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28-32) 하나님 때문에 세상이 더 나빠진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4)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1:28-32)

 

두 얼굴의 사나이

 

미국 CBS TV에서 1977년부터 방영한 “두 얼굴의 사나이”라는 시리즈가 오랫동안 전 세계적으로 히트했습니다. 온유한 성격의 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위기 때마다 괴력의 헐크로 변해서 약자들을 도와주는 내용이었습니다. 힘과 돈과 권력으로 선량한 자들을 해치려 들면 통쾌하게 응징하고 또 사고나 재해로 위험에 빠진 자들의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모든 이가 바라는 구세주 같은 캐릭터였으니 큰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현실 삶에서 체감하는 하나님도 두 얼굴을 지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문제는 당신의 권능을 그 TV 주인공과는 반대로 사용하는 것 같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천하의 악당들이 큰돈을 벌고 떵떵거리며 사는데도 아무런 형벌도 주지 않으니까 죽을 때까지 형통합니다. 권력을 악용해 사회적 약자들을 착취하거나 부정과 불법으로 치부했는데도 말입니다. 반면에 그들에게 핍박 수탈당하는 약자는 대체로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착하고 온유한 자들입니다. 

 

신자에게도 고난은 수시로 닥치고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것 같고 탈진할 때쯤이야 겨우 숨통이 트일 정도만 해결해 줍니다. 그러다 금방 또 새로운 고난이 생기고 심지어 고난 중에 더 심한 고난이 겹칠 때도 있습니다. 반대로 좋은 일은 가뭄에 콩 나듯이 생기지만 팔자가 바뀔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마치 고난이라는 불치병에 평생 시달리는 것이 신자 인생이며, 그것을 이겨낼 약이라곤 기도만, 그것도 신앙 연륜이 오래될수록 면역이 생겨서 효력이 떨어지는 약을 주시는 하나님 같습니다.

 

하나님께 사치를 전혀 요구하지 않았고 검소해도 되니까 평안하며 즐거운 삶을 살길 기대했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믿음을 포기하자니 하나님께 벌 받을 것 같고 그동안 들인 노력과 시간이 아깝습니다. 무엇보다 가끔은 하나님이 시쳇말로 기도의 ‘약 빨’을 늘려서 좋은 일도 주시니까 계속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신앙을 너무 단순화 일반화해서 비하하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물론 아주 성숙한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헌신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가 믿음으로 행하는 일이 교회 활동뿐입니다. 그것도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는 일은 뒷전이고 자기 문제를 해결 받으려 기도에만 집중합니다. 

 

제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은 성경 통독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본 신자의 숫자를 조사해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온전히 알아나가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 생활에 참여한다 해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역사에 대해 의심 원망해선 안 됩니다. 학교에 개근했으나 수업 시간 내내 졸고만 있다가 선생님에게 왜 시험 문제를 이렇게 어렵게 출제했느냐고 불평하는 꼴이지 않습니까?

 

고난에 관한 간단한 진리

 

성경 통독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는 고난에 대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욥이 이유 없는 고난으로 고민한 때가 약 사천 년 전이었고, 약 삼천 년 전 인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의 시편들을 보면 고난 중에 그분의 침묵에 대해 아주 괴로워했고, 약 이천육백 년 전의 하박국 선지자도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따졌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문제로 갈등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류 역사 이래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특정한 고난에 대한 당신의 뜻을 개인적으로는 명확히 가르쳐주지 않았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신자들의 그런 곤혹한 상태가 지속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면 우리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개인 환난이든 세상 비극이든 맹목적으로 그냥 기도만 할 것입니다. 그러다 아무 응답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만의 깊은 뜻이 따로 있으려니 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도는 성경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이 땅의 인간 사회와 신자의 인생을 공평하게 주관 통치하고 계신다고 선언합니다. 문제는 성경에서 배운 하나님과 현실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얼굴이 계속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별적 환난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몰라도 최소한 그런 착시현상이 생기는 이유라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 하나님 정확한 얼굴을 살펴보기 전에, 많은 신자가 성경 자체에 대한 착시현상도 갖고 있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어떤 형식의 책인지부터 정확히 모르니까 하나님에 대해서도 오해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은 영적인 원리들만 계시해 놓았는데도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심지어 점치듯이 무작위로 펼친 첫 페이지에서 처음 눈에 띄는 구절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도 응답이라고 간주합니다. 물론 아주 드물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러면 마치 신문에 매일 연재되는 오늘의 운세를 읽듯이 성경을 대하는 셈입니다. 그렇게 해선 하나님에 대해 절대 제대로 알 수 없고 자칫 오류와 이단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성경 저자로선 당시 상황과 사건만 저술하므로 현대와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포르노는 물론 담배나 마약 등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죄라고 했고, 바울은 술에 취하여 사탄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현대 신자들도 현대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영적 원리는 성경으로 얼마든지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 공의가 굽어 보이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인 원리도 당연히 성경을 통해 계시해 놓았습니다. 의인의 억울한 고통에 대한 욥과 하박국의 질문에도 비록 해석이 조금 어렵긴 해도 당신의 뜻을 분명히 밝혀 놓았습니다. 그래서 개인이든 공동체든 특정한 개별적인 환난에 대해선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이 일일이 해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성경의 그런 원리들을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의 얼굴에 대한 착시현상부터 고쳐나가도록 합시다. 나아가 현실 환난과 그분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형성하고서 어떤 개인적 환난과 사회적 재앙 앞에서도 그분의 자녀답게 담대하게 대처해서 승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두 가지 통치 방식

