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당신은 정말로 좋은 땅인가? (마13:18-23)

조회 수 1877 추천 수 29 2012.09.13 19:5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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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정말로 좋은 땅인가?
마태복음 강해(146)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곧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13:18-23)


성경 읽을 때 꼭 지켜야 할 사항

씨 뿌리는 비유에 비추어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여러분 각자는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중에 어디에 해당되는가? 대부분의 신자가 돌밭 아니면 가시덤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선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니까 길가는 아니고, 그렇다고 백 배 육십 배의 결실을 맺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것이다. 또 그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이유도 자기 내면에는 돌이 잔뜩 박혔고, 외부에는 가시덤불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주 틀린 대답이다. 죄송하지만 기독교 신앙이 아예 없거나 출발이 잘못된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이미 좋은 땅이 된 것이다. 도무지 그럴 자격도 없고 상태가 아닌 것 같고 하나님께는 물론 스스로도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어도 그렇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다.  

성경, 특별히 신약성경을 읽을 때 꼭 유의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그 말씀이 칭의, 성화, 영화의 구원 세 단계 중에 무엇을 말하는지 잘 분별해야 한다. 천국에 가서 영광스럽게 변화하는 영화는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다. 반면에 처음 예수 믿어 구원 얻는 칭의와 예수 믿은 후에 거룩한 품성을 가꾸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며 사는 성화는 구분하기 애매하다.

구원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베푸신 사랑이라면 성화는 신자가 그 사랑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집 짓는 일에 비유하면 구원은 집을 지을 수 있는 기초를 땅에 쌓는 것이고 성화는 그 위에 직접 집을 지어가는 일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 둘을 잘 구분하지 않으면 기초만 쌓고 집을 짓지 않거나, 기초는 쌓지 않고 맨 땅에 집을 지은 것과 같다.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쁘겠는가? 두말 할 것 없이 두 번째다. 기초를 잘 쌓은 것은 언제든 집을 지을 수 있지만, 기초 없이 집만 지으면 조금만 바람 불어도 당장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구원과 성화를 신학이나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구분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다. 전체 문맥(context) 안에서 그 뜻을 파악하면 된다. 대표적인 예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는 구절이다. 언뜻 행위의 구원을 말하는 것 같아 혼란스럽다. 그러나 앞뒤 문맥과 자세히 연결해 보면 성화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본문의 씨 뿌리는 비유는 그 반대로 지금껏 성화에 초점을 맞추어 가르쳐져 왔지만 문맥을 살피면 구원에 관한 말씀이다. 지난주까지 말씀드린 것을 간단히 복습해보자. 먼저 제자들이 왜 유대 대중에게 비유로 가르치는지 물었다.(10절) 완전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다. 그 비유에는 천국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 하나님이 허락해야만 그 비밀을 알 수 있다고 했다.(11절) 구원은 하나님이 예정한 자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책임에 맡겨져 있는 성화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 구약 시대의 선지자와 의인들은 그 비밀을 보고 듣고 싶었어도 그런 기회조차 못 가졌다고 했다.(17절) 그럼 천국비밀은 당연히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구속사역이다. 나아가 본문에 이어서 교회 안에 심판 때까지 가라지와 곡식이 병존할 것이라는 비유가 나온다. 모든 비유와 그에 대한 설명이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와 연결되어 있다.    

제자들이 바로 좋은 땅이다.

본문(text) 안에서도 그 의미 자체는,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성화로 해석될 여지는 없다. 만약 하나님의 일반적인 말씀과 계명과 계시 등을 잘 깨달아 실천하는 것 즉, 신앙이 성숙한 정도에 따라 네 단계로 그 결실이 달라진다는 뜻이라면 비유의 내용이 달라져야 한다. 길가는 열매가 열 개, 돌밭은 삼십 개, 가시 떨기는 육십 개, 좋은 땅은 백 개라고 말이다.  

반면에 좋은 땅에만 삼십, 육십, 백 배의 결실이 다르게 맺힌다고 한다. 성화는 좋은 땅에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가 성화가 덜 된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 세 곳은 뿌리를 전혀 내리지 못했기에 아예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물을 주고 햇빛을 비춰도 절대 결실을 맺을 수 없다. 구원 자체를 못 받았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세상 사람들 사이에 아무리 의인으로 칭송 받아도 그 안에 예수라는 씨앗이 심겨지지 않았으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구원 받지 않았는데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성화는 더더욱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좋은 땅이 들은 말씀이 우리말 표현은 조금 애매하나(23절), 영어에는 the라는 정관사가 붙어 있다. 그 말씀인데, 19절의 천국 말씀을 받는 것이다. 즉 구원으로 초대하는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복음을 뜻한다.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구원과 성화를 구분하지 않고 보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내는 일종의 매뉴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자신의 열성과 정성을 어떻게 바쳐야만 하나님의 복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지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고 읽는다.

