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구원으로 받은 벌(?) (마13:10-17)

조회 수 971 추천 수 40 2012.09.08 14:5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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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으로 받은 벌(?) (마13:10-17)
마태복음 강해(145)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13:10-17)


심판을 예정하지 않았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뿌려지는 씨앗은 바로 예수님이다. 또 주님의 십자가에 감춰진 천국 비밀은 하나님이 허락한 자만 알 수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예정론이 바울이 창안한 종교사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엄연히 선포한 진리이기에 예정론의 타당성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다.

실제로 스스로 예수를 믿으려 생각은커녕 꿈도 꾸지 못하고 성령의 간섭으로 중생한 체험이 있는 자는 자신이 선택 받아 구원을 얻었음에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예정이 옳다는 것까지는 확신하는데 왜 예정으로 구원 받았는지 그 의미에 대해선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단순히 사람과는 그 생각과 길이 다른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으로 죄인을 구원하는 그분만의 신비한 방식이라고만 이해한다. “어찌하여 나 같은 자를?”(Why me?)이라는 감상에 젖은 고백만 한다.

물론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그 신비를 모르고 체험하지 못한 자에 비하면 정말로 무한한 은혜다. 거기다 예정론은 사실상 아주 어렵다. 그것을 반대하는 자를 비평 반박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예수님이 23절에 설명하신 좋은 땅이라면 예정으로 구원 얻은 그 은혜를 깊이 깨달을 수 있다. 또 그 깨달음은 믿음으로 승리하는 확실하고도 핵심적인 근거가 된다.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지옥 형벌을 줄 사람을 따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니 인간을 심판하려고 마음먹은 적도 없다. 그럼 당장 노아의 홍수, 바벨탑, 소돔과 고모라 같은 사건은 무엇인지 의아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건들은 하나님이 죄악인 만연하는 세상에서 인류 역사 전체를 주권적으로 통치하신 결과일 뿐이다. 지금 살피고자 하는 주제는 한 개인이 출생하기 전부터 지옥 갈 자로 뽑히느냐 하는 것인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대신에 구원 받을 자를 뽑으셨다. 그럼 구원 선택에서 누락된 자는 결국 심판으로 선택된 것과 같은 뜻인데 말장난 하는 것 아니냐고 반발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심판은 인간이 자초(自招)한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는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사망이라는 불변의 상수를 평생 몸에 붙이고 살아야만 하는 죄인으로 탄생한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다. 필연적으로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따로 뽑을 필요가 없다. 노아의 홍수나 바벨탑이나 소돔과 고모라 같은 사건들은 그런 맥락에서 역사가 진행되었다는 대표적 예일 뿐이다.

이젠 더 큰 불만이 터져 나올 수 있다.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라면 그 중에 따로 선택해서 그 벌에서 면하게 해준다면 불공평을 넘어서 편애한 것 이라고 말이다. 이 또한 절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비유로 설명했듯이 저도 감히 예정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설명해보겠다. 그전에 전제할 것이 하나 있다. 예수님의 비유마저 여러 오해를 불러일으키듯이 인간 언어로 표현되는 비유는 문자적으로 자구 하나하나씩 판단해선 안 된다. 단지 비유가 상징하는 핵심적 의미에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 우러러 부끄럼 없는 불신자들

선생님이 급한 볼일이 생겨서 학생들에게 열 가지 문제의 시험지를 나눠주고는 자율학습하도록 맡기고 종일 외출하고 돌아왔다고 가정하자.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우선 착한 우등생은 숙제를 다 풀었고 나쁜 열등생은 종일 놀기만 하고 문제지에 이름도 적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럼 당연히 선생님은 숙제 푼 자는 상을 주고 풀지 않은 자는 운동장 열 바퀴 뛰는 벌을 주어야 한다.

바로 타종교인이나 불신자들이 인간이 현재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착한 자는 천국 가야하고 악한 자는 지옥 가야 옳다는 것이다. 거기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으니 천국 갈 자신이 있다고 한다.

인간 세상에서 인간이 판단하는 기준으로는 상대적 의인과 악인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숙제를 풀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기독교의 예정은 두말할 것 없고 아무 선행 없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는 십자가 복음이 씨가 먹히지 않는다. 듣고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들으려고도 않는다.

