니다. 고래에 삼켜졌으니 완전히 죽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멀쩡히 살아났습니다. 얼룩덜룩 탈색 된 얼굴이 고래에게 삼켜졌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요나에게 진위여부를 질문했고 그도 사실 대로 이야기해주었을 것입니다.
요나 사건은 황당한 소설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정말로 여호와의 엄청난 권능이 피부에 와 닿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 전에 역병과 일식까지 있었다면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만큼 간이 큰 자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으로 구출해 냈습니다. 그 때도 그 엄청난 스토리는 인근에 널리 퍼졌는데 심지어 여호수아가 40년 후에 여리고를 정복할 때까지도 가나안 백성들로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기생 라합이 두 정탐꾼에게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수2:9)라고 실토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요나가 메시지를 전하기 전부터 여호와에 대한 소문이 니느웨 성안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전염병과 일식은 제외하고도 태풍, 고래,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소문 등등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이 다 준비하고 행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상을 찡그리고 억지로 당신의 계시를 선포했었어도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어쨌든 당신의 뜻을 전해야 할 사람은 있어야 하니까 요나더러 전하게 한 것입니다. 요나는 엄밀히 말해 하나님이 성령으로 주신 말씀을 인간의 소리로 바꿔서 울려내는 스피커 역할만 행한 것입니다.
요나의 믿음
그렇다고 요나의 믿음을 가볍게 봐선 안 됩니다. 원수의 나라 앗수르 제국의 수도에 단신으로 들어가서 종일 걸어 다녔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는 심판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대히 전했습니다. 주목해야 할 사항은 그들 신들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믿는 여호와가 너희를 심판할 것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만약 한창 역병이 돌 때였다면 정말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볼 때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지배를 줄곧 받아온 미개한 식민지 백성에 불과합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고대에선 국력의 우열과 전쟁의 승패는 각 나라가 믿는 신들의 능력에 달렸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에게 꼼짝 못하니까 여호와도 자기들 신에 비하면 아주 열등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던 차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에게 자기들 신인 아누, 벨, 에아 등을 믿으라고 강요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아프리카의 소국의 한 주술사가 미국에 와서 자기들 신을 믿지 않으면 사십일 후에 미국을 심판한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평소의 니느웨라면 콧방귀도 안 뀌었거나 당장 그 자리에서 칼로 쳐서 죽였을 것입니다. 요나도 그래서 지금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하고 메시지를 선포한 것입니다. 자기를 해코지할지 몰라 두려운 데다 쉽게 믿을 리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자연히 목소리는 기어들어 갔을 것입니다.
요나가 당시 중근동에 통용되는 아람어로 메시지를 전했겠지만 아무래도 악센트나 표현이 어색하고 얼굴도 일그러져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걱정과는 달리 오히려 그런 것들 때문에 니느웨 사람들은 아주 흥미롭고 신비감까지 느꼈을 것입니다. 요나는 마지못해 예언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그 메시지가 이방 백성들의 심령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도록 무대 장치를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마침 주전 8세기에 앗수르는 북방의 신흥국가인 아라랏과 오래 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국력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전염병이나 일식과는 무관하게 이미 자기들 신의 힘이 많이 약해졌다고 여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 요나의 너무나 시건방지고 불경한 메시지를 듣고도 섣불리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주의를 기울여 경청했던 것입니다.
출애굽 때 가나안 백성이나 지금 니느웨 백성이 여호와를 두려워한 공통적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능력이 엄청나게 컸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출애굽 때는 열 가지 재앙이 이스라엘이 살던 고센 땅에서 멀리 떨어진 나일 강가 애굽 본토에만 임했습니다. 고센 땅을 탈출하여 광야로 넘어 왔는데도 홍해를 마르게 했습니다. 요나 사건도 가나안 땅을 떠나 멀리 다시스로 가는 배에서 일어났습니다. 지역과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는 여호와입니다.
무엇보다 여호와는 두 번이나 바다 물을 호령하여 잠잠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방 족속들은 해와 달, 큰 바위나 나무, 바다 같은 피조물 자체를 숭상하지만 여호와는 지금 그 모든 것들을 직접 다스렸습니다. 이젠 자연현상마저 손쉽게 바꿔가며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 인도하는 신입니다. 니느웨로선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입니다.
그런데 그 신의 선지자가 나타났는데 어떤 신상도 지니지 않고 특별한 주술 행위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기도도 하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의 말씀만 선포합니다. 가뜩이나 여호와에게 간담이 녹아져내려 있는 판국이라 그 말씀을 듣기만 했는데도 심령에 깊은 울림이 생기고 저절로 회개하려는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들 사회에선 여호와를 믿으려 개종하는 것은 가장 수치스럽고 비겁하며 연약한 짓이자 자기들 나라와 신들을 배반하는 최고 큰 죄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서 회개했습니다. 더 놀랍게도 아무도 서로 비방 멸시하지 않았고 그 사회에서 소외 추방시키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이가 진심으로 여호와의 권능 앞에 항복했기 때문이며 또 그러자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평강과 안식이 임했던 것입니다.
