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이 땅에서도 무소부재 전지전능하셨는지요?

조회 수 1338 추천 수 14 2014.06.25 19:28:32
예수님은 이 땅에서도 무소부재 전지전능하셨는지요?


[질문]


딱히 어느 성경 구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성경을 볼 때에, 예수님은 당연히 하나님(성자 하나님)이시며 태초부터 성부하나님과 같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있으라 하시매 있었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리고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는 없으시나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수많은 죄의 유혹이 있었으나 하나의 죄도 짓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비록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완전한 하나님이시기도 하신 거죠.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인간적인 제 한계로 이론적으로는 설명 못하지만 당연하다고 믿어집니다. 그저 죄 없는 인간이었다면 달랑 한 사람정도 대속할 수 있으셨겠죠.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삼위일체 중 성자 하나님이라는 것에는 전혀 의혹이 없습니다.

다만 궁금한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계셨을 때에 성부 하나님처럼 (아니면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의 성자 예수님처럼) 무소부재 전지전능 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무소부재, 전지전능을 포기하셔도 예수님 본체가 하나님이신 것은 바뀌지 않는 것인데, 이것을 부정하면 예수님의 신성 자체를 부정한다고 이단이라고들 많이 나와 있는데요. 하나님이시면서 이 능력들은 포기하시고 이 땅에 사실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져서요.

[답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세 가지 중요 결정


상당히 무거운 주제의 질문을 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사역할 동안의 예수님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초대교회 이래로 숱한 논쟁을 낳았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왜곡하여 가르치는 숱한 이단들이 출현했기에 성경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변증과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그 복잡한 과정과 신학적 토론을 다 설명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 중에 정통과 이단을 가름하는 세 공의회의 중요 결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것으로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인간에 불과하다는 이단들이 나타났습니다. 대표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던 아리우스(AD 250?-336)가 성자는 항상 존재하지 않았고 피조 된 존재로 그 시작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AD 325에 니케아종교회의가 열렸고 알렉산드리아 부주교였던 젊은 아타나시우스(AD293-373)의 예수님은 하나님과 비슷한 본질이 아닌 동일본질 즉, 완전한 신성을 가졌다는 반론이 채택되고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분명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이 동시에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또 다른 논쟁거리로 떠올랐습니다. 대표적으로 라오디게아 주교 아폴리우스(AD 310-390)는 그리스도 안에 인간의 몸과 혼만 있으며 하나님의 로고스가 인성의 영혼을 대신하다고 했습니다. 필연적으로 주님의 인간적 육신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로 발전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AD381의 콘스탄티노풀 공의회에서 그의 견해를 정죄하면서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육신하셨다고 즉, 참 사람이 되셨다고 선언했습니다.    

두 번의 공의회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확증되자 이제 그 둘이 어떤 관계를 이루어서 각각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두 인격(위격 two persons)을 가졌다는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兩性論)과, 성육신 이전과 달리 인성과 로고스의 연합 이후에는 하나의 합성된 한 본성이 되었다는 유티커스의 단성론(單性論)이 대표적인 잘못된 주장이었습니다. 칼케돈에서 AD451에 소집된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혼동 없이, 전환 없이, 분할 없이, 불일치 없이, 분리 없이” 연합된 한 인격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 안에 두 개의 자의식(自意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칼케돈 공의회에서 그 때까지의 모든 논쟁을 포괄적으로 종결지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도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토록 계실 성자 하나님으로써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이 아무 혼돈 없이 연합된 신인(神人 God –Man)으로 계셨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극히 일부라도 하나님과 인간으로 각기 분리될 수 있는 존재(God and man)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서기 5세기 중반 이래 지금껏 정통 복음주의 교회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교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속성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 같은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일부 신학자들이 예수님이 편재성(omnipresence)과 전지전능성(omniscience & omnipotence)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자기비하 기독론”(kenotic christology)을 주장합니다. 질문자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이 능력들은 포기하시고 이 땅에 사실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진다.”고 했듯이 말입니다. 이런 견해에 대해선 완전포기와 일부포기 두 경우로 구분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속성의 전부 포기

