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14:1-3) 진심만으론 많이 부족하다.
새롭게 읽는 구약 성경 (20)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호14:1-3)
두리뭉실한 회개
구약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게 전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한결같이 지난 죄를 회개하고 당신의 뜻에 순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소귀에 경읽기”라는 속담처럼 이스라엘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세상 어느 민족도 체험은커녕 알지도 못하는 엄청난 이적들로 보호 인도 받고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라고 한탄했습니다. 결국 흠이 있는 제물들을 받기에 너무 지쳐서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1:10)라고 선언했습니다.
호세아도 이스라엘을 향한 마지막 호소로 “네가 불의함에 엎드려 있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라고 권면했는데, 더 이상 제물을 받지 않겠다는 말라기의 선언과 일맥상통합니다. 호세아는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 활동한 말라기보다 약 300년 앞서 북왕국에서 사역한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완악한 배역은 시대와 상관없이 항상 동일한 모습이었으므로 선지자들의 메시지도 이처럼 같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반드시 정결한 심령을 갖고서 지은 죄를 남김없이 실토 회개해야 합니다. 단지 율법 규정대로 제물의 숫자와 종류만 맞추어 바치는 형식적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오늘날도 그래서 주일 예배를 드리며 신자들은 지난주에 지은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만약에 호세아나 말라기가 살아 있었다면 꾸중할 만한 형식적 회개로 그치는 신자가 꽤 많은 것 같습니다.
호세아는 ‘입술의 고백’이라고 하지 않고 ‘입술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원어는 입술을 제물로 드린다는 의미인데, 다수의 영문 번역본과 일부 한국어 성경은 ‘제물’ 대신에 ‘열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앞에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라고 그 제물의 의미를 이미 밝혀 놓았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했으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모습이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지금 살찐 수송아지를 많이 바치는 것보다 자신을 악에서 선하게 바꾼 모습으로 성전에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또 그래야만 하나님이 그 기도와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선하게 바뀐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가려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부터 정확히 알아서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자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어떤 죄를 범했는지 정확히 고백하지 않고서 두리뭉실하게 회개하고 치웁니다. 주일 예배마다 지난주에 알게 모르게 지은 죄들을 용서해달라고만 말합니다. 공중 예배에서 신자를 대표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다른 신자들도 예배 순서에 따라 제한된 시간 안에 기도해야 하므로 구체적으로 고백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범한 잘못이나 죄가 무엇인지는 마음속으로라도 정확히 알고는 있어야 합니다.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평소에 자신의 어떤 점이 어떻게 해서 죄가 되는지 따져보는 신자들이 거의 없습니다. 막연히 세상 유혹과 시험을 온전한 믿음으로 담대하게 이겨내지 못했다고만 느낍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대로 복음을 주변에 전하지 못했고, 교회에서도 아무 직분을 맡지 않고 있으니까,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다고 여깁니다.
물론 신자들이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그 마음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오면 누구나 두려워서라도 진실하게 되므로 그런 진심만으로는 매우 부족합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구체적으로 알고서 그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훼방이 되었고 나아가 일상생활까지 상당 부분 무너졌다는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 죄로 하나님과 순전한 교제와 동행을 이루지 못했음을 매우 안타깝게 여겨야 합니다. 최소한 자기가 지은 죄들이 너무나 추하고 싫었으며, 그런 줄 알고도 그 동일한 죄를 계속 짓는 자기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서 애통해야 합니다.
나아가 정말로 죄를 지었다고 구체적으로 실감한다면 하나님께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구할 만한 염치조차 없으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만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어떤 처분을 내릴지라도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인 줄 믿기에 기꺼이 그 징계를 받겠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불효를 저지른 자식으로서 부모 앞에 갈 때는 다들 그렇게 잘하면서 왜 하나님 앞에선 그러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지금처럼 두리뭉실한 회개 기도는 아무 의미 없는 요식 행위에 그치므로 그나마 일주일에 한 번 뿐인 예배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아직 선하게 고치지 못했다면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고백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는 마음만 먹었지 시작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는 심령이라도 바쳐야 합니다.
