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아나니아를 죽인 진짜 이유 (행4:32‐5:11)

조회 수 2476 추천 수 122 2009.04.03 19: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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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를 죽인 진짜 이유.
사도행전강해 (23)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 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도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 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행4:32‐5:11)


재산을 다 안 바쳐서 죽인 것이 아니다.  

본문을 다시 살펴보는 이유는 “왜 하나님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꼭 죽여야만 했던가?”라는 의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규명해 보기 위해서다. 지난 주 헌금에 대한 기본적인 몇 가지 오해들을 살펴본 이유는 바로 이 의문을 풀기 위한 사전정지작업이었다.

특별히 말라기서의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약속을 수량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선 안 된다고 했다. 이 부부가 죽은 까닭도 수량적으로 접근하면 자칫 하나님이 전부 다 바치지 않아서 죽였다는 단순유치(?)한 결론으로 끝이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가진 모든 것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 성경적 권유로 둔갑하고 그에 따라 신자로선 논 팔고 집 팔아 바쳤는데도 돌아오는 것이 왜 이 모양인가라는 불만 또한 논리적 타당성을 갖게 된다.  

문제의 본질은 소유를 판 금액 전부 다 안 바쳤다는 데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령 하나님을, 그것도 부부가 함께 작심하고 속였다는데 있다. 결국 소유 전부를 바치지 않은 것과 같은 말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부가 소유의 일부분만 팔아서 그 값 전부를 바쳤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을 것 아닌가? 처음부터 일부만 바치려 결단했고 또 그렇게 행했기에 하나님으로서도 전혀 문제 삼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자꾸 양적으로 이해하니까 교회 안에서 많이 바친 신자는 당연히 믿음이 좋은 양 오해되어  우월적 지위와 특권을 누린다. 신자 개인뿐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다. 출석 교인이 많으면 무조건 좋은 교회이고 담임 목사는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큰 종으로 대우 받는다.

교회가 대놓고 그런 식으로 가르치거나 은연중에 그런 분위기로 몰아가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가르치는 자부터 바칠수록 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바친 양에 비례해서 복을 주신다고 철석 같이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복신앙은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전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럼 세상에서 약하고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복을 평생 못 받는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헌금이란 바칠수록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에 감사해서 내는 것이다.

굳이 헌금을 양적으로 따져 믿음과 연결시키려면 소득과 재물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판단해야 한다. 동전 두 닢을 낸 과부가 주님께 칭찬을 받았지 않았는가? 하나님과 바꾸어 가진 것 전부를 바칠 수 있다는 믿음을 본 것이다. 재물과 하나님 둘 중에 정말 주인으로 모셔야할 한 분만 주인으로 모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소산의 10%를 바치라는 것도 바로 재물이 아니라 당신을 정말로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지 한 가지 증표로 보시겠다는 뜻이지 않는가?

또 목사 쪽에서 먼저 교인들의 기분을 맞춰주려고도 한다. 교인들이 복 받는 것까지는 크게 안 바라도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 현실적 어려움을 이겨내려고 한다. 물론 아예 그 목적만으로 신앙을 갖는 자도 꽤 있다. 목사가 그런 바람에 맞추어 하나님이 신자를 도우신다는 것을 강조하다보니까 기복 신앙으로 흘러버리고 힘든 사람들로 교회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목사도 교회가 성장하니까 하나님의 일을 잘하고 있다고, 처음부터 의도했던 안 했던, 착각한다. 신자는 복 받고 교회는 성장하니까 한 마디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도 있다. 잘못된 시한부 종말사상을 강조하여 아예 축재를 노리는 것이다. 주님 오시면 땅의 것은 전부 아무 소용없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떤 식으로 도래할지는 정작 그 완전한 모습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모든 주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주님에게만 맡겨져 있다. 전혀 소유가 필요 없으리라고 섣불리 구체적 상황까지 확정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아무리 주님의 재림을 대비한다 하더라도 항상 깨어서 기도하며 영적으로 대비하고 있으면 되지 소유까지 팔아 치우는 것은 큰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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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교회가 태동되려는 시점에 이런 오도된 기복신앙이나 종말론이 개입될 여지는 하나도 없다. 아나니아가 죽은 까닭이 전부를 안 바쳤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5:1에 “소유를 팔아”라고 번역되었지만 영어성경으로도 확인 되듯이 사실은 “소유 재산 중의 하나를”(sold a piece of property) 판 것이다. 이들 부부는 요즘 식으로 치면 강남 땅 부자 같이 상당한 자산가였다. 한마디로 재산 전부를 바쳤느냐 아니냐는 원문에서부터 전혀 문제 삼지 않았던 측면이다.

