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으로부터 진짜로 버림받은 적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52)



http://youtu.be/GCJbzz19aj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마27:45-50)


예수는 로마 군병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고, 또 유대인들로부터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온갖 멸시와 조롱을 당했다. 또 십자가에 달려 여섯 시간 동안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그 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며 죽으셨다.

이는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누가와 요한에 따르면 이 외침 후에도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세 번을 더 말씀하신 후 돌아가셨다. 이 세 말씀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반해 본문의 외침은 참으로 난해한 구절로 꼽힌다.    

주님의 공사역 3년 내내 보여주었던 큰 권능의 모습과는 다르다. 십자가는 분명히 주님이 주도적으로 기꺼이 지셨기에 죽음 앞에 더 당당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삼일 후에 부활하는 구속계획은 태초부터 삼위 하나님이 마련했던 것 아닌가? 십자가 죽음을 당신이 여러 번 예고하고 가르쳤기에 이 절규는 뭔가 주님이 해선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성경을 해석하는 첫째 원칙

성경을 접하는 목회자나 신자들이 틀린 것은 아닌데 가장 흔하게 범하는 실수 내지 습성이 하나 있다. 모든 구절에서 영적으로 경건하고 신령하며 초월적 의미만 찾으려 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당신을 경배하길 원하신다. 종교적 실력과 영성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알기를 진정으로 갈망하는 자에게 당신을 더 많이 보여주신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 역사에 간섭 주도하시는 당신의 뜻과 계획을 아주 분명하고 단순하게 드러내신다. 하나님 쪽에 더 가까이 서있는 사람이 당연히 더 잘 깨달아 더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될 뿐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간단명료하다면 성경 말씀도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동원해서 기록된 그대로 논리적으로 합당하게 판단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신학이나 교리를 몰라도 하나님을 알고자 진정한 소원을 갖고 성경을 묵상하며 통독하면 성령이 반드시 조명해 주신다. 누구나 하나님의 진리를 정확히 깨달을 수 있다. 주님의 이 절규의 의미도 그 표현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려진 것이다. 그 육신이 완전히 죽었다. 생명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뭔가 예수님답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자꾸만 예수님의 신성과 연결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 만약에 예수님의 신성이 제거된 상태 즉, 완전한 인성만 소지했다면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외침이다. 주님은 지금 제 삼위 성령 하나님과도 완전히 결연된 상태가 된 것이다. 완전한 인간으로써 이 순간 우리와 100% 동질화, 동격화를 이룬 것이다. 완벽한 대속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몇 번 강조한대로 주님 안에서 그 신성과 인성이 상호 어떻게 교차 작용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분만의 신비에 속한다. 그러니까 더더욱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단순하게 이해해야 하지 않는가?

주님은 절규하신 그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에게마저 십자가 죽음의 형벌을 내렸다. 그만큼 인간의 죄에 대한 진노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또 그 죄에 대한 진노를 처리함에 단 한 치의 타협, 변개, 감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그런 진노 아래에서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것이다.  

엘리야와 예수의 비교

이 절규는 마태와 마가만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유대의 통용어인 아람어로 기록했다. 예수님은 실제로 아람어로 섬기고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했다. 지금도 아람어로 절규했는데 유대 보통사람들을 대표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열방의 복의 근원이 되는 제사장 나라로 세웠다. 따라서 유대인의 대표라면 전 인류의 대표도 된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설명한 대로 주님은 제2의 아담으로 오셔서 모든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하신 것이다.

우리말로는 두 복음서 다 ‘엘리’로 번역되어 있지만 마가는 아람어 그대로 ‘엘리히’로 기록했다. 마태는 히브리 음역인 ‘엘리’로 바꿨는데, 유대인들이 예수가 엘리야를 부른다고 오해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렇게도 들렸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의 전통적 종말관에 따르면 엘리야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구원해주러 다시 오신다고 믿었다. 침례 요한이 죄 사함의 침례를 베풀면서 메시야 오심이 임박했음을 선포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호응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조사단으로 파견된 제사장들이 요한에게 “네가 엘리야냐?”(요1:21)고 물은 까닭은 바로 이런 종말관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는지 두고 보자고(49절) 한 말에는 일말의 그런 소망이 내포됐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예수는 지금 십자가에서 곧 죽을 것이기에, 육체적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들림을 받은 인간 엘리야보다 훨씬 못하다고 비아냥거린 것이다.

