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0:26,27) 이미 얻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1)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10:26,27)

 

히브리서의 저작 동기와 주제

 

성경에는 예수를 믿은 후에 죄를 지으면 마치 구원이 취소되는 것처럼 진술한 구절들이 제법 있습니다. 실제로 아주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이 좋아보이던 신자가 하루아침에 세속적으로 타락하여 교회출석을 중지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고도 죄를 지으면 구원은 취소되고 심판받는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상기도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구절 중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해라고 말한 까닭은 둘입니다. 첫째는 정말로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자에게는 구원의 취소는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상기 본문 자체가 그런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닌데도 해석을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오해에 대해선 여러 번 다루었으므로 오늘은 둘째 오해만 살펴보겠습니다.)

 

신약성경을 해석할 때 반드시 또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일부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전부가 서신서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와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편지라면 발신자와 수신자가 정해져 있고 특정한 주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특정한 수신자와 특정한 상황에 따라 저자가 강조하려는 내용이 다릅니다.

 

예컨대 잘 알다시피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 실제로 발생했던 성도간의 분쟁, 우상에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 음행, 성도 간의 소송, 성령의 은사의 무분별한 사용 등에 관해 영적이면서도 실제적 지침을 주려는 것이 저자 바울의 뜻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선생, 특별히 율법 준수와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주의자의 잘못을 십자가 복음과 비교 지적하여 교인들로 경계 시키려는 목적으로 저작한 것입니다.

 

본문을 정확히 해석하려면 히브리서도 어떤 수신자를 대상으로 어떤 상황에서 기록한 것인 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책의 제목 그대로 유대인 신자들이 대상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을 유대인들이 먼저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오래 고대하던 메시아임을 인정할 수 있었고 또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기왕에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급속히 성장함에 자기들 기득권이 줄 것을 염려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유대인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우상을 믿는 이방제국 로마보다도 여호와를 같이 믿고 따르는 유대교로부터 먼저 있었습니다.(행8:1) 거기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1세대 증인들도 시일이 지나면서 거의 죽었기에 그 후 세대들에게는 복음이 아무래도 생생한 진리로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유대교에선 아무 공로 없이 주는 십자가 구원은 무효하며 유대인이라면 조상대대로 지켜온 모세율법을 반드시 준행해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이 믿음을 지키려면 본토 친척 아비 집과 완전히 인연을 끊어야 했습니다. 또 오직 성령의 충만함에 힘입어야만 그런 핍박 멸시를 견딜 수 있는데다 실은 온전하게 거듭나지 않는 신자들도 많았습니다. 결국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신자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신분적 우월성은 물론, 십자가의 영단번의 대속제사를 구약의 제사들과 비교해서 예수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단호하고도 객관적으로 변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도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장차 올 약속인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얻었음도 함께 설파합니다.(히11, 12장, 11:26)

 

짐짓 짓는 죄란?

 

이처럼 서신을 저작한 동기는 의도적으로 기독교를 버리는 유대인들에게 배교하지 말라는 권면 충고 경계를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부인하는 잘못을 탓하려는 것이 저자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초점입니다. 따라서 본문도 예수를 믿은 후에 알게 모르게 이런 저런 모양으로 죄를 짓는 것으로 제한해서 해석해선 안 됩니다.

 

본문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고 말합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이란 구원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사 그 은혜를 믿는 자마다 아무 자격 조건 공로 없어도 영생을 주신다는 그 진리입니다. 사망의 심판만 기다리고 있던 사탄의 노예로서 죄에 복종했던 과거의 처절한 실패는 물론 그 동안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으로 묶인 종교적 속박에서도 벗어나 신자로 자유롭게 만드는 그 진리입니다.

 

그리고 ‘짐짓’ 즉, 의도적으로 죄를 지은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탄과 세상과 죄악을 향하던 본성이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그 방향만 완전히 전환되었고 또 그 일을 실천할 수 있도록 내주하는 성령님의 도우심도 받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참 신자라면 고의로 동일한 죄를 반복해서 범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아직도 죄의 본성에 져서 수시로 쓰러지더라도 반드시 뉘우치고 고치려 노력은 합니다. 아예 작정하고 죄를 짓는다면 아직 온전히 거듭난 자가 아닙니다.

