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논의에 마지막으로 덧붙여
그간에 올린 십일조에 관한 제 글에 대해 여전히 그 대의(大意)에 대해 조금의 오해가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충분한 소통이 되지 않도록 적은 저의 전적인 불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성경 해석상의 의견 차이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방문자님들 중에도 댓글을 올려 주신 두 분처럼 혹 오해하거나, 혹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다고 제 의견에 다 동의해야 한다는 뜻은, 그렇게 될 수도 없지만, 결코 아닙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십일조는 십자가 복음의 핵심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 사람의 생각이 글로 표현되어질 때는 그 생각이 백 % 완벽하게 다 드러날 수는 없습니다. 또 남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어질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렇다고 미주알고주알 다 쓰다보면 오히려 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생략, 강조, 과장, 비유, 예증, 비교 등의 기법을 사용하다 보면 어느 부분에선가 반드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 부작용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항상 어떤 논의를 할 때는 그 주제와 범위 등을 먼저 합의해서 규정지어 놓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글의 서두에서 나름대로 주제와 범위를 밝혔고, 또 마지막 결론에선 십일조 존속론과 폐지론 양쪽의 공통분모까지 서술했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전한 논지의 요체는, 십일조는 이미 믿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많은 통로 중의 하나이므로 여전히 교회에서 권면 장려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의 율법 중에 도덕률(신앙공동체에 관한 계명을 포함해)을 제정하신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기에, 십일조도 제정할 당시의 하나님 뜻을 잘 헤아려서 그대로 정당하게 운용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시 제 의견을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 주제와 범위를 정한다고 했지만 결정적으로 빠트린 부분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아가페님이 올려 주신 댓글의 내용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미세한 차이에 대해 제 생각도 간단히 더 나눌 필요가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자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당사자 간의 소통을 증진하고 성경 해석의 폭을 더 넓히자는 뜻입니다.
십일조의 명칭과 의미
모든 논의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중요 용어의 뜻부터 확실히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여러 오해를 불러일으킨 근본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서문에서 밝혔지만 “사랑 그리고 편지”님의 댓글에서 논의된 부분을 중심으로 변증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성경문답 사이트에 오래 전에 올린 글을 참조해달라고 했으니 어느 정도 제 생각을 알고 있으리라 지레 짐작한 것도 불찰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막상 십일조 제도가 존속해야 할 이유만 잔뜩 늘어놓은 셈이었습니다. 십일조라고 말할 때에는 어떤 의미이며, 또 십일조 제도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것은 이런 저런 내용을 뜻한다고 제일 먼저 밝혔어야 하는데 그 부분을 통째로 빠뜨린 것입니다. 이미 늦었지만 다시 그 작업부터 한 후에 아가페님의 댓글에 대한 의견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십일조라는 용어에는 항상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됩니다. 레위인의 기업을 대신하는 것과 구제에 쓴다는 두 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일조를 제정한 하나님의 근본적 목적입니다. 십일조 용어의 두 가지 의미란, 1) 십일조를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의미와, 2) 실제로 헌금을 내는 형식의 둘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십일조 제정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레위인의 기업 보충용, 백성들의 감사 축제용, 가난한 자의 구제용입니다. 또 유대인들이 십일조 명목으로 성전에 드린 것을 합치면 숫자적으로는 10%가 넘습니다. 감사축제용은 소산의 1/10을 먼저 바친 후 나머지 9/10의 1/10을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라고 하면 그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그렇다고 십의 2조, 3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남은 것 즉, 자기가 현재 가진 것의 10%를 계산한 것이기 때문에 십일조라는 명칭에는 여전히 타당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십일조의 정신은 살아 있고 현재도 그 제도가 존속해야 한다고 말할 때는 바로 교회가 상기의 용도로 따로 모금해서 또 그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십일조가 가지는 내용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10%의 계산법을 아예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십일조의 두 번째 뜻은 현대 교회에서 자기 수입의 10%를 헌금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계산법을 여기서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컨대 매 주일 내는 헌금 외에 따로 내든지 네 주로 나눠서 내든지, 세전 혹은 세후 수입으로 계산해 내든지, 어쨌든 자기 수입의 10%를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뜻을 갖고 그렇게 시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간혹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표현을 두고도 그분은 돈이 필요 없으니 교회에 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지만, 이런 문제까지 논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우리말 표현상의 통용되는 용례와 또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관점에서 단순하게 이해하면 됩니다.)
따라서 제가 신자의 믿음이 성숙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기에 교회는 십일조를 권면, 장려할 수 있다고 말할 때는, 수입의 10%를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 드린다는 그 형식적 의미도 당연히 내포되어 있습니다. 물론 반드시 십일조 제정의 목적대로 교회가 수행해야 함을 전제로 한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구태여 두 의미로 구분 짖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 글의 십일조라는 용례에서 그 본래의 제정 목적과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의미는 쏙 빠진 상태에서 신자 된 의무로서만 십일조를 꼭 해야 한다는 의도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반드시 구약 율법의 형식대로만(단순 10%가 아닌) 해야 한다는 의미도 당연히 없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구제의 뜻을 어떻게 살려야 하는가?
이쯤에서 상호 소통을 위해서 간단히 다시 정리해봅시다. 십일조 제정의 뜻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 거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목회자 사례비 용도에 대해선 부분적 의견 차이가 있고 감사축제 용도도 새로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에 그 둘은 제외하고 구제라는 한 가지만 따져도 그렇습니다. 또 그 계산법이나 바치는 물건들이 구약 율법의 방식과 완전히 동일해야 된다고도 아무도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 남은 것은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구제 목적을 수행하느냐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제 의견은 십일조(순수입의 10%를 바침)가 그 목적을 수행하는 아주 좋은 방안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전교인에게 강제 징수하듯이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일조 제정의 뜻을 잘 가르쳐 자원하는 신자에 한해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게 해야 합니다.
원하는 자만 기쁨으로 하면 되는데도, 교회가 십일조를 권면 내지 장려해야 한다고 말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신앙의 모든 행위는, 심지어 하나님이 성경에 명령으로 주신 것도, 강제성을 요구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강제로 하는 것은 이미 신앙행위가 아닙니다. 또 권면, 장려라는 단어 자체가 벌써 자율성을 함의(含意)합니다. 말하자면 아무리 봉사, 전도 같은 것이 신자의 자율에 맡겨져도 교회가 권면 장려해야 하는 것과 같은 성격이라는 뜻입니다.