만약에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면 믿겠다고 조롱한 대로(47,49절) 실제로 내려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 “Iron Man”처럼 순식간에 피 흘린 것과 몸에 상처 난 것이 깨끗해지며 왕의 복식이 척척 입혀져서 그들 앞에 우뚝 섰다면 말이다. 유대 대중은 물론 대제사장마저도 당장 주님 발밑에 엎드릴 것이다. 주님의 그 엄청난 위엄 앞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방금 전에 주님을 조롱했던 그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유대의 왕으로 모시고 현실 세상의 주인인 로마를 무찌르러 가자고 부추겼을 것이다. 또 49절처럼 엘리아가 다시 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주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예수님 대신에 엘리야가 총사령관이 된다는 사실을 빼고는 똑같은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 뜻에 완전히 상충된다.  

무엇보다 주님이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서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당한 것이 완전 허사가 된다. 로마 군병과 유대인들에게 모독을 당한 것 모두가 아무 의미가 없고 십자가는 한갓 매직 쇼로 전락한다. 무엇보다 지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한 것은 역사상 최고의 희극이자 사기가 된다. 역으로 따지면 예수님의 이 외침은 유대인들이 소원하고 기다리고 있던 현실적 정치적 경제적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고자 원하는 구원이 절대 아님을 가장 확실한 증명이 된다.

성전에 나타나지 않은 예수

예수님은 다시 올 엘리야가 아니다. 엘리야가 와서 구원해줄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님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죽음이었는데도 단 한 번도 변론을 하지 않았다. 예고대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후에 예고대로 스스로 3일 후에 스스로 부활하셨다.

이 땅에서의 생명의 시작과 끝을 당신이 주관하셨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자기가 실존케 하고 유지했다. 주님은 존재할 수 있는 근거와 능력을 스스로 갖고 있는 즉, 자존하는 하나님이다. 거기다 신자가 천국에서 거주할 수 있는 상태와 모습인 신령한 육신으로 부활했다.

그냥 육체적으로 죽지 않고 승천한 엘리야와 비교당할 차원이 도무지 아니다. 엘리야는 자기 밖의 제 삼의 힘 즉, 하나님에 의해 하늘로 들리어 올려졌다. 예수님은 스스로 당신께서 승천하셨다. 본문 50절의 “영혼이 떠나시다”는 우리말로는 분명하지 않지만 원문과 영어번역에는 행동 주체가 예수님인 능동체로 표현했는데 바로 그런 점을 강조하려는 뜻이었다.

그런데 주님이 부활하실 때에 그 장엄했던 헤롯 성전 꼭대기에 홀연히 등장하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던 모든 자들이 보고 따끔하게 찔리도록 하지 않으셨다. 그들도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소문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선 부활한 메시야로 속이려는 술수로 치부했다. 실제로 대제사장이 로마군병과 하속들에게 돈을 주고 그런 소문을 내라고 부추겼다.(마28:11-15)

보통의 유대인들은 십자가 죽음으로 예수 메시야 소동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고 간주했다. 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 받는 죽음을 당한 나사렛 이단의 교주로만 각인되었다. 지금도 그 사상에는 변함이 없고 아직도 이스라엘을 최고 강국으로 세워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께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훼파된다고 예언한 헤롯 성전에 나타날 수는 없었다. 대신에 나사렛 이단으로 몰려 잡혀갈까 두려워 숨어서 모여 있는 소수의 제자들 앞에 나타났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몇몇 아녀자들만 만나주었다. 겨우 40일 동안만 소수의 신자들과만 교제를 나누셨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어도 그 제자들의 현실적 위치는 전혀 풍요롭거나 형통치 않았다. 거기다 틀림없이 앞으로 더 큰 곤경과 심한 박해를 받을 것이 확실한 너무나 초라하고 가난한 상태 그대로 버려두고, 주님은 구름을 타고 영광중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럼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모든 이로 알게 하려고 당신의 역사를 간단하고 분명하게 보인다고 한 서두의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닌가? 주님은 마치 구원 받을 자의 숫자를 일부러 더 줄이려 한 것 같지 않은가? 예수님은 생업과 가족을 버려가며 당신께 헌신한 자들만 편애하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기준
    
주님은 삼 년간의 공사역 기간 동안 유대와 사마리아는 물론 헬라인들이 사는 데가볼리 지역까지 쉬지 않고 열심히 걸어 다니셨다. 도무지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이적을 많이 베풀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는 달리 모든 이들의 영혼에 찔림이 생기도록 권세 있게 가르쳤다. 십자가 사건을 모르는 유대인은 아무도 없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도 텅텅 비었다.

