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3:1-7 숭고하고 신령한 부부관계

조회 수 1205 추천 수 0 2017.10.05 11:49:22

숭고하고 신령한 부부관계

정기수련회 주일예배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7)

 

 

부부관계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

 

오늘의 본문은 베드로가 부부관계에 대해 권면하는 내용이다. 어저께 배운 바울의 권면(엡5:22-33)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은 같다. 반면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고 몇 가지 구체적으로 권면하는 점이 다르다.(7절)

 

첫째 남편은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둘째 아내를 연약한 자이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라고 했고, 셋째 그래서 귀히 여기라고 했다. 그런데 표현만 다를 뿐이지 결론이 귀히 여기라고 했듯이 사실상 사랑하라는 것이다. 결국 부부관계의 요체는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점에서 두 사도가 다를 바 없다.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베드로가 권면하는 동기와 이유다. 바울은 가정을 교회와 예수님의 관계에 유비해서 가르쳤다. 요컨대 부부관계를 예수님이 이끌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반면에 베드로는 본문에서 어떤 점을 강조하고 있는가?

 

먼저 1절에서 아내가 순복하면 혹시 남편이 구원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아내는 믿었고 남편은 불신자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 7절에선 남편이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여기라고 한다. 이번에는 아내가 불신자일 가능성이 높다.

 

바울은 부부 둘 다 신자라는 바탕에서 권면했다. 베드로는 둘 중 한 사람만 신자라고 전제했다. 지금도 아내들이 주로 먼저 믿듯이 이제 막 복음이 전파되던 초대교회 시절에는 더더욱 아주 많은 가정이 한 사람만 먼저 믿었다. 베드로는 그래서 부부관계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구원을 함께 받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강조한 사정이 있다. 베드로 전서는 AD 64년 로마의 네로 황제가 크리스천을 본격적으로 박해한 후에 로마에서 저작되었다. 잘 알다시피 그래서 담대한 믿음으로 인내하고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라고 위로 격려하는 서신이다. 신자가 핍박을 받는 중에 순교할 가능성마저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 한 사람만 천국에 가는 불행은 어떻게 하든 막으라고 권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내더러 외모를 단장하기보다 마음의 숨은 사람 즉, 내면의 영혼을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을 더 중히 여기라고 했다.(3-5절) 심지어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 자체가 단장이라고 선언했다. 아내가 화장을 과하게 하지 말라거나 화장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은 전혀 없다. 죽음이 임박한 상태에서 즉, 곧 천국에서 주님과 일대일로 대면할 것이므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을 가꾸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4절)

 

종교적 핍박이 없는 현대에는?

 

마침 저희 교회에는 부부 중에 한 분만 출석하는 가정이 없다. 서로 전도할 필요가 없다. 세계 최대 기독교 국가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 된 미국에서 교회 출석한다고 순교를 당할 리도 만무하다. 본문에 대해서 실감나지 않는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권면인가? 그렇지 않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 보라. 바울이 에베소서를 박해 전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네로의 핍박이 절정에 이른 후에 저작했다면 틀림없이 베드로와 같은 맥락의 권면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전7:26)고 했다. 임박한 환난 즉, 마지막 때의 주님 재림이 임박했으니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베드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권면을 했지 않는가?

 

더 중요하게는 종교적 핍박이 있든 없던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언제든 앗아갈 수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게”(히9:27) 마련이다. 이는 모든 세대 모든 인간에게 지어진 숙명이다. 베드로 전서는 네로의 핍박으로 인해 신자들이 급박하게 죽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던 당시 상황에 맞추어 저작된 것이지만, 사실상 본문은 오늘날의 평화시대에도 그대로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말하자면 부부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내가 예쁘게 단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안정된 직장에 다니며 고액 연봉을 받아 좋은 집에 좋은 차를 사서 안락한 삶을 꾸리는 것이 남편이 행할 책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고 남편은 아내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 함께 서지 못하면 이 땅에서 아무 문제없이 남들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사이좋게 살았어도 그만한 실패가 없다. 천국에 혼자서만 가면 시쳇말로 하자면 “영원한 돌싱”의 신분이 된다. 이 땅에서 결혼했지만 이혼하고 천국에는 혼자 온 셈이지 않는가? 천국 성도들 보기에 부끄럽고 온전한 교제를 나누기 힘들 것이다. 비록 지금 함께 교회에 출석하지만 배우자가 정말로 구원의 확신을 가졌는지, 함께 천국에 갈 자신이 있는지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다들 한 번쯤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역으로 말해 신자의 부부 관계가 주로 자녀 양육 문제로 야기되는 부부 싸움을 가능한 줄여나가는 차원으로 머물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둘 중의 한 명이 천국으로 불러가도 두 사람 모두에게 전혀 아쉬움이 없고 후회될 일이 없도록 살아야 한다. 가장 흔하게 하는 말로 오늘 하루가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처럼 서로에게 순복하고 사랑해야 한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처럼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부부 각자가 개인적으로 또 함께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에 완전히 붙잡혀 있어야 한다. 가정과 부부 사이에 예수님만이 시작이자 끝, 알파요 오메가여야 한다. 예수가 없는 가정과 부부관계란 아예 상상도 할 수 없어야 한다.