또 현대 교회들이 구제에 거의 관심을 쏟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구제에 관한 규례들의 제정 의미를 당시 상황과 연결해서 가르치고 또 현재 여건에 적용시켜 그 뜻을 계승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십일조도 그 안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것만 수시로 강조하거나 어떤 의도를 갖고 그래선 안 됩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거나 성경에서 그런 부분이 나오면 가르치고 장려해야 합니다.
나아가 현대 교회에 헌금의 종류가 너무 많습니다. 온갖 명목으로 도에 지나치게 강요하다시피 합니다. 심지어 재산을 저당 잡히거나 남에게 빌려서라도 하라는 권면(?)까지 등장합니다. 그 많은 헌금 중에 구제 용도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선, 역으로 따진 것이지만, 모든 명목을 다 없앨 필요도 있습니다. 십일조라는 이름이나 구제라는 용도마저 사실은 구태여 밝힐 이유는 없습니다. 주일 예배 시에 신자가 원하는 대로 내게 해야 합니다.
그럼 그 뜻만 가르치면 되지 교회가 왜 구태여 십일조를 시행토록 해야 하느냐 반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미 올린 글에서 밝힌 대로 신약 성경에 명시된 금지가 없고, 예수님도 분명 그렇게 명했고, 초대 교회도 시행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구약과 똑 같은 방식으로 시행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에 관해선 아래에 다시 조금 더 보완하겠습니다.)
또 누차 말씀 드린 대로 현대 교회에선 구제가 너무 등한시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제 기능이 현대에 와선 정부나 사회단체에 넘어갔기에 구약시대만큼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공동체가 안팎으로 봉사해야할 측면이 여전히 많은 데도 현대 교회는 자기 조직체의 운영과 성장을 위한 전도에만 너무 신경을 쏟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와 교회의 신앙 중심을 봉사와 구제 쪽으로 일부 돌리기 위한 교육 뿐 아니라 실천 측면에서도 십일조는 아주 유용한 제도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구제나 지역사회 봉사라고 딱 부러지게 가르치고 시행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신자는 하지 않거나, 관심을 거의 쏟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십일조를 과도하게 권면 장려해도, 부족하게 외면 방관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온갖 종류의 헌금이 많은 것을 선의로 해석하자면 그 동안 잘못 운용한 폐해가 너무 많았으니까 오히려 구체적 명목을 붙여 오직 그 용도로만 쓰게 하려는 의도도 작용한 것입니다. 십일조를 현대 교회도 시행하자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구제, 봉사 목적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종의 최저 가이드라인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십일조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여러 통로 중의 하나가 된다는 의미도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구제, 목회자 사례, 교회 운용, 등의 용도를 따지기 이전에(따지지 말라거나 그래선 안 된다는 뜻이 아님), 신자 본인이 재물에 굴복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순전히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교회가 성경적 용도로 헌금을 투명하게 운용한다는 절대적 전제하에 십일조를 포함한 모든 헌금의 명칭을 아예 없애버려도 신자들은 한 달 수입의 10% 정도는 자진해서 헌금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으며.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서 보듯이 분명 구제에 금액이나 퍼센트로 최소 혹은 최대의 제한을 전혀 두지 않은 편입니다. 만약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한 달에 10 %를 헌금해도 오히려 잘 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십일조 존속과 폐지는 같은 내용이다.
순전히 실천적인 면만 따지면 십일조 명목을 붙이느냐 떼느냐는 지엽적인 문제로 사실상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가르치되 강요하지 않고 신자의 자의에 맡기나(모든 신자의 필수적 의무가 아니라는 뜻임), 십의 십조가 되더라도 자신의 여건에 따라 액수에 관계없이 내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나 결과는 대동소이하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헌금하는 실제 금액은 오로지 이미 형성된 자신의 십일조에 대한 개념과 현재 형편에 달렸을 뿐입니다.
물론 십일조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하면 교회 제도의 하나로서 가르친 것입니다. 또 그러면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죄책감이 드는 반면에 성실히 한 자는 믿음의 표시로 자랑하게 될 것이라는 염려와 부작용이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점은 교회의 다른 모든 신앙행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공부, 기도모임, 전도, 봉사, 등등 해당되지 않는 분야가 없습니다. 또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느냐는 속담대로 염려나 부작용이 생긴다고 권면, 격려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성경적으로 교회를 운영하여 폐해를 최대한도로 줄이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십일조가 몰고 오는 부작용에만 유독 말이 많은 것은 돈이 갖는 민감성과 폭발성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돈과 연관해선 누구나 자랑 아니면 수치의 둘 중 하나의 극단적 반응을 나타내기 쉽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헌금이나 십일조를 한 자의 명단을 주보에 올리거나, 공개적으로 거명 칭찬하는 일은 안 해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은밀히 행하면 됩니다. 담임 목사도 관여해선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정말로 믿음이 신실하고 입에 철통 자물쇠를 채운 자들로 재정 담당자를 시켜야 합니다.
돈에 민감성과 폭발성이 가장 많다는 것은 교회는 성도들에게 돈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하나님과 재물 중에 한 주인만 섬겨야 한다고 강조했듯이, 단적으로 말해 성경이야말로 하나님과 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돈을 주인으로 삼지 않기 위한 교육을 위해서도 십일조 제도가 아주 유용하며, 또 하나님이 처음에 그 규례를 제정한 목적에도 분명 그런 뜻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논의의 초점과 범위가 아주 더 좁혀졌습니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헌금을 투명 공정하게 거두어서 봉사와 구제활동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럼 남은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십일조라는 제도를 운용하는 것이 좋은지 안 좋은지 여부뿐입니다. 또 십일조를 운용하든 안 하든 각기 장단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존속이든 폐지든 각기 어떤 장단점을 취하고 버리느냐의 문제로 제한될 뿐입니다.
