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거울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27))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원래는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의 현관 기둥에 새겨진 말로 누가 제일 먼저 말했는지는 불명하다. 소크라테스가 자주 사용했기에 마치 그의 말처럼 여겨질 뿐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어떤 자질과 능력을 가졌는지 올바르게 깨달아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뜻의 격언이다.
실제로 자신의 자화상을 스스로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그 삶과 인생이 달라지는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한정지은 자기 그릇의 크기를 넘을 수는 없다. 매사를 그 크기에 맞추어 판단하고 결정하여 시행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일방적 강권적 간섭이 일어나지 않는 한에는 그러한데 그런 간섭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있지 않는가?
만약 자신을 과대평가하면 허풍이 많아지고 지나친 교만에 빠지게 된다. 무슨 일을 하던 선무당이나 돌팔이가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주기 십상이다. 반대로 과소평가하면 열등감과 자격지심에 사로 잡혀 항상 우울해지며 매사에 무력해진다. 어떤 이가 100의 크기 밖에 안 되는데 자신이 200이라고 믿고 행동한다면 능력을 초과한 100만큼 감당하지 못해 난리날 것이다. 반대로 100인데도 50밖에 안 된다고 여기고 행동하면 50만큼 제대로 찾아서 누리지도 못할 것 아닌가?
물론 사람(man)마다 자서전을 기록하듯이 의식적으로 자신을 세밀하게 분석 판정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어떤 방식으로든 갖고 있기 마련이다. 또 그 이해는 반드시 자신은 동물과는 다른 인간(manhood, human)이라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결국 어떤 이라도 자화상을 바로 그리려면 인간의 일반적 속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결 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이 눈 코 귀나 손발의 숫자, 모양, 기능이 같으며 지정의를 갖고 있다. 한번 태어나서 한번 죽는 것은 모두에게 일반이며 그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해야 팔십이다. 나아가 누구에게나 왜 자신은 이 모습으로 이때에 이곳에 태어나 살아야 하는지, 왜 일생동안 환난과 곤고가 계속 밀어닥치는지, 더 거룩하고 아름답고 신나게 살 수 있는 길은 없는지, 왜 더 오래 살 수 없는지, 등등 온갖 질문들이 끊이지 않는다.
성경은 그 질문들의 답을 “인간은 하나님 형상을 닮게 그분에 의해 지어진 자”(God's image bearer)라는 데서 시작한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는 자화상은 당연히 하나님의 형상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반면에 인간은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된 존재라고 믿는 불신자의 자화상은 자연히 물질적 특성을 닮게 그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꿔 말해 진화가 생물교과서에서 배운 과학적 지식으로, 창조가 교회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 그칠 수는 결코 없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화상을 그릴 때에 반드시 필요한 밑그림 내지 배경이다. 이 둘을 무시 내지 배제하고선 캔버스가 없이 허공에다 그리는 것과 같아 결코 온전한 자화상이 그려지지 않는다.
더 중요한 사실은 진화 아니면 창조 둘 중 하나는 엄연한 사실(fact)이자 진리(truth)다. 하나가 사실과 진리라면 다른 하나는 지어낸 이야기이자 거짓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는 실제로 자화상을 그릴 수 있는 캔버스가 있는 셈이고 다른 쪽은 신기루 같이 캔버스가 없는데도 있는 것 같은 착각만 일으키게 된다. 아무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서 현명한 삶을 살려고 해도 아예 불가능하다. 그 인생은 허공을 치는 싸움이요 향방 없는 달음질로 끝날 수밖에 없다.