 

신자들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의심 원망하게 되는 첫째가는 이유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다 주관한다는 아주 단순하고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대부분의 인생살이를 인간의 자유의지대로 행하도록 일임해 주었습니다. 실제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기도로 하나님께 일일이 허락받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습니까? 

 

인간이 자유의지대로 행하도록 맡기셨다면 세상 고난의 일차적 직접적 책임도 인간에게 귀속됩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자기부터 되돌아봐야 하는데도 거꾸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립니다. 매사를 하나님이 주관 통치한다는 어설픈 믿음의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반드시 종합적 장기적으로 세밀하게 분석해야 하는 인류 공동체나 전체 역사에 실현되는 그분의 공의까지도 그렇게 단순하게 접근합니다. 피부로 실감하는 외적으로 드러난 부정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니까 왜 이렇게 엄청난 재앙이 일어나도록 손을 놓고 있지, 미리 막아주지 못했다면 고통이라도 줄여 주셨어야지라는 표피적인 반응부터 앞섭니다. 무엇보다 성경에 비추어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어리석고 불완전한 인간적 지식에, 특별히 도덕적 기준으로만 하나님의 공의를 평가 판단할 줄밖에 모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원리 하나를 설명해 줍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어서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품고 있던 의문에 대한 결정적인 해답이 되는데, 놀랍게도 공의가 굽어 보이는 이유가 실제로 하나님이 세상을 그대로 방치했기에 더 악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피면 그것은 반(半)쪽의 진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방치했다고 설명했기에, 그 반대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로 방치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님은 당신을 마음에 두는지 따져서 사람을 오직 두 부류로 나누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결국 세상은 눈에 안 보이지만 하나님 그분을 주권자로 모시는 나라와 그분 대신에 인간이 주권자가 된 나라 둘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노골적으로 하나님이 악인을 그대로 버려두어서 세상에 공의가 굽어지고 의인이 억울하게 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셈이니까, 그분을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고 혹시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반대로 하나님이 죄를 지을 때마다 악인을 일일이 벌을 준다고 한번 가정해 보십시오. 온 세상은 24시간 365일 하늘에서 벌주는 레이저 광선으로 태양도 필요 없을 정도로 밤낮으로 훤히 밝을 것입니다. 

 

예컨대 새벽 기도 모임에 가는 권사님이 억울하게 음주 운전자에게 희생되지 않게 하려면 차를 길거리 전봇대로 돌진하게 해서 운전자에게 중상을 입히든지 사망하게 해야 합니다. 요즘 들어서 빈발하는 정신 질환자의 무작위적 폭행을 막기 위해선 그 증상이 도져서 자살해도 되니까 밖에 나오지 못하게 집안에만 가둬놓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인간 세상이 어떻게 될지 너무 빤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목걸이에 묶인 개가 되어서 주인인 하나님께 무조건 복종만 강요당하는 사육장으로 변합니다. 제멋대로 폭력만 행사하는 독재자 하나님 앞에 속마음과는 전혀 다르게 겉으로만 순종하는 척할 것입니다. 그전에 당신에 대해 이런저런 의심과 원망을 하는 자부터 가장 먼저 죽이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비록 자유의지로 타락할지라도 인간을 짐승과 다르게 특별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그 후로도 인간이 아무리 자기 죄악으로 온갖 재앙을 만들어 내도 마지막 날까지 그 자유의지를 빼앗지 않습니다. 인간을 절대로 짐승 취급하지 않고 이성을 갖춘 고상한 인격체로 대함으로써, 자기 의지로 자발적으로 회개하여서 기꺼이 당신께로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불행하게도 인간 세상은 그러지 않은 악인들이 훨씬 더 많고 또 그들의 횡포로 의인들이 억울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정하신 마지막 날의 심판으로 당신의 공의를 일시에 모든 인간은 물론 피조 세계 전체에 완성할 것입니다. 