그러나 십일조 제도를 존속시켜야 한다고 해서 모든 신자의 헌금 상태를 정기적으로 점검 독려(독려와 장려는 의미의 차이가 있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십일조 하지 않는 신자를 불러서, 야단과 강요는 당연히 해선 아니지만, 통보 지적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설교나 성경공부에서 정확하게 의미를 가르쳐 수행할 것을 권하고(권면), 또 그 장점을 분명히 밝혀서 이왕이면 성실하게 하라고 권하라는(장려) 것입니다.
아가페님과의 성경 해석의 차이
아가페님의 댓글에서 그 결론 부분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십일조를 교회에서 권면, 장려해도 되는지 여부에선 그 결론에서도 다소 불명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저와의 의견 차이가 있다면 바로 그 부분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차이를 규명할 겸 해서 댓글에서 제시해 놓은 성경 해석상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 사역자의 마음 자세
“사역자의 마음 자세는 빚진 자로서 하나님의 사명이므로 아무 보수가 없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자진해서 해야 한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진리입니다. 현대 교회의 모든 사역자가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역자의 자세가 그렇다는 것과 교인들이 헌금과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알다시피 생업을 이어갈 수단이 없고 오직 성전에서만 사역을 해야 하는 레위 인에게 하나님은 백성들의 십일조로 생계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물질에 시험 들지 않게 하고, 재정적 부정을 저지르지 말며, 오직 제사장 직무에만 충실 하라는 뜻입니다.
율법의 그 기본 원리는 바울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13,14절)
그런데 잘 알다시피 전반 13절은 십일조 받는 제사장들에게만 해당되는 예로 든 것은 아닙니다. 신약시대의 사역자도 얼마든지 사례를 받을 수 있고 심지어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성전의 예를 든 것뿐입니다. 성전제도가 폐지되었으니 그 원리마저 함께 폐지되었다는 뜻은 전혀 아니고 신약시대에 적용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또 바울이 말한 사역자의 자세는 십일조를 바치는 신자와는 별개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역자 개인의 입장에서도 그 마음 자세와 실천하는 현실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비량 선교가 가능하거나(최근의 전문인 혹은 비즈니스 선교처럼), 다른 직업을 갖거나 재산이 많아 생계 수단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Full time사역자는 당연히 사역하는 공동체나 파견한 기관으로부터 사례를 받아야 합니다. 또 오직 기도와 말씀에만 전념하기 위해선 오히려 사례를 받는 것이 더 좋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바울의 가르침대로 따른다고 나는 절대 사례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사역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게 한다고 잘못은 아닙니다. 일단 그렇게 선언했으면 평생을 두고 그렇게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바뀌는 경우도 많고, 자칫 복음의 장애가 되는 역설적인 경우가 어쩌면 더 많이 생길 수 있음도 감안해야 합니다.(예수님 말씀처럼 함부로 맹세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마음의 자세는 어디까지나 마음의 자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비량으로 사역하든 Full time 사례를 받든, 재물에 흔들리지 않고 부정을 저지르지 않아서 복음 전파에 방해만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이 그렇게 했다고 해서 초대 교회의 다른 사도들이 다 그랬던 것이 아님도 이미 제 글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요컨대 본문을 초대교회 당시에는 십일조를 시행한 것이 아닐 것이라는 해석에까지 연결시킬 유력한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기록이 안 되어 있어서 두 가지 상반된 입장으로 나뉠 때에 해석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당시의 모든 문화, 관습, 법률, 전통, 등을 함께 감안해서 개연성이 더 많은 쪽의 손을 들어 주어야 합니다. 두 해석을 당시 사정에 대입하여서 좀 더 자연스런 쪽을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성전은 몰라도 기독교 공동체에서 구약 식으로 십일조를 모금 운용한 것은 당연히 아닐 것입니다. 말하자면 감사축제용으로 첫째 십일조 드리고 남은 것의 1/10을 더 바쳐야 했다든지, 제 삼년과 육년 째에 구제용도로 그 둘째 십일조를 대체했다든지 하는 식으로는 시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시행하는 십일조 제도도 당연히 그러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 중에는 첫 소산의 십의 일을 바치는 자는 많았을 것입니다. 또 제대로 바치지 않는 자들도 그런 규례에 익숙해 있어서 그 헌금으로 사역자 사례를 드리는 일에 대해 아무도 반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십일조의 정신과 제도가 부인되고 시행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쪽과 십일조의 정신과 제도는 여전히 존속하여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을 것이라는 쪽에 어느 해석이 당시 상황에 더 적합했을지 판단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런 판단을 위해서 십일조 폐지론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초대 교회에서 십일조 정신은 오히려 더 강화되고 특별한 경우가 생기면 자진해서 헌금한 것은 분명 맞습니다. 또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에선 전 재산을 헌납하여 서로 나눠서 통용했기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옳습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에서 보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는 오늘날도 실제로 그대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쓰나미, 지진피해, 북한기아 돕기 등의 특별 헌금을 하고 있으며, 비록 구약만큼은 못해도 장학금과 구제 용도의 예산을 짜는 교회도 많습니다. 또 제가 잘 아는 장로님 부부는 두 가정이 서로 전 재산을 팔아 한 집에 살면서 자비량으로 선교, 전도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초대 교회의 본을 보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공동체를 이룬 것은, 자진해서 전 재산을 헌금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 특별한 예외로서 지금뿐 아니라 당시에도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었습니다. 일반적 사례가 아니라는 것은 그 경우에만 해당되는 특수한 사정과 가르침은 배워서 참조하되 신앙생활의 지속적 원리로 채택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뜻입니다. 또 특별한 예외라는 것은 교인이 전 재산을 팔아서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약 교회의 초기에는 예수님이 당대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사도들까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것이 예수님 말씀의 해석상의 잘못임을 사도들도 나중에 깨닫게 되고 또 성경에 그런 과정들을 보여줄 수 있는 기록들이 나옵니다. 가장 분명한 예로 바울조차 비록 개인적 의견이라고 했지만 재림이 임박할 것으로 알고 처녀는 가능한 결혼하지 말라는 권면을 했습니다. 나중에 자신의 의견을 바로 잡고 잘못된 종말론자들을 꾸짖었고 또 그런 꾐에 넘어가서 일하지 않는 자는 애찬에도 참여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착각으로 인해서 초대 교회 중의 일부가 일시적으로 완전한 공동체 생활을 한 적은 분명 있습니다. 