지금 창조를 믿는 자만이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라는 개념이 기독교라는 종교의 교리 문제로만 축소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진리일 수밖에 없는 창조와 진화 둘 중 하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가장 먼저 행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라는 것이다. 이 둘을 그저 과학적, 종교적 논쟁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곁으로 제쳐두는 자는 자기 부모와 생일도 모르는 셈이다. 아침마다 거울을 봐도 실상은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간 사상의 두 기원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해버리는 너무나 중요한 사항이 하나 더 있다. 인간이 지금껏 고안 개발해 낸 모든 철학, 사상, 문화, 예술, 제도, 관습, 법률, 종교 등이 오직 이 둘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자신이 그린 자화상에서 출발하지 않는가? 그럼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도 결국은 인간 정체성의 기원인 바로 이 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말이다.
아무리 합리적인 것 같고 심오한 사조라도 역으로 분석하면 궁극적으로 유신론 아니면 무신론에 가닿게 마련이다. 설령 객관적 사실만 기록한 역사나, 분석한 과학이라 해도 그것을 이해하여 실제 현실에 적용할 때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근본사상 즉, 이 둘 중 하나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문예부흥 때까지는 모든 사상과 조류가 대부분 유신론에, 비록 그 구체적 내용은 사람과 세태에 따라 달라도, 바탕을 두었다. 그렇지 못하면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취급당했다. 그러나 르네상스에서부터 지금까지 흘러온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무신론적 진화론에 바탕을 둔 사상만이 정론이 되었고 그게 아니면 종교적 억지로 치부한다. 심지어 유신론적 진술은 타인의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죄악으로까지 매도되는 판이다.
고대인들이 현대인보다 미개해서 유신론을 정론으로, 또 현대인이 고대인보다 지혜로워 무신론을 정론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아무도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차 강조하지만 둘 중 하나가 바른 근거라면 다른 하나는 가상이라는 점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영역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여 행동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양 쪽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박쥐같은 인간이요, 아무 관심을 두지 않는 자는 아예 인간이길 포기한 셈이다.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도 못하는 장님이다. 그럼에도 인간과 인생에 대해 다 알고 있는 양 큰소리치면 지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바보라고 스스로 소리치고 다니는 꼴이다.
진화와 창조를 비교 검토하여서 더 합리적인 쪽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해도 여전히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아래에 진술할 하나님 형상을 닮은 인간의 특성들이 과연 진화로 생성 보유할 수 있을지 철두철미 따져봐야 한다. 종교 사상의 타당성을 비교 검토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자기 자화상을 정확히 그려야 한다는 뜻이다.
혹시라도 하나님 형상을 닮은 인간상도 결국은 기독교인이 지어낸 것일 뿐 하나님과 직접 연관되는지 인간이 알게 뭐냐고 반발할 수는 없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이나, 인간이 고안한 사상이나,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창조와 진화라는 출발점에 도달한다. 말하자면 무신론자가 어떤 진술을 부인하는 실질적 이유도 그 내용의 합리적 타당성과 상관없이 자신의 자화상인 진화와 반대되는 창조에서 기원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비유컨대 아이가 김씨 집안에 태어나서 김씨 성을 가진 것이지 김씨라고 성을 붙여 주니까 김씨 집안에 태어난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요컨대 기독교에서 인간이 하나님 형상을 닮았다고 진술하는 그 자체도 사실은 하나님에게서 출발된 사상이지 인간 스스로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더 쉽게 말하면 물질에서 진화된 인간이라면 아예 그런 생각도 못한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진짜로 자기가 확신하는 인간 기원 위에 그려야만 진짜 자화상이 된다. 진화를 믿으면 철저하게 무신론자로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세상을 통치하는 절대자와 그분의 영원한 진리가 없으면 오로지 이 땅이 전부처럼 행동해야 한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자신의 안일과 형통만 도모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인생관이 된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세상 법률에만 저촉 안 되면 그만이다. 단 죽어서는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진짜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로 판명될 것이라는 전제는 갖고서 말이다.
하나님의 어떤 면을 닮았는가?