 

거기다 본문이 단순히 윤리적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고 말한 후반부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서 기자가 계속해서, 특별히 10장에서 강조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동물 희생 제사로는 온전한 속죄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엇이 하지 못함이라. ..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10:1-11)

 

반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제사는 전혀 다르다고 바로 이어서 선언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0:12-14)

 

본문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말했다면 앞에서 변증 진술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제사를 버리고 다시 동물 속죄 제사로 돌아간다면 구원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너희들도 정말로 곰곰이 잘 따져보아라. 동물 제사로 온전한 죄 사함이 되는지 말이다. 매해마다 죄의 심판 아래 있게 하지 않느냐? 율법을 범할 때마다 동물제사를 지내야 하는 속박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지 않느냐?”

 

앞뒤 문맥에서의 뜻

 

성경이 구원의 취소를 말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범하는 오류는 그런 뜻처럼 보이는 특정 구절만 따로 떼어내어 그 근거로 앞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본문 해석과 논리가 아무리 그럴싸해 보여도 시작부터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을 앞뒤 문맥과 책 전체의 주제에 맞추어서 해석하지 않고 자기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거꾸로 성경본문을,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자기들 뜻에 맞춰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본문도 이 두 구절만 볼 것이 아니라 앞에서 잠시 살펴본 것처럼 책 전체는 물론 앞뒤 문맥에서 정확한 의미를 찾아내어야 합니다. 바로 앞부분(19-25절)에선 무엇을 말합니까? 큰 제사장 예수님이 성전 휘장을 제거하였기에 모든 신자가 스스로 “예수의 피에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19절)고 합니다. 어떤 윤리적 죄를 지어도 동물 제사 없이 언제든 있는 모습 그대로 성소에 나가 회개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22절) 마음에 뿌림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심령을 깨끗케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이 실현된 것입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3) 돌에 새겨진 율법과 그에 따른 동물 제사를 하나님께서 스스로 폐기시킬 것이라고 약속했고 그 약속이 예수 십자가로 이뤄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라고 권한 것입니다. 새 언약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비록 죄를 짓더라도 언제든 예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끼리 서로 용서하고 세워주기 위해서 교회로 모이기에 더욱 힘쓰라고 말합니다.(23-25절)

 

그 후에 “짐짓 죄를 범한 자에게는 대속 제사가 더 이상 없다”고 말합니다. 죄를 범하고도 그럼 예수십자가 보혈의 완전한 대속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다시 동물 제사로 돌아간 자에 대한 권면임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뜻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29,29절)

 

본문이 속한 10장은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28, 29절은 “십자가 대속의 형상에 불과한 율법을 어긴 자도 심판을 받았는데, 그 십자가를 부인하면 하나님 아들을 밟는 것이요 자기를 거룩하게 해주는 주님의 새 언약의 피마저 더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이며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인데 얼마나 그 벌이 중하겠느냐? 정말로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기 강조합니다. 초기 유대인신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유대사회에서 추방되는 현실적 불이익은 물론 실제적인 핍박을 받게 되자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런 자들의 심령에는 예수의 피 뿌림이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식적으로 깨달았을 뿐 심령의 뒤집어짐이 없었기에 쉽게 변절 배교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그들은 죄를 지으면 매번 율법의 제사로 용서를 받는 것이 옳다고 믿었던 자들입니다. 배교도 ‘짐짓’ 했으니 모든 것을 스스로 비교하여 옳다고 판단한 쪽을 택한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절감 체험은커녕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자들입니다.

 

요컨대 본문은 유대교로 재차 개종하려는 유대인신자들을 향해 예수 십자가 복음의 큰 은혜를 율법의 동물제사와 비교해 다시 진지하게 따져보라고 전도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자가 윤리적 죄를 지었다고 구원이 취소된다는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3/14/2019


master

2019.03.14 04: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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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한 기독청년이 개인적으로 상기 구절의 뜻에 대해 물어 왔기에 함께 나누고자 올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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