성경은 어떤 책인가? 거룩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리고 인도하시되, 예수님과 그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으로만 그렇게 하신다는 진리를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신자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더욱 잘 깨달아야 하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그 완전한 사랑과, 그 거룩한 통치를 충분히 받을 수 있을 만큼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자꾸만 성경을 복 받는 지침서로만 여기니까, 마태복음 13장 1절에서 23절에 이르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관심은 23절 한 절에만 가있다. 그것도 삼십, 육십, 백 배라는 일부 구절에만 말이다. 아주 엄청난 대박의 복을 기대하는 것이다. 저에게는 백 배까지는 무리고 사실은 삼십 배의 복만 내려주셔도 괘념치 않겠다는 낯간지러운 겸손(?)까지 떨면서 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삼십, 육십, 백 배의 결실은 신자마다 성화의 정도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우리가 바라는 대박의 은혜가 아니다. 볍씨 한 알만 심어도 쌀이 백 알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수천 개는 달리지 않는가?

다시 말하지만 23절의 말씀은 천국 복음이기에, 예수님이 내린 결론은 당신을 자신의 진짜 주인으로 모신 자에게는 예수라는 신령한 씨앗이 이미 심어지고 그 뿌리가 단단히 내려졌다는 것이다. 제자들 보고 너희는 천국 비밀을 보고 듣고 알도록 허락되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난 것이다. 비록 이전에는 길가, 돌밭, 가시떨기였을지라도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되면서 지금은 좋은 땅이 된 것이다.

예수님을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만나면 그동안 자신을 미혹하여 죄와 사망과 사탄의 노예로 묶고 있던 흑암의 사슬에서 벗어난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킨다. 그 가치관이 인간, 정확하게는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완전히 뒤바뀐다. 세상과 사람들이 자기를 중심에 두고 그 주변을 돌고 있다거나 돌아야만 한다고 믿었던 예수를 알지 못할 때의 생각들이 철저하게 부서진다. 이 땅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뜻이 실현되는 무대요, 자기는 그 주역배우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생활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살게 된다. 좁고 협착한 길이긴 해도 예수님을 따라 걷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 된다. 예수님의 참 생명이 그 속에 있는 자는 결실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최근에 이집트 피라밑에서 발견된 씨앗을 심었더니 수천 년이 지났는데도 심었더니 곡식이 열렸다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영원하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생명을 하나님이 부여했고 그분이 숨겨서 보존했고 그분이 싹을 틔우고 결실케 한 것이다. 장래 수천 배의 결실로 맺히게 될 숨은 생명이 작은 씨앗 한 알에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종자(種子) 씨앗을 전혀 아끼지 않는 농부(農夫)

그런데 본 비유를 자세히 살피면 상식에 어긋나는 좀 이상한 내용이 하나 있다.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겠는가? 추수를 끝낸 농부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알이 굵고 좋은 곡식을 내년에 뿌릴 종자 씨앗으로 골라 아주 소중하게 보관하는 것이다. 그 아까운 것을 길가, 돌밭, 가시떨기 위에 뿌리지는 않는다.

예수님도 그래서 “더러는”이라고 일부라는 뜻을 표명했다. 현대식 영농이 아니고 손으로 씨앗을 뿌릴 때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8절에 의하면 좋은 땅에도 똑 같이 “더러는”이라고 설명한다. 좋은 땅에도 일부만 뿌려졌다는 뜻이지 않는가? 물론 원어와 영어로는 “some"과 ”other"로 즉, 좋지 않은 땅에 떨어진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라는 의미가 있긴 하다. 그럼에도 이 비유의 초점은 네 종류 땅에 따라 씨앗의 발육 결실 상태를 비교하는데 있지, 씨앗이 얼마나 많게 뿌렸는지 여부를 밝히는데 있지 않다.

농부는 하나님을 뜻한다. 하나님이 부주의로 실수할 리는 절대 없다. 그럼에도 비유는 마치 낭비하면서 씨를 뿌린 것 같이 설명한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전혀 아끼지 않으시고 죽이시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셨다. 그 사랑을 출세에 눈먼 권력의 화신인 빌라도나 헤롯에게도, 종교권력으로 치부하느라 국민들을 오도한 제사장 그룹에도, 사람들의 칭찬에 취해 자기 의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뽐낸 바리새인들에게도 보여주었다. 그 반대로 아무 가진 것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창녀, 과부, 고아, 죄인을 비롯해 문둥병자, 중풍병자, 귀머거리, 소경, 귀신들린 자는 물론 죽은 자에게까지 그 씨앗은 뿌려졌다.