최고의 기적
초등학생들은 객관식이나 단답형 문제로 시험을 치릅니다. 본문에서 객관식 문제는 니느웨를 회개시킨 것은 여호와, 아누, 벨, 에아 중에 누구인지 체크하라는 것입니다. 단답식 질문은 니느웨를 회개시킨 신은 누구인가입니다. 둘 다 정답은 당연히 여호와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원론적 진리에만 머물면 초등학생 수준의 믿음입니다.
성경에 언뜻 동화처럼 여겨지는 요나서가 포함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동화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는 힌트가 곳곳에 숨겨져 있으니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나의 인생은 물론 그를 통해서 인간사회를 통치하는 원리를 깨닫고 그에 합당하게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들더러 하나님의 깊이, 높이, 길이, 넓이를 최대한 정확히 재어서 그분에 대해 논술 형으로 진술해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선 어떤 논술 형 답변을 작성할 수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이 오래 동안 모든 방안을 동원해서 니느웨로 회개할 마음이 들도록 미리 만들어놓았다는 것입니다. 국제정세를 주관하여 아라랏과 전쟁으로 앗수르의 국력은 소진시킨 대신에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는 강성케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최고로 큰 피조물이자 지구 전체와 그 안에 사는 모든 생물의 삶과 죽음에 영향을 미치는 해와 달조차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때에 맞춰서 일렬로 세우셨습니다.
그와 정반대로 현미경으로 봐야 겨우 보일까 말까 하는 바이러스 하나로 당시 세계 최강국 앗수르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요나가 틀림없이 상을 찌푸리면서 메시지를 전할 것까지도 아시고 고래 위액으로 화장해서 신비감을 보태었습니다. 요나가 어눌한 아람어 말투로 메시지를 전해도 성령의 권능이 실리게 했습니다.
여러분 세밀하기로 치면 세균 하나로 그 강대국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듯이 인간이 도저히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세밀하십니다. 광대하기로 치면 해와 달을 맘껏 움직였듯이 인간이 꿈도 꾸지 못할 만큼 광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수백 수천 년 동안 그 세밀하심과 광대하심이 결코 서로 상충하지 않고 완벽하게 조화롭게 작동하여 단 하루 만에 모든 이들로 당신 앞에 항복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분임을 실감할 수 있습니까? 바로 그런 분이 지금 일생 동안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여러분의 삶과 일생을 거룩하게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있습니까? 최소한 온전히 믿고는 있습니까?
무엇보다 그분이 일으키신 모든 기적 가운데 본문의 기적이 가장 경이롭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지상에서 최고로 완악하고 악독하며 잔인했던 민족이 억지로 전하는 요나의 메시지 한 번 듣고는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당신 앞에 엎드렸습니다.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도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그 마음을 일순간에 뒤집어버렸습니다. 한 개인이 스스로 자기 마음을 뒤집는 것도 불가능한데 인간끼리 서로 합의 의논해선 죽었다 깨어나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응하도록 만들어졌으나 인간만은 끝까지 당신을 거역하고 원수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당신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로 인간을 진심으로 회개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간 요나를 회개시키고 또 그를 사용해서 니느웨로 회개케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가진 공의의 기준으로는 요나는 처음 거역했을 때에 심판받았어야 했고 니느웨도 그대로 두어서 멸망당해야 마땅한데도 말입니다. 인간의 눈에 백 퍼센트 정상적인 일을 거꾸로 백 퍼센트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바꾸었으니 이만한 기적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도 우리 눈에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고 여겨지는 일들에 사실은 하나님의 더 오묘하고 거룩하신 뜻과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진정으로 회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가장 비정상적인 일이자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큰 기적이라는 뜻입니다.
논술형 답안의 결론
하나님에 대한 본문의 논술 형 답안에 포함되어야 할 중요한 사항 하나가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한 사람의 헌신된 종을 찾고 또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믿음이 좋아서 당신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능숙하게 전할 자여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자면 충분합니다. 유일한 자격 조건은 세상으로부터 어떤 비방 반발 수모 미움 학대를 받더라도 담대히 실천할 수 있는 자여야 합니다. 신학적 지식과 기독교 교리에 능통한 자는 불신자들과 말싸움 밖에 하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요나는 소리통의 역할만 했습니다. 소리통을 우습게 여기면 절대 안 됩니다. 들어온 목소리를 단순히 볼륨과 음색만 조절할 뿐 그대로 다시 내봅니다. 받은 계시를 철자 하나 틀리지 않게 선언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2절)고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전할 때 틀릴 수 없도록 아주 간단하게 명했습니다. 회개하여 당신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사십 일 내에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더러 소리통 역할만 하라는 것은 사람들로 그 소리에 제대로 반응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책임 하에 당신께서 행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너는 내가 말한 것을 똑같이 복창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 그렇게 되도록 이미 다 알아서 예비해 놓았습니다.
