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녀 탄생을 인정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인가요?

조회 수 797 추천 수 28 2014.05.30 19:41:44
동정녀 탄생을 인정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인가요?


[질문]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나타난 기적들의 사건을 선뜻 이해할 수 없고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아예 기독교나 성경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의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예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단자로 낙인찍어버리는 현시대의 교회 사조를 다시 한번 신중히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싶지만, ‘예수님이 처녀의 몸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현재의 과학적 논리적인 사고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고민하는 사람이 정말 구원받지 못하는 ‘불신자’라고 낙인찍어버려야 할까요? 실제로 일어난 ‘사실’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한 사실들을 제대로 알 때 그것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증명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 모든 사실을 똑같이 인정하고 있는 건가요? ‘인정하는 것’이 ‘믿음을 가진 것’과 동등한 것일까요?

[답변]

참으로 중요한 주제를 거론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인데도 피상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적과 믿음의 관계에 대한 원론적 설명부터 드린 후에 동정녀 탄생 기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관해 구체적인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전제

기독교 신앙은 신구약 성경 66권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자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종교가 자신들의 경전을 믿고 따르듯이 너무나 당연하고도 상식적인 이치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내용이 반드시 성경이 말하는 바와 일치해야 합니다. 현대 신자들이 성경을 통해, 특별히 교리를 배우지 않고 주일날 하루 성경구절 한둘로 치장한 도덕 훈화나 생활 철학을 배우고는 믿음을 가진 것처럼 여기는 것은 너무나 잘못된 일입니다. 신앙과 전혀 무관합니다.  

성경을 믿으려면 그 말씀에 오류가 없다는 사실이 필수적 전제가 됩니다. 시대적 상황이 달라 문화적 윤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거나 현대의 과학 상식과 상충되는 부분들은 믿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신약만 믿는 신자라든가 창세기의 초반부는 믿지 않는 신자란 어불성설입니다. 과학적 윤리적 종교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자세히 살피면 충분히 수긍하고서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일부 지엽적인 부분에서만 해석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창1:1) 그 목적은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게”(계22:21)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대리하여 이 땅을 다스리게 할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했음에도(창1:28), 그분을 배역하여 죄에 빠진 인간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이 말하는 바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성경은 아무 전제나 구체적 설명 없이 하나님은 창조주라고 선포하면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절대자로 그분에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창조 후에도 모든 피조물의 생존과 운행의 법칙을 제정하여 통치하십니다. 법칙 자체를 제정한 분에게는 그 법칙과 달리 관리하는 일 즉, 동정녀 탄생 같은 기적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에는 기적도 당연히 인정하고 믿는다는 뜻이 내포됩니다. 어떤 기적은 믿고 어떤 기적은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도 성경의 일부는 믿고 일부는 믿지 않는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믿어지는 부분만 스스로 골라 믿는 것은 자기가 성경을 저작하는 셈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여 진리와 비진리 여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올라가는 극도의 교만입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을 아직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정말로 제대로 알고 싶다는 말은 성립됩니다. 반면에 이 부분은 진리가 아닌 것 같아 믿지 못하겠다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신앙이 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믿고 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전체를 읽고 또 읽으면서 관련 주해서나 신앙서적을 참고하면서 전문 목회자와 상의하면 충분히 이해하고 믿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적과 특별은총