그럼 과연 인간은 하나님의 어떤 면을 닮았는가? 우선 확실히 해둘 것은 눈, 코, 귀, 얼굴, 손발 같은 외모를 닮았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 신체는 지구라는 외적 환경에 살아가기에 가장 적합하게, 또 하나님이 당신의 청지기로 세우겠다는 계획대로 완벽하게 창조된 결과다. 반면에 하나님은 영으로 영원토록 자존(自存)하는 분이다. 물질계에 한정될 분이 아니다. 그분의 외형적 실체는 너무나 협소한 인간의 지식수준으로는 도무지 짐작할 수조차 없다.
물론 천국에 가면 얼굴과 얼굴로 맞대면할 수 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인가? 이미 신체적 눈은 땅에서 썩어 없어졌다. 신령한 영적 실체로 변모하여 그분과의 직접적인 소통과 교제가, 그 구체적 모습은 여전히 감도 잡을 수 없지만, 가능하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렇다고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으로 바뀌어서, 그것도 인식 가능한 관념으로만 그분과 교제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이 땅과는 전혀 다른 영적 차원에서 그에 적합한 온전한 영적 실체를 가지고서 하나님과 교제할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외양적 실체를 닮지 않았다면 그분의 내면적 특성을 닮게 지어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하나님은 영원히 자존하시는 분이다. 썩지 않는 영이시다. 전지전능하시다. 어떤 면에서건 절대적으로 완벽하시다. 인자와 사랑에 무한하시다. 물론 죄와는 아예 공존할 수 없는 거룩한 분이다. 모든 천체를 운행하시고 생물에게 생명력을 부여하신다. 삶과 죽음을 주관하며 구원과 심판을 행하신다. 이런 등등의 면에선 인간이 감히 닮을 수가 없다. 신학적 용어로 인간과 함께 나눠가질 수 없다는 뜻으로 비공유적(非共有的) 속성이라고 한다.
인격성(人格性, personality)
그럼 피조물, 그중에서도 특별히 인간과 공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인가? 인간만이 그분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은 갖고 있지 않는 인간만의 특성을 따져보면 된다. 우선 첫째로 인격성(人格性)이다. 흔히들 단순히 지정의를 가진 것으로 인격성이라고 정의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상당히 부족한 해석이다.
동물들도 비록 수준이 낮긴 해도 지정의를 갖고 있다. 예컨대 개미는 먹이의 크기를 보고 운반할 수 있는 숫자만큼의 동료 개미를 불러 오는 지성을 가졌다고 한다. 도축장에 끌려 들어가는 소는 두려운 감정이 앞서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블레셋 사람도 송아지 젖을 아직 떼지 않은 암소로 언약궤 실은 수레를 운반토록 했다. 어미 소는 새끼를 걱정해 뒤를 돌아보기 마련인데 그러지 않는다면 여호와의 능력이 그 배경에 있다고 판단하려 했던 것이다.(삼상6장) 갈매기가 조개를 높은 곳에서 떨어트려 속을 꺼내 먹으려 하는데 잘 깨어지지 않으면 일부러 딱딱한 바위 같은 곳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떨어트린다고 한다. 기어이 먹이를 먹고 말겠다는 의지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들은 그 지정의를 오직 자기 종족의 보존과 번식에만 사용할 수 있다. 본능에만 따라 살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배가 고프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먹어야만 한다. 배가 고파도 맛이나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고 먹지 않는 인간과는 다르다. 인간처럼 건강, 정서, 종교상의 이유로 금식하는 법은 결코 없다.