예수님은 노예나 자유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여종이나 남종이나, 외모로는 일절 차별하지 않으셨다. 오직 가진 것과 외모로만 사람을 차별하는 세상에서 역사상 최초로, 아니 유일하게 외모로는 차별하지 않으셨던 분이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셨다. 말하자면 인간을 가장 참 인간답게 대우하셨다. 하늘의 빛과 진리와 영광을 무차별적으로 무제한적으로 아낌없이 이 땅에 드러내셨던 것이다. 그분 안에는 한 치의 거짓, 궤사, 조종, 강요는 물론 이해타산조차 없었다.  

물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사건을 직접 목격한 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많아야 수백 명일 것이다. 당시의 예루살렘 인구 십만 명에 비교해도 아주 소수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복음의 의미, 가치, 권능은 너무나 엄청나서 전 우주를 덮고도 남는다. 그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 앞에 그 때까지 세상을 지배하던 인간의 모든 사상, 철학, 도덕, 종교를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저가 뉘기에?(Who is this?)

제자들이 밤중에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에 광풍이 일어 배가 전복될 지경에 이르렀다. 모두가 두려워 떨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말씀으로 명하자 바람과 물이 잔잔해졌다. 제자들이 너무나 놀라서 어떻게 말했는가? “저가 뉘기에(Who is this?)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눅8:25)

바람과 물을 지으신 창조주가 아니고는 결코 그럴 수는 없다. 하나님 본체이신 바로 그분이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은혜를 베풀 만한 이를 골라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말씀하신 그대로, 당신의 전부를 하나 남기지 않으시고 죄인들을 위해 다 내어주셨다. 강건해야 7-80년 밖에 살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피조물이자, 연약하고 어리석으며 죄에 찌들어 더럽고 추한 죄인들을 위해서 말이다. 그것도 우리가 그분과 원수되어서 거역하고 있을 때에 말이다.

세상에서 소외되고 가난하며 무식하고 병들고 상처 받은 자들에게 더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신 까닭이 무엇인가? 그 동안 세상에서 손해 본 만큼 보상해서 형통하고 출세케 해주시려는 것인가? 삼십, 육십, 백배의 대박 같은 축복을 부어주시려는 것인가? 아니다. 오직 죄에서 구원하여 그 심령에 참 진리와 참 생명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사랑의 품 안으로 다시 품어서 당신과 교제하고 동행케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행함이 따르는 참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서 죄악이 관영하여 썩어질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또 그래서 십자가 앞에 엎드린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고, 그 영생을 얻었음을 깨달을 수 있는 믿음마저 선물로 주신 것이다.    

성령이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결코 시인할 수 없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성경이 말하는 참 복음의 진리대로 자신의 주인으로 모신 자는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성령의 전이 되었다. 이 좋은 땅이 된 것이다. 남은 일은 결실하는 것뿐이다. 이전의 길가, 돌밭, 가시떨기로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한번 얻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

정말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람과 물을 명하여 순종케 하시는 주님이 신자의 속에 와 계신다. 예수님의 씨앗이 그래 기껏 삼십, 육십, 백배의 결실 밖에 못하겠는가? 보잘 것 없는 한 랑의 곡식도 수천 배의 결실을 맺는다. 예수의 씨앗이 심긴 신자는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다. 역사를 거룩하게 이끌 수 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는가?(요14:12)

엄청난 은혜를 제대로 실감할 수 없는가?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는가? 제 경우에는 예수를 믿고 난 이후 지금까지 그분이 모든 어렵고 고달픈 고난에서 다 건져주셨다. 고난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도 많은 어려운 문제들 가운데 있다. 내 능력과 방식과 계획대로 문제를 어떻게 해서든 해결해보려 노력하면 할수록 낑낑대는 힘만 더 들고 헛수고였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정말로 씻은 듯이 깨끗하게 해결해주셨다. 나의 생각과 계획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되는 놀랍고도 신기하며 풍성한 방식으로 말이다. 거기다 나에게 최고 유익이 되면서 하나님의 영광도 크게 드러남을 확인할 수 있기에 저절로 감사가 나오는 일들이 제 인생에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이는 절대로 과장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얼마든지 구체적으로 간증할 일들은 많다. 그러나 간증이란 자칫 자기 자랑이 되며, 듣는 자도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많다. 그래서 제가 확실하게 간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신비한 권능에 관한 간증거리가 저에게도 많다는 사실 하나다. 성경에 믿음의 선진들의 증거가 구름 같이 허다하듯이 말이다.  

