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뜻은?(2)

조회 수 409 추천 수 1 2019.02.19 15:36:0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뜻은?(2)

 

율법사의 대답(27절)

 

다행히도 율법사는 주님의 그 질문에 정답을 말했습니다. 율법사답게 십계명을 온전히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대답을 할 때까지만 해도 스스로는 그 뜻대로 즉,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그런 확신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밝혀주실 것입니다.

 

오늘날의 불신자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면 나는 십계명도 잘 지키니까 믿을 필요 없다고 큰소리칩니다. 인간관계를 규정한 수평적 계명(5-10)들을 위반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 잘하고,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 한 적도 없으며, 남의 물건을 탐하지 않고 검소하게 절제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윤리적으로 큰 하자가 없고 최소한 평균 이상의 선함은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형제를 말로 바보라고 비방해도 살인한 것이며,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말입니다.(마5:22,28)

 

나아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며 그 나오는 것들이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등이라고 말했습니다.(마 15:15-20) 사람이 외부 여건이나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아 행동으로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죄인이기에 말과 행동으로 죄를 범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것들이 바로 십계명의 인간관계 계명을, 불신자들이 잘 지키고 있다고 큰소리치는, 위반하는 죄입니다. 거기다 십계명의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탐심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죄의 본질이 아니라 마음이 죄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런 마음이 생기는 근원은 바로 첫째 계명을 위반하여 하나님 외에 다른 주인을 섬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그래서 동일한 의미의 첫째와 열 번째 계명으로 괄호처럼 앞뒤에서 묶은 셈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기에 탐심이 생기고 그래서 다른 여덟 가지 죄를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대신에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결국 돈이라고 주님은 강조했습니다.(마5:24)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의 이런 구조와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죄가 무엇인지 이웃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선 본 홈페이지의 출애굽기 강해설교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모든 인간은 십계명으로 구원받는다.”(출애굽기강해 #41 / 출20:1-17)를 참조하십시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죄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앞에서 그분의 자녀가 되는 뒤집어짐이 있기 전까지는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는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 수준도 제대로 못 지킨다고 선언합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 그분을 모르기에 십계명도 얼마든지 지킬 수 있다고, 그래서 그분은 더더욱 믿을 필요 없다고 고개를 쳐드는 것입니다.

 

본문의 율법사도 자기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도 온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윤리적인 측면에선 오늘날 불신자들의 십계명에 대한 반응과 동일합니다. 최소한 평균 이상으로 선하다는, 율법사의 경우는 아주 상위에 속한다는, 자신감을 드러냈지만 주님 보시기엔 그만큼 큰 교만과 죄가 없었습니다.

 

평균 이상으로 선하다고 자부하는 것은 자기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자기 눈에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자들은 모두 지옥 가서 마땅하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은 의인이고 남들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인간이 절대로 품어선 안 되는 탐심입니다. 또 십계명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자 즉, 성전 중앙에서 하나님의 상을 받아 마땅하다고 고개를 쳐드는 바리새인 같은 자들은 외면합니다. 스스로는 탐심을 도무지 절제하지 못하기에 태생적인 죄인이오니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소원한다고 간구하는 세리의 기도에는 귀를 기울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주님의 반응(28절)

 

율법사가 주님이 바라는 정답을 맞혔지만 이제부터 주님이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결론으로 이끌어 가실지 전혀 짐작조차 못했습니다. 얄팍한 종교적 지식만으로 무장한 율법사의 교만과 무지는 너무나 컸고 그와 동시에 인간과 하나님과의 차이도 그 이상으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맡은 일이 율법 연구인만큼 율법의 뜻은 알았으나 자신을 비롯한 인간의 너무나도 초라한 영적 실상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정답을 맞혔다는 것은 주님이 지금부터 비유로 드러내려는 사랑과 구원에 대한 심오한 가르침의 맥락 안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온 셈입니다. 주님을 비방하러 왔지만 자신의 영적 가난함은 물론 윤리적인 죄마저 살아 역사하는 말씀에 의해 여지없이 주님 앞에 벌거벗겨져 드러날 것입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주님의 대답은 너무나 쉽고도 간단했습니다. 율법이 말하는 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옳다고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행하라고” 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원리이고 실제로 구체적인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한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율법대로 탐심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순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은 전혀 섬기지 않는 참 믿음을 소유한 자의 사랑입니다. 또 그런 사랑을 하는 자는 당연히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믿음을 소유한 즉, 이미 구원을 온전히 얻은 참 신자만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지할 것은 그런 사랑을 전혀 할 수 없었고 알지도 못하던 상태에서 구원 후로는 가끔이라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지 매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율법사가 사랑을 아주 쉽게 생각 판단했기 때문에 주님도 그에 맞추어 아주 쉽게 대답해준 것입니다.(지금 주님과 율법사 간의 대화 진행이 시종일관 그러합니다.) 율법사는 자기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잘하고 있으니 나는 살 것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자입니다. 말하자면 그런 자기 믿음대로 따지면 이미 영생을 소유한 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 영생의 길을 물어봤기에 주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이 간단한 주님의 반응을 정확하게 풀어쓰면 이렇게 됩니다.