바꿔 말해 인간 외에는 본능마저 거스를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다. 하나님에 의해 이미 프로그램 되어 있는 행동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그렇다고 동식물들이 아주 열악하고 불충분한 존재, 말하자면 창작의 실패작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각기 그 종류대로 완벽하게 만드시고 또 그 결과에 흡족해 하셨다. 한마디로 원숭이는 단지 하나님을 닮은 인격이 없다는 점만 빼고는 원숭이로 완전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자유의지란 자기 인생에 대한 장래 소망을 품고 그 꿈을 이룰 계획을 세워 시행하는 데 필요하다. 요컨대 자기가 행동한 일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근거다. 자의로 여러 대체 방안 중에서 택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정의를 소유한 여부가 아니라 생존과 번식의 본능을 넘어서 자유의지로 자신의 일을 결정 시행 책임지는 것이 인격성이다. 인간이 동물과 지정의적 측면에서 가장 다른 점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로 대변되는 인격성을 부여한 이유는 계속 강조하지만 이 땅을 당신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종족의 인간뿐 아니라 인간 외의 다른 종들과 그 환경까지 관장해야 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될 수밖에 없다. 이타적 동기로, 특별히 타 종족에 대해서,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이런 측면에서 두 번째 형상이 나타난다.
도덕성(道德性, morality)
인간이 스스로 생존하고 번식하는 것으로만 만족하면 인간일 수 없다. 짐승일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해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려야 할 존재다. 필연적으로 동일 목적을 이룰 공동체를 구성해서 함께 힘을 합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상호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는 특성을 부여했다. 감옥의 형벌 중에 가장 혹독한 것이 좁은 공간에 오래도록 혼자 버려두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에겐 독처하는 것 즉, 외로운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반드시 사랑을 주고받게끔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던 것이다.
반면에 동식물은 다른 종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간섭할 수 있는 수단도 없으며 아예 그런 지정의적 수준이 되지 못한다. 간혹 개미나 벌같이 공동체 사회를 만들어 엄격한 위계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있어도 여전히 자기 종의 한계 내에서만 그러하다. 또 그 자체도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그런 종을 유별나게 만들었을 뿐이다.
인간 외에는 어떤 동식물도 다른 종의 일에 관여치 못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흥미롭지 않는가? 만약 물질에서부터 계속 이어져 진화된 것이 사실이라면 다른 종과 관련되어 일을 도모할 수 있거나, 최소한 바로 직전의 종에 대한 어떤 애착의 여지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실상은 인간 외에는 오로지 약육강식의 생존게임만 있지 종들 간에 연결되는 애정은커녕 미련의 고리조차 전혀 없지 않는가? 다른 이유라곤 없다. 오직 각기 종류별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자기 종을 넘어서 다른 종까지 다스려야 한다면 필연적으로 자기 종만의 생존 번식 차원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모든 인간을 비롯해 다른 모든 피조물로부터 유익을 얻고 또 유익을 끼칠 수 있다. 그렇다고 원래부터 거룩하고 선만 행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기적 삶과 이타적 삶을 자유의지로 선택 시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 선택의 시금석은, 차후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바로 선악과 금령의 순종여부에 달렸다.
그렇다고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전 중립상태로 창조된 것도 아니다. 백지 상태로 있다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선해지고 불순종하면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공유함으로써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되었다. 도덕을 얼마든지 자의로 실천할 수 있었다. 비록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어도 처음에는 죄악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창조되었다. 정확히는 죄악이 부재한 상태에서 창조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는 그분의 선이 자신에게 더욱 충만히 임해지고 또 세상을 그분의 충만한 선으로 얼마든지 아름답고 거룩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는 것이 도덕성의 실체다.
한 마디로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선을 알고 행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비록 원죄 하에 태어나도 모든 인간에게 그 도덕성의 흔적이, 그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해도, 양심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께 순종하여 에덴동산을 아름답게 꾸몄던 영혼의 잔재다.