본문에 이어서 51-53절에는 더 확실한 징조들을 보여주었다. 십자가에 달린 후반 3시간 동안에도 흑암이 온 천지를 덮었다(45절) 그래서 이교도인 로마 군인이, 방금 전까지 예수를 그렇게 심하게 조롱했었던 자가 예수님은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분명하다고 인정했다. 하나님이 이 이상 어떻게 더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그 로마 군병이 예수님을 직접 대면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예수를 알고 믿고 따르는 데는 신학이나 교리를 아는 것과 무관하다.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온전히 수용하고 순전하게 믿으면 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기존의 종말사상과 유대주의 종교에 묶여서 그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를 보지 못했다. 특별히 하나님을 위하는 열성으로 뭔가 행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다 못해 그분을 거역 대적하게 되었다. 큰 참람 죄를 지은 것은 정작 그들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 자신의 전부를 드리며 온전히 순종해야만 그분을 온전하고도 깊이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이 외침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오직 두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된다. 본문의 유대인들은 그 외침대로 하나님이 예수를 버렸고 엘리야도 끝내 구원하러 나타나지 않았다고 간주했다.  

반면에 십자가상의 우편 강도는 달랐다. 그도 예수님 절규의 문자적 의미를 몰랐을 리는 없다. 바로 곁에서 들었기에 엘리야를 부르는 것이 아님도 알았을 것이다. 대신에 예수님과 한두 마디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지금껏 세상에서 도무지 얻지 못했고 차원이 전혀 다른 평강과 안식을 느꼈다. 죽음이 두려워 불안 초조 염려에 휩싸였던 것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특별히 이사야서 53:5의 말씀대로, 주님의 찔림은 자기의 허물로 인함이요 그분의 상함도 자기의 죄악으로 인함이요 그분이 징계를 당하자 자기는 평화를 누릴 수 있었고 채찍을 맞자 자기에게 나음이 임했다. 그 말씀 그대로 자기에게 실현됨을 성령의 간섭으로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직전에 예수님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약속을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어졌다. 내 죄에 대한 형벌을 저분이 내 대신 감당하셨구나, 정말로 저분은 지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제물로서 하나님께 바쳐지고 있다고 절감했던 것이다. 그는 골고다 현장에서 이 외침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추측컨대 그는 틀림없이 예수로 인한 감격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이 흘렸을 것이다. 그의 가슴 속에 흐느낌으로 넘쳤을 것이다. 베드로는 스승을 부인했던 그 비겁한 자기 존재에 대한 모멸감 때문에 통탄하며 절망에 빠져 심히 통곡했었다. 반면에 이 강도는 주님으로 인해 완전한 나음을 입었다는 감격으로 충만해졌다. 육신은 죽어가도 그 영혼에는 천국의 새 생명으로 가득 찼고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신생아 탄생의 울음이었을 것이다.

이 절규의 특이한 점은?

예수님의 이 절규에 특이한 사항이 하나 있다. 복음서를 통 털어서 주님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호칭한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는 점이다. 그 전에는 대중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가르쳤었다. 또 당신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주님을 일대일 대면하는 자는 주님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태여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공사역 기간 중에 제자들도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들 밖에서 역사하는 객관적 하나님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순전하게 믿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또 하나님과 재물 중에 재물을 주인으로 혹은 우선순위에 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생업과 가족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하나님을 주인 혹은 우선순위에 둔 것은 틀림없다.

그들은 유대인으로써 ‘쉐마’(신6:5) 가르침대로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의 메시야가 아니라고 조롱은 하지 않았지만 유대인 고유의 종교적 사상은 갖고 있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당신의 새 나라를 세우리라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승에게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때가 언제인지 계속 물었고, 또 그 때는 어떤 징조가 따를지에 관심의 초점이 모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그분의 약속과 율법과 성전을 소지했기에 그분께 제사를 드리며 도덕적 종교적 생활에 주력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자기들 쪽에서 할 바를 다했기에 더 이상 할 일은 없고 하나님더러 어서 빨리 엘리야를 보내어 로마의 압제에서 고통 받는 자기들을 구원 해내라고 떼만 쓰고 있었다. 제자들 또한 그런 종말관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쉽게 말해 유대인들은 “우리의 하나님”으로만 불렀지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부른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 또 그랬다간 아예 불경하다고 간주했다.  