기적에 관해서도 성경이 말하는 핵심적 진리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새롭고도 온전한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지금껏 기적을 초자연적 현상이라는 점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어 왔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물리적 양상이 자연이 운행되는 순리와 법칙과 상충되는 모습이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조금 부족한 이해입니다.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미리 제정해 놓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신학적 용어로 바꾸면 “일반 은총”에 해당됩니다. 당신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하나님이 당장 심판하지 않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에 따라 내려서 자기 노력한 만큼 수확을 얻게 해주고 또 자신의 수명에 따라 살아가도록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불신자는 혼자서 세상 사는데 큰 불편을 못 느끼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이미 마련해 주신 일반은총의 결과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설령 조물주가 있었어도 만물을 만든 후에 완전히 손을 놓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만사는 단지 인과응보적인 물리적 법칙의 한계 내에서만 이뤄진다고 믿습니다. 요컨대 이 땅에 하나님은 부재(不在)하고 자연과 물질뿐이라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기적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일반은총을 벗어나는 일 즉, 특별은총은 그 전부가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기묘한 자연 현상만이 기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해 베푸시는 모든 일과 구원 후에 그 부름 받아 나온 당신의 자녀들을 당신만의 사랑으로 인도하는 모든 일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던 자가 그분을 알게 되는 것, 그분의 아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그분의 인도대로 따라가면서 겪는 모든 일들이 세상은 모르는 하나님만의 은혜요 사랑으로 바로 기적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 같은 죄인을 어찌 구원해 주셨는지, 아니 그 이전에 나를 택하시고 나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까지 당신께서 일일이 간섭하셨던 일 모두가 기적이지 않습니까? 내가 소망하고 계획하여 미리 준비하면서 노력하여 얻은 구원이 아니지 않습니까?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아시고 나를 당신의 나라 안으로 당신만의 사랑으로 품어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분의 자녀가 된 뒤에도 우리의 보잘 것 없는 기도를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오묘하고 풍성한 방식으로 응답해주시고 합력해서 선으로 이끄시는 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심지어 때로는 기도를 하지 않았어도 나의 신음 소리와 마음의 통분함을 이미 다 들어서 아시고 그 고통을 해결해주시고 억울함을 대신 신원해주시지 않습니까?

이런 영적 간섭과 주도가 자연계 안의 물리적 기적보다 더 크고 중요한 기적 아닙니까? 구약시대에 기적들을 베푼 후에는 꼭 상천하지에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임을 알게 해주려고 했다는 설명이 함께 나오지 않습니까? 또 예수님이 책에 다 기록하지도 못할 표적을 일으킨 것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기적이란 그래서 일반 은총의 자리에서 특별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자리로 옮겨주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일반은총에선 하나님이 부인되니 기적도 부인됩니다. 하나님과 반대편에 있기에 그분을 알지도 못하며 스스로 알아보려고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성령이 아니고는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여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영접하게 되는 것이야 말로 핵심적 기적이자 요한 사도의 진술대로 하나님이 표적을 베푸는 목적입니다.

다른 말로 죄인을 구원하려면 일반은총이 아닌 특별은총 즉, 기적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고 기독교 신앙은 기적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듯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제 2의 창조가 구원입니다. 하나님만의 초자연적 역사가 바로 구원입니다. 그래서 특별은총은 두 가지 핵심진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구원이요, 둘째는 그 구원의 의미를 풀어 설명한 성경입니다. 한 죄인이 구원을 받고 자기가 받은 구원의 의미를 아는 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인 것입니다.

십자가 구원의 의미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죄에 빠진 인간을 조건 없이 무한한 긍휼로 용서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옳습니다. 그러나 이는 십자가의 한 쪽 측면만 본 것입니다. 죄에 대한 정당한 처벌 없이 무조건 용서하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자녀가 아무리 잘못해도 무조건 용서하면 자녀를 망치는 지름길이듯이 말입니다. 죄는 엄중하게 벌하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죄가 왜 잘못인지 정확히 깨닫게 한 후에 죄인을 용서해주어야만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하여서 의롭게 자라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에 빠져 그분의 의에 이르지 못해서 그분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의 처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하자면 모든 이에게 죽음의 형벌을 주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인간을 몽땅 죽어야 합니다. 이런 인간의 영적 실상은 예수님 오시기 전이나 지금이나 모든 세대에서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만족되어야만 인간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인간의 죄를 씻을 완전한 대속 제물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임으로써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의 모든 죄책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대속적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온전한 십자가 사랑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게 엎드린 자에게 구원의 선물을 베풀었습니다.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롬5:16,17)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할 완전한 대속 제물이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습니다. 우선 인간의 죄 값을 감당해야 하므로 첫째 조건은 반드시 인간이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중에 최고로 의로운 자라해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할 수 없는 죄인이므로 대속 제물로 자격이 없습니다. 최대한 양보해야 자기 죄의 형벌을 감당한 것밖에 안 됩니다. 둘째 조건은 그래서 다른 이의 죄를 모두 전가하여 그 죄책을 다 감당하기 위해서 완전하고 흠이 없는 제물이어야 했습니다.