호세아의 애끓는 심정
호세아가 이스라엘더러 입술의 열매를 바치라고 말한 정확한 이유를 알려면 하나님이 그를 선지자로 세운 엄중한 뜻부터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음란한 여인 고멜을 신부로 취해서 살라고 명했는데, 그더러 당신의 이스라엘을 향한 심정이 어떠한지 피부로 생생히 체감하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한 여인은 그 간부와 함께 돌로 쳐죽여야 합니다.(레20:10) 아무리 자비심이 많은 남편이라도 이혼 증서를 써주고 내쫓아야 합니다. 고대에서, 아니 오늘날도 간음한 아내를 데리고 살 바보 같은 남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술 더 떠서 호세아더러 고멜이 외간 남자와 간통해서 낳은 아이까지 자기 자식으로 호적에 올리라고 명합니다.
간혹 세상에는 아주 이상한 남편들이 있습니다. 무능력해서 돈 한푼 벌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이 된 남편이 정부에서 주는 아이들 양육 자금을 받으려고 아내가 밖에서 낳은 아이들도 자기 호적에 올립니다. 심지어 아예 아내를 술집 호스티스로 보내고 손님들과 밤을 지새우더라도 화대만 많이 받아오라는 천하의 후레자식도 있습니다. 그런 자는 인간 말종으로 가만두어도 천벌을 받게 마련입니다.
호세아의 신상에 관해서 성경은 침묵하지만, 하나님이 선지자로 세웠다면 당연히 인격이 고상하고 율법을 잘 따르며 믿음이 좋았을 것입니다. 최소한 상식적인 인물은 되는데도 음란한 아내를 절대 내치지 말고 끝까지 긍휼을 베풀며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아비 모르는 아이들까지 자기 자식처럼 사랑을 베풀면서 믿음으로 양육하라고 명합니다.
만약 우리가 호세아의 입장이었다면 어떠했을까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서 견디다 못해 아내와 아이들을 죽여버리고 또 그 일이 못내 양심에 걸려 자살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그런 아내는 쳐 죽여야 한다고 명했기에 당시로선 아무 잘못이 아닙니다. 살인과 자살을 할 담력이 도무지 없고 신자로서 해선 안 될 일일 것 같으면 당장 내쫓을 것입니다. 다시 자기를 찾아오면 그때는 죽일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여자와 아이들과 한 지붕 아래 얼굴을 맞대고 살 수 있으려면 아내가 벌어오는 돈이 탐나거나, 죄송하지만 정신이상자나 천치 바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시의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해서 품고 있던 심정이 바로 그와 같다고 호세아에게 실습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호세아로선 하나님의 엄중한 음성으로 직접 들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순종했다 쳐도 어쨌든 그도 엄청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타락상에 대해 평소에 아주 비참한 심정을 품고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간섭이 속히 임하길 간절히 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그를 택해 그런 소명을 주었을 것이며 그도 성령의 인도대로 순종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
호세아가 활동했던 여로보암 2세 시대는 북 왕국이 최고로 번영했는데 필연적으로 백성들이 쾌락과 죄악에 빠져 극도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안타깝게 여긴 북 왕국 이스라엘의 잘못은 윤리적 죄들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에게 지시한 대로 신부 이스라엘이 신랑 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랑을 맞아들여서 간음한 죄였습니다.
그들은 앗수르의 우상 신들을 여호와 대신에 혹은 동시에 섬겼습니다. 고멜이 호세아의 아내이면서도 밖에서 마음놓고 바람피우는 꼴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상에 바치는 제물과 똑같거나 더 나쁜 제물을 여호와께 바쳤습니다. 그것도 앗수르 사람의 사악한 방식대로 돈을 벌어 제물을 사서 바쳤으므로 고멜이 밖에서 낳은 자식을 호세아가 아들로 받아주는 꼴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그들의 선조를 오직 당신만의 권능으로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온갖 죄악은 물론 당신을 배반 거역하는 것까지 계속 참아주면서 당신의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마치 아무 배알도 없는 무능력한 남편 취급하고서 마음놓고 간음하며 우상의 자식까지 낳았습니다.