물론 그런 착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실수이긴 해도 잘못은 아닙니다. 초대 교회에선 후대의 잘못된 종말론과는 달리 진정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뜨겁게 열망했기에 오히려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만의 전지전능하신 절대적 섭리로 그런 착각마저 들어 쓰셔서 당신의 뜻을 밝혔고 또 모든 신자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성경에 기록시켰습니다. 후대의 잘못된 종말론에 대한 경종을 울리며, 나아가 완전한 공동체 생활이 이상적인 목표는 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시행 불가능하니까 (가능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로 완전한 신정국가로 삼는 것이 이상이지만 왕정국가로 허용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처음 계획이 잘못되었거나 완전치 못해 수정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체질이 진토임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 물든 본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어도 죽을 때까지 살아 있다는 것을 감안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 생활이 일차로 유대 지역에 성행(?)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큰 기근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그 중에 이미 전 재산을 팔아 헌납한 자들로선 더욱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각 지역의 교회들에서 부조를 내어 도와주기로 했습니다.(행11;27-30) 또 유대지역에서부터 큰 핍박이 일어나 천하 각지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신자들이 온전한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사는 것은 이상적인 목표이지만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신자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죄의 본성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감안하신 것입니다. 또 당시에 유대에만 모여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러 갈 생각을 않으니까 강제로 흩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앞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길 이단 종말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교인들의 전 재산을 헌납토록 하는 잘못에 대한 사전 경고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바나바나 초대 교회 신자들이 전 재산을 자진해서 헌납한 것은 사도들의 꾐에 넘어간 것이 아니기에 그 성격이 다릅니다. 단지 헌금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사도들이 평소에 십일조의 권면을 하지 않았다고 단정 지을 확실한 근거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그런 공동체를 금지시키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려면 공동체 생활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부족합니다. 예컨대 퀘이크 교도들처럼 생업이나 사유재산을 다 포기한 완전한 공동체는 자영(自營)하기에 바빠서 외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그들의 진리 증거는 오직 자식들에게만 적용되고 또 전도도 후손을 많이 낳는 길이 최선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의 공동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오늘 날도 하나의 이상으로 삼아 그 정신을 본받아 현실적으로 가능한 분야에 한해 실제 적용해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십일조 제도의 존속도 그런 의미에 속합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꼭 이루어야할 실제적 목표라든지, 십일조 제도가 초대 교회에선 시행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의 근거로는 많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기독교의 여러 부조리에 실망한 칼 마르크스가 바로 공산주의 이론을 고안하는데 사도행전의 이 기사가 일부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길 없지만 어쨌든 국가적 공동체를 지향한 공산주의 이론은 이상에만 머물고 현실적으로는 무참하게 실패했지 않습니까? 그는 하나님과 다른 인간에 불과한지라 인간의 죄성을 감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두 가정의 그 공동체도 몇 년을 시행하다가 현재 도저히 서로 시험에 들어 사이가 나빠지기 전에 그만두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아나니아 사건은 교회가 공동체적 이상을 지향하고, 상호 구제에 힘쓰며, 성령을 속이지 말라는 일차적인 뜻 외에도 위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를 향한 종말론적 섭리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초대 교회 중의 초기에 잠시 있었던 모습으로 모든 시대와 상황에 적용되는 일반적 신앙 원리로 삼을 수 없다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헌금과 관련해선 제도나 액수에 관계없이 원하면 십의 십조라도 자진해서 해야 한다는 원리는 분명 있지만 십일조 존속과 폐지에 직접 관련지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 초대교회의 후기에는 즉, 재림이 당장에 있을 것 같지 않다고 깨달아 완전한 공동체보다는 지역교회로(가정 교회의 모습이었던 조직체 교회든 간에) 모이기 시작할 때의 상황은 어떠했겠습니까? 여전히 핍절하는 가정이 있었고 구제의 필요성을 느꼈을 텐데 그 때에 어떻게 대처했겠습니까?
한국이 보리 고개에 굶어 죽는 자들이 많이 나온 핍절한 시대에 일부 농촌 교회 성도들이 성미(聖米)를 십일조로 바쳤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따른다는 점도 있었지만, 당시 농촌은 곡식 농사가 주였기에 추수하여 벼나 보리를 시장에 팔기 전까지는 돈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사계절로 다양한 영농법을 개발하기 전이었습니다. 자연히 쌀로 헌금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의 생계도 물론이지만 열 가정 중의 한 가정은 굶어 죽는 일을 면할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또 그 제도를 애굽의 요셉처럼 잘 운영했으면 춘궁기를 교회 전체가 이겨내는 방도도 충분히 되었을 것 아닙니까? 당시 상황으로는 성미의 십일조는 잘만 운행했다면, 구약 율법대로 하느냐 안 하느냐를 떠나서, 너무나 좋은 제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십일조를 제정한 근본 뜻이기도 합니다.
당시 성미제도를 시행하지 않는 농촌 교회들이 만약 구제를 했다면 어떻게 운영했겠습니까? 당연히 신실한 부농 신자는 자진해서 많이 내고 가난한 자는 참여도 못했을 것입니다. 자원하는 경우에 맡겨도 여전히 상처 받거나 시험 드는 가능성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교회 전체가 잡음 없이 공평하게 구제를 감당하고 이왕이면 모든 신자로 구제에 참여시키려면 십일조를 시행하되 자율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제도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은 사정이 다르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핍절한 자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세계적 불경기로 우리 세대에서 최고로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운동을 벌립니까? 월급 인상을 금하고, 보너스를 반납하고, 심지어 초임을 동결 내지 줄여서 일자리를 나눠 갖자는 정책을 시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세계적 춘궁기에 세상마저 일종의 십일조 운동을 벌리고 있는 셈입니다.