하나님은 아나니아가 헌금을 하는 태도 즉,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벌을 내렸다. 부부가 공모해서 땅을 판 대금의 일부를 감추었다.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아마도 그들은 이것이 땅을 판 돈의 전부라고 먼저 말했거나, 베드로가 이것이 전부냐고 물어봤을 가능성이 높다. 또 베드로의 물음에조차 그렇다고 시침을 떼며 거짓말했을 것이다.

만약 이 부부와 베드로 간에 공식적인 확인절차 없이 즉, 하나님이 곧 바로 죽였으면 자칫 나중에 당신께서 오해 받을 소지가 있다. 다른 말로 주위 사람들로 그 부부가 끝까지 거짓말하는 모습을 분명히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절차 없이 죽이면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은 드러나지만 자칫 변명이나 회개의 기회마저 주지 않는 무서운 하나님이라는 누명(?)을 쓸 수 있지 않겠는가?  

한 마디로 이 부부는 헌금의 다소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 했기에 벌 받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 예수를 믿고도 죄인 줄 빤히 알고도 거짓말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아니 솔직히 작정 헌금을 제대로 못하거나, 주일 아침에 처음 마음먹은 액수에서 줄이고 줄여 헌금하는 경우도 많지  않는가? 땅을 팔았으면 일부를 감추었어도 상당한 액수였을 텐데 이 부부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벌을 받은 것은 좀 심한 것 같지 않은가?  

가인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이유

헌금을 바치는 신자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면 이 사건과 가장 유사한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살펴봐야 한다. 히브리서의 설명대로 가인이 바친 제물의 종류 때문에 하나님이 열납 하지 않으신 것은 맞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히11:4)

물론 이 때는 모세가 동물 희생제사 율법을 받기 훨씬 이전이었다. 이 둘의 아비 아담은 범죄 후에 스스로 나뭇잎으로 앞을 가렸지만 죄책에 대한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없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 손수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줌으로써 비로소 구원을 얻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은 아담에게서 동물에게 죄를 전가해 제물로 바침으로써 죄 사함을 얻는다는 하나님의 원리를 배웠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가인이 제물의 종류가 틀려 열납 되지 않은 것은, 아나니아 부부가 거짓말해서 벌 받은 것처럼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일차적이고도 쉽게 알 수 있는 이유다. 성경도 다른 모든 책과 마찬가지로 당시 상황과 비교해 전체 문맥에 따라 행간(行間)의 의미를 잘 따져 보아야 한다. 사변적으로 추론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 내에서 타당한 근거를 찾아서 유추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나니아도 마찬가지이지만 가인의 경우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않은 또 다른, 어쩌면 더 중요한 이유가 분명 있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제물의 종류 즉, 헌금의 질과 양보다 제물을 바치는 믿음의 태도가 더 나빴던 것이다. 그 사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성경 기록상의 힌트가 둘이나 있다.

우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창4:4)를 바쳤다고 한다. 처음 것이 제일 좋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에서 장자 혹은 초태생으로 정의된 것은 전부를 대표한다는 뜻이다. 출애굽 할 때 열 번째 재앙으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신 것도 사실은 전부 죽어 마땅한 죄인임에도 장자만 그 대표로 죽였다는 뜻이다. 첫째 인류의 장자 아담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가 죄 아래 있게 되었지만, 새 인류의 장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 인류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둘째 힌트는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창4:4,5)고 ‘사람’이 ‘제물’보다 앞서 표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고 제물을 받으신 것이지 제물을 보고 사람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을 보셨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믿음의 중심을 보셨다는 뜻이다. 제물은 어찌 되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믿음이 바로 선 사람은 제물도 온전하게, ‘많게’가 아니라, 바친다는 것이다.  

