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3:16의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이란?

조회 수 83 추천 수 0 2019.08.07 16:16:32

계3:16의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이란?

 

[질문]

 

예수 믿는 친구들과 요한계시록의 3:14-22의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16절)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토해내는 것을 어떤 이는 구원의 취소를 뜻한다고 했고, 저는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주님의 자녀에게 말씀하신 것이라 하나님은 자녀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고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또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무슨 뜻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성경을 전체 문맥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는데 저로선 아무리 해도 어려워서 정확한 해석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목사들

 

질문자에게만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많은 목회자들도 부족하게 심지어 잘못 해석해서 가르치고 있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가장 많이 범하는 아주 큰 오류는 차거나 뜨겁다는 말씀을 신앙생활을, 더 정확히 말해 교회생활을 하는 모습에만 비추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유지 실현하는 태도가 차분하게 이성적이든지 열정적으로 감성적이든지 둘 중 하나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성경에 계시된 교리와 계명을 지식적으로 많이 습득하여 실천하면서 교회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에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목사에게 묵묵히 순종하는 모습을 차갑게 믿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성령의 은사를 추구하면서 뜨겁게 기도하고 열정적으로 찬양하며 교회 직분을 맡아서 몸 사리지 않고 희생해가며 섬기는 것을 뜨겁게 믿는 것이라고 풉니다.

 

이런 해석은 필연적으로 교회에 아무리 오래 다녀도 주일 예배에만 참석하고 아무 직분도 맡지 않고 성경공부나 기도모임에도 열심을 내지 않는 것이 미지근한 믿음이 됩니다. 그런 신자들에게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권면 충고하고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이 토해낼 것이라는 경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정작 말하는 바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해석입니다.

 

성경해석상 결정적인 잘못들을 여럿 범한 탓입니다. 성경해석의 원칙과는 아예 담을 쌓고 그저 그냥 두 단어, 그것도 차다 덥다라는 형용사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목사 개인의 생각을 강요한 것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심지어 분노마저 치밀어 오릅니다.

 

성도들은 질문자님처럼 하나님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정확히 알고 싶어 하는데 그 요구를 제대로 채워주지 못합니다. 한 술 더 떠서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신자가 아니라 교회와 목사에게만 충성하는 교회 회원들만 양육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니까 작금 기독교인들이 정작 세상 죄악과 사탄에게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번번이 패배합니다. 교회 안에 모이게 해선 기독교라는 종교 장사 놀음에만 몰두한 당여한 결과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부패한 유대 성전과 그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이런 해석은 우선 앞뒤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16절 한 절만 따로 떼어서 그것도 순전히 문자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둘째 비유와 진리를 구분해서 해석하지 않았고,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며, 책의 전체 내용과 저자가 강조하려는 주제와 연결시키지도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본문 자체가 말하는 바를 찾지 않고 목사가 말하고자 하려는 뜻에 본문의 한 구절만 억지로 끼워 맞춘 것입니다.

 

역사적 상황 하에 기록된 실제 편지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14-22)

 

요한계시록을 단순히 인류 역사의 종말과 마지막 때의 대환난에 관한 예언으로만 간주하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성경의 묵시적 예언의 본질적 특성이 먼 미래까지 포함합니다. 거기다 요한 사도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피조세계 전체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아서 성령의 영감에 따라 저작한 것도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막상 저자 요한은 당시 로마의 크리스천에 대한 박해가 극심해져서 큰 고난 중에 있는 교회와 신자들을 일차적으로 위로하려는 목적으로 기록했음을 반드시 감안해야 합니다. 당장의 로마 황제나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나 아무리 막강한 세상 권력도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 앞에 무력하게 패배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 것이 책의 주제입니다.

 

참담한 고난 중에도 부활 승리에 대한 소망을 키우며 끝까지 인내하여서 이기는 신자는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영광과 거룩한 통치에 세세토록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까닭입니다.

 

현재 핍박을 받고 있는 교회와 신자들의 위로가 서신의 일차적 목적이라면 반드시 당시의 상황을 감안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실존했고 그 현실적 영적인 상황을 저자 요한은 물론 이 서신을 읽는 독자들도 익히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주님은 이 계시를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원칙이 여럿이며 학자들 간에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해석관점을 취하든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과 그것이 당시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반드시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렇게 파악된 일차적인 영적 원리를 모든 세대의 신자와 교회들이 자기들 상황에 적용 실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오늘날 기독교에 대한 불신 세상의 비방 핍박이 아무리 심해져도 오직 예수 십자가 승리와 부활 생명만 붙잡고 이겨내며 천국 소망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만약 당시 상황은 전혀 감안하지 않고 종말에 관한 묵시로만 여기고 마지막 때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표나 물리적 상태를 추측하려 해선 안 됩니다. 적그리스도의 잔혹한 핍박이나 지구 종말의 비참한 모습을 예측토록 하여서 신자로 두려움에 빠지게 만드는 책이 절대 아닙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계시록이 말하는 바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의 말씀으로 신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해석하는 원칙

 

질문하신 구절이 오늘날의 독자에겐 난해해 보여도 막상 저자 요한과 독자인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당시 상황을 잘 알기에 무슨 뜻인지 부연설명 없이도 쉽게 그 뜻이 소통되었습니다. 따라서 설명 드린 대로 가장 먼저 당시 상황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이 구절에서 “차거나 뜨겁거나 미지근하다”는 표현들은 당시의 어떤 사안에 빗대어서 말한 것입니다. 수사학적으로 비유에 속합니다.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어떤 진리를 더 쉽고도 분명하게 깨닫게 하려고 화자나 청자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현실 상황에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비유들을 해석하는 제일 중요한 원리를 쉽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른다.”는 한국 속담이 있습니다. 기억 자의 모양을 그와 흡사한 낫의 모양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 속담은 낫을 보면 기억 자의 모양도 알 수 있다고 강조하는 뜻이지, 기억 자를 보면 낫의 모양도 알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속담이 강조하려는 진리는 기억 자의 형상이며 낫의 모양이 아닙니다.