매년 바쳐지는 구약적인 동물 제물의 대속 효과는 일시적, 부분적, 불완전할 뿐입니다. 또 제물의 두 조건을 충족할 자는 인간 중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그 죄 값을 직접 감당하고 대신에 죄인들을 살려주기로 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8:3)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써 오신 주님께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전가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히4:15) 그래서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히9:12) 영원한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완전한 제물로 바쳐졌기에 구원은 완성(once-for-all)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죄에 대한 형벌”과 “죄인의 용서”라는 구원의 두 측면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방도는 없습니다.  

동정녀 탄생의 의미

지금껏 동정녀 탄생을 남성과의 정상적인 성적 교섭 없이도 수태가 되었다는 초자연적 양상에만 초점을 맞추어 왔습니다. 과학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아서 그 사실성 여부에 의심쩍어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자들은 큰 관심과 의미를 두지 않았고 목회자들도 온전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동정녀 탄생의 기적은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특별 은총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선 인간의 죄 값을 대속할만한 완전한 제물이 바쳐져야 하는데 완전한 인간이되 죄가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자 하나님이 동정녀 탄생으로 이 땅에 오는 방식 즉, 완전한 인간이면서 완전한 하나님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만약에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거나 온전히 믿지 못하면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독생자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우리와 동일한 평범한 인간이라는 뜻이 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평범한 인간 제물로는 다른 이를 위한 대속 자체가 아예 불가능합니다. 억지로 갖다 붙이자면 한 의인 내지 영웅의 우연한 희생적인 죽음에 하나님이 감동을 받아 크게 인심 쓰듯이 사형수 감방의 문을 열어준 것에 불과합니다.  

요컨대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고 인간 영웅의 공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태초부터  구원으로 인도할 자를 택하여서 당신의 일방적 은혜로 베푸는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계획과 주관 밖에 있습니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하나님의 즉흥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다른 이들은 그 영웅의 희생적 선행에 공짜로 편승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구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측면은 그런대로 드러났을지 몰라도, 이는 서두에서 말한 대로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방탕에 방임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각 개인의 죄와 죄 값을 온전하게 처리해야 하는 공의는 전혀 만족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동정녀 탄생을 창세기에서부터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ㅏ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니”(창3:15) 인간을 꾀어서 원죄를 범하게 만든 사탄에게 내린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특별히 남성 우위적 사회에서 구태여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고 합니다. 동정녀 탄생으로 오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탄의 철장 권세를 깨트릴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성경 최초로 십자가 구원을 설명하는 구절이기에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원시복음은 차츰 구체적으로 계시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사7:14) 동정녀로 탄생하는 구세주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그 아기를 분명히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의신칭의의 교리를 설파하는 로마서의 첫 머리에 복음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1:2) 하나님이 동정녀 탄생의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기로 창세기, 아니 창세전부터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그 구원을 주관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그러니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이 된다는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의 역사성