교회가 먼저 제정 시행한 아주 좋은 제도를 또 성경에 분명한 금지가 없고 오히려 강조하고 있는데도 교회 스스로 구태여 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서서 반대할 일은 아닌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하게 하되 그 부작용을 막아야 한다는 것은 입이 아플 정도로 강조해도 모자라지만 말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교회가 안팎으로 구제 봉사를 하는 것은 모든 시대 모든 교회의 절대적 소명입니다. 문제는 그 방법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천 년 전 초대교회의 중근동지역 현실적 여건과 수십 년 전 보리 고개 시절의 한국과 비교해 어느 쪽이 나았을 것 같습니까? 또 완전공동체가 실패로 끝났을 때에 구제를 어떻게 시행했겠습니까? 물론 여전히 전 재산을 헌납하는 신자, 또 판매한 대금의 일부를 속이는 신자도 있었을 것이며, 구약 식으로 바치는 자도, 도저히 바칠 형편이 안 내어 못 내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모든 시대 모든 교회에 공통되는 현상입니다. 자진해서 전 재산을 헌납한 신자들이 나타난 모습은 물론 초대 교회가 강하긴 했지만 그들만의 고유한 모습은 아닙니다.
오히려 재산 헌납의 부작용을 이미 경험했다는 입장을 감안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공동체가 구제를 체계적으로 공평하게 다 같이 감당하기에는 역시 십일조 제도가 낫다는 사실만은 인식 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변적이고도 독단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초대 교회에 십일조를 명시적으로 권유 혹은 폐지한 기록이 없을 때에 모든 가능성을 두고 어느 쪽에 더 개연성이 있었을지 따져 보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십일조 제도는 초대 교회의 주를 이룬 유대인들로선, 사실 이방 종교에서도 많이 시행하고 있었지만, 아주 관례적이었고 최소한 반감을 이루는 제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구약과 100% 일치하는 방식으로 시행하지는 않았겠지만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준행하는 성도들은 여전히 많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그런 일을 두고 사도들이 적극 독려까지는 몰라도 금지는 결코 하지 않았고 아마도 잘하는 일로 칭찬은 했을 것 아닙니까?
재산을 헌납하는 공동체가 사라진 다음의 초대 교회가 구약과 다른 방식으로 헌금을 모았다는 뜻은 한 마디로 금액에 제한을 두지 않고 전적으로 신자의 자율성에 맡겼다는 것뿐입니다. (특별 목적의 별도 헌금은 서두에서 현대 교회에서도 시행하므로 논의에서 제외된다고 했음) 그러니까 당연히 금액에 제한을 두는 십일조도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사도들이 십일조는 폐지되었으니 앞으로는 하지 말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신자들이 자진해서 십일조를 여전히 들고 나와 바쳤을 것 같습니까? 어느 쪽이 더 자연스런 상황이었겠습니까?
또 자진해서 십일조를 내는 자 중에 구약처럼 둘째 셋째 십일조까지 다해야 하는지 묻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사도들이 십일조 자체를 아예 내지 말라고 말렸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소산의 10%만 내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혹은 그 당시에 이미 둘째 셋째 십일조 규정은 사문화(死文化) 되었기에 단순히 십일조만 내는 것이 관례로 되어서 아예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까?
물론 지금에 와선 아무도 확정적으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에 가능성이 많았을지 판단하는 데는 예수님의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관건이 될 수 있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언급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23:23)
이 말씀의 해석에 차이가 나는 부분을 찬찬이 조명해봅시다. 예수님은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 종교 행위와 또 그것을 신자들에게 강요하는 잘못을 저주하면서까지 야단치셨습니다. 최악의 죄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입니다.
또 율법의 형식보다 그 담긴 뜻을 더 중요히 여기라는 것은 너무나 타당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신은 버렸고, 또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라고 말하셨습니다. “더 중한바”란 비교법은 하나는 틀렸고 다른 하나는 옳다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중요한데 그 중에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는 이론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만 해당되며 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이 완성되었기에 예수님의 지상 사역 시에만 적용된다고 합니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성전에서 장사하며 폭리를 취하고 또 제사장들과 부패 고리로 연결되어 있던 환전상과 제물 장사치들을 예수님이 성전에서 다 쫓아내셨습니다. 그 때에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도다.”(막11:17)라고 야단친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성전제도, 제사장, 환전상, 제물판매상 등이 다 없어졌으니까 지금 시대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날도 장로 피택을 위해 현대판 매관매직(Simony, 행8:18)이 일부에선, 그것도 대형교회에서 자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모든 세대의 교회는 담임목사부터 아무 직무도 맡지 않은 일반 신자까지 돈이 아니라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신 모습을 사람들 앞에, 특별히 교회 안에서부터 보여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또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한 말씀을 현대에도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노방전도에 대해 적극적 찬성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부작용이 많음을 예민할 정도로 “더 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한 번도 성경적으로 틀렸다거나,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조금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잘못된 종말론을 주장하면서 노방에서만 전도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하라는 의미도 곧 있을 당신의 십자가 사역을 의미하지 당장에 재림과 종말이 닥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의 본질과 그것을 담는 그릇을 구분해야 함은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그릇에도 아주 다양한 종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은 해주어야 합니다. 불신자 시절에 다들 졸린 눈으로 출근하는 아침의 서울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노방 전도하는 자를 만나면 예수쟁이에 대해 이를 갈면서 저주했던 자가 바로 저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를 믿더라도 절대 저런 짓은 하지 말아야지 수차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은혜 안에 막상 들어와서 보니까 노방전도의 유익도 때와 경우에 따라 나름대로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문제는 막무가내로 천국과 지옥을 강조하면서 간단한 말 한마디로 전도가 다 되리라 여기는 데 따른 부작용들일 뿐입니다. 노방전도에 꼭 장점이 많다거나 혹은 단점이 더 많다는 것을 떠나서,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전하는 수많은 통로 중의 하나라는 뜻입니다. 십일조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많은 통로 중의 하나라고 입이 닳도록 강조했듯이 말입니다.
나아가 실제로 노방전도라는 그 방식조차 아직 살아 있습니다. 당시는 통신과 교통이 아주 미개해 노방전도가 유일하고도 가장 효과적인 전도 수단이었지만 사정이 달라진 지금은 아예 금하거나 더 효과적인 방안을 찾아 봐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구약의 선지자처럼 길거리에서 외친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가가호호 방문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물론 무작정 아무 집이나 방문하는 것을 문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로선 십자가 복음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가구가 전도의 대상이었습니다. 오늘날 복음의 불모지이자 교통 통신이 발달되지 못한 오지(奧地)에서 가가호호 방문하여 전도하듯이 말입니다.
