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기도의 차원을 높여라.(요17:1-5)

조회 수 1052 추천 수 20 2012.07.02 13: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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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차원을 높여라.(요17:1-5)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시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1-5)  


십자가가 영광인 예수님

드라큘라가 실존인물임을 아는가? 그런 흡혈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뜻이 아니다. 중세 시대의 동구라파 지역의 한 포악한 군주의 이름이다. 그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알려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회교도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감옥에 있던 죄수들 수백 명을 한꺼번에 십자가에 처형해서 성으로 오는 길 양 쪽에 쭉 늘어세웠다. 침공해오던 무슬림들이 그 죽은 시체들의 기괴하고 처참한 모습을 보자 치를 떨며 공포에 휩싸여 오던 길을 되돌려 퇴각해버렸다고 한다. 그 인물의 이름만 빌려서 뱀파이어에 관한 공상소설을 쓴 것이다. 혹시라도 오해하지 말 것은, 지금 드라큘라 백작이 아주 잔인했다는 것보다 십자가 처형이 너무나 처참하다는 뜻의 예화를 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만찬을 즐기며 그들의 발을 씻겨주었고 다락방 강화로 가르치셨다. 그 후에 그들과 이 땅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셨는데 본문은 그 첫 부분이다. 때가 이르렀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데도 당신께서 영화롭게 된다고 한다. 그것도 성부 하나님도 함께 말이다.

십자가란 도무지 영광과는 거리가 먼데도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이제 곧 부활 승천하셔서 천국 보좌 우편에서 만민을 다스릴 것이기 때문인가? 연약하고 비천한 인간에서 영광스런 하나님의 본체로 돌아가기 때문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바는 좀 더 다른 뜻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항상 영화롭다. 태초부터 영원까지 그 영광이 절대로  늘거나 줄지 않고, 퇴색, 변질, 왜곡되지도 않는다. 천지창조를 할 때의 영광이나 인간이 창조의 선한 목적을 위배해 타락했을 때나 동일하게 영화로웠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출애굽 시킬 때나 그들을 멸망시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했을 때나 그 영광은 동일하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혀 긍휼을 보이지 않고 지옥 심판을 내려도, 심지어 이 지구를 지금 당장 멸망시켜도 그분의 영광에 단 한 치의 부족이나 오류가 없다.

예수님도 비록 이 땅에 흠모할 모습 하나 없이 보기에 연한 순 같이 오셨고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지내다 비참하게 십자가에 죽었어도 성육신 할 때부터 부활 승천할 때까지 그 영광은 동일했다. 영광(glory)이란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인간에게는 절대 적용시킬 수 없는 용어다. 죄 많은 인간으로선 도무지 근접할 수 없는 찬란한 광채이다. 어떤 추함과 악한 것도 섞이지 않은 완전한 밝음이다. 예수님은 어두움에 휩싸여 있는 이 땅을 밝히려 오신 하나님의 참 빛이었다.  

천국은 항상 영광스런 곳이다. 주님이 그곳으로 올라가시면서 성경 독자들에게 구태여 영광스럽다고 강조할 필요는 그리 없다. 주님도 4절에 보면 세상에서 즉, 인간들 사이에서  영화롭게 된다고 했다. 특별히 “아버지께서 내게 하시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고 했다. 십자가에서 죄인들의 구속을 완성시킨 것을 뜻한다. 2절에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당신이 갖게 된 까닭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뜻이라고 하지 않는가?

두 가지 의미의 영광

예수님은 죄와 사단과 사망의 멍에에 묶여서 흑암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러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대속 제물로 성부 하나님께 드렸다. 더럽고 추한 세상 속에서 갈 바 몰라 방황하는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을 완성함으로써 성부는 물론 당신께도 영광이 된 것이다.  

십자가는 가장 고통스럽고도 잔인하기도 하지만 가장 수치스런 처형 방식이었다. 영광스런 하나님 당신께서 완전히 발가벗겨져 치부를 만민에게 다 드러내고 죽으셨다. 사람들은 비방 조롱 멸시하며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욕을 하며 채찍질했다.

유대인들이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다. 율법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b)고 선언한다. 그들 생각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라면 십자가 처형을 당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저주 받은 죽음을 한 자가 어떻게 메시아가 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낌”이 되는 것이다.(고전1:23)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분은 하나님 본체시다. 항상, 유일하게,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영광스런 분이다. 말하자면 스스로 자신을 영화롭다고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영광스런 분이다. 그런데도 십자가 구속에 대해서만은 당신의 입으로 영화로운 일이라고 치켜세웠다. 무슨 뜻인가? 영광의 의미로만 따지면 어폐가 있지만, 본인 심정으로는 당신의 모든 영광 중에 가장 큰 영광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이렇다. 운동 경기에 우승해 트로피를 받거나 시상식에서 최고상을 받으면 이 모든 영광을 부모님이나 사랑하는 아내에게 돌린다고 말한다. 그 때의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glory)과는 다르다. 벅찬 감격에 사로 잡혀서 최고로 기쁘며 그 자리에 이르도록 흘렸던 지난 모든 땀과 피가 이런 크고도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기에 너무나 감사하다는  뜻이다. 사람에게 돌리는 그런 영광은 영어로는 honor다.