 

한 명이 먼저 천국에 가는 육신적 이별의 슬픔과 고통은 엄청나다. 미국 정신과 협회에서도 부부 사별(死別)의 우울증은 통상 6개월이 가도 정상적인 것으로, 통상적인 우울증은 2주 이상 지속되면 병으로 취급하나, 간주해줄 정도다. 그럼에도 신자는 배우자가 먼저 천국에 가있으므로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곧 그곳에서 다시 상봉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 정확히 말해 곧 만날 것을 기대가 아니라 확신하기에 슬픔을 이겨내고 혼자 남아서도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어야 한다.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저희 모두 아이들이 어리고 나이도 젊어 창창하다. 그렇다고 천국 죽음 등이 먼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의 일이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자문(自問)해보라. 인생에서 가장 실패하고 불쌍한 자가 누구인가? 돈이 없어서 항상 쪼들리게 사는 자인가? 중병에 걸려 오늘내일 죽음만 기다리는 자인가?

 

아니다. 가장 안타까운 자는 그 심령에 예수님의 사랑이 심겨지지 않은 자이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는 자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불효는 부모가 예수님의 십자가 반대편에 거한 채로 돌아가시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저 같은 자다. 부끄럽게도 목사이면서 교회 개척한다고 바빠서 아버님을 그냥 그렇게 보냈다. 언젠가 말씀드린 대로 젊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너무나 교만했던 저에게 사업 뒷돈 대주느라 힘들게 만드는 천하의 불효를 저지른 위에 결정적인 불효를 범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하늘이 무너진다. 너무 괴로워서 아예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남편더러 아내를 귀히 여기라는(7절) 표현은 당시 여자를 재산, 가정부, 종, 성적 노리개 정도로만 인식했던 관습에 비추면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베드로 사도는 지식에 따라 동거를 하라고 먼저 선언했다. 어떤 지식을 말하는가?

 

우선 “이와 같이”라고 말했으니 6절에서 설명한 내용을 그대로 받는다. 아내와 함께 곧 하나님 보좌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7절 후반부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고 부연 설명했다. 아내가 그런 줄 아는 지식이다.

 

당시 예수를 모르는 일반 사람들의 여성관과 완전히 반대다. 또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조차 남편이 모세의 증서만 써주면 제 멋대로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교만과 오류에 빠져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큰 죄악인지 깨달으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땅에서 최고로 낮은 자리에 있던 아내를 하늘의 최고 높은 자리에 두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 땅에서도 그런 관점으로 동거하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생명이 아내 안에 있고 또 내 안에도 있고 나아가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사이에 충만하게 역사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부관계에서 첫째로 중요한 사항, 아니 전부라는 것이다.

 

누가 기도해야 하는가?

 

누가 그 지식을 알고 주도적으로 행해야 한다고 하는가? 남편이다. 나아가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기도가 막힌다고 한다. 너희라는 복수가 부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부부가 함께 하거나 아내 혼자 하는 기도가, 그것도 남을 위한 기도가, 막힌다는 뜻이 아니다.

 

‘남편들’이라고 7절에서 복수로 지칭했기에 ‘너희’는 그것을 다시 설명하는 대명사다. 기도를 남편들이 해야 하고 그럼 아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내가 이미 구원을 얻은 자라고 해도 아내가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영광을 누리도록 기도해주라는 것이다. 당시에 물건 취급 받던 여자를 그만큼 귀하게 대우하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아내를 그렇게 귀히 여기지 않으면 곧 순교해서 자신이 죽더라도 아내의 천국 구원을 위해 기도한 내용이 응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지 않는가?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는데 어떻게 함께 천국에 갈 수 있겠는가? 거기다 부부가 함께 주님을 믿더라도 가정의 대소사는 물론 부부 사이의 갈들을 해소하려는 기도도 응답이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즈음의 상황은 어떠한가? 남자 성도들은 주일 예배에 한 번 참석하는 것으로 끝이다. 주로 아내가 주중 성경공부나 기도모임에 참석한다. 생활환경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핑계를 댈 수는 없다.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는 핍박을 받는 중이라 더 경황이 없었음에도 남편들더러 기도하라고 권하고 있지 않는가?