 

눈에 안 보여도 세상에 두 나라가 있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도 둘로 나뉠 수밖에 없습니다. 살펴본 대로 불신자들로 제 맘대로 행하도록 허용하는 수동적 통치가 첫째입니다. 그 반대로 당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신자를 능동적으로 주도하는 통치가 둘째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하는데 성경은 불신자와 신자를 나누는 기준이 도덕적 의로움이 아니라, 그들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기뻐하는지 아닌지 하나뿐이라고 말합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이 마음에 없기에 제멋대로 행하면서 떵떵거려도 그분의 진노를 자기 머리에 차곡차곡 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마음에 둔 신자들을 당신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통치해 주십니다. 신자더러 당신의 공의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심할 이유나 필요는 전혀 없고, 대신에 세상 앞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해서 악인이 굽게 만든 세상 공의를 앞장서서 바로 잡게끔 인도해 주십니다. 요컨대 성경은 하나님의 이 두 가지 방식의 통치가 바로 당신의 공의를 세우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라고 밝힌 것입니다. 

 

죄악의 보응이 공의다.

 

나아가 하나님이 악인을 방치하는 것이 반쪽의 영적 원리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이 땅에 당신의 공의를 온전히 세우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악인들로 자기가 지은 죄악으로 인한 폐해를 반드시 자기부터 덮어쓰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에서 동성애자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둠으로써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7절)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이 동성애자를 차별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로마 시대에 죄로 타락한 현상의 대표적인 예로 우상숭배 신전에 동성애를 위한 남창과 창기를 두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실제로 동성애자들은 성병이나 에이즈 같은 관련 질병에 걸릴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흔적이 남아 있기에 그들의 정서에 평안과 기쁨이 없고 자기도 모르게 영적으로 눌릴 것입니다. 나름대로 즐겁게 살아가는 그들의 인생에 시비 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감히 추측하건대 그들도 자기 자식이 동성애자가 되었을 때 동의는 해주어도 정말로 솔직하게 따져보면 진심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죄악이 세상의 선을 유일하게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본질적인 속성 때문에 그 결과도 항상 악하게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도박은 반드시 패가망신하고, 사기꾼은 사기꾼에게 더 크게 당하고, 뒤에서 수군수군하는 자는 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하며, 부모를 학대하는 패륜아는 불신자들마저 천벌 받을 것이라고 혀를 찹니다. 죄악을 즐기는 자의 비참한 말로가 어떠한지 굳이 도덕과 종교 교육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TV 뉴스로 접할 수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우리 모두 체험적으로 익히 실감하고 있습니다. 

 

물론 불법과 권력으로 치부해서 세상 쾌락을 끝까지 즐기며 수명대로 장수하며 살다가 평안히 죽는 악인도 꽤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 가는 일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부자가 되려면 어느 정도는 영악한 불법이 반드시 동원되기 마련입니다. 부자가 재물을 쌓는 동안에 짐승이 아니라 정상적 인간이라면 한시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을 것이며, 또 돈만 밝힌 집안이라 부모의 모습을 빼닮은 자식들끼리 유산 다툼하느라 피 흘리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통치하는 존재는 사탄과 하나님, 둘 뿐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들에게 사탄인 자기 대신에 돈을 주인으로 모시도록 미혹합니다. 불신자는 돈이 자신과 자기 일생을 지배하도록 내어 주었기에 평생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물질만 쫓습니다. 자연히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구원과는 담을 쌓고 영원한 심판을 받기 마련입니다. 거액의 복권 당첨자의 말로가 한 명도 올바른 경우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기독교도 세상 핍박 없이 평안할 때는 부패와 타락으로 치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불신자들을 방치해도 이 땅에선 서로 물고 뜯게 되고, 죽어선 지옥 심판이 기다리므로 당신의 공의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을 목걸이에 묶인 개들이 아닌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들이 꾸려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창조 때 모든 사람의 마음에 당신의 형상을 닮은 도덕성을 심어줌으로써 사실상 당신의 공의는 세상에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신학적으로 복잡한 설명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본문 29-31절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악의 리스트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런데 길 가는 아무라도 붙들고 물어보면 누구도 그렇게 살기를 좋아하는 자는 없고 오히려 너무 싫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불신 세상 안에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확실한 증거이지 않습니까?