또 그런 영광은 항상 박수갈채, 꽃다발, 팡파르가 울려 펴지는 가운데 모든 이의 축하를 받기 마련이다. 골고다 언덕에선 그런 상황이 전혀 연출되지 않았다. 아니 정반대였다. 제자가 배반하여 죽음으로 내몰렸고, 수제자는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했고, 모든 제자들이 뿔뿔이  도망 가버렸다. 당신을 낳은 생모와 감정에 겨운 몇몇 여인네들만 남아서 나무에 달린 젊은 랍비를 보고 측은함과 동정심과 안타까움을 가득 안고 절망에 빠져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영원토록 영광스런(glory) 그분이 이 모든 영광(honor)을 당신을 앎으로써 영생을 얻은 모든 죄인에게 돌린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맡겨주신 자들을 끝까지 사랑한다고 외친 것이다. 그 영광을 받을 자 중에는 천하에 최고로 교만했고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하고 허공을 치면서 헛되고 헛된 삶을 살았던 저도 포함되어 있다. 거기다 예수를  믿고 난, 목회자가 된 이후에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을 거부, 부인, 배역, 원망하며 속에선 수시로 거짓과 궤휼과 음란과 치사하고 추한 생각이 떠오르는데도 여전히 예수님 당신을 믿었다는 단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저를 영화로운 자로 여겨 주신다.

저 뿐 아니라 여러분 모두를 지금 이 순간에도 “You are my utmost & best honor."라고 선포하고 계신다. 비록 우리가 미국 이민 와서 험한 일을 하며 숱한 고생을 하고, 육신은 병들어 고달프고, 인간관계에 많은 상처와 질곡을 안고 있어서 어디 내세울 것이라고는 단 하나 없어도 우리를 영광스럽게 여겨주신다. 그분은 예수 믿는 자를 보기만 해도 기쁨에 겨워서 춤을 추신다.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여기든 간에 그분은 절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이미 주신 영생을 거두시지 않으신다. 천국에는 우리를 위한 영광이 벌써부터 완전히 확보되어 있다. 그런데 신자가 누리는 영광은 정작 이것뿐이 아니다.  

신자의 또 다른 영광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시91:15-16)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 즉, 신자가 환난 날에 주께 구원을 간구하면 그 기도에 응답하겠고 그를 영화롭게 해준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고난 중에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그분은 아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에는 수많은 뜻이 있지만, 가장 기본적으로는 신자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이미 십자가의 영광 가운데 서있기에 주님의 이름을 아는 자가 환난 중에 구원해달라고 엎드리기만 해도 하나님 당신은 기쁨에 겨워서 어쩔 줄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 새벽 기도에 어떤 마음으로 나왔는가? 혹시라도 너무 힘든 고난을 당해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나이질 기미는 안 보이고 갈수록 더 어려워지기만 하니 하나님에 대한 의심, 불만, 불신에다 분노마저 가지고 있는가? 세상에서의 호사와 풍요를 간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 문제 하나만 해결해 달라는데 여전히 전도가 안 보이므로 너무나 갑갑한가? 응답이 된다는 확신이라도 갖게 어떤 징조라도 보여주면 헌신 충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지도 않으니 불평만 늘어나는가?  

기도에 대한 많은 신자들의 솔직한 생각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반드시 응답할 의무가 있다고 여기는듯하다. 마치 외상 장부를 들고 나와 빚 갚으라고 독촉하는 심정이다. 아니면 어떻게 하든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여 승리하려는 것 같다. 쥐어짜듯이 힘겹게 기도하여서 어떤 문제를 해결 받고는 잠시 잠잠하다가 고난이 또 닥치면 이전처럼 힘에 부치는(?) 씨름을 다시 시작하지 않는가?  

이 새벽에 자신에게 한 번 진지하게 물어보자. 하나님이 예수 믿은 나를 아주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아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라도 해봤는가? 그분은 신자가 당신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일 때에 가슴이 벅차서 춤을 추신다는 사실을 상상이라도 해봤는가? 그것도 우리가 여전히 죄의 땟자국을 제대로 벗겨내지 못하고 심지어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분을 붙들고 있는 손만 놓치지 않는다는 근거로 즐거워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크게 영광을 돌리는(not glorify but honor us) 일이 무엇인 줄 아는가? 신자가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께 나오는 것이다. 아무런 가식과 위선과 과장 없이 말이다. 죄에 찌들었어도, 도무지 불안과 염려가 사라지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신이 넘쳐도, 아무 것도 보태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나오면 그분은 당신을 찾았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기뻐하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뜻이 바로 그것이지 않는가? 죄와 사단과 사망의 세력을 도무지 인간 스스로는 대적할 수 없기에 당신 앞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나오기만 하면 새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하게 채워주신다는 것이지 않는가?

