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창조 담화(Creation Narrative)
절실하고 시급한 제 2의 종교개혁
포스트모던 세계는 "한 사안을 두고" 사람에 따라 진리가 달라지거나(상대주의), 여러 개의 진리가 공존하는(다원주의) 입장에서 한참 더 나가버렸다. (절대적) 진리 자체가 아예 없다고 단정 짓는다. 이제는 인간이 문제 삼아 진지하게 고려해 볼 사안이라곤 자기가 소속한 사회의 실정법적(實定法的)으로 정당한지 아닌지 여부뿐이다.
현 세대의 사람들이 가장 혐오스럽게 여기는 대상은 절대적 진리를 알고 있다는, 아니 최소한 그런 진리가 확실히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반면에 가장 환영을 받는 대상은 보편적 진리란 아예 없기에 자기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한 남들이 무슨 짓을 하던 간섭, 판단, 정죄, 충고, 권면을 아예 하지 않는 자세다.
바꿔 말해 죄에서 구원 받으라는 십자가 복음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안개처럼 전혀 반향(反響) 없이 공중에 떠다니는 헛소리가 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절대적 진리가 있어야 그에 반(反)하는 것은 죄라는 인식도 생기는데, 그런 기준 자체가 실종되었기에 구원은커녕 죄마저 아예 없어져버렸다.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것은 절대자 하나님도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분의 실재(實在)가 있다가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인식 대상에서 완전히 빠져버렸다는 뜻이다. 더 이상 절대자가 인간의 사고, 말, 행동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완전히 없는 양 살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살 것처럼 보인다.
결국 공동체의 존속과 번영에 장애가 되는 것만이 죄가 되었다. 이제 도덕적 규범과 연관되는 죄(sin)라는 용어조차 사용하기 꺼리게, 아니 아예 사용하지 않는 정도가 되었다. 대신에 정치적으로 정당한지(Political Correctness) 그른지만 따진다.
정치적 정당성이란 새로운 용어가 언뜻 아주 고상하고 심오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인간이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겠다는 작정에 불과하다. 짐승들의 세계야말로 종족(공동체)의 존속과 번영만이 유일한 목표이지 않는가? 하기야 짐승에서 진화되었다고 철석같이 믿는 자들로선 당연한 논리적 귀결일 수밖에 없다.
현대인들은 마음 깊숙한 부분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에마저 귀를 막아버렸다. 이전에는 죄였던 행위들 대부분이 이젠 단순히 생물학적 심리학적 결점으로 치부된다. 알기 쉬운 예로 미국에선 매일 술에 취해 혁대로 자식을 때리는 아버지는 정신질환자로 분류되어서 납세자의 돈으로 정신병원에 보내져 치료를 받는다. 반면에 순수 훈육 목적으로 어쩌다 체벌을 가한 아버지는 형사범으로 분류되어 감옥에 가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양심(良心 Consciousness)이란 모든 자가 한 결 같이 살인, 강도, 간음 같은 짓은 잘못이라고 여기는 도덕적 의식이다. 또 모두에게 그런 동일한 의식이 생기는 까닭은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한 조상을 지녔기 때문이다. 도덕적 존재인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든 인간에게 부여한 그 형상의 잔재로 남은 것이 양심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양심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바로 앞의 세대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이 계시한 절대적 진리에 대해 믿건 안 믿건, 아니 인정하건 안 하건, 최소한 어떤 인간에게도 양심이 있다는 사실만은 인정했다. 이제는 양심의 성격을 상대적, 다원적으로 분류하다 못해 아예 양심의 실재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현세대에 남은 진리는 오직 자기중심성뿐이다. 자기에게 옳으면, 기분에 맞으면, 만족하면, 좋게 여겨지면, 편하면, 신나면, 남들과 차별지어주면, 자기도 모르게 끌리면, 아니 자기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모든 동기(動機) 내지 동인(動因)은 전부 진리다. 물론 그 반대는 죄가 아니라 비(非)진리다.
자기중심성은 필연적으로 단절과 분리로 이끈다. 자기부터 출발하기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해체가 이뤄져서 점차 더 큰 범위로 확대된다. 우선 본인부터 정체성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데다, 부부가 동상이몽이 되고, 부모 자식과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진정한 우정과 애정이 사라지고 사람과 사람을 튼튼히 이어주었던 끈들이 전부 다 풀어졌다.
현대인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관계를 맺고 사는 세대는 없었다. 그 수많은 관계를 묶는 견실한 이음은 도리어 눈 닦고 찾기 힘들다. 대외 관계는 오직 실용성 즉, 어떤 측면에서건 자기에게 유익한지 여부만 그 관계를 유지하는 근거가 된다. 상대의 유익을 위하기는커녕 상호 교통마저 사라졌다. 공적 관계에 진정한 자신을 일절 투여하지 않는다. 들판에 혼자 외로이 서있는 허수아비처럼 모두가 일방적, 표피적, 일시적, 현실적 실용성에 따라 만나고 헤어진다. 또 공적 관계를 떠나는 순간 곧바로 혼자서 자신의 안쪽으로만 자꾸 파고든다.
결국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동의할 수 있고 또 인간을 다른 모든 존재와 구별 지을 수 있는 의미, 가치, 목표가 완전히 없어졌다. 거대담론을 논하는 것 자체가 이미 고리타분한 헛된 짓으로 바뀌었다. 절대자 하나님이 없어지니까 진리가, 또 진리가 없어지니까 죄가 완전히 사라졌다. 남은 것이라고는 겨우 백년도 살지 못하는, 그것도 럭비공처럼 날마다 제멋대로 튀는, 개미 같은 인간 군상들과 그들을 조종해 자기 배를 더 채우려는 정치권력뿐이다.