아벨이 첫 새끼를 바쳤다는 것은, 그 새끼를 얻고 또 앞으로 키워 이득을 얻기 전부터,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확신하여서 감사함으로 자기의 전부를 드린다는 고백이다. 사실상 그 양이 둘째 새끼를 낳기도 전에 또 나을지 안 나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바친 셈이다. 쉽게 말해 양은 물론 새끼를 여러 마리 낳지만 만약 한 마리만 낳았어도 바로 그 양을 바쳤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에 반해 가인의 믿음을 입증할만한 기록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창4:3) 아버지에게 이미 교육 받았음에도 제물의 종류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또 첫 소산도 아니었다. 다른 말로 자기가 쓰고 남은 것으로 바쳤던 것이다. 자기 소산 전부를 하나님이 주셨다는 인식이 아예 없었다. 대신에 자기 노력으로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단지 혹시나 벌 받으면 어쩌나 싶어 면죄부나 부적을 사는 심정으로 바친 것이다.

분명 가인이 아벨보다 먼저 제사를 드렸음에도 열납 되지 않았던 원인이다. 히브리서 말씀에도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했다. 가인이 어쨌든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린 것 자체는 좋지만 그 믿음의 태도가 나빴다는 것이다. 이처럼 헌금의 근본적 성격은 하나님께 받은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이지 우리의 것을 쪼개서 바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답답해서 우리 것을 받으시며 또 그것으로 무엇을 하시겠는가?

“여호와의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데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1‐14).”

다윗 왕이 성전건축을 위해 온 이스라엘지파의 헌물을 받아 아들 솔로몬에게 인계하면서 하나님께 주님의 것을 되돌려 드린다고 .분명히 고백하고 있지 않는가? 또 정작 감사한 이유가 많은 소유의 복을 받아서가 아니라고 한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데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라고 고백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랑하여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 즉, 그분과 교제하며 은혜 가운데 있는 것 자체가 더 큰 복이라는 것이다.    

혹시 여유가 생기면 헌금을(십일조를 포함해) 하겠다는 생각은 엄밀히 따지면 돈이 많이 생기면 하나님이 해 주신 일이고 적게 생기면 하나님이 해주신 것보다는 내 능력이 모자랐다는 뜻이 된다. 마치 하나님의 사정을 봐주는 것 같지만 오히려 겸손한 신앙이 결코 되지 못한다. 지금 당장 $500의 수입밖에 없어도 그것 역시 하나님이 은혜로 감사해야 한다. 어떤 때는 한 푼 수입도 없거나 심지어 부도가 나서 망할 수도 있다. 그것마저 하나님이 하신, 최소한 허락하신, 일로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없이는 아벨처럼 첫 새끼를 바치지 못한다. 수입이 $500이 생기기 전부터, 또 부도가 나는 전 과정과 그 환경 가운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역사하셨다. 돈이 많이 생겨야만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 아니다. 아벨은 첫 새끼를 얻었기에 바친 것이라기보다는 첫 새끼를 낳을 때 까지 지난 모든 과정이 하나님이 풍성하게 간섭하신 은혜였음을 너무나 확신했기에 첫 새끼를 받자마자 그런 고백과 증표로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그래야만 둘째 새끼가 낳는 또 다른 첫 새끼도 바칠 수 있게 된다.  

아나니아의 완악한 마음

아나니아의 경우도 하나님께 거짓말 한 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것을 돌려드린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벌하신 것이다. 그런 완악한 마음을 알 수 있는 힌트를, 가인과 아벨의 기사와 마찬가지로,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사람들 앞에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드렸다. 우리말 성경과 달리 원어에는 ‘그러나’를 뜻하는 접속사가 5장 1절 머리에 있다. 무슨 뜻인가?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과 반대 내지 비교될만한 경우라는 것이다. 저자 누가는 바나바의 헌금과 일부러 대조시킨 것이다.