예수님은 구세주로 유대 땅에 와선 유대인들의 그런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외되고 비천하고 가난한 자들과만 개인적으로 교제했다. 새로운 교파나 종교 단체를 조직하지 않았다. 마지막 십자가에서 유대인의 왕 행세를 했다거나 로마에 반역하려 했다는 억울한 죄목으로 고통과 수치 가운데 죽어가면서도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해선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이들이 들으면 하나님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는 것 같은 절규만 했다. 지금 예수님은 완전한 대속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당신을 모든 인간과 동격화 시켰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보는 모든 이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한 죄인으로 서서 그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라는 뜻이었다. 하나님을 멀리 했던 과거의 자기는 바로 사탄의 종으로 하나님께 거역 대적했던 존재였음을 깨달으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과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리고 실제로 자기 옛 사람이 완전히 죽어 없어지는 체험을 하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당신의 제자들더러 그 때까지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호칭을 “나의 하나님”으로 바꿔 부르게 하려는 뜻이었다. 예수님처럼 나의 아버지를 넘어서, 아빠, 나의 아빠의 관계로 이끌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 믿는 신자만 현실적 형통과 안일의 구원을 준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하나님은 예수 믿는 신자 각자의 심령을 안으로부터 변화시키신다. 그분의 역사는 인간 영혼의 깊숙한 내면에 임하며 그래서 신자로 성령이 내주하는 전으로 바꿔주신다. 인간의 안에서 주도하며 간섭하여 각 사람을 거룩하게 뒤집어 놓으신다. 인간의 밖에서 단체, 의식, 제사, 조직을 통해 역사하지 않는다.

신자의 바깥은 거룩하게 변화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게 하여 그 주위에 새 생명의 씨앗을 수십 배로 뿌려지게 한다. 누룩처럼 신자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서 십자가 복음이 번져 나가고 부풀리는 역할을 하게 한다.    

하나님에게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지 않겠다는 계획은물론, 그런 마음을 먹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 백성들이 전혀 거룩하게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외적인 여건만 바꾼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공동체는 하나님이 세우려고 바라지도 않았고 언약하지도 않았다.

죄악이 관영하는 인간 사회에선 로마를 제거하면 또 다른 그보다 더 강력한 로마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대신에 자신이 안에서부터 바뀌어 거룩하게 된 신자, 성령의 사람이 된 신자는 단 한 명이라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떤 세력과도, 그것이 얼마나 크게 융성하든지 간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자 속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모든 사악한 것들과는 얼마든지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다시 오기를 바랐던 엘리야를 보라. 그는 혼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당당히 맞서 싸웠더니 하나님이 불을 내려 승리케 했지 않는가? 본문 현장에 있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의 신자들 모두가 엘리야를 보내주어 통쾌한 승리를 맛보게 해주면 그 때 가서야 하나님께 경배하고 감사하겠다는 것이다.  

이 땅을 거룩하게 바꾸는 일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개인적 교제만 했다고 해서 그분의 구원이 개인의 구원에 머무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회와 세상을 개혁하여 거룩하게 하는 일은 신자 모두에게 맡겨진 소명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교회 조직이나 종교 세력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 한 명의 온전한 십자가 군병으로도 승리케 하고 세상을 더욱 거룩하고 진실하며 아름답게 바꾸신다. 그 일을 신자 한 명으로도 충분히 아니 차고 넘치도록 이루신다.  

크리스천의 역사를 되돌아보라. 인간 사회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결정적으로 선하고 거룩하게 방향 전환을 시킨 역사적 사건은 하나님께 평생 헌신한 몇몇 신자들의 순종과 순교에 의해 이뤄졌지 않는가? 노예 해방, 해외 선교, 가난한 아동 교육, 여성의 인권 신장, 인종 차별 금지 등등 그 예는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

객관적 공동체로서 인간 사회를 화려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일은 불신자들의 몫이다. 그들은 먹고 마시는 것이 풍요로워지면 자기 심령도 함께 풍족해질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도덕적으로 조금 깨여서 물질보다 정신의 풍요를 더 바라는 자들도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썩어빠진 자신의 인간적 의로만 이 땅을 거룩하게 바꿀 수 있다고 또 다른 착각을 하고 있다.