기독교의 인간관은 그와 전혀 다르다. 반장, 우등생 구분 없이 모두가 신나게 노느라 숙제는 하나도 풀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두가 운동장 열 바퀴 돌아 마땅한데 선생님은 그중에 특별히 몇 명만 열외(列外)로 빼준 것이 구원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게 심판을 면하게 해준 이유를 셋으로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반장 체면을 보고, 부잣집 아들이라, 생긴 것이 마음에 들어서 그랬다면 편애요 특혜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보고 전혀 착하지 않고 뒤로 호박씨만 까는 자들을 오직 예수를 믿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구원을 주니 편애라고 비방하듯이 말이다.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하지만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지 않느냐고 따지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자기 백성만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다. 당신 백성들 전부를, 한 나라를 몽땅 다른 나라에 사백 년간이나 노예 살이 시키셨지 않는가? 당신을 거역하고 타락하자 70년 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하지 않았는가? 죄를 범하고도 오래토록 회개하지 않을 때마다  전쟁, 질병, 자연재앙 등으로 자기 백성부터 징계하셨는데 어떻게 편애하는 분일 수 있는가?

성경을 스스로 저작하는 신자들

둘째로, 열 문제를 다 푼 자는 없어도 그래도 한두 문제를 푼 자는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다. 실컷 놀긴 했지만 오후에 정신 차리고 책상에 앉아서 숙제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종일 놀기만 한 아이와는 구별해주어야 옳지 않느냐고 따진다. 하나님 쪽에서 선택한 구원은 부인하고 인간 쪽에서 믿기만 하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언뜻 합리적인 것 같다. 그러나 믿음의 정의(定意)부터 바로 내려야 한다. 자기가 믿었다는 것은 스스로 깨달았다는 뜻이다. 자칫 깨달음 자체가 인간의 공적이요 자랑이 된다.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의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게 되며, 당장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과도 충돌된다.

성경에는 그런 식으로 오해할 만한 말씀들이 곳곳에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믿음의 필요조건이다. 어쨌든 믿기는 믿어야 하는 것은 구원의 가장 기본이자 출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을 설명하는 말씀들도 곳곳에 나타난다. 그것을 부인하면 성경을 믿긴 믿되 자기가 골라서 믿겠다는 뜻이 된다. 성경을 자기가 저작하는 셈이며 하나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꼴이 된다.

하나님의 딜레마(?)

물론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할 의도는 추호도 없을 것이다. 선생님이 벌에서 면제해준 세 번째 경우를 몰라서 그렇다. 처음에는 숙제를 하려고 노력했던 학생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다 다른 아이들이 노는 것이 너무 신나고 재미있어서 끝내는 못 참고 같이 부화뇌동하여 문제지로 종이비행기와 딱지를 접어 놀면서 교실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계제가 전혀 아니다. 모두가 점수로 따지면 빵점이 아니라 마이너스 무한대다. 숙제 안 했으니 빵점인데다, 학교를 다 부숴 놓았으니 마이너스 무한대이지 않는가?

바로 창세기 3장의 타락 기사로부터 신약에 이르도록 성경이 말하는 바다. 최초의 살인은 형제 사이에 일어났다. 하나님이 잘못을 추궁하자 오히려 가인은 하나님께 내가 동생의 보호자냐고 대들었다. 하나님은 아벨을 보호하지 않는 것을 야단친 것이 아니라 살인한 죄를 회개하라고 권한 것인데도 말이다.

아비 아담이 한 짓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선악과를 따 먹은 죄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강변했다. 하나님이 창조해서 붙여준 이브가 꾀는 바람에 그랬으니 당신 탓이라는 것이다. 처음에 이브를 데려다 주었을 때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감지덕지 하던 그가 말이다. 세상 사람들도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을 줄 뻔히 알면서도 선악과를 만들어서 먹지 말라고 명한 하나님이 잘못이기에 그런 하나님은 믿지 않겠다고 버티지 않는가? 노아홍수, 바벨탑,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모두가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완악한 마음이 어려서부터 늙어죽을 때까지 하나도 바뀌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에서 벗어난 필연적 결과인 것이다.