동정녀 탄생을 구원을 위한 특별은총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라고 해서 그 역사성은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동정녀 탄생을 성경에 기록하게 된 경위는 오직 예수님의 생모인 마리아와 그녀와 정혼은 하되 주님의 법률적 아버지인 요셉에 기인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후대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먼저 후대에 지어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세상 종교들은 그 창시자를 신성시하기 위해서 초자연적 탄생을 강조하거나, 의로운 가문에서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은 모습으로 포장합니다. 알에서 태어났다든지, 동물과 인간 혹은 천사와 인간의 교섭에서 태어났다든지, 아니면 최소한 인간 사회에서의 위인 내지 성자는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이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비천한 모습으로, 그것도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할 동정녀 탄생이라고 합니다. 이성적으로 따지자면 혼전 임신이라는 불륜으로 태어난 이름 없는 사생아라고 밖에 인정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랄 때에 특출한 모습도 없었고 사역을 시작했어도 비천하고 가난한 자들과만 어울리다 십자가 사형수로 마감했습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죽을 때도 변변한 종교 경전 하나 없었고 종교적 조직체도 없었습니다. 후대 사람들이 지어내려면 아예 생각조차 못할 기독교 태동의 역사입니다.

성경대로 마리아와 요셉에서 탄생의 기원을 찾아야 합니다. 이 또한 세상에 통용되는 상식과 이성으로는 도무지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마리아 자신이 사형에 해당하는 혼전 간음죄를 지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 그런 아들이 구세주가 될, 사람들이 따르고 믿을 스승도 될 수도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물론 이방인에게도 씨가 먹히지 않을 이야기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는 성경에 기록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지금도 세상에선 예수가 마리아가 처녀 때에 로마 군인과의 혼전 불륜에서 태어났다고 비난하지 않습니까? 거기다 로마의 사형수에 불과한 유대인을 믿을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가장 온유한 입장이라도 문화와 관습과 사고가 다른 이스라엘의 종교 내지 서양 종교인데 왜 믿느냐고 반발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성경의 하나님 즉, 무에서 유로 창조한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에 관한 모든 것도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신자는 그와 반대여야 합니다. 성경을 믿는 자로서 성경이 과연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진리인지, 예컨대 동정녀 탄생 기사가 이성적으로도 합당한지 여부까지 탐구하고 또 탐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본인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선언했지 않습니까?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28,29) 어떤 인간도 영생을 준다고 선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말은 유대인으로선 입에도 담지 못할, 아니 꿈에도 생각 못할 말입니다. 거기다 아버지와 본인이 하나라고까지 선언했습니다. C. S. Lewis 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미친 사람이거나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에는 제자들에게 아예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고 직설적으로 선포했습니다.(요16:9)  그래서 보혜사 성령이 오면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게 하는 일을 제일 먼저 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요1장, 고전12:3) 말하자면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그분이 동정녀에서 탄생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으면

성경에서 동정녀 탄생이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에서 사랑만 남고 공의는 사라집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었다는 사실만 인정해도 믿음을 갖는데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 않느냐고 강변할지 모릅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그치면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바로 자기의 죄 값으로 완전히 죽었다 살아난 체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런 차이를 낳습니다. 인간 위인인 예수님이 “온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서 그가 창시한 기독교를 믿는 자도 그 죄를 용서해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치면 다행이련만 위에서 인용했던 성경 기록을 비롯해 예수님에 관한 성경 기록 모두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수님도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어집니다. 성경이 말하고 하나님이 태초부터 의도하여 계획한 구원은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부인하는 인간이 자기 생각으로 스스로 구원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령으로 거듭 나는 영적 체험이 생길 수 없습니다. 성령이 와서 행하는 첫째 일이 예수를 믿지 않은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을 수는 있어도 예수님이 자신의 온전한 주인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간섭하지 않고는 자기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는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절감하지 못합니다.(요3:5-9, 고전2:10-14) 성령의 씻음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제 이의 창조가 이뤄지는 체험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 십자가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실감이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자기의 자기 된 것이 “오직 예수님의 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성찰과 종교적 지식에 좌우”될 뿐입니다.  