그 이름이 “위로의 아들”을 뜻하듯이 바나바는 나중에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성경도 그 인물됨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11:23, 24)

그가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 때에 틀림없이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자 아나니아가 샘이 났던 것이다. “재산으로 치면 감히 바나바가 나와 비교가 돼? 어림도 없지. 내가 가진 것이라곤 돈 밖에 없는데 까짓것 강남 땅 하나만 팔아서 폼 한 번 잡아봐?” 그래서 “a piece of property”를 처분한 것이다. 헌금을 한 근본 동기가 하나님의 것을 되돌려 드린다는 개념은 전혀 없고 내 것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칭찬 받을 욕심뿐이었다.

조국 교회는 물론 재정적으로 연약한 교민 교회에 이런 경우가 꽤 있다. 혼자서 목사 사례를 주고 교회 살림을 다 꾸려간다는 이유로 권세 부리려는 분을 쉽게 볼 수 있다. 자기 노력으로 얻은 재물인지라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자기가 자기 재물로 자기 교회도 책임지고 운영해야 하는 양 착각한다. 또 자기가 책임져야 할 부분을 순종하며 기꺼이 감당했으니 자기 할 바를 다한 의로움이 넘쳐서 주위 사람마저 알아서 길 정도다.  

헌금은 책임이나 의무가 아니라 권리이자 축복이라고 말했다. 임무란 각자에게 미리 할당량이 주어지고 그것을 충분히 혹은 초과 달성했을 때는 칭찬해주게 된다. 일부교회에선 안수집사나 장로 직분과 교환하여 헌금 할당량을 배정해주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 있지 않는가? 그렇지 않은 교회에서도 주로 여유가 있는 분들이 직분자로 선택받고 또 일단 임직되면 열심히 헌금 한다. 헌금 잘한 것 가지고선 아무도 시비 걸 수 없지만, 임무 달성했다고 생색내고 그만큼 값을 하겠다고 설치니 문제다.

소유가 자기 것이라는 인식이 있으면 아무리 교회에 헌금해도 자기가 손해나 희생을 감수했다고 여기게 된다. 자연히 교회 안에서 자랑 내지 생색을 감출 길이 없다. 재물이나 직분이나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라고 주신 것을 가지고 순전히 자기 것이라고, 그것도 하나님의 전에서 큰 소리 친 것이다. 마치 재벌 회사의 수위가 그 그룹의 회장이라도 된 양 주위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과 방불하다.  생각해보라. 재벌회장과 하나님이 감히 비교라도 되는가?

나아가 헌금을 많이 못한 교인들을 아주 우습게 대한다. 임무나 책임조차 완수 못했다고 여기니 당연한 반응이다. 헌금이 권리이자 축복이면 제대로 못한 자를 어떻게 간주해야 하는가? 현실적으로 오죽 힘들면 그 권리조차 못 찾아 먹을까 안타까이 여겨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아직 온전한 믿음의 단계에 들어서지 못했으니까 중직들이 제대로 이끌어 주어야 하든지 말이다.

아나니아가 품었던 두 번째 잘못된 생각은 의심이다. 그나마 생색내겠다는 생각은 어느 정도 순진한 측면이 있다. 괜히 우쭐해진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도 열심을 한번 내볼까라는 선한 동기도 분명 있다. 사도들의 사역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 신앙공동체에 서로 통용하여 핍절한 자가 없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그 안에 함께 소속되고 싶은 소원이 없었다고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그런 마음이 중간에 변심되었다는 것이다. 얼마를 감춘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나머지 일부만 해도 바나바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생색내고 구제하는데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겠지 계산한 것이다. 현실적 용도만 감안해서 그 당시 공동체에 필요한 금액을 충당만 하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바나바가 바친 것보다 최소 몇 배는 되니까 오히려 아주 잘하는 일로 착각했을 것이다.