또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자연세계 안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고급한 지정의를 사용해서 피조물들 가운데 숨겨진 그분의 진선미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누구라도 피와 시체를 보면 두려움이 생긴다. 반면에 서로 섬기며 사랑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이미 인간 안에 심겨진 도덕성이 작동된 결과다. 우연히 진화된 인간이라면 모든 인간에게 그런 통일성과 일관성이 나타날 수는 결코 없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18,20)
성경은 인간의 내면에 하나님이 선악을 분별하는 도덕성을 심어주었다고 선언한다. 서로 시기하고 싸우면 화가 나지만 서로 섬기고 사랑하면 기쁨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자연 속에 세밀하고도 완벽한 질서와 아름다움이 충만히 내포되어 있기에 도무지 창조주의 거룩한 손길을 부인할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진선미를 모든 피조물 안에 심어주셨다. 그러나 다른 피조물은 그것을 반영(反映)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그 진선미를 당신 대신에 이 땅 위에 실현할 수 있는 능력도 받았던 것이다.
종교심(宗敎心 religious sentiment)
인간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인간 속에 보이고, 또 그분의 능력과 신성을 자연세계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면 그분께 감사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동물에게는 없는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다. 마땅히 경배 받아야 할 하나님이 따로 있음을 깨닫는 능력이다. 이 땅의 주인이 인간을 필두로 어떤 피조물도 될 수 없다고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살고 죽음부터 인간 스스로 주관할 수 없지 않는가? 동물과 비교해보라. 동물은 죽음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삶과 현실이 허무하여 스스로 자살하지도 않는다. 먹고 마시고 자면 끝이다. 물론 본능적으로 죽음을 예지하는 능력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한 방어 장치일 뿐이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따져보거나 그것을 관장하는 이가 따로 있음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다.
반면에 인간은 천둥 번개만 쳐도 아무 까닭 없이 가슴을 졸이지 않는가? 홍수, 지진, 화산폭발, 해일, 태풍 등이 일어나면 그 엄청난 위용 앞에 얼마나 두려워지는가? 또 사계절과 밤과 낮의 섬세하고도 신실한 규칙을 보라. 과연 그 모든 것이 우연히 생긴 것일까? 분명히 세상만사를 주관하는 이가 따로 있음을 조금만 따져 봐도 알 수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 그는 번개 빛으로 그 두 손을 싸시고 그것을 명하사 푯대를 맞추게 하시나니 그 울리는 소리가 풍우를 표시하고 육축에게까지 그 올라 오는 것을 표시하느니라 이로 인하여 내 마음이 떨며 자기 처소에서 떠나느니라 하나님이 기이하게 음성을 울리시며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그가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시나니 이는 그 지으신 모든 사람으로 그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욥36:26, 32-37:1,5,7)
세상의 모든 종족마다 나름대로 신을 숭배하는 의식은 다 있었다.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성경적인 의미와는 달랐어도 분명히 이 땅을 움직이는 제 삼의 힘이 있음은 인정했다. 참 하나님 앞에 큰 죄이긴 해도 각양 우상의 형태로 신을 만들어 경배했다. 어쨌든 인생 만사가 절대로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더라는 겸손한 고백을 한 셈이다.
나아가 죽음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유사 이래로 계속 행해졌다. 생로병사의 틀을 깨어보려고 모든 수단을 강구했다. 동시에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진지한 사색과 탐구가 이어졌다. 인간 존재와 삶을 영원과 이어보려는 소망을 가졌다. 구체적으로 인지하든 못하든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가려는 일종의 귀소본능의 발로라 말할 수 있다.
짐승에겐 조물주 내지 신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이 땅의 삶이 전부다. 가시적 물질계 안에 제한된 존재다. 생존과 번식만이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오늘 끼니를 때우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 배만 부르면 더 이상 사냥하지 않는다. 눈에 안 보이는 주관자가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 자기보다 덩치 크고 힘센 존재만 두려워한다. 지구 전체는커녕 다른 종을 다스릴 생각은 아예 없다. 죽음을 고민하지 않기에 당연히 영원도 사모하지 않는다. 요컨대 동물은 기도하지 않는다. 전혀 종교심이 없기 때문이다.
