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은 대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5:6-9)
많은 신자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 기도만 하면 사단은 당장 물러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름과 신자에게 내주하신 성령님의 권능은 대단합니다. 사단이 감히 대적을 못합니다. 사단과는 절대 타협과 조정을 할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대적해야(행16:18) 함도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단아 물러가라”는 한 마디로 사단은 절대 쉽게 물러가지 않습니다. 매번 그러면 기도가 아니라 일종의 주문이 됩니다. 반드시 온전한 믿음의 바탕에서 대적해야 합니다. 유대 한 제사장의 아들들이 예수의 이름을 빙자해 보았지만 오히려 사단에게 크게 당한 실례가(행19:14-16) 있지 않습니까?
그럼 온전한 믿음으로 사단을 대적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의지를 다시 굳세게 다잡아서 큰 목소리로 주저하지 않고 대적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대적 기도가 아닌 주문 기도를 더 세게 한 것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본문의 서두에 말한 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큰 소리 치는 것은 어쩌면 신자의 두려움이 반영된 것일 수 있습니다. 대신에 순순히 하나님에게 사단을 물리쳐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더 온전한 믿음이자 더 권세 있는 기도가 됩니다. 사단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쫓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사단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함부로 대적해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단을 제압할 수 있는 권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인간을 묶고 있던 사슬을 십자가에서 다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기도가 그 십자가 은혜와 권능을 확신하는 바탕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하지 않습니까?
나아가 신자는 범사에서 사단과의 영적인 싸움을 항상 하고 있는 중입니다. 구태여 따로 사단을 야단치며 맞상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에 욥의 경우에서 보듯이 아무리 큰 능력을 가진 사단도 절대로 하나님의 궁극적 통치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확신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 사단을 맡기면 됩니다.
유대 제사장 아들들을 사단이 도리어 야단친 내용을 잘 살펴보십시오.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사단은 예수님과 바울은 잘 알지만 제사장 아들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대적 기도를 했지만 온전한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단이 꿰뚫어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사단이 바울을 삼키기는커녕 그 앞에 감히 얼씬거리지도 못할 것 아닙니까?
대적기도를 세게 하는 것보다 사단의 수족이 예수님의 보혈 권세로 골고다 언덕에서 이미 다 잘려나갔음을 정말로 확신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본문도 사단을 대적하라는 것보다 믿음을 굳게 하라는 말을 먼저 강조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십자가 은혜와 권세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충만히 감싸고 있음을 한 시도 잊지 않으면 사단은 아예 덤벼들지 못합니다. 혹시 근처에 얼씬거리기는 해도 말입니다.
8/12/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