 

남편이 돈을 잘 벌어주고 있으니 아내더러 순복은 몰라도 불평은 하지 말라 나는 내 책임을 다했다는 식의 뻔뻔한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남편이 가정의 제사장 역할을 맡아야 한다. 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잘못을 품어주고 용서해주며 하나님에게 대신 기도하여 사죄와 긍휼을 간구해야 한다. 욥이 어떻게 했는가? 자식들이 잔치를 마치면 혹시라도 부지중에 하나님께 거역했을까 기도하며 제사지냈지 않는가?

 

매일이 마지막 날이 되려면?

 

부부 관계를 이 땅에서부터 천국처럼 유지하라고 해서 항상 좋은 일만 있어야 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라는 의미라고 이미 말씀드렸다. 말기 암으로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게 되면 그 남은 기간 동안 무슨 일을 하리라고 계획하는가?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서 그 동안 해보지 못했던 일을 마지막으로 원도 한도 없이 다 해보는 것인가? 물론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해봤을 때 과연 후회와 미련이 완전히 없어지겠는가? 전도서가 결론을 어떻게 내리는가? 하나님이 없이 해 아래에서 행한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다고 하지 않았는가? 버킷 리스트로 따지자면 인류 역사상 솔로몬만큼 다 성취한 자가 없는데 바로 그가 내린 결론이다.

 

실제로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자들 거의 모두가, 심지어 불신자라도 전혀 다른 일을 계획하여 시행한다. 평소에 자기가 잘못했거나 피해를 입혔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사이가 소원해졌거나 자주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찾아간다. 서로 용서를 구하며 화해하고 잠시라도 짬을 내어 교제한다. 그리고 반드시 빠트리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남편과 아내와 자식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말을 하거나 편지로 남긴다.

 

죽을 때에 모두 그 일을 후회한다면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는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한 것. 남을 온전히 용서하지 못한 것이 된다. 예수 믿은 후에도 그러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물론 우리가 아직도 연약하고 비천하며 탐욕과 죄성이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예수님을 부부 사이와 가정에 주인으로 모시라고 에베소서에서 권면한 까닭이다.

 

매일 천국처럼 살라는 뜻은 결국 이것이다. 시한부인생 선고를 받고 행해야 하는 이 일을 안 해도 될 만큼 평소에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것이다. 시한부 인생은 그나마 마지막으로 정리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갖도록 미리 알려주니 감사할 일이고 다행이다.

 

언제 부부가 서로 영원히 이별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본문의 베드로의 권면은 한마디로 천국을 먼저 가든, 뒤에 혼자 남아 있던 후회 하지 않도록 살라는 것이다. 최소한 서로 감추어야 할 부끄러운 일들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럽도록 가장 성공한 부부는?

 

세상의 부부 중에 어떤 부부가 가장 부러운가? 저희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한 날 한 시에 함께 천국으로 가게 해달라고 가끔 기도하고 있다. 정확히 그렇게 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우니 사실은 그렇게 소망만 하고 있다. 어쨌든 최대한 그 차이를 단축시켜 달라고는 기도한다.

 

집 사람이 가끔 이런 농담을 한다. 자기가 죽고 3일 후에 저보고 따라오라고 한다. 제가 먼저 죽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자기가 그 뒤처리를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막연한 소망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리라 믿고 있다.

 

여러분이 실감나도록 설명해보자. 가장 부러운 부부, 가장 성공한 부부로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꼬부라졌는데도 서로 손을 꼭 잡고 공원을 산책하는 부부를 아마도 다 꼽을 것이다. 벤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 서로 나눠 먹는데 이빨이 빠져 흘리는데도 짜증 하나 내지 않고 웃으며 서로 닦아 준다. 그 얼굴에 온화한 빛이 넘치고 한눈에 봐도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여서 극진히 챙겨주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마저 그런 따뜻하고 사랑스런 분위기가 번져나가는 부부다.