영성(靈性 spirituality)
문제는 인간이 그런 종교심을 가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닮은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절대자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 인정하거나, 그분을 두려워하는 정도로선 인간의 정체성을 설명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종교심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의 타락으로 파괴되고 남은 흔적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에 앞선 인간의 인격성과 도덕성도 사실 무신론자들도 인정한다. 진화에 의해 지정의가 고급하게 발달되어서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공동체를 형성하여 존속 발전시키려니 어떤 규율이 필요하기에 도덕률을 고안해냈다는 것이다.
공동체가 생기기 전에도 인간이 피를 보면 두려워지거나, 공동체 존속에 방해가 되지 않게 피해자에게 충분한 보상을 했음에도 죄책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인간 본연의 도덕성은 인정하지 않지만 말이다. 또 설령 공동체적 필요 때문에 윤리 규정을 인간이 제정한 것이라고 쳐도, 아예 도덕성이 전혀 없는 백지의 상태에서 과연 그 일이 가능할지는 여전히 해명하지 않는다. 어쨌든 인격성과 도덕성은 진화론자도 인간만의 특성이라고 친다.
마찬가지로 종교심도 여타 종교인들이나 심지어 불신자들도 인정한다. 종교를 규정하는 범주가 문제이긴 해도 말이다. 단순히 도덕률을 따르고 훈련과 수양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얻는 정도를 종교로 본다면 기존의 인격성과 도덕성만으로도 종교는 고안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자가 세상만사와 사후심판을 주관한다는 개념까지 포함하여 종교라고 볼 때는 인간에게 이미 내재된 종교심에 따른 것이다. 한마디로 기독교 외의 종교에도 인간의 인격성, 도덕성, 종교심이 부분적 혹은 종합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인간에게 심어 주어서 당신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리게 했다면 그 다스리는 동안 즉, 살아 있는 동안에도 당신과 인간의 소통이 반드시 필요하고 또 가능해야 한다. 사후 심판만 주관하는 종교적 하나님만으로 참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영성이란 그래서 도덕적으로 더 거룩하고 종교적으로 더 경건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초자연적 은사나 체험을 강조하는 뜻도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땅에 살아 있을 때는 아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죽은 후에 심판만 하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경배하는 정도라면 종교심만으로 충분하다. 이와 달리 인간에게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하며 언제 어디서나 소통이 가능한 관계를 이 땅에서부터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성이다.
다른 말로 인격성, 도덕성, 종교심이 하나님 형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셋은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고유의 특성이긴 해도 인간이 스스로 감지할 수 있는 일종의 자의식 즉, 피조물 고유의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개별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태생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반면에 영성은 반드시 그분과의 관계성이 전제된다.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아예 인식도 안 되는 특성이 바로 영성이다.
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최초로 인간을 창조했을 당시는 즉, 죄악이 들어와 타락하기 전까지는 종교성과 영성의 구분이 없었다. 자유의지로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끔 창조되었다. (자유의지니까 물론 고의로 배역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 에덴에서 쫓겨 나오는 벌을 받음으로써 원죄 하에 태어나는 인간에겐 그분과의 관계는 끊기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다. 말하자면 영성이 파괴된 흔적이 종교심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다.
불신자들도 인격성, 도덕성, 종교심까지는 인간 고유의 특성으로 본다. 그러나 영성이 타락함으로써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써 아담 이후의 인간에겐 그 셋도 왜곡된 상태로 남게 되었다.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를 믿지 않고는 그 삶과 인생이 허무하고 갈급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간의 정체성은 예수를 믿어 하나님과 화목 되면서 온전한 영성으로 복귀되어야만 올바르게 세울 수 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선 타락 담화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당신은 과연 누구인가?