바꿔 말해 그는 바나바가 재산을 바친 뜻을 오해한 것이다. 바나바는 레위인이었다. 레위지파는 경작용 토지는 소유하지 못하고 거주할 성읍과 집 주변에 채소를 기를 작은 밭은 소유하고 또 물려줄 수 있었다.(레 25:32,33) 본문이 바나바는 ‘밭’을, 아나니아는 ‘땅’을 팔았다고 구분해서 표현한 이유다. 또 아나니아가 바친 금액이 바나바보다 훨씬 많았을 근거도 된다. 따라서 바나바로선 밭을 팔고나면 정말 거주할 집 말고는 자기 소유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는다. 여전히 땅이 많이 남은 아나니아와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바나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나니까 재산과 돈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더 이상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에 미련을 가질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전 평생을 바치기로 한 것이다. 이제 그는 자기 전 소유를 처분하고 본연의 레위인의 임무로 돌아가 오직 주님의 일만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또 서로 통용하여 아무도 핍절하지 않는 공동체를 계속 존속시키는 데에 자기 전부를 던지기로 한 것이다. 단순히 교회의 구제에 필요한 돈만 충당한 것이 아니었다.

반면에 아나니아는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에 바친다는 확고한 인식이 없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운영 내지 사업 용도로만 자금을 댄 것이다. 잘 봐주어 윤리적 차원에서 선한 일 한 번 하는 셈 친 것이다. 나아가 재산을 팔아 교회를 도와주었으니 천국 가는 티켓도 보장되겠거니 기대했을 것이다. 인간적 현실적 측면에서 아무리 따져 봐도 금액으로는 이만하면 차고도 남는다는 약삭빠른 계산이 선 것이다.

나아가 돈이 아깝기도 했겠지만 현찰을 조금 가지고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공동체 생활의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갑자기 생겼거나 이전부터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니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혼자 좀 더 편안하고 풍족하게 살려 했던 것이다. 최소한 비상금은로 좀 갖고 있어야겠다는 뜻이다. 결국 한 발은 세상에 두고 한 발은 교회 안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에게 어떤 의도가 있었던 일부를 감춘 것은 그 공동체에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과 권능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십일조나 헌금을 많이 내고 나면 생활은 어떻게 하지라고 염려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생각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가? “황충을 멸하여 포도나무 소산이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말3:10)해주시겠다고 했지 않는가? 하나님은 신자에게 굶는 일은 생겨도 절대로 죽게 버려두지는 않는다. 실망할 일은 허락해도 완전한 좌절로 내몰지는 않는다. 사방으로 둘러싸여도 하늘을 향한 위는 세상이 절대 막지 못한다.

재산도 많은 아나니아가 처음에 작심한 것을 중간에 마음을 바꾼 것은 한 마디로 두 마음을 품은 증거다. 두 마음이 세상에선 온갖 나쁜 짓을 다하다가 교회에서 착한 양 위선을 떤다는 뜻이 아니다. 또 수시로 의심과 불안이 덮쳐서 믿음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두 마음의 본질은 내 인생이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능력으로 사는 것이 대 부분이고 혹시 필요하고 급할 때만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두 주인을 동시에 혹은 때때로 번갈아서 모시는 것이 두 마음이다.

그러니까 의심이 믿음을 흔들 수밖에 없다. 누구나 세상에서 전부 형통치 못하고 환난은 닥친다. 하나님이 주(主: the Lord)가 아니라 조력자(助力者: Helper))에 머무르는 자로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이번에 안 도와주셨는가, 왜 안 도와주시지 등의 의아심이 꼬리를 물 수밖에 없다..

