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네 문둥이(2)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황혼에 일어나서 아람 진 가에 이르러 본즉 그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저희로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황혼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그 문둥이들이 진 가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왕하 7:5-8)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관심과 초점을 주로 어디에 두느냐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도덕적 계명 중심으로 읽고 그대로 실천하려는 자,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관심을 두어 자기도 그런 능력 받기를 사모하는 자, 영적인 위로를 받아 내면의 성숙을 이루기 원하는 자,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알아보는 자 등 다양합니다.
목회자의 경우는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눠집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에 개입하시고 인간을 다루었는지에 초점을 두는 것과 신자가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입장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동일한 말씀을 두고 한쪽 면을 더 강조한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동전에 앞면과 뒷면이 있듯이 그 순서는 정확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 만사에 직접 개입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항상 신자더러 하나님이 먼저 베풀어주신 은총에 제대로 반응하라고 요구하지 신자 쪽에서 먼저 어떻게 해야만 보상이 따라온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한 것이므로 항상 하나님 중심으로 읽어야지 인간 중심으로 읽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인간사에 간섭하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정확하게 깨닫기만 하면 신자는 그 앞에 저절로 고개 숙여지게 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총이 먼저이고 신자의 믿음은 그 다음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읽는 신자들의 반응도 각각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아람 군대를 큰 소리로만 물리친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하여 자신에게도 그런 능력이 임하기를 소원할 수 있습니다. 늦게나마 문둥이들이 자기들 소위를 깨닫고 동족에게 찾아가 기쁜 소식을 알려 준 것을 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 섭리하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먼저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관해선 새삼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 우주를 말씀 하나로 창조하신 그분께 능치 못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홍해를 갈랐고 침묵의 행진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고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게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신학적으로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그 크기로만 따지지 말고 각 개별 상황과 사람에 따라 독특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됩니다. 만약 여리고성을 불태워 무너트렸거나, 홍해를 큰 배로 건너가게 했거나, 다윗이 어른이 된 후 골리앗을 이기게 했다면 하나님의 섭리는 상당 부분 퇴색되고 도리어 인간의 믿음이 돋보였을 것 아닙니까? 각 사건마다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하고도 절묘한 방식대로 역사하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주권적 섭리입니다.
본문의 경우도 하나님이 아람 군대를, 그것도 이스라엘과 전쟁 한 번 없이 물리치는 것 정도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입니다. 문제는 엘리사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할” 것이라고 예언한 그대로 이뤄지게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때처럼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줄 수는 없었습니다. 엘리사가 “사마리아 성문에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했기에 하늘에서 떨어져선 안 되며 반드시 고대 시장터인 성문에서 매매하는 모습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외부에서 물자가 공급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단 하루 만에 수많은 양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설령 그런 물자를 구한다고 해도 아람 군대가 성을 포위하고 있어 도저히 성안으로 반납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람 군대의 것을 빼앗아 줄 수밖에 없는데 정상적인 전쟁으로 군수물자를 적군에게 그냥 넘겨줄 바보 같은 군대는 없습니다. 항상 견고한 방어진을 친 후방에 보관합니다.
그 물자를 빼앗을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아람 군대가 너무 황급한 나머지 도저히 물자를 챙길 여유가 없이 몸만 빠져 나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했습니다. 어마어마한 군대가 금방 돌격해오는 소리가 장막 바로 곁에서 들리게 했습니다. “목숨아 날 살려라!”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치게 말입니다.
또 네 문둥이가 이왕 죽을 바에야 마지막 실오라기 같은 가능성에 전부를 걸어보자고 결심한 것은 황혼 때였습니다. 엘리사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일을 이루려면 하나님은 어차피 아람 군대가 하루 안에 물러가게 만들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람 군대를 황혼 때에 물러가게 했습니다. 문둥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조금 일찍 항복하러 갔더라면 죽였을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살려서 당신의 기적에 대한 증인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크게 발휘되기 보다는 오묘하게 작동될 따름입니다. 각각의 특수한 상황에 맞추어 완벽하게 나타나 너무나 신기합니다. 반드시 당신께서 계획한대로 진행시켜 뜻했던 결과를 도출해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환난을 덮고도 남을 만큼 커서 전능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완전해서 전능한 것입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아주 정밀한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듯이 모든 일이 때와 방법과 순서에서 단 한 치의 오차 없이 세밀하게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베푸는 은혜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듯이 수십 수백 배로 차고 넘치게 주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게 주십니다. 대박이 터지기보다는 아주 섬세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말로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은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스스로 계획한 일을 두고 하나님께 대박 같은 은혜를 소망하기 보다는, 범사에 숨겨져 있는 그분의 은혜를 발견하려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신자가 기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중단되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많은 그분의 은혜가 신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심지어 지각도 못한 채 흘러지나갑니다. 신자들이 자꾸 대박 같은 은혜를 사모하는 이유는 평소에 섬세하고 오묘한 은혜를 제 때 발견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인간 중심으로 보면 비겁한 네 문둥이와 하나님의 큰 능력에 혼쭐이 난 이방 군대 밖에 발견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으로 보면 아름다운 네 문둥이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이방 족속마저 도구로 삼아 끝까지 당신의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문둥이들이 한 행동 자체는 치사했습니다. 그러나 사방이 막혀 아무 방도가 없을 때에 생명을 거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또 모슨 사람이 외면한 그들에게 오히려 가장 중요한 일을 맡기신 하나님의 역사가 참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지만 아주 섬세하십니다. 이 둘도 동전의 앞뒷면입니다. 그러나 위대함만 보면 대박만 찾습니다. 반면에 섬세함을 먼저 보면 범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어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그분의 은혜를 발견하여 감사하고 충성하게 됩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과 겪고 있는 일 속에서 섬세한 하나님을 섬세하게 묵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대박같이 터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삶과 인생 자체가 대박으로 변할 것입니다.
10/1/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