간혹 제가 세상 죄악과 쾌락으로 되돌아 갈 때도 있었다. 그 일을 주님이 묵인할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주님이 먼저 가셔서 그럴 수 있는 여건과 사람들을 미리 차단해 주신 일도 많았음을 간증할 수 있다. 또 그런 지난 체험 때문에 주님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저로 더 작고 세밀한 죄와 허물 대해서도 더욱 민감하게 만들 것이다. 내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이 당신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나를 이끌고 가실 것이고 말리라는 간증을 할 수 있다.

예수를 믿고 나니까 믿기 오래 전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시고 하나에서 열까지 동행 보호하시며 이 자리에 그분께서 이르게 하셨다는 것이 절대적 사실이 되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내 인생은 틀림없이 헛되고도 헛되게 끝났을 것이다. 세상에서 형통하고 출세하는 것과 상관없이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뻥 크게 뚫린 채로 살고 있었으리라고 전혀 의심치 않는다.

저는 정말로 제 자신밖에 몰랐던 너무나 교만했던 자다. 예수를 알고 나선 생전 처음으로 남을 위해서 기도를 해봤다. 그것도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전혀 이해타산 관계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들의 힘든 고난과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기도도 했지만 그보다는 제발 예수의 천국비밀의 씨앗이 그 심령에 심겨서 예수를 믿게 해달라는 기도를 더 많이 했다.

단순히 목사로서의 종교적 의무감이 아니었다. 제가 예수를 몰랐다면 얼마나 황당한 실패를 했을지, 또 얼마나 비참한 사망에 빠트려졌을지, 한마디로 너무나 아찔한 생각이 들기에 그것을 막으려는 뜻이었다. 세상에서 최고의 대박이 바로 예수 믿는 것임을 철저히 체험했기에 바로 그 은혜를 함께 맛보자는 뜻이었다.      

제게 일어난 이런 변화들이 어찌 제 스스로의 노력으로 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불신자 시절에는 계획과 생각은커녕 꿈도 꾸지 못하던 일이었다. 내속에 심겨진 예수님의 참 씨앗이 갖는 생명력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너무 거창하게 여길 것은 없다. 신자들이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 하나만 해도 예수 믿기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한 일 아닌가? 주일에 골프나 여행을 가야지 왜 교회에 나가서 그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지, 그것도 돈까지 바쳐가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 않는가? 주일 예배들 드리는 것 하나만으로도 좋은 땅이 된 증거다. 이미 하나의 열매를 맺었다. 아니 주일 하루라도 온전히 거룩하게 지내면 일주일 중의 하루니까 신자로서 평생 맺을 열매의 1/7을 이미 맺은 것이다. 또 세상에선 주일에 오히려 죄를 짓기 쉬운데 신자가 되어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면 죄도 짓지 않은데다 경건의 훈련을 쌓게 된다. 이야말로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는 “따블”(Double)의 즉 대박의 축복이 아닌가 말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신자의 속에 있다고 해서 당장 거룩한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씨앗으로 뿌려져 있을 뿐이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길가, 돌밭, 가시떨기 쪽으로 가서 신나게 놀고 싶다. 그럴 때마다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 순종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혹은 그와 동시에, 예수를 믿음으로써 성령님이 내 안에 임재해 계시고 또 그분이 나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주신다는 엄청난 사실부터 꼭 붙들어야 한다. 언제 어떤 경우가 닥쳐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신자들을 위해서 중보까지 해주시고 계신다.

좋은 땅이 된 신자들은 이 비유에서처럼 마귀의 음흉한 영적 시험을 이기고(길가), 세상 쾌락과 죄악의 유혹은 물리치고(돌밭), 자기 속에 있는 욕심과 죄성을 죽여야 한다.(가시떨기) 육체의 소욕을 죽이면 성령의 열매가 열리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종교적 일이나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신자 스스로 노력한다고 성령의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이미 심겨졌기에 싹이 나고 자라는데 방해하는 것들만 제거하면 열매는 맺히게 된다.    

세상에서 최고 쉬운 일

작금 기독교와 신자들이 왜 힘이 빠졌는가? 예수님의 참 생명이 심겨져 이미 좋은 땅이 되어 있다는 절대적 확신이 없어서 그렇다. 여전히 돌밭과 가시떨기로 착각하고 있다. 어서 빨리 자신들의 종교적 노력으로 좋은 땅으로 바뀌면 하나님이 삼십, 육십, 백배의 복을 부어주시리라 기대한다. 신앙의 목표가 예수의 생명이 나를 통해서 열매 맺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만 받아내는데 있다.  