반면에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이 하나님의 의로운 손에 전적으로 붙잡혀 있다고 확신하는 자에게는 아무래도 의심이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간혹 위급한 문제에 대한 자연적 반응으로 불안과 의심이 생겨도 십자가에 죽으실 만큼 자신을 사랑하고 내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을 상고하면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  

아나니아가 기대했던 것은 사람들의 칭찬과 공동체의 고급회원권과 천국 가는 보장이었다. 그러나 정작 받은 것은 죽음이었다. 하나님이 두 마음을 품은 신자에게서 보는 것은 언제나 세상을 향한 마음뿐이다. 교회 안에 살짝 들여 놓은 발은 그분의 주의를 전혀 끌지 못한다. 성경이 성전 마당만 밟았을 뿐이라고 선언하고 있지 않는가?

속인 것을 넘어서 횡령했다.

그런데 아나니아가 가진 마음이 위에서 설명한 정도가 전부라면 하나님도 꼭 죽음으로 심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배반하고 십자가 형벌로 넘길 가룟 유다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수차례 허용했다. 물론 베드로도 이것이 전부냐고 반문함으로써 아나니아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거짓 대답으로 현장에서 즉사시켜 버렸다. 여전히 너무 가혹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헌금하는 우리의 마음에 교회에서 생색을 좀 내고 하나님도 세상 안일을 좀 보상해 주시리라는 기대가 전혀 없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그런 마음이 털끝만치도 없다고 자신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 우리도 아나니아처럼 죽어 마땅한 것 아닌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은 아나니아보다 속인 금액이 너무 미미하기 때문인가? 물론 하나님이 헌금 액수로 따질 리는 없다. 어쨌든 하나님 앞에 거짓말 즉, 성령을 속이는 죄는 우리도 수시로 범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베드로가 아나니아더러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물었을 때 ‘감춘다’는 원어는 횡령, 착복을 의미한다. 자기 것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한 것을 착복이라고 하지 않는다. 반드시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제 멋대로 소비하는 것이다. 헌금의 근본적인 의미가 하나님의 것을 되돌려드리는 것임에도 자기 것인 양, 그것도 일부만 속여서 바쳤으니 횡령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그는 신앙공동체 앞에 미리 서약했을 것이 틀림없다. 바나바에게 시기를 느껴 “말죽거리에 노는 땅 몇 평이 있는데 그것을 팔아 전부 헌금하겠다.”고 해놓고 전부 바치지 않은 것이다. 속였다는 사실을 성령이 베드로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그 땅의 시세가 빤할 텐데 그에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누가 봐도 너무 모자라게 내놓고는 땅값 전부라고 시침을 뗀 것이다.

교회에 작정한 것을 온전히 헌금하지 않으면 큰 벌을 받는가보다 단순하게 여길 문제가 아니다. 지금 믿는 무리가 공동체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 역사적으로는 초대교회가 가시적이고 조직적인 모습으로 태동하는 시점이었다. 또 그 교회가 기존의 종교 공동체와 전혀 다른 특성은 모든 신자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내주하고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만 의존하는 성령공동체였다. 정말 예수님이 머리였고 성도들은 전부 그분에 연결된 지체였다.

그런 시점에 성령을 훼방했다는 것은 성령공동체에 방해를 한 행위이며 초대교회를 탄생시키려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을 막으려 했다는 뜻이 된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다. 단순히 윤리적 죄나, 하나님께 한 거짓말로 간주해버릴 문제가 아니다. 최초로 생긴 교회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짓이었다.

이 최초의 교회에는 “한 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통용”함으로써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 다른 말로 사도들은 구제와 봉사에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오직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여 복음만 전하면 되었다. 실제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렇게 한 마음 한 뜻으로 변화된 것이다.

바나바나 아나니아가 바친 헌금은 무슨 목적에 쓰이게 되는가? 오직 예수를 증거 하여서 무리로 그분의 은혜를 입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시 옛 이스라엘이 저질렀던 잘못처럼 눈먼 희생, 저는 양같이 더럽고 죄로 물든 제물을 바친 꼴이다. 하나님을 속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훔쳤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온전한 제물로서 공로가 더럽혀지고 또 부인되는 결과다. 베드로가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였다”라고 지적했듯이 바로 사단이 한 짓이었다. 하나님이 이제 지상에 세울 최초의 천국 모형을 그 출발부터 뒤흔들려는 사단의 흉계를 아나니아를 즉사시키는 벌로 부셔버렸다.  