하나님 예수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나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그분께서 나에게 새로운 참 생명을 주셨다는 인식이 없기에 그에 걸맞은 삶의 변화도 따르지 않습니다. 완전히 죽었다가 새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아시어 세상으로부터 따로 불러내어진 그분의 거룩한 성도가 아닙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체계 안에 있는 기독교인은 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그분의 친 백성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바로 사도신경에 한 구절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자라면 마땅히 또 자연스레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고백합니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으로써 흠이 없는 완전한 대속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그 사랑을 알게 됨으로써 자신의 죄 값이 완전히 제거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거역했던 자기는 완전히 죽었고 또 그분의 부활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써 새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동정녀 탄생은 십자가 구원의 출발입니다. 그 출발이 없으면 구원은 아예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영적 의미는 물론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다른 말로 사도신경을 부인하면, 이단으로 취급합니다. 그 의미와 역사성에 대해 아직 온전히 납득되지 않아 선뜻 믿기 힘들 수는 있습니다. 그 기적이 구원을 위한 특별은총이라는 점은 알지 못하고 단순히 초자연성에만 주목하여 이성적으로 동의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성과 상식을 동원하여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사가 왜 성경에 기록되었을지 유추해보면 오히려 그 사실성이 더 확실하게 입증될 뿐입니다.  

5/30/2014  

김추강

2014.06.02 19:29:36
*.204.91.2

하나님이 못 하실 일이 없으니, 기적은 당연히 일어날 수 있으며 그렇게 여기는 것이 어려워 보일 것도 없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걸리는 것은, 글에서 쓰인 ‘변증’에 관한 관점이나 방법들이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무런 연결고리를 줄 수 없다는 염려입니다. 기독교신앙의 전제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첫 스텝이라면, 결국 비스리스도인들에게는 답변의 이야기가 아무런 의미 없는 ‘교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 66권이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 온전하고 절대적인 진리임’을 믿는 것이 구원을 받는 ‘본질적인 믿음’입니까? 기독교신앙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나머지 성경에 나타난 진리의 말씀을 비그리스도인들과 멀어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일부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자칫하면 ‘종교적 신념 (creed)’와 ‘믿음 (faith)’을 혼동하게 되지 않을까요?

여기에 쓰신 문답의 글과 관련하여 꼬리를 잡는 질문과 논쟁을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목사님의 글들을 통해 많은 유익을 받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운영자

2014.06.02 21:37:48
*.231.162.27

김추강 형제님

형제님 지적하신 부분은 저도 100% 공감하니 아무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드린 답변은 기존의 교인들을 상대로 한 것입니다.
답변의 서두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는
당연히 기적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 까닭입니다.
불신자에게는 형제님 말씀대로 기독교 신앙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교리부터 강조할 수 없고 또 그래선 오히려 반감만 살 수 있습니다.

변증은 그 대상에 따라 두 가지 내용으로 나눠질 것입니다.
기존 교인들의 믿음을 올바로 세우고 더 굳건하게 성숙시키는 내용을,
(저의 위 답변이 이에 해당됩니다.)
불신자들에게는 기독교 믿음을 이해시켜서 그 마음을 열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불신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교리로 바로 들어가기 보다는
하나님의 실존성, 그분이 어떤 분인지, 또 그분과 비교한 인간의 역적 실상,
즉 죄가 무엇이며 왜 생겼고 결과가 무엇인지, 등등부터
먼저 설명한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요컨대 불신자가 정말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죽을 죄인이라고 인정하기 전까지는
예수님과 그 십자가는 잘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작 문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자기가 죄인임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고
또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십자가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따라서 불신자를 향한 변증은 그들의 마음을 여는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온전한 기독교 믿음을 가지려면 성령의 역사로 십자가 은혜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변증과 함께 성경공부를 통해 말로써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변증과 전도 모든 과정에 성령이 역사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병행하면서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적 신념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성경적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교리이기에
교리와 신앙에 불일치나 부조화가 생긴다면
그 갭을 제대로 해소해주는 것이 변증의 또 다른 역할일 것입니다.
제 글들이 이런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되길 진정으로 소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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