기도는 신자의 종교적 의무가 아니다. 세상에서 모든 수단 방법을 다 써보고는 안 되니까 꺼내는 최후의 히든카드는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과 씨름해서 어떻게 하든 내 뜻을 더 많이 달성하는 게임도 아니다. 기도는 신자를 기꺼이 영광스럽게 세우기를 소원 아니 열망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기도

다윗은 시편37편에서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4절)이라고 증언했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에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다. 기뻐하라가 먼저 나왔다. 여호와를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자가 먼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가 그분을 기뻐하면서 기도할 때에 그 소원을 이뤄주신다는 것이다.

그 앞 1절에서 “행악자를 불평하여 하지 말고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고 했다. 불의가 횡행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굽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자신의 현실적 불행이나 고난이 꼭 자기 죄로 인한 것이 아니며 그 가운데도 하나님의 놀랍고도 은혜로운 계획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 어디서나 절대로 손상이 없으며 신자의 경우는 반드시 때가 되면 당신의 방식대로 그를 영화롭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공의롭다. 그리고 당신께서 택하신 자는 끝까지 사랑하신다. 그러니까 불의를 행하며 형통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라고 하며, 3절에서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라고 한 것이다.    

신자에게 가장 큰 은혜가 되는 것은 그분은 여전히 수시로 넘어지고 쓰러지는 우리의 연약한 체질과 보잘 것 없는 믿음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는 사실이다. 새벽 기도에 온갖 상을 다 찌푸리고 외상장부 들고 나와 빚 독촉하듯이 그저 빨리 이 문제 해결해내라고 떼밖에 쓸 줄 모르는 우리의 미성숙함도 아신다. 거기다 그 아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우리를 정금같이 빚으실 기회로 받으시고 기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당신께 엎드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너무나 기뻐하신다.  

그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이제는 차원을 좀 높여야 한다. 그럼 기도의 응답의 차원도 높아진다. 성령의 은사인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약속의 성경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거나, 굳건한 믿음을 갖고 응답의 확신을 갖고 기도하라는 차원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그 이전에 기도하는 자가 꼭 갖추어야 할 근본적인 마음 자세가 있다. 바로 다윗처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뻐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도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6,17)고 권면했다. 이 둘이 각기 다른 경우에 해당되는 계명이 아니다. “쉬지 말고”와 “항상”이란 같은 뜻의 말이다.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이다. 따라서 기도할 때마다 정말로 기뻐하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당신께선 최고로 비참하고도 수치스럽게 죽어가면서 당신이 택한 자에겐 네가 나의 최고 영광이라고 선언하셨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고 미성숙해도 여전히 그 선언은 단 한 치도 줄지 않고 유효하다. 또 바로 그것이 그분이 영광스럽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우리에겐 얼마나 영광스러운 축복, 은혜, 권능인가? 어찌 그분을 기뻐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러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

진심으로 그분을 기뻐하면서 기도해 보라. 비록 우리 주변의 모든 여건과 되어져 가는 상황이 감정적으로는 도무지 기뻐할 수 없어도 십자가에서 나를 향해 네가 나의 가장 큰 영광이라고 선언하신 그분에 대해서만은 기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기도에는 그분의 응답의 차원도 당연히 달라진다. 당장 형통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분의 영광을 제대로 알고 기도했으므로 그분의 영광이 반드시 드러나게끔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수십 년간 철옹성처럼 버티고 서있던 베를린 장벽이 어떻게 무너졌는가?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그 벽이 어느 날 정말 피 한 방울 하나 흘리지 않고 시민들의 망치만으로 여리고성처럼 무너졌지 않는가? 바로 여러분 같이 아주 작은 교회에서 이름 없는 목사와 교인들 몇 명이 모여서 기도하였고 그 기도의 불길이 전국에 번져서 그렇게 되었지 않는가?

여러분도 하나님 그분을 진정으로 기뻐하면서 모든 기도 제목들이 그분의 기쁨에 동참하는 방향으로 응답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새벽마다 울부짖는 그 철옹성 같던 문제와 고난도 어느 날 전혀 예상치도 않는 순간에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또 그분만의 놀랍고도 신비한 영광이 모든 사람이 보아서 훤히 알 수 있도록 드러날 것이다. 예수님을 온전히 기뻐하라. 특별히 기도할 때에는 더 그러하라.    

7/2/2012

*** 미국 남가주 Torrance에 위치한 한마음교회의 지난 주말(6/30) 새벽기도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사라의 웃음

2012.07.02 22:17:06
*.109.85.156

그 분의 기쁨에 동참하며 드리는 기도,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감사로 드리는 기도가 우선되어야함을 배웁니다.

자주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잉태소식을 전해 들은 사가랴의 벙어리됨, 사라의 장막뒤에서의 웃음.. 저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거짓말처럼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나이많음, 연약함.. 등을 너무 잘 아는 까닭이였을 터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락하여 주신 약속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을 터이고... 또 정작 배가 불러오는 엘리사벳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그저 홀로 하나님께만 찬양드리는 그 기쁨, 그러나 사람에겐 말하지 못하는 그 심정...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게되는 말씀입니다.

양요한

2013.01.29 06:25:18
*.98.184.194

기도는 신자를 기꺼이 영광스럽게 세우기를 소원 아니 열망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다. 아멘....주님이 나의 기쁨이십니다. 무슨일을 만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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