또 현대 교회에서도 아파트 단지에 가가호호 방문해 전도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문제의 핵심은 무례한 태도로 무조건 천국과 지옥의 심판을 선언하거나 잘못된 종말론을 전하는 것이나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정중히 거절해도 일부 이단처럼 자꾸 떼를 쓰는 것일 뿐입니다. 무작위로 노방에서 혹은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노방전도가 구원 여부나, 기도나 말씀처럼 성화의 핵심적 수단이거나, 또 하면 복 받고 하지 않으면 벌 받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예의 바른 매너와 상대를 존중하는 정당한 방식으로 십자가 진리를 상대와 때와 경우에 맞게 적절하고도 올바르게 전한다면 좋은 일이자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 여행에 내보면서 하신 말씀에서 신자들이 배워야 할 내용입니다.
다시 예수님의 십일조에 관한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 중에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것과 아닌 것을 분명히 구분은 해야 합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했어도, 심지어 40일 완전 금식기도를 했어도 물 위를 걷든지 죽은 지 나흘 된 무덤 앞에서 걸어 나오라고 고함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되신 그분만이 행할 수 있는 이적입니다.
또 아무리 현재 목사들이 잘못하고 있다고 해서 대놓고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욕하거나 화 있을찐저라고 지옥 심판을 선언하거나, 강대상을 뒤엎을 수는 없습니다. (*: 유대 광야에는 뱀이 많았습니다. 순전히 이해를 돕기 위해 개가 많이 나다니는 우리 실정에 비추면 “개 새끼들아!”라고 욕한 셈임) 신적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과 행동입니다.
그럼 인간 신자가 예수님의 행적 중에 따르고 따르지 말아야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명료합니다. 앞뒤 문맥과 당시 상황에 비추어 상식적 이성으로 복음서를 살펴보면 금방 구분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의 깊고 풍성한 의미까지 쉽게 알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자가 따라 할 수 없는 예수님 고유의 행동과 말씀인지, 배워서 따라야 할 것인지의 구분은 전혀 어렵지 않고 또 그럴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경우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대상으로 그 당시에만 유효한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당신께서 그들을 야단쳐도 전혀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수님은 이미 아셨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화 있을찐저라고 심판의 선언부터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 대부분이 예수님 말씀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고 십자가에 매다는데 앞장섰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 후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완전히 목석을 상대로 그런 말씀을 하셨고 또 그런 허공을 치는 메아리 같은 말씀을 성경 기록에 남겼겠습니까? 아닙니다. 사실은 그 곁에 있는 유대청중을, 최소한 항상 동행하는 제자들을 향해 하신 것으로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 저주의 강화를 하기 직전에 성경이 어떻게 말합니까?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23:1)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살짝 숨어서 함께 들었는지는 몰라도 공개적으로는 오히려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또 다시 오늘 날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에 해당되는 사역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 받은 사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최대한 양보해 목회자에게만 해당된다 해도 최소한 일반 신자가 “소경된 인도자”를 따르지 않아야 할 판단 기준으로라도 적용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또 십일조 제도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양념의 십일조까지 하는 것만 예로 들었습니다. 율법의 세세한 문자적 규정과 또 자기들이 정한 법은 잘 지키면서 막상 하나님이 십일조 계명에 주신 그 뜻, 구제와 친교 등은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한탄한 대로 저는 것, 흠 있는 것을 끼워 넣어서 수자만 채운 십일조 도적질 행위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목회자가 구약의 율법을 들어서 십일조를 강요하고 하나님의 상벌을 받는 근거로 왜곡해서 가르치고 또 그 돈을 엉뚱하게 운용하는 것들 모두가 아주 큰 죄이며 또 신자들은 잘 분별하여 그런 목회자를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모든 세대의 사역자와 신자에게 해당되는 영원토록 명심하고 따라야 할 가르침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십일조 제도 자체를 부인했거나, 부작용이 있으니 폐지하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당시의 일부 종교지도자들만 대상으로, 그것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시적으로만 적용되는 말씀은 더더욱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십일조 제도 자체를 더 중한 것인 의와 신보다는 덜해도, 여전히 중한 것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요13:29) 저의 앞글에서 이미 인용했지만 다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헌금에 의존했고 그 헌금으로 공동체 운용에 사용했고 가난한 자를 구제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재정부장 격인 유다가 해야 할 일로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요즘의 교회와는, 또 사도들이 세운 초대교회와도 조금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순회선교단체 식의 교회이긴 해도 목사들을 양성하는 신학교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따라서 이 공동체 내부 즉,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십일조를 권면하고 드려지는 일은 당연히 없었을 것입니다. 직장 재산 다 버리고 예수만 따른 자들에게 무슨 돈이 있었겠습니까? 혹시 짬짬이 막노동이라도, 신학생의 아르바이트, 했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외부의 일반 유대인들이 이 공동체에 헌금하는 가운데는 그 때까지 유대인들에게 일반화되어 시행하던 십일조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가 곧 십자가에서 율법을 전부 폐지할 테니 십일조를 비롯해 헌금이 필요 없다고 거절하기 보다는 기꺼이 그것을 용납하셨을 것 아닙니까? 구태여 십일조인지 아닌지 물어 보고 십일조는 내지 말라고 했을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입으로 십일조를 내라고 해놓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다 양보해도 최소한 구제를 자주 시행했다는 것과 또 그 비용으로는 공동체 운영경비를 능가하는 헌금(순전히 자발적인 것이긴 하지만)을 받아서 충당한 것만은 확실합니다.
또 초대 교회에서, 특별히 유대교와의 분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십일조가 여전히 시행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해석상의 자연스런 흐름입니다. 그 동안 성전에 계속 바치던 것을 교회에다 자연적으로 대체 납부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예를 들면서 제자들에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고 분명히 가르쳤지 않습니까?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사도들이 강요까지는 아니더라도 권면은 했을 것 아닙니까?