 

세 부류의 교인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이 죄인 줄 잘 알고 또 싫어하면서도 막상 자기 개인의 형통과 치부를 위해선 그 모든 죄악을 슬쩍 눈감고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과 한편이 되어서 더 큰 악을 자행하고 또 자기들 편의 숫자가 많으니까 오히려 선하다고 최소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이 본문의 결론(32절)에서 선언한 그대로 말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러는 자들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도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롬3:9) 쉽게 말해 교회 안에도 악인이 있다는, 즉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좋아하는 알곡과 싫어하는 쭉정이가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찬가지로 교회 안의 쭉정이들도 상실한 마음에 그대로 버려두어 자기 의지 대로 행하도록 허락하시기에 지금 일부 교회들이 세상으로부터 큰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게 된 연유는 계속 강조하지만,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더 높이려는 원죄가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세 부류의 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길 기뻐하여서 성령으로 거듭나고 그분 뜻대로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경건한 신자와, 당신께서 기쁨으로 구원으로 인도하는 중인 택함 받은 신자와, 끝까지 완악하게 돈만 주인으로 모시며 하나님을 이용만 하려는 종교적 신자가 그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를 교회 안에서라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일일이 셋을 구분해서 상벌을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교회 밖 타락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이마에 주홍 글씨를 새긴 자와, 천국 훈장을 가슴에 달아준 자 둘로 나뉘어졌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당장 모든 인간을 그렇게 차별하는 하나님은 싫고 차라리 모두 개 목걸이를 달고 있는 사육장으로 바꿔 달라고 아우성칠 것입니다. 

 

입이 아프도록 말씀드리는데 세상의 공의는 하나님이 아니라 불신자들이, 정확하게는 일부 신자들도 포함해서, 더 정확하게는 경건한 참 신자마저 때로 죄악을 저지름으로써, 인간이 다 훼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만의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당신의 공의를 바로 세우고 계시는데, 가장 기본적인 방안이 죄악을 일삼는 자부터 죄의 폐해를 가장 많이 덮어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신자를 상실한 마음에 버려두어서 그 폐해를 스스로 짊어지게 했다면, 신자에겐 그 반대로 당신의 공의로운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우선 원죄로 상실되었던 마음부터 성령이 능동적 초자연적으로 간섭해서 완전히 바꿔주십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자기 마음에 두고서 사랑하게 만듭니다. 십자가에 자기 죗값을 대신 갚으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게 하여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가고 싶다는 소망과 열정이 생기게 해주십니다. 무엇보다 평생토록 성령을 내주케 해서 거룩한 삶과 인생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라 당신께서 실현하는 공의도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세 교인 중에 경건한 신자들을 통해서 실현되도록 해주십니다. 지상에 가시적인 조직체로서 완전한 교회는 없는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참 신자들의 모임인 참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이 엘리야 때처럼 당신의 주권적 간섭으로 형성시켜서 이 땅을 공의롭게 바꾸라고 남겨두십니다. 내주하신 성령의 인도를 온전히 따르면 신자 한 명도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불신자가 행하는 죄악의 리스트에 버금가는 신자가 반드시 행해야 할 선행의 리스트도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령의 열매인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를 자신은 물론 이웃과의 관계에서부터, 아니 교회 안에서라도 실현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대로 온전히 실현한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신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겪는 고난도 외부의 불신자들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가 저지른 잘못의 폐해를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중이라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로서 인정하긴 싫어도 엄연한 사실은 불신자들도 싫어하는 죄악의 그 리스트조차 온전히 멀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신자의 인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신자가 때로 상실한 마음에 따라 악을 범해도 그대로 두고서 회개하기를 기다려 주십니다. 그 잘못을 계속 범하면 신자에게 내주한 성령이 대신 탄식하며 간구해 주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거룩해져 헌신하라고 사랑의 징계를 내립니다. 