하나님으로선 오래전에 이스라엘을 심판해도 마땅하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여로보암 대에 와선 당신의 인내는 거의 한계에 이르렀고 호세아의 회개를 촉구하는 이 권면도 듣지 않으면 곧바로 심판을 내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지금 어떤 심정인지 호세아 선지자의 메시지를 그의 가정생활에 비춰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지금 애통 비참 분노 나아가 증오로 가득 차서 폭발 직전에 있다고 깨닫지 못하면 그분의 백성이 될 자격조차 없으며 너무 어리석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입술의 열매가 무엇인지 호세아가 어떻게 설명합니까?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3절) 앞으로 다시는 하나님 대신 앗수르의 도움을 청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 손으로 만든 우상들을 절대 신으로 모시지 말라고 명합니다. 자기들의 죄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서 그 말씀대로 회개한 결실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호세아의 실제 삶에서 터져 나오는 메시지에도 귀를 완전히 막았습니다. 전혀 회개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계속했고 애굽과 앗수르를 번갈아 의지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자기들이 의지하려 했던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셋에게 기원전 722년에 멸망당했는데 호세아가 이 메시지를 전하고 겨우 10여 년 후였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호세아 개인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가면서까지 이스라엘이 당신의 뜻을 절대 모를 수 없는 방식으로 계시해 주었는데도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이 소나 말 같은 짐승보다 못하다고 탄식한 그대로였습니다.
정복자 앗수르는 사마리아로 이주하여 이스라엘 사람들과 통혼하였고 그 땅은 혼혈 족속으로 채워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아내는 마치 고멜처럼 이방 남자들과 행음한 꼴이 되었고 그들 사이에 난 혼혈 아이를 이스라엘 사람은 호세아처럼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혼혈이 나쁘다고 인종 차별하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호세아가 자기 삶으로 전한 메시지는 살펴본 대로 이스라엘이 우상과 간음하여 그 아이를 낳고 있는 죄를 책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범한 그 죗값대로 우상을 섬기는 백성의 아이를 낳게끔 그와 똑같은 형벌을 가했던 것입니다. 호세아의 너무나 기묘했던 삶은 장차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이 바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엄중한 예고였던 셈입니다.
남 왕국 유다도 북 왕국보다는 조금 늦었으나 동일하게 우상 숭배로 타락한 죄와 하나님 대신에 이방 나라에 의지한 잘못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멸망당했는데 유다의 죄악이 이스라엘보다 덜해서 심판이 늦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그 왕위를 견고케 해준다는 언약을(삼하7:16) 당신의 이름을 걸고 지키기 위해서 조금 더 참아주었을 뿐입니다. 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고 그 70여 년 후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본토로 귀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귀환 후에도 제대로 정신 차리지 않고서 곧바로 율법대로 살지 못했기에 말라기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한탄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표
말라기서는 구약 시대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였습니다. 성전에서 흠 있는 제물을 드리는 형식적인 제사는 계속 진행되었어도, 당신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은 완전히 침묵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 문 대신에 당신의 입을 닫았습니다. 당신의 백성이 입술의 열매를 바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호세아의 메시지를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도 미리 다 아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가 호세아에게 계시해 준 내용에 정말로 눈여겨 볼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호세아더러 은 열다섯 개와 보리 떡 한 호멜 반을 고멜의 몸값으로 지불하고 데리고 와서 함께 살라고 명했습니다. 아마 그녀가 다른 간부에게 묶여 있었을 것입니다. 이어서 여호와는 당신의 은총을 입고서 이스라엘이 말일에 당신께 경외함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해 주었습니다.(호3:1-5) 그 약속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실현되었습니다. 호세아는 예수님을 예표 상징하는 선지자였고 고멜은 원죄 하에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세상 것들로 우상으로 섬기는 모든 인간을 대변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바로 우리가 고멜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사역 중에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아무 죄도 묻지 않고 오직 당신의 은총으로 용서해 주었습니다. 또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다가 다시 새로운 남자와 동거하는 한 많은 여인도 먼저 찾아가서 지난 상처를 씻어서 구원해 주었습니다. 모두가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창녀들을 따뜻한 보살핌으로 교제했으며, 민족의 반역자로 유대 사회에서 추방 정죄당한 세리도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의 긍휼로 모든 이를 아무 차별 없이 사랑해 주었으며 그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당신께 경외함으로 나오는 자는 구원해 주었습니다.