새 언약과 새 계명
말씀의 내용이 그것을 담을 그릇에 비해 더 중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릇이 완전히 필요 없다든지, 그릇이 중요치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전에 작고하신 S 코미디언의 노래처럼 아무리 인천 앞 바다가 사이다라고 해도 컵 없이는 못 마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컵도 시원한 사이다의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투명 유리컵이면 효과는 배가하지 않습니까?
제 앞글에서 새 언약과 새 계명은 그 내용에서 하등 차이가 없음을 밝혔습니다. 달라진 것은 말씀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담을 그릇입니다. 그러나 담을 그릇이 바뀐 것이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담을 그릇이 전부 폐기되었거나 다 바뀐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부는 폐기되고, 일부는 바뀌고, 일부는 갈고 닦기만 했고, 또 일부는 골격은 그대로 두고 새롭게 덧붙여 기능을 강화시키기도 했다는 뜻입니다.
그 바뀐 핵심은 물론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주되 신자가 그것을 마음에 법으로 새기는 데는 성령의 거듭남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구원 받은 후 성화를 이뤄나가기 위해 죄를 이기는데도 생명의 성령의 법에 따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성령이 개별적으로 역사하여 예수를 통해 구원한 것은 동일했지만, 이제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처럼 만민에게 당신의 신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가 보편화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크게 달라진 것입니다.
‘언약’은 칭의, 성화, 영화 셋을 망라하여 구원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내용이며, ‘계명’은 특별히 신자의 책임으로 맡겨진 성화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만 죄 사함을 받고 또 성령의 인도와 권면에 따라 그분을 닮아가며 세상에 그분의 향기를 드러내야 한다는 면에서 새 언약과 새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담아낼 가시적인 그릇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성령의 외적 은사도 있지만, 성령이 교회 공동체내에서 은혜를 주고받는 외적 통로 또한 여전히 필요한 것입니다. 십일조가 바로 그런 것의 하나입니다.
십일조를 기복 수단으로 강요하는 목회자에게는 두말 할 것 없이 예수님의 마23;23이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런데 간혹 십일조를 하지 않았더니 멀쩡한 아이에게 병이 나거나 사업이 쇠퇴하다가, 십일조를 했더니 병도 낫고 사업이 흥해졌다고 간증하는 신자도 있습니다. 그들 또한 소경을 인도하는 자에게 속은 같은 소경임에는 틀림없기에 동일한 말씀의 적용을 받아야 합니다. (미처 성경을 몰라서 그럴 수 있고 아직 구원이 이뤄지지 않았을 수 있으므로, 둘 다 지옥에 떨어진다고 단적으로 해석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 말씀에 비추어 회개하고 고쳐야 한다는 뜻으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제 그렇게도 역사를 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 권면의 말씀을 듣고 우연히 시험 삼아 시행했더니 정말 골치 아팠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물론 십일조 바치고 난 후에 근검절약해서 이뤄낸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신자가 아이에게 너무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사업체 운영에 인생의 모든 것을 다 걸다시피 하므로 하나님이 그가 가장 잘 깨달을 수 있는 방식으로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했으니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기 속에 있는 우상을 버렸다는 점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신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든 것이 십일조가 복을 받는 수단이며, 또 그렇게 가르치는 목회자나 그대로 따라 간증하는 신자의 정당성을 옹호하자는 의도는 눈곱만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런 간증이 원칙적으로 잘못되었고 또 듣는 자도 잘못 이해했다는 예로 든 것입니다.
만약 십일조 준수 여부가 상벌의 근거가 된다면 정말로 그보다 “더 중한 바”, 기도, 말씀, 전도 등에 등한히 한 자는 아이가 죽고 사업은 완전히 망해야 합니다. 아니 이런 글을 쓰는 저부터도 벌써 죽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도 반드시 십자가 복음만 붙들고 성령의 인도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율법식의 훈련으로 성화가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훈련이 경건에 조금, 그것도 잠간만 유익이 있지만 신자가 온전한 믿음 위에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면 성령의 열매는 금할 길이 없이 열립니다. 또 그렇게 복음만 붙든 자가 상벌의 근거가 아닌 자신의 믿음의 고백과 헌신을 십일조라는 그릇을 통해 표출할 수 있고 또 그 그릇을 통해 은혜를 받을 수는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모든 개인에게 가장 적합하도록 당신만의 방식과 때에 따라 이뤄집니다. 또 그 모든 역사는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을 증거하는 방향으로 이뤄지는데 십일조도 그 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증거 중의 하나는 정말로 세상 재물에 의지하지 않고 머리 둘 곳 없으나 그분만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청년부자 관원더러 재물을 다 팔고 구제를 한 후에 따르라고 했을 때에 그 액수나 행위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하나님과 재물 둘 중에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정말로 심각하게, 전 재산을 걸고, 생각해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더 중한 바 되었어도 여전히,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재물을 다 팔아야 하는 그릇은 필요한 것입니다.
십자가로 구약의 말씀을 담을 그릇이 다 폐지되거나 다 바뀐 것이 아닙니다. 난지 팔일 만에 받는 할례만 해도 중세에는 천주교의 유아세례로 왜곡되었지만 오늘날 일부 교단에서 헌아례로 수정 보완하여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릇의 골격은 두고 새롭게 갈고 닦은 셈입니다. 아이를 하나님께 돌려 드리며 (구원여부와 관계없이) 부모가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여 청지기의 직분을 잘 감당하겠다는 서약의 뜻입니다. 구약 시대의 할례에도 분명히 이런 의미는 있지 않습니까? 그럼 십일조는 어떠합니까? 그 뜻과 제도를 보완 발전시켜야 합니까? 부작용과 잘못된 폐해가 많다고 권면 장려하는 것조차 금지해야 합니까?
신구약 성경에 십일조를 잘못 운용하는 사역자들을 야단치는 내용은 나오지만 그 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언급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또 십일조를 몇 번이나 강조한 것은 그만큼 잘못 운용되기 쉽고 또 누구나 잘 넘어지는 돈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 동안 돈이 주인이 된 우리 존재와 삶과 인생의 중심 좌소에 예수님을 항상 모시기 위한 신앙을 성숙시키는 데에 오히려 더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자로서 그렇게 바뀐 하나의 증표요 하나님 쪽에서도 은혜를 베푸는 하나의 훌륭한 통로라는 것입니다.