예수님 오실 때쯤에는 아주 영악하게도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마저 제물의 숫자만 채우려 들었다. 절고 눈먼 흠 많은 제물마저 바치고는 복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쳤다. 이는 선생님이 외출하자 교무실에 숨어들어가 책상을 뒤지고는 정답지를 베끼고선 숙제를 다 했으니 상달라고 떼쓰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를 넘어서 아예 대놓고 속인 것이다. 오죽 하면 하나님이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한탄하셨겠는가?(말1:10)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사1:3) 인간들은 자기 부모마저 몰라보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사1:4)으로 하나님의 슬픔만 자아내었다.

결국에는 바울 사도가 로마서 3:9이하에 어떻게 결론을 내렸는가? 우등생으로 처음에는 숙제해 보려고 노력했던 유대인이나, 처음부터 열등생이었던 이방인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한 결 같이 피 흘리는데 그 발이 빨랐는데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처지가 심판에서 안 건져 주었다고 해서 아무 반론도 못할 상태라고 선언한다. 자율학습으로 내준 숙제는 전혀 하지 않은데다 교실과 학교를 엉망으로 때려 부순 학생들에게 운동장을 열 바퀴 도는 벌을 내렸다고 해서 어느 학생이 감히 억울하고 불공평하다고 불평할 수 있겠는가? 어린 학생도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쯤은 알지 않는가?

구원과 심판에서 문제는 인간 쪽에 있었던 것이 전혀 아니다. 도리어 아주 곤란하게 된 것은 하나님 쪽이었다. 아무리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지었어도 몽땅 벌을 주려니 당신의 창조 자체를 당신이 부인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존재하실 의미와 목적마저 상실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과 닮게 하여 당신을 찬양케 하는 존재로 지으신 후에 심히 기뻐하셨다. 또 그 심히 기쁜 존재가 당신과 교제하고 동행하면서 당신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리면 더더욱 심히 기뻐하신다. 그런데 인간이 없어진다면 이 세상은, 다시 말하지만 어차피 죄악 가운데 죽어갈 인간에게가 아니라, 하나님 그분에게 무가치하고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보라. 학생이 다 없어지면 학교 문을 닫아야 하고 그런 폐교(廢校)에는 거미줄과 먼지만 쌓이지 않는가 말이다. 당신이 창조하신 이 땅과 인간이 다시 흑암의 공허한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그분으로선 아주 싫었고 무의미했다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지 모른다.  
  
가장 심한 징벌을 받는 구원(?)
    
결국 하나님은 그중에서 몇 명을 선택해서 열외로 세우기로 했다. 그들이 과연 누구인가? 다 같이 마이너스 무한대의 잘못을 범했는데 말이다. 그 중에도 진짜로 도가 지나치게 노느라 이미 다리가 부러지고 허리가 다친 자들이다. 그래서 운동장 열 바퀴 도는 벌을 줄 수도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벌을 안 주고 가만 두면 그야말로 편애요 특혜가 된다. 그래서 진짜 벌을, 가장 심한 벌을 주었다. 서두에 말한 대로 어디까지나 비유이므로 새겨서 들어야 한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벌을 주었다. 바로 교실로 돌아가 먼저 내준 숙제 열 문제 다 풀라는 벌 이다. 평소에 가장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그 가장 싫은 것을 주었다면 상이 아니라 벌이지 않는가? 이것 또한 제 비유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다.

아브라함은 마누라를 두 번이나 팔아치웠다. 우리라면 이혼했으면 했지 나 혼자 살려고 아내를 남에게 동침하라고 내어주지는 않을 것 아닌가? 야곱은 잘 아는 대로 꼼수의 제왕이다. 우리도 부모에게 효도를 제대로 못하고 때로는 거짓말할 때도 있다. 그러나 대놓고 엄마와 짜고 유산을 두 배로 받아내려고 친 형과 아버지에게 사기 치는 짓은 거의 하지 않지 않는가? 모세는 어떠했는가? 동족이 핍박받는 것을 보고 의분을 못 이기긴 했지만 애굽 군병을 그 자리에서 때려 죽였다. 어쨌든 살인죄를 범했으면 회개하고 자수해야지 그 날로 외국으로 도망쳤다. 우리가 미국으로 이민 와서 힘겹게 살지만 한국에서 범죄하고 도망쳐온 것은 아니지 않는가?

