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악인이 도리어 형통하는가?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矜恤)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30:18)
사람들은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고 악인이 오히려 형통하는 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의심합니다. 불신자는 그런 모순으로 하나님의 존재성마저 부인하는 구실로 삼고 신자마저 때로는 그 신앙이 흔들리게 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죄지을 때마다 벌주어서 악이 없어져야 당신의 공의가 서지 않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공의의 하나님을 우리 생각과는 다르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기다리시는 여호와”를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만약 사람이 선행 혹은 범죄 할 때마다 상벌을 주면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오직 무섭고 두렵게만 인식하게 됩니다. 벌이 무서워 죄를 짓지 않고 상을 받고 싶어 선행을 하게 됩니다. 그분은 절대적인 독재자가 되며 사람은 기계적으로 맹종하거나 선을 가식적으로 행하게 됩니다. 나아가 사람들이 그분의 권선징악 법칙대로 행동함으로써 인간사를 움직이는 실체가 그분이 아니라 그 규율이 되어버립니다. 비인격적인 법칙이 인격적 하나님을 대체하여 하나님이 되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권위만 앞세워 아무 원칙 없이 임의대로 상벌을 시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아주 신경질적인 하나님이 되어 버립니다. 인간은 도무지 어떻게 해야 그분의 기분을 맞출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사람들도 인생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하려 해도 언제 하나님의 태클이 들어올지 모르는데 그 일에 최선을 다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것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인간의 재량에 맡겨서 방임하지도 않습니다. 그럼 권력과 돈이 많은 자가 세상일을 마음대로 주무르게 됩니다. 아무리 법으로 규제해도 법만 피할 수 있으면 무슨 짓을 해도 됩니다. 이제는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인간과 인간이 만든 법입니다. 불신자의 핑계대로 하나님이 결과적으로 실종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절대 남에게 빼앗기지 않기에 스스로 자신의 존재성을 부인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계십니다. 매번 상벌을 주는 것보다는 심판 혹은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기다리는 데에 하나님의 참 공의가 있습니다. 악인의 경우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주 크게 망하게 또 의인의 경우도 결정적인 순간에 아주 흥하게 하십니다. 당신의 공의를 가장 공의로운 방법으로 사람들 앞에 드러내십니다. 죄인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있으며 의인에 대한 구원을 한 시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다리므로 사람도 그분의 공의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불신자는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 짓습니다. 그분의 공의를 믿는 신자마저 이 부분에서만은 항상 자신이 없어집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세상이 바뀌는 것 같지 않고 자신이 잘못한 것이 별로 없는데도 오히려 자기 문제는 더 꼬여가기 때문입니다.
또 실제로 하나님의 공의가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실현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죽기 전에 우리가 기대하는 식의 공의가 실현되면 사람으로 여전히 언젠가는 나타날 상벌에 연연하게 만들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사람이 천국에 대한 소망이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후 심판과 보상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공의라면 사람들로 또 다시 지옥이 두려워서 죄를 안 짓게 하고 천국 가고 싶어 선행하게 만듭니다. 사후 심판과 구원마저 공의의 궁극적 모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본문에는 “그분의 공의를” 기다리라고 하지 않고 “그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사후에는 이미 심판과 구원이 확정되는데 그분을 다시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기다리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하나님이 되려면 반드시 이 땅에서부터 그 공의가 실현되어져야 합니다.
그럼 이 땅에 실현되는 그분의 공의의 실체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의인으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상벌에 전혀 연연하지 않고 오직 그분과 함께 교제하며 사는 것 자체가 생의 소망이자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으로 선을 행하되 지치지 않고 세상에 선이 실현되어져 가는 것, 그것도 아주 적은 부분에서 적은 모습으로 실현되더라도 이미 그것만으로 참 기쁨을 누리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공의입니다.
반면에 악인은 악에 그대로 두는 모습입니다. 악인을 상실한 마음에 그대로 두어서 본인이 저지른 악이 갖는 폐해로 스스로 벌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돈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평생 동안 죽도록 돈만 벌다 죽으라는 것입니다. 쾌락이 목표면 더 크고 더 자극적인 쾌락을 쫓다가 영육 간에 황폐해져 죽도록 버려두는 것입니다.
요컨대 선은 선으로 더 크게 흥하게 하고 악은 악으로 더 크게 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렇다고 만사를 인간에게 맡겨두고 방임만 하는 하나님이 절대 아닙니다. 그분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이 땅에서부터 당신의 구원과 심판은 반드시 있으며 아주 엄격하고도 정의로운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럼 도대체 그 때는 언제입니까?
이 원칙도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이미 말한 대로 악인이 자기가 쌓은 악의 폐해로 괴로워하고 있는 동안에는 직접 벌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벌 받고 있는데 하나님이 구태여 나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악인이 조금이라도 그 악으로 괴로워하고 있거나 폐해를 눈치 채고 있다면 회개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기다려 주려는 목적입니다.
대신에 악인이 악을 자랑하고 도리어 선인 양 선전하며 하나님은 이 땅에 없다고 큰 소리 칠 때에는 반드시 엄청난 모습으로 징벌을 내립니다. 모든 자가 당신의 공의를 완전히 목도하도록 만듭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분은 당신의 영광을 세상의 어떤 존재에게도 절대 빼앗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인에게 나타나는 공의의 원리도 동일합니다. 의인이 왜 세상에 악이 더 설치고 악인이 더 형통하는지 의심과 불만을 없애지 않는 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고 계속 그 어려움 속에 내어버려 두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의인의 그 불평에는 자기도 세상에서 악인처럼 형통하고 싶다는 악한 의도가 내면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의인마저 하나님 당신을 기다리지 않고 그분의 공의만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서 빨리 저 악인을 호통 치시고 대신에 나를 폼 나게 해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라는 마음을 완전히 없애기를 그분은 기다리십니다. 니느웨를 멸망시켜 주기를 간구했던 요나와는 달리 하나님은 오히려 그 악의 도성에 구원의 축복을 베풀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의인이 정말 낮아질 대로 낮아져 “이제는 나에게 소망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면 비로소 당신만의 너무나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악인의 교만과 완악이 찰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당신만의 너무나 큰 징벌을 내리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인의 품성 자체가 완전히 거룩해질 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한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온전히 재확인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의인이 정말 선이 선 자체로 너무 좋아서,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만이 너무나 큰 축복임을 절실히 알아 실천하도록 기다립니다. 악인도 사실은 더 크게 혼내려고 일부러 오래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를 스스로 파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 것이지 깨닫고 회개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더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를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찾으려 해선 공의는커녕 그분마저 놓치게 됩니다. 반면에 그분 당신을 기다릴 때에는 그분의 공의마저 충만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의는 누더기에 불과하고 온전한 의는 하나님께로만 나옵니다. 아니 하나님 당신이 바로 의 자체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공의는 언제나 정밀하게 실현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신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리기 보다는 그분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운 분인지도 모르고 세상은 모순투성이라고 불평하며 오늘도 세상에서만 형통케 해주는 죄악을 쫓아 그분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불같은 진노를 자기 머리 위에 계속 쌓고 있는 중입니다. 사단에 그 영혼이 팔려 도대체 자기들이 하는 짓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전혀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불쌍할 뿐입니다.
대신에 하나님 당신을 즐거워 할 수 있는 신자는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저 불쌍한 영혼을 지금도 기다리고 계시는 긍휼의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신자마저 혹시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 있는지 의심하고 불평하는데 신앙생활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허송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5/9/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