이와 똑 같은 사건이 구약시대에도 일어났지 않는가? 여호수아7장의 아간의 사건이다. 가나안 정복이 여리고성 함락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하다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크게 패했다. 그 원인은 아간이 하나님의 물건을 횡령한 죄였고 그는 죽음의 벌을 받았다. 우상 숭배에 절은 이방 땅을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으로 채우려는 첫 단계에서 사단이 아간을 이용해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 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수7:11,12)

하나님의 것을 횡령하였더니 자기 대적을 능히 당하지 못했다고 한다. 훔친 것이 단순히 도적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훔친 물건과 함께 자기도 바친 꼴이 되어 훔친 자가 죄의 노예이자 사단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다. 사단의 수하가 된 자가 사단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아간을 공동체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그 공동체 전체에 사단이 누룩 같이 퍼진다. 하나님이 도저히 같이 하실 수 없다. 아간 한 사람을 죽여서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 전체를 성결하게 유지해야만 했다.  

아나니아를 죽인 뜻도 동일하다. 그는 초대교회가 태동하는 순간에 두 마음을 품었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했으며, 시샘과 질투심으로 세상의 칭송을 듣고 싶어서 사단에 속아 넘어갔다. 하나님을 속이는 것보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죄로 물들이려는 것은 더 중한 죄였다. 하나님으로선 사단의 종을 교회 안에 절대 그대로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 막지 못한다.

서두에서 성경에 명시적 기록은 없지만 베드로가 그에게 공식적인 확인절차를 행했을 것이라고 했고, 또 아나니아가 교회 앞에 작정헌금으로 서약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던 배경에 충분한 타당성이 있음이 이제 드러났다. 성도들로 단순히 그의 죄와 죽음이라는 형벌의 증인으로만 서게 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교인들에게 교회는 반드시 십자가 복음을 증거토록 하나님께 불려나온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확실하게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또 교회가 그렇게 되려면 오직 성령이 주도해야 가능하다는 원리도 확인시켜 주려 했던 것이다. 인간 베드로가 이 부부에게 사형의 심판을 내리거나 집행할 수는 도저히 없지 않는가? 아니 그럴 마음도 없었을 것이며 감히 하나님께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할 꿈도 꾸지 못했을 것 아닌가? 그는 단지 성령을 속이지 말라고 성령의 인도대로 야단만 쳤을 뿐이다. 어쩌면 가장 놀란 자가 베드로였을 것이다. 가장 크게 깨닫고 온전한 헌신을 다짐한 자도 앞으로 그 교회의 목사가 될 그였을 것이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머리가 되어 성령이 인도하지 않는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전하기는커녕 그 전에 대적 사단에게 먼저 휘둘리게 된다는 것이다. 아간을 제거한 후에 이스라엘이 연전연승했듯이 최초의 기독교 교회도 아나니아 부부를 제거한 후 동일한 결과를 맺었지 않는가? 이 사건의 결론을 성경이 이렇게 맺고 있지 않는가?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5:11)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능력과 교회를 향한 뜻을 다시 깨닫고 진정으로 그분을 경외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도들도 스승의 부활을 증거할 때에 성령의 살아 계신 권능으로 주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런 신자와 그런 사도들이 함께하는 공동체에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죽인 것이 아니라, 모든 지체가 한 마음 한 뜻이 되도록 보존하여서 교회를 지키고 살리신 것이다.