우선 완전한 포기는 전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오직 인간으로만 사셨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실제로 사역하신 모습과도 완전히 상충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가장 먼저 알아보고 사람들에게 공지했던 침례 요한도 옥중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잠시 의심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인지 물어봤는데 주님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4-5)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는 현대에도 불치병입니다. 유전공학이 발달되다 보면 언젠가는 많은 불치병들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 한 마디로 순간적으로 완벽하게 고쳤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이 또한 주님은 말씀 한마디로 살렸지만, 더더욱 없습니다. 폭풍마저 말씀 한마디로 잠잠하게 하자 제자들이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면서 심히 두려워했습니다.(막4:39-41) 예수님은 이 땅에서 전지전능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히 내보였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예수님은 당신의 편재성도 당신의 입으로 증명했습니다. 이 말씀이 부활하신 후 즉, 하나님의 신성을 회복한 후에만 해당된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살아계신 중에도 직접 동고동락한 소수의 제자들 외에도 신자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에 그 가운데 주님은 분명 계셨습니다. 그들의 일상적 삶도 주님이 다 주관하여 인도하셨습니다. 예컨대 삭개오가 주님을 영접하러 뽕나무 위에 올라간 것이 스스로의 결정 같아도 주님이 미리부터 그에게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을 심어준 것입니다.(눅19:1-10)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줄 때에 직접 그 집에 가지 않고도 멀리서 말씀으로 고쳐주었는데,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마8:5-13) 예수님의 권능이 멀리 떨어진 백부장의 집에 역사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육신으로도 편재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 수시로 나타났고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 호수에 가있었습니다. 이 또한 신성을 회복한 후라고 해도 어쨌든 승천하시기 전이니까 이 땅에서의 사역입니다. 무엇보다 변화산에서 제자들 앞에서 천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마17:1-8) 천국과 이 땅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할 뿐 아니라 그 모두를 주관하는 하나님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제자들을 먼저 배로 출발시킨 한참 후인 한 밤중에 바다 위를 걸어서 순식간에 그들에게 도달했던 사건도 시간과 공간을 다스리는 분이라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마14:22-33) 이 때도 제자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33절)라고 베드로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마16:16) 전인데도 주님을 성자로 인정하며 절까지 했습니다.

이 곳 저 곳에 동시에 나타나는 육체적 편재는 결과적으로 가현설을 지지하게 되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기에 더더욱 그래선 안 됩니다. 인간과 달리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으면 편재입니다. 그래서 편재는 반드시 영적 편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펴본 대로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전지전능성은 물론 편재성을 포기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이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사실을 구태여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 속성의 일부 포기

예수님이 하나님의 속성 중 일부를, 그중에서도 전능성을 포기한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는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무 저항 없이 잡혀가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이 그 대표일 것입니다. 주지해야 할 사항은 그 사건을 기록한 바로 그 구절이 포기가 아니라고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營)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26:53,54)

영(營)은 6천 명으로 조직된 로마의 한 군단을 뜻합니다. 당시 로마는 유대 전 지역을 한 영으로 충분히 다스렸습니다. 열둘은 꽉 찬 완전한 숫자입니다. 주님은 언제든지 천군천사를 다 동원할 수 있었고 그럼 예루살렘 주둔 로마군은 물론 로마 제국 전체도 얼마든지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전능성은 여전히 갖고 계셨습니다.

포기라는 것은 도무지 능력이 달려서 항복하거나,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천군을 불러 내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당신의 공사역 내내 성자 하나님의 전능성을 일부라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억제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죄악으로 관영한 이 땅을 언제든 순식간에 멸망시킬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까닭이 당신의 능력을 포기한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한없는 긍휼이 그 능력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듯이 말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 &14)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이셨고, 이 땅에 오셨을 때도 하나님 당신이셨으며, 승천하신 후 지금도 성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하나님으로서 좌정해 계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나 오신 후에라도 그 특성을 아주조금이라도 포기 내지 비우셨다면 하나님이 아니게 됩니다. 조금 모자란 하나님이란 아예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최고로 잘 봐주어야 천사들 중에 최고 높은 자가 될 뿐입니다. 인간 이상의 존재이긴 해도 완전한 하나님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극히 일부라도 포기한 하나님”이 된 적이 전혀 없습니다. 대신에 십자가 처형에서 보듯이 “전능성 전체를 완전히 억제하여 완전한 인간”이 되신 적은 있어도 말입니다.