반면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도덕적으로 불공평하고, 종교적인 수치라고 오해한다. 이성적 수준이 떨어지는 저급한 자들과 종교적 광신자들만 따를 뿐이라고 치부한다. 자기들이 진정으로 살고 죽은 것이 그분과 그분의 십자가 은혜에 달렸을 뿐임을 꿈에도 알지 못한다.

신자는 그들과 다르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바로 본문과 동일한 절규를 외친 적이 있는 자다. 하나님을 몰랐던 자신의 지난 모든 삶이 헛되고 헛된 절망과 실패뿐이었음을 절감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했다. 단순히 하나님께 지난 실패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터트린 것이 아니다.    

정말로 스스로는 도무지 기사회생 할 수 없었다. 사방이 완전히 막혀서 출구 하나 없었다. 숨을 쉴 수 있도록 바람이 들어올 만한 바늘 틈새도 없었다. 그 가운데 하늘로 향한 작은 창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빛이 조금 새어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십자가상의 강도처럼 주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에 나를 생각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랬더니 주님으로부터 내일 나와 낙원에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고 그 약속을 확정적으로 지금도 소지하고 있는 자가 신자다.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를 모든 이에게 쉽고도 분명하게 드러내시되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야만 알 수 있고 또 역사하도록 하셨다. 십자가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과 아예 아무런 관계도 없다. 문제는 교회 안에도 본문의 유대인들 같은 신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종교적으로 행할 바는 다 행했으니 어서 빨리 엘리야를 보내어 자신들을 고통에서 건져내라고 아우성치는데 주님은 그런 자와도 아무 관계가 없다.

참 신자는 엘리야가 다시 와서 구원해줄 대상이 결코 아니다. 이미 주님이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다 이루셨다. 하나님의 구원이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니다. 엘리야처럼 바알 선지자들과 대적해야 한다. 혼자서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에 맞서 싸우며 얼마든지 당당하게 승리할 수 있다. 신자는 이 땅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소명을 받은 하나님의 동역자다. 그 소명에 충성하고 있는 한 하나님이 반드시 지키시고 인도하신다.

신자는 소속한 교회는 너무나도 당연하며, 다른 모든 공동체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사회를 새로운 이스라엘로 회복시킬 수 있다. 지금 그렇게 노력하고 있어야 하며 최소한 그런 인식이라도 있어야 한다. 이 거룩한 소명을 알지도 못한다면 자신이 받은 구원이 진정한 구원인지부터 다시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1/11/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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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 (마태복음강해 #254 - 마27:57-66) [1]

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 마태복음강해 (254) http://youtu.be/0118IV1svQQ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

바위를 터트리는 믿음을 가졌는가? (마태복음강해 #253 - 마27:51-56)

바위를 터트리는 믿음을 가졌는가? 마태복음강해 (253) http://youtu.be/FQxHP1k1Syc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하나님으로부터 진짜로 버림받은 적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52 - 마27:45-50)

하나님으로부터 진짜로 버림받은 적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52) http://youtu.be/GCJbzz19aj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신자가 신년에 반드시 계획해야 할 사항은? (마태복음강해 #251 - 마27:38-44)

신자가 신년에 반드시 계획해야 할 사항은? 마태복음강해 (251) http://youtu.be/Uc5ekqUC1Ug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마태 판(版) Passion of the Christ가 강조하는 것은? (마태복음강해 #250 마27:27-37) [1]

마태 판(版) Passion of the Christ가 강조하는 것은? 마태복음강해 (250) http://youtu.be/sHYlgb3sKac (클릭하시면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

예수 믿어 얻은 가장 큰 축복 (마태복음강해 #249 - 마27:23-26)

예수 믿어 얻은 가장 큰 축복 마태복음강해 (249) http://youtu.be/SlHawHa5DZA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온전히 믿고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8 - 마27:15-22) [1]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온전히 믿고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8) http://youtu.be/-ufaHw1PK-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때에 바라바라 ...

심히 기이한 유대인의 왕 (마태복음강해 #247 - 마27:11-14)

심히 기이한 유대인의 왕 마태복음강해 (247) http://youtu.be/RVwNg7fM8Po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

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 마27:1-10)

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http://youtu.be/qhSGponWju8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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