다윗은 더했다. 충직한 부하의 아내와 간음했는데 덜컥 임신이 되어버렸다. 그 아이를 자기 아이가 아닌 것처럼 속이기 위해서 나라와 왕을 위해 전쟁을 치르고 있던 부하에게 특별 휴가를 주어서 아내와 동침하도록 권했다. 부하가 전쟁에서 고생하는 부하들을 생각해 혼자만 호사를 누릴 수 없다고 거절하자 부하를 최전방으로 내보내어 아무도 모르게 죽게 만들었다. 야곱이 아니라 다윗이야말로 꼼수의 마왕이지 않는가?

그들 모두가 심판 받을 자격이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두 배, 세 배는 족히 넘지 않는가? 신약시대의 바울은 열 배는 될 것이다. 예수님의 입장에선 조금 심한 말로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원수였다. 다매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라고 했지 않는가?

그는 사람을 살인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놓고 핍박한 자다. 선생이라면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외출하지 말고 직접 가르쳐야 하지 않느냐 따지면서 자율학습 시키는 선생이 악하다고 대들었다. 율법을 준수하는 자를 구원해야지, 아무 공로 없는 십자가로 구원하는 것은 이단이지 않느냐면서 예수님을 열렬히 박해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선택하여 열외로 세웠다. 각자에게 교실로 돌아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숙제를 다 푼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조건이 아니다. 학교를 폐쇄하지 않고 다시 재건하는 일에 그들을 동참시키려고 배려한 너무나 큰 은혜다.

벌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이 심판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을 결코 예정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너무 공부하기 싫어서 실컷 놀다가 숙제도 못했다. 그런 학생들에게 선생이 “운동장 열 바퀴 도는 벌을 받을래? 아니면 교실에서 숙제 열 문제 다 풀래?”라고 물었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열이면 열 명, 다 운동장을 (기꺼이) 돌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바로 예수님이 본문 15절에서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어 하나님께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했다는 설명 그대로다. 하나님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 싫고, 대신에 세상에서 죄에 빠져 사는 것이 너무 신나고 좋으니까 스스로 완악해져 귀와 눈을 감은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숙제는 둘째 치고 학교도 다 부셔버린 학생들에게 하나님은 운동장을 돌리는 벌조차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롬1:24) 했을 뿐이다. 또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롬1:28)것 뿐이다. 죄를 너무 좋아하니까 그냥 죄 속에 살도록 둔 것이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심판으로 향하는 자에게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도리어 선물로 준 셈이다. 반면에 구원으로 선택 받은 자는 가장 싫어하는 공부를 하도록 벌을 준 셈이다.

하나님이 벌을 주지 않았다고 요한복음은 더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예수 믿지 않는 것 그 차제가 심판이지 거기다 추가로 더 심한 벌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놀랍고도  풍성하며 아름다운 은혜와 권능과 신비를 누리기는커녕 알지도 못한다. 이 땅에서 이미 심판 받은 것이다. 아니 인간으로선 가장 큰 불행을 겪는 것이다. 또 그런 상태로 죽는 것이다. 하나님과는 전혀 교통이 없으며, 그분이 아예 임재하지 않는 곳으로 영원히 들어가 살게 될 뿐이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바울 모두가 자기가 열외로 뽑히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기대도 않았다. 아니 꿈도 꾸지 못했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자기가 소유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세상에서 형통하고 출세하려 모든 노력을 다했다. 재물, 건강, 지성, 직위를 이용해서 그저 남보다 높아지려 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실존하고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가장 기초적인 믿음은 있었지만 그 믿음마저 출세에 이용했다.