신자는 종착점이 지옥형벌이라는 낭떠러지를 향해서 세상 사람들 속에 휩쓸려 넓고 편한 길을 가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 이름을 지명하여서 불러내어 빛 가운데로 옮겨진 자다. 더 이상 어둠이나 그 그림자가 얼씬도 못하며, 사망이나 그 냄새가 넘어뜨릴 수 없는 신분이 이미 되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가 성령님이 가기를 대신해 간구해 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이며, 대박이 터진 축복인지 모른다. 자신의 전부를 성령님의 인도에 완전히 내어맡기면 주님께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아니 그런 꿈도 꾸지 않는다. 오직 내 사업체와 내 월급을 수십 배 뻥튀기 시켜 달라는 요구밖에 하지 못한다.

최근 기독교나 교회가 부흥하려면 예배를 갱신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강단이나 예배당의 분위기를 예배에 집중할 수 있게끔 경건하게 꾸민다. 최신 음향장비와 각종 악기들을 동원해 찬양을 뜨겁게 한다. 연극, 연주, 특송 등 감동을 주는 예배 순서도 마련한다. 나아가 강단 말씀의 회복이 곧 부흥의 원동력이라고 믿고 은혜로운 성경적 설교를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회복과 부흥은 바로 신자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신분과 특권을 소지한 것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의 전부와 바꿀 수 있는 엄청난 은혜임을 모든 예배자가 확신한다면 저절로 예배는 부흥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사랑과 권능이 전 우주를 덮고도 남는다는 것에 의심이 없이 전부를 걸 수 있는 자들이 모인 예배가 어찌 뜨겁지 않을 수 있는가? 불신자 시절과 비교해 예배드릴 수 있는 것만도 최고의 축복임을 절감한다면, 또 예배드릴 수 없는 것이 얼마나 큰 실패와 사망으로 이끄는지 안다면, 예배의 순서와 찬양과 그 분위기 등은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주님이 명하자 바람과 물이 잔잔해지자 제자들이 “저가 뉘기에”(who is this?)라고 감탄했다. 처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죄에서 구원 받은 확신이 생기면 “어찌 나 같은 자를?”(why me?) 그렇게 까지 사랑한 은혜에 감탄하게 된다. 칭의의 구원에 해당하는 감탄사다. 성화의 구원을 이뤄나가는 신자는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두고 한 감탄을 바로 자기에게 적용시켜야 한다. “제가 뉘기에?”(who is me?), “성령님이 나를 대신해 간구해주시고 하나님의 참 진리와 참 빛을 보고 듣게 하셨나이까?” 또 “나를 통해 예수님의 참 생명을  수백, 수천 배의 결실을 맺게 하시나이까?”라고 말이다.      

모든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 받았다. 자기가 속한 직장을 천국으로 바꿀 소명이 있고 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직장이 안 되면 가정이라고 그렇게 할 수 있다. 가정마저 어려우면 스스로 자신을 주님 안에서 천국처럼 변화시킬 수 있다.  

흔히들 세상에서 최고로 쉬운 일을 두고 “맨 땅에서 헤엄치기”라고 말한다. 그런데 맨 땅에서 헤엄을 치려해도 꽤 힘이 든다. 자기 몸 부피만한 물의 저항력을 이겨내면서 앞으로 진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세상에서 고난과 문제를 수시로 겪기 마련이다. 그러나 땅을 짚고 헤엄치는 것은 절대로 빠져 죽을 염려가 없기 때문에 가장 쉽다고 말한다.

신자의 형편이 바로 그렇다.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벌써 좋은 땅으로 변했다. 믿음의 반석을 주님의 참 생명 위에 두었다. 천국 비밀의 씨앗이 이미 심겨져 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신자를 대신해 내어주셨다면, 그분이 신자를 위한다면 세상에서 신자를 대적할 세력은 단 하나도 없다. 반드시 풍성하고 아름답고 신비한 예수님의 열매는 맺히게 되어 있다. 비록 우리가 아직 게으르고, 연약하며, 때로 죄와 세상의 유혹에 넘어갈지라도 정말로 나의 전부를 주님께 내어드리면 주님이 한 걸음씩 앞으로 이끄신다. 나부터 시작해서 내 주위로 천국이 확장되어진다. 가장 큰 문제는 오히려 좋은 땅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9/2/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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