 

미지근하다, 차다, 뜨겁다는 표현들은 물론 토하여 버리리라는 것까지 상기 속담에 비추면 낫 즉, 어떤 진리를 가시화시켜 쉽게 설명하려고 비교된 대상입니다. 그것들의 문자적 의미 자체가 영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서두에 설명 드린 것 같이 그런 표현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는 것은 기억 자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낫 모양만 열심히 공부하는 꼴이 됩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지역 근처의 히에라볼리에는 온천이 있었고, 또 골로새에는 냉천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온천수는 치료용으로 사용했고 찬 물은 식수로 사용했는데 그들에겐 물은 반드시 차거나 뜨거운 것 둘 중 하나여야만 했습니다. 만약에 이 둘을 섞어서 미지근해지면 식수로도 치료용으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시는 순간 바로 토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토해내는 미지근한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겉으로 보기엔 분명 물이지만 물로서 전혀 가치가 없고 도무지 마실 수 없어서 아예 뱉어내어야만 하는 쓰레기입니다. 이 비유가 드러내려는 영적인 진리는 겉으로는 신자인데 속에는 신자로서 가치가 전혀 없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쭉정이로 나중에 불에 태워질 가짜 신자들입니다.(마3:12)

 

일부 주석에서 온천과 냉천에서 오는 물이 수로(水路)로 흘러오는 도중에 식어서 미지근해졌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냉천에서 오는 물은 아무리 미지근해도 토해낼 정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 수로 자체를 건설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말로 갈증이 심하면 아무리 미지근해도 너무나 시원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온천수 또한 아무리 식어도 내포된 성분은 변함이 없으니까 그대로 피부질환에는 효능을 나타내고 다시 데워서 활용하면 됩니다. 대부분의 온천장들이 온도를 식혔거나 다시 데운 것들이듯이 말입니다.

 

토해내는 대상이 누구인가?

 

라오디게아교회의 교인들뿐 아니라 계시록을 읽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교인들도 주님의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추가 설명 없이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미지근한 것은 온천수와 식수 두 가지를 섞었기에 토할 수밖에 없어서 아예 물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것 같은 신자를 빗대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어지는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는 설명이 바로 그런 뜻이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자기는 잘 믿는 신자라고 착각하고 입술로도 주여, 주여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영혼이 완전히 벌거벗었고 하나님의 진리는 전혀 모르는 자입니다. 나아가 본인은 자신이 그런 줄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교회 안의 겉만 번지르르한 쭉정이 신자입니다. 현재 당면한 로마의 핍박에서나 마지막 때의 환난에서나 그런 교인은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물을 섞었으니까 당시 예수님만 믿은 것이 아니라 여러 우상도 함께 숭배하는 혼합신앙을 뜻한다고도 봐야 합니다. 나아가 초대 교회에 침입한 순전한 십자가의 은혜만으로 부족하니까 유대교의 전통도 지켜야 구원 받는다고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인 유대주의자들을 추종하는 교인들도 포함시켜야 합니다. 우상을 함께 숭배하든 다른 복음도 함께 따르면 하나님과 예수 십자가를 온전히 믿는 자들이 아닌 불신자입니다.

 

토해내리라는 것도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물에 관련된 비유적 표현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불신자와 거짓 신자를 외면한다는 것이지 참 신자의 구원을 취소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이미 회심을 한 온전한 신자가 때로는 세상 시험과 유혹에 넘어진다고 해서 내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절)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20절).” 언뜻 주님이 말하고 있는 대상이 동일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편지의 수신인이 라오디게아 교회 공동체이지 한 사람의 교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앞의 19절은 교회 안의 알곡 이미 회심한 참 신자를 말합니다. 아무리 외부의 핍박이 극심해도 그 자체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는 차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너무 심하거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믿음이 떨어졌어도 다시 회개하고 오직 십자가 어린 양의 승리만 붙잡으라는 권면입니다.

 

이어지는 20절은 교회 안의 쭉정이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 또한 비유이지만 주님이 계속해서 그 심령 밖에서 두드리고 있습니다. 쭉정이들은 자기 영혼이 벌거벗고 가난하고 비참한데도 그 사실은 전혀 모르고 주님의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막고 문을 열지 않습니다. 참 신자가 성령이 들어와 내주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요컨대 상기 구절에서 미지근한 자는 교회생활에 열의가 없는 자를 말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회심한 참 신자라면 누가 강요 권면하지 않아도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기 마련입니다. 교회와 목자들이 올바른 복음 위에 서있고 제대로 가르친다면 말입니다.

 

상기 본문은 한마디로 신자라면 오직 십자가 복음의 완전한 영단번의 승리만 끝까지 붙잡으라는 위로와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의 것까지 포함해서 어떤 환난에도 이길 수 있고 또 주님이 당신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신다는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너무나도 큰 힘이 되는 약속입니다.

 

8/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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