 

누구나 오래 같이 살다보면 그렇게 되리라 자신할 문제가 아니다. 백세 인생에 부부로 75년을 함께 살아야 하고, 빈 둥지 증상(empty net syndrome)을 겪은 후로는 부부 둘이서만 50년을 살아야 한다. 날이 갈수록 싸움과 갈등이 줄어서 사이가 더 좋아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오늘의 본문처럼 남편이 아내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렇게 오래 살 동안에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신뢰해야 한다고 해서 항상 좋아하고 열정이 넘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래 살수록 그만큼 갈등과 충돌은 많아지기 마련인데도 잘 해소해냈다는 뜻이다. 잘 참아주었고 잘 용서해준 것이다. 어제 저녁 집회에서 배운 대로 사랑의 본질이 참는 것이기에 그만큼 많이 사랑한 셈이다.

 

신앙의 문제를 너무 도덕적 계명이나 종교적 교리로 따져선 안 된다. 신앙생활이란 실제로 현실에서 살아가는 삶 그 자체다. 부부란 수도 없이 다투고 자존심을 세우고 이혼 일보 직전까지 가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신자부부는 자식 때문에 할 수 없이 참고 사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 사도가 본문에서 말하는 지식에 따라, 특별히 아내를 귀히 여기며 동거해야 한다.

 

그리고 천국에 함께 가는 일이 먼 미래가 아니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처럼 살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내 가정과 교회를 세우도록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남편과 아내 중에 혼자 먼저 믿었다면 배우자가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믿음으로 끝까지 잘 버텨야 한다. 또 처음 믿음이 연약했을 때는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저 원수 같은 남편과 아내를 고쳐달라고만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를 자꾸 하다 보면 그런 기도는 그만 두게 되고 내용도 바뀌게 된다.

 

특별히 부부끼리 자기들 문제는 물론 자녀들의 문제를 함께 항상 기도하면 그렇다. 인생의 동일한 고난, 부부 두 사람이 힘을 합해 맞서야 할 시련 연단 슬픔 상처를 함께 기도하며 이겨낸 체험이 쌓이고 쌓여야 한다. 두 사람이 함께 믿음으로 이겨낸 두 사람만의 비밀이 늘어나게 된다. 다른 이와는 공유할 수 없고, 오직 주님과만 나눌 수 있는 그럼 은혜의 체험들이 생긴다. 그래서 서로 눈빛만 봐도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손잡고 산책하는 것을 연습하라.

 

매일을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로 살려면 바로 오늘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비록 부끄러운 모습일지라도 바로 오늘 이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셨다는 감사가 매일 있어야 한다. 또 그래서 내일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 백세 시대에 다가올 50년을 버티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갖고 있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통로를 부부가 함께 소유해야 한다. 노년의 부부가 사이좋은 것만큼 인생은 물론 신앙에서 가장 큰 승리는 없다. 그런 부부에겐 거룩한 아우라가 비춰 나와 사람들의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세상의 엄마는 물론 세상의 아빠 모두가 위대하다. 신자로서 정말 신자다운 남편과 신자다운 아내도 둘 다 위대하다. 생명의 은혜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라서 더더욱 그렇다. 그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못 이룰 것 하나 없지 않겠는가?

 

신자 부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원대하다. 그분의 엄청난 큰일을 성취할 수 있다. 부부가 함께 눈물의 제단을 함께 통과하면 영광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다. 그 모든 시련을 함께 기도하며 통과했고 마지막까지 사이좋은 신자 노부부는 숭고하고 신령하기까지 하다.

 

첫 집회에서 인간 세상을 향한 사탄의 목표는 사랑을 실종시켜서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사탄에겐 에덴동산 때부터 세상 끝 날까지 오직 이 한 가지 목표뿐이다. 신자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한다면 사탄의 그 음모는 철저히 파괴되고 이 땅에서의 신자로서의 소명을 완수하는 셈이다.

 

이 시대의 인류의 소망이 이것이다. 자식에게 물려줄 유산도 이 믿음 외에 따로 없다. 부부가 손잡고 산책하고 있는가? 손잡는 것이 혹시라도 어색한가? 지금부터라도 연습해야 한다. 상대가 먼저 손을 잡자고 하면 이미 성공한 부부다. 그 손의 따뜻한 기운이 평강을 주는가? 그 따뜻함이 없으면 너무 허전해 못 살 것 같은가? 그만큼 성공한 부부는 없다.

 

20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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