그래서 로버트 레이몬드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신약성경과 칼케돈 기독론의 일치된 표현은 성육신은 뺄셈(extraction)이 아니라 덧셈(addition)의 행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히 하나님이 되시는 것의 중단함이 없이 우리의 인간본질을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드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 완전한 하나님이 아닌 적도, 완전한 인간이 아닌 적도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 “개혁주의 기독론”, 로버트 레이몬드 저작, 나용화 옮김, 기독교문서회 2007 발간, p 344)

속성의 비움이 아닌 신분의 비하

“그는 근본 하나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이 성육신 하실 때의 비움 내지 비하는 하나님의 속성의 포기가 아니라 신분의 낮아짐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레이몬드의 표현대로 하자면 비천한 신분의 인간을 덧입은 것입니다. 오직 죄만 빼고 인간의 모든 특성을 다 자신의 것으로 더하시고 실제로 공사역 중에 그 특성들을 다 드러냈습니다. 성전에서 불같이 화를 내며 장사치를 쫓아내었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속으로 통분히 여기며 우셨고, 환자들을 볼 때마다 긍휼히 여기셨으며, 때가 되면 배가 고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4)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2-14)

성자 하나님 예수님이 자신의 신분을 인간으로 낮춘 것은 오직 완전한 인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져 인간의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영원하고 온전한 단 한 번의 제사를 드리고 죄의 노예로 묶여 있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열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의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에서 건져주시고 더 이상 정죄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속 외에 주님이 인간으로 오신 또 다른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그(주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그 빛이 세상에 비췸으로써 사람들로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음을”(요1:10) 깨닫게 하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려 하심”(엡1:10)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3,14)

사람들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세상 역사를 어떤 방향과 원리로 이끄시는지, 특별히 죄인을 어떻게 구원하실지, 또 구원하신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실 은혜와 소명이 무엇인지 등을 밝혀 보여 알게 하시려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속성을 일부라도 포기하면 온전한 제물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도 사람들에게 온전히 보여주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죄가 하나도 없는 인간이 되려고만 해도 하나님의 전능성을 전부든 일부든 포기하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의 모습을 이 땅에 보이셨음에도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요1:10,11)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예수님이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에 자기 죄를 회개치 아니 했습니다. 만약 인간만으로, 혹은 일부 속성을 포기했다면 결과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줄 알고도 인간을 창조한 까닭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비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당신을 영접하지 않을 것을 알고도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까닭도 십자가가 예비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온전한 제물로써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온전히 계시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그 계시된 진리를 사람들로 깨닫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임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온전한 은혜답게 베풀어지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결론적으로 말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정체성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여야 했다는 뜻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태초부터 세워진 완벽한 구원 계획에 따라 동정녀에게 성령으로 잉태하여 인간으로 나시고, 삼 년 간의 공사역을 온전한 인간이자 온전한 하나님의 속성을 지닌 채 수행하시고, 로마와 유대의 합작으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시어 사십일 후에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와서 택하신 죄인에게 성령이 간섭하여 중생의 은혜를 베풀면서 온전한 회심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 역사와 방식이 아니고는 온전한 구원이 이뤄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세대 모든 인간 중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예수님과 동일한 아니 비슷했던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아예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써 완전한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는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이자 인간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고안해 낸, 아니 고안해 낼 수 있는 구원방식도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의  은혜는 인간의 도덕, 사상, 철학, 종교를 초월한 하나님 그분만의 의(義, righteousness)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인간의 동의, 이해, 납득을 넘어서 완전하시고 영원하신 그분이 하셨기에 다 옳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기껏 생각해낼 수 있는 구원은 착한 자가 구원 받고 악한 자는 심판 받는 정의(正義, justice)일 뿐입니다. 죄인에 대한 사랑이 실현될 길이 없습니다.

반면에 인간의 죄는 죽기까지 저주하시되 그 죄인은 죽기까지 사랑하기 위해서 당신의 진노를 당신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억제하시고 당신의 긍휼은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드러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성육신 하되 하나님으로서의 속성을 이 땅에 계실 동안에 포기하지 않고 억제해야만 했습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오직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 당신의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특성의 교류와 역사는 그분만의 신비에 속한 것입니다. 당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유기적 역동적으로 당신의 뜻에 따라 이뤄졌을 뿐입니다. 매 사건, 매 장소, 매시 마다 반드시 예수님이 행하신 모습 그대로 두 속성이 교류하고 역사해야만 했을 뿐입니다.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성육신한 목적과 당신께서 의도한 뜻에서 하나 부족함 없이 행하셨던 것입니다.

요컨대 그분은 이 땅에 계셨을 동안에도 절대로 변할 수 없고, 변하지도 않은 성자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분의 인성과 신성은 한 인격 안에서 “혼동 없이, 전환 없이, 분할 없이, 불일치 없이, 분리 없이” 연합하여 역사하였습니다.

6/25/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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