사람들에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주로 어떻게 대답하는가? 자신의 직업이나 현재 하고 있는 일로 설명한다. 거기에 신체적 특성과 외모를 비롯해 학력, 경력, 가문과 소속되어 있는 여러 단체의 성격등도 거론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을 포장한 겉치레에 불과하다. 간단히 말해 직업과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자기 자신은 아니지 않는가?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그런 겉포장을 다 떼어버린 상태 즉, 존재 자체의 특성을 따지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욥1:21)라는 욥의 고백에 동의한다. 바로 그 적신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기 마련이다.(사40:8)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될 뿐이다.(잠31:30) 없어지거나 바뀔 수 있는 모든 특성을 다 제거하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변함없는 진짜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말이다. 이 질문에 답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죽으라고 자기 포장만 온갖 모습으로 바꾸다가 만다.
적신으로 나왔을 때의 인간 상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것과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된 것 둘 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절대로 둘 중의 하나다. 다른 하나는 절대로 아니다. 또 적신으로 돌아갈 때도 하나님의 품 아니면 썩어 없어지는 물질 중에 하나일 뿐이다.
누군가 비유했듯이 어떤 인간이라도 아침마다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볼 때에 발견할 수 있는 자화상은 “날개 달리지 않은 천사”와 “털이 빠진 원숭이”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어떤 때는 천사처럼 선하고 어떤 때는 짐승처럼 악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 본질은 일관되게 정해져 있다. 절대 변할 수 없는 문제다. 최소한 논리적으로는 그럴 수 없다. 그러나 타 종교인이나 불신자의 경우 실제로는 천사나 짐승 둘 중 하나를 번갈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영성은 완전히 제외한 채 인격성과 도덕성과 종교심만으로 인간을 한정 짓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귀하고 소중한 자녀로 회복되었다는 인식은 전혀 없고 수시로 죄를 짓는 추하고 더러운 모습만 자신 속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영원한 진리를 발견 못해 우왕좌왕 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모순이지 않는가? 인간은 물질에서 출발해서 물질로 돌아간다고 철석같이 믿는 자들에게, 인격성은 그렇다 쳐도, 도덕성과 종교심이 왜 필요한가 말이다. 도덕과 종교를 물질에다 장식해봐야 어떤 의미와 가치가 생기겠는가? 가장 진화된 원숭이에게 교회나 절에 가자고 한들 꿈적이나 하겠는가? 아니 무슨 말인지도 모를 것 아닌가?
신자는 달라야 한다. 비록 자신의 내면에 죄의 본성이 남아 때로는 죄의 법에 사로잡혀가는 일이 있더라도 아침마다 거울을 볼 때에 발견하는 모습은 평생을 두고 한결 같아야 한다. 인격성, 도덕성, 종교심은 물론 영성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본래 모습으로 회복된, 최소한 그런 열망을 가진, 하나님의 너무나 소중한 자녀의 모습이어야 한다.
거울에 비록 털이 빠지긴 했어도 원숭이만 보는 자는 원숭이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이 땅에서 자신만의 풍요로운 생존과 번식만 추구할 것이다. 반면에 날개 없는 천사를 발견하는 자는 천사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며 하늘의 거룩한 보배를 이 땅에 옮겨와 심는 것이 인생의 최우선 목표로 바뀔 것이다.
당신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예수님으로 인해 창조 당시에 보유했던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회복된 자인가? 그 형상이 무엇인지도 아직 모르며 단지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죄를 사해 구원 준다니까 예수를 믿기만 한 것인가? 혹시라도 진화가 더 인간의 기원으로 타당하다고까지 여기지는 않는지?
정말로 자신이 짐승과는 다른 인간이라고 자부한다면, 영성의 회복은 몰라도, 최소한 인격성과 도덕성과 종교심이 과연 진화로 생길 수 있는지 곰곰이 따져 보아야 한다. 그 반대로 진화가 정말 옳다고 확신한다면, 인격성은 몰라도, 도덕성과 종교심이 과연 인간에게 필수적인지도 함께 따져야 한다. 자기 자화상을 매번 천사와 악마 둘 중의 하나인줄 헷갈리기에 그렸다 지우고, 지웠다 그리면서 평생을 마칠 수는 없지 않는가?
3/19/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