예수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의미를 갖습니다. 고멜이었다가 호세아로 바뀌어졌다는 뜻입니다. 제 멋대로 바람피우는 아내를 두어야 하고 또 밖에서 낳은 사생자까지 자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주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신자도 다시는 고멜처럼 살지 말아야 하므로 세상에서 출세 형통만 바라고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던 이전의 삶을 완전히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고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품어주는 호세아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구원은 호세아가 예표하는 예수님이 신랑이 되어서 고멜 같았던 우리를 아내로 맞아준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 되는 주님이 아내인 우리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 교회 생활 열심히 하는 것, 헌금 많이 바치는 것,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내는 것 등등 물론 다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바라는 것은 이전처럼 바람피우지 않는 것 하나입니다. 다시 집을 나가서 음행하는 것은 도무지 더 이상 묵인할 수 없는 죄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물론 남 왕국 유다도 바로 그래서 멸망당했지 않습니까?
고멜 같은 신자들
엄밀히 따져서 오늘날 신자들은 고멜이 바람피우는 것 이상의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기에 세상의 우상은 전혀 섬기지 않는다고 과연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상의 본질이 우매한 원시 종교가 깎아 만든 신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외에 자기 인생을 주도 통치하는 어떤 존재나, 또는 자기 삶의 목적 방향 양식이 그 쪽으로 따라오게끔 이끄는 어떤 힘을 말합니다. 예컨대 지금 하는 일이 평생의 소망이므로, 혹은 자기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서, 혹은 자기 자녀가 잘못될 소지가 있으면, 심지어 자기 도덕적 기준에 위반되는 일이라면, 절대로 양보 타협하지 못한다는 식이면 우상 숭배입니다. 사업, 자존심, 자녀, 양심 등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여서 자기 인생과 삶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가 새벽 기도마다 제발 자녀가 아이비리그 대학에 입학 졸업하여서 구글 같은 초일류 회사에 취직되게 해달라고 빕니다. 부모도 자기들이 하는 사업에 대박 같은 성공을 이뤄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나름대로 의로운 자기 인생의 목표이지만, 따지고 보면 실은 자기 우상을 잘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만 빌리려 드는 셈입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주인이며 자기는 그분의 종이므로 사나 죽으나 오직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자라야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합당한 은사와 재능을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도록 세상에서 따로 불러낸 자입니다. 세상 직업과 일들은 그 소명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과 통로일 뿐입니다. 반대로 세상일이 목적이고 하나님이 수단이 되면 그 세상일이 우상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거꾸로 하나님이 신자의 종이 됩니다.
솔직히 교회에 성실히 봉사 헌신하는 교인 중에 의외로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꽤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우상과 간음하는 일보다 더 나쁜 짓을 하고도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는지 잘 모릅니다. 말씀드린 대로 자기들이 모시는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만 얻어내려고 온갖 떼를 쓰면서 일방적으로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이번 일에 성공하면 크게 헌금하겠다든지, 주님의 일에 충성하겠다고 서원합니다.
잘 따져보면 사실상 세상에서 우상으로 섬긴 일에 성공해서 번 돈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뜻입니다. 고멜이 밖에서 바람피우면서 번 돈으로 남편 호세아에게 좋은 시계나 차를 선물하는 꼴이지 않습니까? 현재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이 시킨 것이거나, 최소한 그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지 않다면 그 일들은 쉽게 자기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일에서 번 돈은 고멜처럼 밖에서 낳은 사생자가 됩니다. 또 하나님의 올바른 방식으로 돈을 벌지 않았다면 더럽고 추한 돈이 됩니다. 그런데도 죄송하지만, 비전을 스스로 크게 세워서 간절히 기도하고 교회 봉사 많이 하면 하나님이 이뤄주시므로 그 받은 축복으로 감사 헌금 많이 하라고 부추기는 목회자들마저 있습니다.
하나님의 첫 계명
물론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서 순전한 마음으로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치장하려 하지 않고 풍요와 사치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자기 인생의 소망은 단지 소박하고 평탄한 삶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성실하고 정당한 방식으로 돈을 법니다. 그러는 중에 여유가 생긴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 충성할 것입니다. 이처럼 그 마음에 추악한 욕심과 영악한 계산이 개입되지 않고 순진한 진심인 신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두어야 합니다. 과연 정말로 내 인생의 목표가 평생토록 하나님 그분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그분에 의해서, 특별히 예수 십자가 구원의 권능과 은총을 주변에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 내 삶과 인생이 보호 인도되고 있음을 확신합니까? 최소한도 그렇게 살고는 싶습니까?