그런 어느 날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당신의 종으로 세웠다. 하나님으로선 학교는 물론 학생들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교를 다시 세우고 학생들을 열심히 공부하게 만들고 싶었다. 어질러진 것을 말끔히 청소하고, 부러진 책걸상도 고치고, 페인트칠을 다시해서 학교를 원래의 상태로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부하기 가장 싫어하고 나쁜 짓만 골라했던 학생이 변화되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으로 학교재건의 방식으로 택한 것이 바로 예정이다. 처음에는 운동장을 도는 것이 더 편할 것 같이 여기고 자원해서 벌 받았던 학생들로 최고 악동들이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게 해서 아무래도 학생은 교실에서 공부를 해야 맞고 좋다고 여실히 깨닫도록 말이다.

십자가가 바로 예정이다.

예정으로 구원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봤는가? 비유에 나오는 선생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말이다. 운동장 열 바퀴 도는 벌을 받은 학생들을 바라 볼 때에 “하라는 공부는 않고 교실은 엉망으로 만든 괘씸한 놈들! 벌 받아 마땅하다.”라고 통쾌하게 여겼을까? 그럼 무자비한 선생이다. 선생으로 자격이 없다. 또 교실에 남아서 공부하게 만든 자를 “그래! 평소에 공부는 않고 놀기만 좋아했어도 아무 이유 없이 내 마음에 들었기에 쉽고도 편한 벌을 주었지!”라면 편애요, 특혜다. 그런 예정에는 공의도 없고, 사랑도 없다.

하나님은 그러지 않았다. 운동장 도는 벌을 받은 자나, 공부하는 상 아니 벌 받은 자 모두를 불쌍하고 긍휼히 여겼다. 똑 같이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당신의 자녀들이었기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했다. 열 아들이 다 가출하여 방탕한 생활을 보냈는데 한두 명 돌아왔고 나머지 모두는 탕자로 남아 있었다 치자. 부모가 돌아온 아들만 사랑하고 나머지는 아들 취급을 하지 않겠는가? 그런 부모는 세상에도 없다. 세상에 남아 있는, 그래서 결국에는 심판을 자초하는 아들이 더 불쌍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니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하나님은 분명히 모든 이들을 회개하여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 예정 안이든 밖에 있던 둘 다 정말로 안타까이 여기신다. “너희 모두가 타락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원한다.  어서 빨리 내 품안으로 돌아와서 나와 함께 찬양을 부르자. 내 손을 잡고 동행하며 교제하자. 너의 모두가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한 인생이 되길 내가 더 원한다. 다들 열심히 공부하여 다들 훌륭한 인물이 되어라.”             .            

그렇다고 해서 예정론이 부인되는 것은 아니다. 상기 두 성경구절 다 “원하시느니라”로 마쳤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소원이요 마음이다. 그러나 원하신다는 것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 소원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운동장을 도는 벌을 원하는 자에게는 그 벌을, 도무지 달릴 수 없는 자는 죽도록 싫어하던 공부를 하는 벌을 내리는 방법으로 말이다. 인간이 벌을 선택한 것이며 또 그것이 바로 예정이다.

무엇보다 예정론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다. 하나님의 그 안타까운 심정을 인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제 발로 피 흘리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쪽으로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소원이라도 있었다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실 이유는 전혀 없었다. 스스로 온전한 회개를 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실력이 인간에게 전무했기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것이다. 도무지 스스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으니 하나님이 천국 비밀을 알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부인되면 예정론도 실종된다. 반면에 그 십자가 옳다면 예정론도 옳은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해지는 예정론

지금 예정론만 변증하고자 드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신앙생활 십년, 이십년을 했어도 아직도 내 믿음은 왜 이 모양인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반에 반도 못 미치고 있다니라는 실망이 왜 드는지 아는가? 영적 실상이 너무 자주 가난해져서 애통해지는 까닭을 아는가? 바로 우리가 공부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런 실망이 수시로 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뜻이다.

신자란 가장 심하게 놀다가 다리까지 부러져 달리기 벌에서 열외 된 자다. 거룩과는 가장 거리가 멀었었다. 하나님의 일방적, 강권적 선택이 아니고는 도무지 구원할 수가 없었기에  예정으로 구원 받은 것이다. 실제로 성인이 되어서 신자가 된 사람의 대부분이 쉴 새 없이 쥐어터진 자들이지 않는가? 성한 곳이라고는 더 없을 정도로 실컷 두들겨 맞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지 않는가? 정말로 의지할 곳 하나 없어서 두 손 들고 천부께 나오지 않았나?  