 

다윗을 보라.

 

욥기가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욥의 세 친구처럼 신자도 남의 환난을 보면 하나님의 공의가 일일이 실현된 것이라고, 즉 자기 죄로 인해 벌 받은 것이라고 판단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 믿음 좋은 장로가 큰 환난을 당하면, 신자들이 뒤에서 그 장로가 겉으로는 경건해도 믿음이 좋지 않은가 보다,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가보다 쑥덕거리지 않습니까? 본문의 수군수군하는 죄를 예사로 범하면서 자신은 종교적으로 아주 의로운 양 행세하지 않습니까? 욥기는 또 욥처럼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막상 자기가 고난 당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물고 늘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밖에서 신자들더러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믿음과 무관하게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서 티끌은, 심지어 하나님에게서조차 잘 찾아내는 선수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다윗을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한 근거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의 인생도 욥 이상으로 고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가 지은 시편을 보면 극심한 환난을 당해 억울한 처지에 빠진 의인의 입장에서 욥처럼 수시로 하나님의 공의를 물고 늘어졌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시73:3-5,13) 다윗은 대놓고 자기는 너무 억울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굽었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오래 기도한 후에 한가지 영적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다 멸하신다고 결론지었습니다. (18, 27절) 다윗은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도 정확히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10,11)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우리 악행을 일일이 벌주는 방식으로 실현하지 않으며, 대신에 인자하게 용서해 주어서 신자더러 거룩하게 성장하게 하는 모습으로 공의를 실현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욥과 비견될 만한 극심한 고난을 겪고 있는 신자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눈물샘이 마를 새 없이 새벽마다 기도의 제단을 쌓아도 도무지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오히려 고난이 더 늘어납니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는 절대로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므로 욥의 친구들처럼 옳고 그름을, 즉 하나님의 공의를 섣불리 따져선 안 됩니다. 똑같이 죄에 찌들고 연약하며 어리석은 인간이 다른 사람의 선악간(善惡間)을 절대로 자기 윤리적 기준에 따라서 또 짧은 성경 지식과 종교적인 개념으로 판단 정죄해선 안 됩니다. 그러는 자가 오히려 하나님의 헤아림을 받을 것입니다. 단순히 그들과 함께 울어주어야 하고, 최소한 그들의 탄식 의심 불만을 끝까지 들어주면서 함께 있어 주는 방식으로 위로해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환난 중에 신자가 취할 태도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그 환난을 통해서 신자 개인에겐 반드시 합력해서 선으로 이끌 것이며, 인간 세상에서도 반드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공의를 굳게 세운다는 소망을 절대 놓지 않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 따라서 신앙을 감정적으로 허비시켜선 안 됩니다.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에 자신의 전부를 걸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신앙적 이슈를 다윗처럼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끈질기게 씨름하면서 풀어나가야 합니다. 반드시 말씀이 먼저여야 하고 그 진리에 따라서 판단해야 합니다. 

 

당장에 현실 고난만 보고서 그분의 공의를 의심하는 배경에는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 특별히 신자에게 비극을 허락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 깔린 것입니다. 신자가 단순히 현실의 비극과 고난만 보고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 원망한다면 그 믿음의 목적도 현실 형통을 추구하는 기복주의가 됩니다. 하나님이 고난과 재앙을 일부러 일으킨 경우는 손꼽을 정도로 거의 없습니다. 대신에 모든 인간을 상실한 마음에 버려둠으로써 필연적으로 생긴 고난에 비록 의인이 힘들어질지라도 끝까지 당신과만 씨름하여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당신의 자녀답게 거룩한 자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두 얼굴이 아닙니다. 영원토록 완전한 공의와 완전한 사랑이 완벽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드러나는 한 가지 얼굴뿐입니다. 자기만 높이려는 원죄에 묶여서 자기와 남에게 이중잣대를 적용하는 그런 두 얼굴을 가진 인간들이, 하나님에게마저 이중잣대를 갖다 대는 바람에 그런 착시현상이 생긴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공의를 문제 삼으려면 왜 내 죄를 공평하게 일일이 처벌하지 않느냐고 따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완벽하게, 그것도 인간이 어질러 놓은 쓰레기 더미를 당신께서 묵묵히 청소하는 방식으로 온전히 세워지고 있습니다.

 

(12/3/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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