 

“네가 율법을 정확히 알고는 있구나. 그럼 그 아는 대로 실제로 실천해 봐라.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도 사랑해봐라. 네가 지금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구원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율법을 제정한 하나님의 더 근본적인 목적은 다르다. 십계명의 마지막 탐심을 갖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정확한 뜻을 안다면 함부로 사랑하고 있다고, 나아가 율법을 실행하고 있다고 아니, 알고 있다고 큰소리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도 제대로 못하고 율법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지금 율법을 제정한 나에게 와서 감히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따질 작정이냐?”

 

주님은 지금 율법사의 믿음이나 그 믿음의 실천이 옳다고 인정해 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정반대였습니다. “율법의 뜻은 맞추었지만 어느 누구도 온전히 실천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정말로 율법대로 실천한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지만 실제로 이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구원 받을) 수 있는 방안은 다르다. 이제 곧 비유로 말해주겠다.”

 

이 율법사의 율법에 대한 또 불신자들의 십계명에 대한 오해를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바울의 선언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19,20)

 

다시 강조하지만 주님의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말씀은 실제로는 “이를 온전히 행할 자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율법으로 살 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율법사가 너무나 당당하게 따져드니까 그의 생각과 태도에 맞추어준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럼으로써 당신께서 의도하신 대로 이 토론을 이끌고 가시는 중입니다.

 

한 가지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주님의 그 말씀이 본문의 율법사에겐 부정적인 의미로 적용되었지만 구원을 얻은 신자에겐 말씀 그대로 긍정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사랑을 모르는 불신자는 주님 말씀대로 온전한 사랑을 실현할 수 없으나 신자는 그런 참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마음 밭이 거듭 났고 성령의 인도에 따르면 실제로 실현할 수 있습니다. 비유의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성실히 실천하라는 권면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사의 헛된 자부심 (29절)

 

주님의 너무나 간단하고 쉬어보이는 답변에 율법사는 이제 한껏 신이 났습니다. 그의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헛된 자부심은 물론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던 음흉한 의도가 이어지는 질문에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쭈었다고 합니다. 자기는 율법대로 하나님을 힘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도 그만큼 잘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행하고 있으니 영생을 얻은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라고 겸손히 대답하고 그쳤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주님을 시험하려고 덤빈 것이 아니라 정말로 구원의 길이 궁금해서 물은 꼴이 됩니다.

 

율법사는 어떻게 하든 주님과 제자들의 잘못을 꼬투리 잡아야만 합니다. 어쩌면 그는 주님이 바로 그 대답을 해주길 바라고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첫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주님의 그 대답을 듣고서 주님에게 이제 올무를 걸 기회가 왔다고 섣불리 판단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이웃 사랑을 잘하지만 예수와 제자들은 이웃 사랑을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사탄의 계략에 진 것 같은 모습이지만 주님은 그마저 들어 사용하여 당신의 인류 구원 계획을 온전하게 실현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도록 모든 상황과 사람들을 주관하신데다, 사탄은 주님이 죽음으로써 죄인을 구하는 사역이 끝날 줄 알았지만 주님은 부활함으로써 그 흉계를 완전히 깨트렸습니다. 도리어 구원의 길을 완벽하게 완성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율법사는 자기들은 이웃 사랑을 잘하고 있지만 예수와 제자들은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했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고 정반대가 옳다고 지적할 참입니다.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구인지 물은 까닭은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 동족만 이웃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끼리 서로 사랑했지만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죄인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사랑할 필요가 전혀 없고 상종 교제마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들 동족 중에도 로마의 앞잡이라고 보는 세리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저주 받아 지옥 갈 죄인 취급하였습니다. 반면에 주님과 제자들은 세리, 창녀, 과부, 고아, 불치병자, 불구자, 귀신들린 자는 물론 이방인과도 식사 교제를 하며 영혼과 육신 모두를 치유해주었습니다.

 

이 율법사의 관점에선 자기들은 이웃(유대동족) 사랑을 아주 잘하고 있으나 예수와 그 일당은 하나님의 대적과 어울려 다니느라 이웃 사랑을 오히려 잘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밝혀줄 것입니다. “이웃이 누구인지, 진정한 이웃 사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나아가 구원을 얻는 길은 무엇인지”가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추적해야 할 과제들입니다.  

 

2/19/2019 (계속 이어집니다.)


박홍현

2019.02.21 18:16:50
*.112.128.61

여기까지 잘 읽었습니다. 자세히 답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율법사의 대답(27절)

 

9번째 단락 마지막에, 

 

주님 보시기엔 그만큼 큰 교만과 죄가 없었습니다.

 

이 부분은 오타같습니다.

알료샤

2019.02.21 22:42:26
*.150.230.43

목사님

귀한 말씀 잘 읽었습니다.

다음 3부가 무척 기대가 되네요.^^

master

2019.02.22 04:22:01
*.115.255.228

박홍현님 알료사님 긴 글을 따라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서 너무나 피상적으로 때로는 잘못 가르쳐지고 있기에 더 자세히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따로 책을 써도 될 정도이지만 많이 줄인 것입니다만...) 그리고 27절의 9번째 단락 마지막은 오타가 아닙니다. 앞으로 더 전개되는 내용을 읽어보시고 다시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샬롬!

박홍현

2019.02.26 17:29:54
*.112.128.61

앞의 문장과 이어서 생각해보니 문장 호응이 잘 맞지 않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이미 율법사의 태도가 교만한 모습이라 충분히 문제가 없는 문장 같습니다. 제가 잘 못 생각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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