세태가 이렇게 바뀐 데는 교회의 책임도 상당히 크다. 그동안 절대적 진리에 대한 절대적 헌신이 너무 부족했다. 어쩌면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서 실종되었다. 기껏해야 아주 값싼 복음만 성행하고 있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너무 오랫동안 전가의 보도로 써먹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선전하다보니 진짜로 그저 믿기만 하는 엉터리 신자들을 양산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선택과 그 계명대로 준행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의 공적과 의로는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에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철두철미하게 깨어지고 항복하는 고통이 앞서야 한다. 그리고 오직 예수만을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주인으로 삼는 헌신과 실천의 벅찬 승리도 따라야 한다. 성령의 인도를 좇아 절대적 진리인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죽고 사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 누구나 보아 알 수 있게 명확히 드러나야 한다.
그 동안 교회와 신자들은 “누구든지 일단 믿어만 보시라”는 전도 놀이에 너무 치중했다. 또 일단 믿었으니 그 다음에는 믿음의 보상만 요구하게 되었다. 십자가 구원이 절대적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라는 확신이 없으니 상대주의, 다원주의가 판치는 세태에 당당하고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 교회 안에서부터 그들과 영합하려고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자유주의자들마저 등장했다.
고래(古來)로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은 어차피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선악과를 범해 원죄를 저지른 내용이 바로 하나님을 없애고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 되겠다는 뜻이었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까지는 아무리 인간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려고 해도 그나마 교회가 절대자와 그분의 진리를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때로 행동이 따르지 못해도 최소한 성경이 진리임을 선포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믿고 따라야만 할 거대담론을 말하고 있는 유일한 책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이제는 기독교 스스로 그 거대담론을 퇴색, 변조, 실종시켜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천군만마를 얻은 양 신이 나서 하나님과 그분의 절대 진리는 없다고 설쳐댄다. 죄가 없으니 예수의 십자가 구원은 그야말로 박물관에 가야할, 아니 골동품 가게에 진열해 놓을 가치마저 없다고 큰소리친다. 그럼에도 기독교계는 스스로 그렇게 시인하고 들어간 원죄가 있어서 제대로 반론을 제기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제는 신자들이 성경이 완전한 진리임을 확신하여 그대로 따르는 것조차 큰 용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서두에서 밝힌 대로 현대인들은 절대적 진리가 있기에 그대로 따라 살고 있다고, 최소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를 가장 혐오하기 때문이다. 한 미국인 목사는 미국에서 성경을 휴대하는 것조차 헌법으로 금지하는 시대가 곧 올지도 모른다고 예언 했다. 실제로 벌써부터 죄를 죄라고도 말하지 못하게 되었지 않는가?
이런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신자들이 세상의 모든 비방, 멸시, 조롱을 무릎 쓰고라도 성경을 절대적 진리라고 외치는 것이다. 또 그 외침이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려면 실제로 성경대로 살고 있는, 예컨대 예수님 말씀대로 눈을 뽑고서라도 예쁜 여자를 보고는 음욕을 품지 않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반드시 보여주어야 할 때다. 이슬람이 지금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보면 이 말이 결코 종교적 과장, 강요, 협박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러기 위해선 우선에 성경의 진리로 돌아가는 것이 급선무다. 제 2의 종교개혁이 정말로 절실한 때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구원의 방도에 관한 것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대역죄인임을 분명히 인정한 바탕 위에서 이뤄졌다. 오직 가톨릭교회의 가르침대로 따라야만 구원 얻는다는 교리가 잘못되었음을 밝힌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교회와 그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해 놓은 절대적 진리인 성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앞으로 벌여야 할 제 2의 종교개혁의 모토도 동일하게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어야 한다. 단지 그 배경과 내용이 다를 뿐이다. 종교개혁 전에는 성경이 비록 왜곡되어 가르쳐졌지만 그 자체의 진리 됨은 의심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 왜곡을 고치는 즉, 죄에서 구원 받는 방도만 바로 세우면 되었는데 루터의 개혁으로 충분히 달성되었다.
이제는 죄가 존재함을, 절대적 진리가 있음을, 또 그 진리가 성경을 통해 인간에게 계시되었음을 반드시 밝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창조주 하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실종된 진리, 사라진 하나님을 되찾는 작업을 교회 안에서부터 당장에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은 여전히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되 값싼 복음이 아니라 죄와 타락이 철저하게 규명되어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 창조의 섭리와 위대함이 인간을 참 인간답게 만드는 유일하고도 절대적 근거임이 가장 먼저 뚜렷하게 강조되어야 한다. 창조, 타락, 구원, 완성으로 이어지는 성경의 거대담론이 모든 교회의 모든 활동에 일상적으로 논의되어져야만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주 미력하고 부족하지만 창조담화부터 시작해 볼까 한다.
3/12/2009
스스로 만든 얄팍한 생각들을 가지고, 그저 내 맘에 흡족한 교회, 내 가치 챙기기에 좋은 그런 교회를 지향했던 것, 진리의 말씀조차도 자신의 구미에 맞게 해석하여서 그것이 진리라고 굳게 믿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는 입술로만 시인하면 맘으로 믿은 것이라 간주하며,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그저 교회만 개혁되어야함을 외쳤던 이런 어리석은 제 모습을 되돌아 봅니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함을 외치면서도 그 가운데에 또 자신이 기준이 되어있는 부분은 없는지 조심히 살피며 값싼 복음이 아닌 죄로 얼룩지되 처절하리마치 얼룩져있는 이런 인간을 사랑하시되 어떻게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지를 매일 매일 더 배우길 소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