바꿔 말해서 내 안에 하나님 외에 숨겨진 우상이 없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애인이 있고 그 애인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알게 모르게 노력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자식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 자기 사업이 형통하는 것, 자기 삶의 철학을 의로운 모습으로 세우는 것 등 다 귀하고 소중한 일입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지 말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인해서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만 전적으로 받는 데에 장애가 생기지 않는지 항상 점검해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시는 첫째 계명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여호와를 뜨겁게 열심히 믿으라고 명하지 않았습니다. 신자라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아니면 신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일단은 진심과 열심으로 가득 찬 믿음을 갖고 교회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첫 계명으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20:3)라고 너무나 당연해서 미처 자세히 생각해 보지 않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알게 모르게 우상을 비밀리에 둔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미개한 고대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영악한 현대인들이 더 많이 숭배합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를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우상을 만든다고 둘째 계명에서 밝혔습니다. 한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절대자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지금은 아예 신이 없어졌습니다. 모두가 오직 자기가 최고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위해 만드는 우상들이 더 다양해지고 더 세련되어졌습니다.
예배를 회복하라.
올해부터 신자들이 매주 대표 기도든 개인기도든 지난주에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식의 두리뭉실한 고백은 중지해야 합니다. 그 대신에 알게 모르게 숨겨 두었던 우상들을 꺼내놓고 완전히 부숴버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리 죄를 회개하는 기도가 경건하고 심지어 일부 죄를 고쳤다고 해도 아무 의미도 소용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알게 모르게 모시고 있는 우상들로 인해서 평생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가 우상을 깨트리는 입술의 열매를 드리라고 권했으나 이스라엘은 끝내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도 본문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3절)고 권했습니다. 자신이 고아임을 알고서 자기를 먹여주고 입혀주는 유일한 힘은 주님이 주는 긍휼뿐임을 절감해야만 우상을 깨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앗수르, 바벨론, 바사, 마대, 헬라, 로마 등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 최고 가는 힘에 기대었으나 전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이 없어지면 자기들은 고아가 되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될 때만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그 간단한 진리조차 이스라엘은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호세아는 말일에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온다고 예언하면서 동일한 뜻을 다시 강조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호3:4)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사백 년 신구약 중간기에 하나님이 침묵하자 그제야 그분의 긍휼만 소망했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하고 죄가 많은 인간이 동일하게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간에게 의지해선 인생의 기쁨과 만족을 절대 얻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정치 권력, 재정 능력, 과학 지성이, 나아가 심오하고 경건한 철학 도덕 종교로는 인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온전한 왕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인도받아야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자신이 고아인 줄 절감한 자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아와서 그분만 아버지로 모십니다. 하나님 없이 처절한 실패와 절망을 겪은 자만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 밖에선 어떤 의미와 가치도 심지어 소망도 없는 인생이 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서 그분께 돌아가는 씨름입니다.
솔직히 지난 연말까지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잘 따져보십시오. 우리 안에 의를 실현하며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고 싶다는 소원은 있었으며 또 그것은 분명히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뒷받침해 줄 온전한 담력과 의지와 믿음은 없었지 않습니까? 주변을 둘러봐도 불쌍하고 애처롭지 않은 인생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올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과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삶을 제대로 꾸려갈 수 없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정말로 두렵고도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숨겨진 나만의 비밀스러운, 때로는 나도 미처 인식 못하는, 우상을 하나님은 모를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고멜을 아내로 맞아서 참아준 호세아처럼 그분은 계속 참아주고 계십니다. 당신과 원수가 되어 있던 우리에게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며 온전한 사랑을 실현한 예수 십자가 앞으로 다시 나와서 겸손히 엎드리기만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드러난 그분의 너무나 엄중한 공의 앞에 내 부끄러운 모습을 하나 숨김없이 드러내어야합니다. 그와 동시에 고아를 긍휼히이 여기는 너무나 따뜻한 사랑 앞에 절로 눈물이 흘러야 합니다. 새해가 시작되는 이때, 신자들은 올해부턴 정말로 오직 예수님과만 동행하면서 아무리 작더라도 말씀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참 예배로 회복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1/5/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