그렇게 선택해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로, 모세는 그 민족의 구원자로, 다윗은 가장 의로운 왕으로, 바울은  그리스도 가장 열렬한 옹호자로 바꾸어 복음의 파수꾼으로 세웠듯이, 우리 또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고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우리 모두는 성경의 위인들만큼 그릇 크기가 되지 못한다.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와 있는 표시만 확실히 드러내면 된다. 먼저 자신이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철저히 인식 자백해야 한다. 찬송가 405장 가사처럼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준 은혜를 감사 찬양만 해도 된다. 그 찬양에 감동한다면 이미 예정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제일 공부 안 하고 말썽만 부리는 바람에 아예 열외로 시킨 그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 반대편 흑암의 세력의 가장 먼 곳에 있던 자를 거룩한 생명의 빛의 제일 앞자리에 두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내야 한다. 알기 쉽게 말해 “아니 저런 자가 예수를 믿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네!”라는 반응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저랬던 자가 이렇게까지 변하다니? 저자가 스스로 한 짓은 분명히 아닌데? 절대 그럴 수도 없었을 텐데? 저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뀌었다면 도대체 저자가 믿고 따르는 예수는 어떤 존재란 말인가? 천지개벽할 일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정말로 예수에게 완전히 헌신되어 그분만을 보배로 자신의 속에 가득 채워서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들어내야 한다.

바울은 돌로 순교당하는 스데반을 보면서 스스로는 아무래도 풀 수 없는 질문을 품게 되었다. “저 스데반의 심령에는 대체 어떤 천국의 비밀의 씨앗이 심겨져 있기에 천국의 영광을 보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죽음 앞에서도 저렇게 당당하다 못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지?  대체 어떻게 자기에게 돌 던지는 원수들마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이다. 스데반은 십자가에 담긴 천국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씨앗을 바울의 심령에 심어준 것이다. 바울은 가장 위대한 사도였다. 그 위대한 사도를 평신도 스데반이 변화의 토대를 심어주었다면 스데반이 더 위대한 것 아닌가? 요컨대 신자는 불신자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최소한 호기심이라도 불러일으키도록 예정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정리해 보자. 심판은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 아니요 인간이 선택한 것이다. 반면에 구원은 인간이 선택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다. 또 다시 같은 내용의 말을 표현만 바꾼 말장난이 절대 아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말장난 같고 어렵고 복잡하며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예정론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완벽하게 단 하나의 상충 없이 조화롭게 실현된 것이다.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면 예정론도 이해된다. 나아가 예정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뜻도 이 땅에서부터 실현할 수 있다. 신자가 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어리석으며 죄의 본성이 살아서 즉, 이전에 공부는 죽어도 싫고 놀기만 좋아했던 그 습성이 우리를 거룩과 의에서 자꾸 멀어지게 끌어당길 수 있다. 그래도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리와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그 안에 완벽하게 실현된 예정의 뜻을 다시 회상한다면 얼마든지 나부터 다시 주님의 일군으로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다. 내 가장 가까운 가정과 직장에도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천국을 실현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바로 그것이 예정론과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다.      

8/27/2012


사라의 웃음

2012.09.08 23:24:23
*.109.85.156

치매환자 마냥 십자가 사랑을 자꾸만 잊고, 또 잊으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맘은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고는 오히려 하나님 맘을 잘 아는 듯 착각하며 살아 갑니다.

그저 자신만 사랑하기에 급급하면서도 늘 그것 아닌 듯 생각하는 이런 무지함, 교실을, 학교를 모두 부숴버리면서 놀고 있는 악동, 진흙탕에서 분탕질치느라 정신없는 이런 최고의 악동을 구원해 주셨건만, 그런 맘은 헤아리지 못하고 너무도 자주 이런 저런 변명으로 바쁜 입술이 되어지는 이 모순을 어찌 해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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