또 이 공동체의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심이 대외적으로는 어떤 열매를 낳았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사도와 성도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고, 또 예수 믿는 자답게 참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에 권위가 서고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가 임하여 듣는 자마 영원한 생명 혹은 죽음 둘 중 하나의 냄새를 확연히 맡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신자에게선 예수의 모습을, 그 공동체에선 천국의 형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 듣고 영혼의 떨림을 경험한 자라면 정말로 살아 계신 주님을 모시고 오직 주님의 뜻만 따르는 교회에 누구나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 않겠는가? 만약 아나니아를 죽이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교회는 이해하기조차 힘든 이상한 사교(邪敎)의 하나로 세상에 비춰졌을 것 아닌가? 교회는 출발도 못해보고 모함과 비방의 표적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오늘 날 세상 사람들 앞에 목회자와 신자가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 그들이 교회 공동체에 가입하고 싶은 마음을 절실히, 아니 조금치라도 느끼는가? 관심 내지 호기심만이라도 가지는가?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이 솔직한 답일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아나니아 같은 자들이 교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니 교회가 도리어 은연중에 제2의 아나니아를 환영하고 심지어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부패에 물든 돈이건, 어떤 의도로 바치든 헌금의 액수와 그에 따르는 정성만 많으면 믿음이 좋은 신자가 되어버렸다. 교회 안에서 아나니아를 내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높은(?) 자리를 주어 행세하도록 조장하고 있다.  

교회가, 목회자가, 심지어 그런 목회자를 추종하는 교인들마저 두 마음을 품었다. 세상과 타협하고 있다. 저들의 죄를 지적하여서 돈은 못 벌더라도 거룩한 삶을 살도록 만들지 않는다. 사단과 타협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교회마저 사단의 노름에 놀아나고 있는지 모른다. 교회는 돈으로 움직이는 것이 절대 아니다. 돈은 오직 주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여러 수단 중의 하나일 뿐인데 그것이 전부인양 되었다. 주님이 오셔서 그런 모두를 아나니아처럼 그 자리에서 즉사시킬까 두려워해야 한다.

신자나 목사나 살아계신 주님의 완전하신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처럼 부활하신 주님만 바라보아야만 십자가 복음으로 영혼을 변화시키는 목회자의 권위가 되살아 날 것이다. 스스로 부활하셨기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하게 주실 수 있는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려운가? 교회 안에 돈이 아무리 많은들 그 돈이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사도들과 믿는 무리들은 돈에 완전히 자유스러워진 모습으로 복음을 전했다. 바나바와 아나니아 사건은 구약의 아간 사건처럼 교회에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 하나 없이도 성령이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가장 생생한 본보기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다. 틈만 나면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대적 사단은 돈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성도만이 물리칠 수 있다. 아나니아나 아간 같은 방식으로 사단은 복음으로 바로 서려는 교회일수록 쉴 새 없이 흔들 것이다. 두려워 할 것 하나 없다. 바나바 같이 돈에 구애 받지 않고 자기 모든 것을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전부 바친 자가 한 명이라도 있을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교회를 지키고 바로 세워주신다. 그 한 명의 역할은 응당 목사부터 먼저 맡아야 하지 않는가?

신자와 교회는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특별히 신비하고 거룩한 행동을 하고 일을 벌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 앞에 당당히 맞서려면 그것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기만 하면 된다. 세상은 사단에 의해 돈 맛에 중독된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진다. 교회와 성도와 특별히 목사는 그 정반대로만 가면 된다. 하나님이 아나니아를 죽인 것이 잔혹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선 교회와 성도를 흔들려는 어떤 대적도 그 현장에서 즉사시킬 수 있음을 신자로 확신시키려는 뜻이었지 않는가?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신자가 실망하고 기죽을 필요는 전혀 없다.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한 것보다  돈에 절대 굴복되지 않았던 바나바 같은 신자라면 말이다.

4/3/2009
      
유타대학촌교회 8/18/1996 주일 설교          


김순희

2010.04.08 12:27:53
*.160.176.34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는 사건, 오늘날 교회에도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오히려 아나니아 같은 자들이 추대를 받고 있는 요즘 교회의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날마다순종

2021.01.04 16:04:40
*.14.99.253

두려운 마음으로 혹 그분 앞에 두마음을 품어 감히 그분을 만홀히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점검하게 하는 글입니다. 제 눈의 들보를 빼어 내어 소금과 빛으로 넉넉히 감당할 수 있도록 밝은 눈과 지혜를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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