최근의 코로나 사태는 인간의 죄악과 탐욕으로 인해 지구가 온난화된 것이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고 또 그로 인해 이전 바이러스들보다 모든 상황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모두가 당장의 죽음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와 신자들은 불신세상으로부터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박해까지 받고 있으니 억울하다 못해 야속하고 미워지기까지 합니다. 세상은 니느웨와 신자는 요나와 판박이처럼 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재앙 앞에 신자가 행할 바도 요나서에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회개하여 당신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반드시 심판할 것이라는 한 가지 단순한 메시지를 담대하게 전할 자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리통처럼 십자가 복음을 절대로 변개 수정 타협 왜곡하지 않고 순전하게 그대로 가르칠 목회자들은 더 간절히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논술형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길은 그분과 동행하는 체험뿐입니다. ‘안다’는 히브리 단어의 뜻도 부부가 살을 맞대고 수십 년을 사소한 것에서 아주 큰일까지 아웅다웅 다툼하면서 서로를 속속들이 다 알 듯이 그렇게 아는 것입니다. 지금 요나가 전하는 메시지는 아주 간단했으나 모든 정황상 고래 배속에서 죽었다 살아나는 체험이 없었다면 쉽게 행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메시지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느냐 면하느냐는 것인데 요나야말로 가장 적임자였으며 요나를 그렇게 만드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로 맺어진 그분의 백성입니다. 그분의 살아 역사하는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야 그분의 은혜를 누리고 무엇보다 그분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 한마디라도 실천하는 것이 제자훈련 지도자 반을 수료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적으로 경건한 일이며 믿음도 견고해집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의 여정이 각자 다르고 현재 처한 상황도 서로 다릅니다. 하나님과 순종하는 체험의 내용과 의미도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럼에도 모든 신자가 십자가 예수님의 긍휼 앞에 항복하지 않으면 죽음 이후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참 인간답게는 절대로 살 수 없다는 진리 하나는 철저히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서 아무 소망이 없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실제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죽어있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게 여겨지고 나에게 기적을 일으킨 그 십자가 복음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어집니다. 바울이 빌립보 간수에게 전한대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간단한 메시지면 됩니다. 말솜씨가 부족하면 이전과는 완전히 달리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라도 얼마든지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입에서 나간 말씀을 절대로 실현되지 않은 채 땅에 떨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진리의 말씀이 일단 선포되면 그 말씀 자체에 영적 권위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신께서 그 진리 됨을 확증해야 하므로 반드시 성령이 강력히 역사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주관하셔서 전해지는 메시지가 먹힐 수 있게끔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놓습니다. 코로나 사태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생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니면 윤리적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삶의 무게를 못 이긴 정서적 불안정이 생기기도 하고, 사람 사이에 상처를 주고받으며, 중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으며,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가정의 부부 사이의 어려운 문제 등 하나 같이 불쌍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복음이 그 심령을 찔러 쪼갤 수 있도록 하나님이 틈새로 미리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진솔한 말로 들려지면 마치 큰 얼음덩어리가 바늘 하나만 꽂아도 둘로 쪼개지는 것 같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순수성이 교회와 신자에게서 사라지거나 퇴색되는 순간 세상에서는 특별히 코로나 같이 재앙의 시대에는 빛이 더 빨리 사라지고 흑암은 더 많이 설치게 됩니다. 비록 영적으로 미숙하고 수시로 하나님을 거역했었고 이번 사태가 온전히 이해되지 않아도 영원토록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십자가 예수님은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요나 같이 세울 수 있기에 코로나 사태를 허락했습니다. 특별히 논술형 믿음을 가진 신자들이 바로 선다면 반드시 새로운 영적 부흥을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죄로 타락한 세상이 아니라 신자와 교회가 순전한 복음 위에 바로 서있느냐는 것입니다.
11/1/2020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시107:8)
할렐루야~ 한시도 쉬지 않으시며 일하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아버지의 그 행하심은 높디 높으며 그 길은 저희와 달라 감히 상상치 못하나,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알기에 언제든 어떤 상황이든 감사드리며 기뻐 찬양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뜻에 합한 자녀되어 쓰임받는 세상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영광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