결론
아가페님이 말씀하신 아래의 결론에는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니 폐지론자나 존속론자 모두 동의하고, 신자라면 어떤 반대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고 안하고의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하면 신앙의 유익이 있는 것이고 다른 방식으로 한다고 해도 유익이 있습니다. 하지만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강제적 혹은 구약의 성경말씀을 근거로 반드시 십일조의 방식으로 해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결론을 맺고 싶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로 인해 물론 신앙의 유익이 있지만 더불어 그것으로 말미암아 시험에 든다든지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판단, 평가, 정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돌아봐야 할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9장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you should each give what you have decided in your heart to give. You shouldn't give if you dont want to. You shouldn’t give because you are forced to. God loves a cheerful giver." 해석이 더 명확한 것 같아서 영어성경을 적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특정한 목적의 헌금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헌금을 할 때 성도들의 자세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것처럼 부담감, 혹은 원하지 않는 마음으로는 헌금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강제, 혹은 강요된 것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작금의 한국교회에서는 대부분 십일조가 권유가 아니라 강요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 혹은 아니니아 삽비라등의 얘기를 하며 "꼭" "반드시" 라는 말을 붙여 이루어지는 십일조의 강요는 가정안에서의 신앙교육에까지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세우신 조직체 교회는 합당하지만 그 조직체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든지 혹은 조직체를 성경말씀위에서 운영해 나가고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만일 조직체 혹은 개인을 위해서 성경말씀을 왜곡해서 이용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합니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을 모아 드려진 헌금은 반드시 현명하고 정직하고 투명하게 그리고 교회와 세상에 덕이 되게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돈만 내고 ‘헌금했으니 내 믿음을 하나님께서 보셨으면 된거야.’라고 그치는 것 보다는 초대교회 때 사도들이 성도들의 연보한 것이 어떻게 쓰여질지 그리고 헌금이 쓰여지는 곳, 혹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요청 했듯이 헌금은 성도들과 선교사들이 혹은 성도들과 이웃들이 지속적인 영적인 교통을 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동일하되 지금껏 논의해 온 초점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현대의 조직체 교회가 믿음을 가진 신자에게 십일조 제도를 존속 권면 장려할 수 있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논의를 가름하는 성경적 근거는 오직 십자가로 구약의 그릇이 전부 다 폐지 내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되었는지 여부에 달렸습니다. 또 그것은 신약성경 특별히 초대 교회의 기록에 명시적 금지 혹은 장려가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인가에 달렸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구원(칭의) 뿐 아니라 성화라는 측면에서도, 십자가 복음으로 금지한 것은 히브리서의 명시적 구절에 따라 제사법, 정결법, 음식법에 관한 것에 국한되었다고 봅니다. 물론 십일조는 그 세 가지 법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또 폐지된 법들 중에도 외적 의식은 빼고 그 정신은 아직도 배워야 할 부분들이 다분히 있다고 믿습니다.(행위구원은 당연히 절대 불가임)
나아가 신구약 성경에 십일조에 대한 명시적 금지가 없고 오히려 강조하는 부분들이 많아서, 아무리 부작용과 폐해가 많아도 제대로 투명 공정하게 운용하여 더욱 존속 발전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또 신약교회에 기록이 없는 것도 오히려 십일조의 관례가 유지된 것이 더 자연스런 해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단 누차 강조했지만 십일조를 공적 제도로 수시로 점검 강조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관련된 언급이 있어서 가르쳐야 할 때는 마땅히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십일조를 가르쳐도 제대로 하지 않는 신자는 항상 있으며, 안 가르쳐도 믿음이 바로 선 자는 십의 십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구원과 믿음은커녕 옳고 그른 일, 좋고 나쁜 일의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각 자가 어떻게 믿든, 또 해야 된다고 믿는 자 중에서도 성실하지 않게 하던 남들이 상관할 문제는 아닙니다. 십일조 수행 여부로 상호간에 폄론, 비방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각자 나름대로 성경을 정말로 앞뒤로 연구하며 묵상하셔서 다음 세 가지 질문에는, 존속 혹은 폐지 어느 입장에서든, 자신 있게 변증할 수 있도록 하셔야만 할 것입니다. 1)십자가 복음으로 율법에서 폐지된 부분이 무엇이며 어디까지인가? 2) 예수님의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3) 초대 교회에 과연 십일조 관행이 유지되었을까 아닐까?
첨언
아래는 이미 올린 제 글의 두 곳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십일조 제도가 돈에 대한 훈련과 믿음을 성숙시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통로 중의 하나라는 측면을 강조한 내용이기에 이상에 적은 내용들을 상기하면서 다시 한 번 참조해 봐주시기를 감히 소원합니다.
인용문 1
“또 교회는 많이 생기면 많이 생길수록 좋은 것입니다. 정말 초대교회처럼 십자가 복음만 증거 실현되고 그 공동체의 자금의 모금과 운용이 성경적 뜻에 따라 투명하고도 잘못이 없으면 됩니다. 나아가 정말로 많은 신자들이 십일조를 많이 내어서 구제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구약대로 열 가정 정도의 십자가 사랑의 공동체가 곳곳에 세워지고 그 중 한 가정이 성경적인 제사장이 되며, 또 그런 공동체들이 이 땅에 편만하게 확장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십일조만 해도 폐지시키는 것이 개혁이 아니라 오히려 더 그 뜻을 잘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 올바른 개혁 아닙니까? 기독교가 개혁을 해야 할 만큼 그 동안 잘못에 빠진 가장 큰 원인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5:24) 한 마디로 교회도 재물을 섬긴 것 때문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십일조 규례를 제정하신 의미에 교회가 재물을 섬겨야 한다는 의미가 단 한 치라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우선 신자는 재물에 굴복하지 않고 산다는 믿음의 고백으로 과도하게 여겨지리만큼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또 신자들의 공동체는 재물에 의존하는 세상 방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방식으로만 운영되어져야 하기에 구제를 열심히 하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제사장 레위 지파는 마음을 재물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전무하고 또 그렇게 사는 모습을 신자들 앞에 솔선해서 보이라고 세속 직업을 갖지 못하고 성도들의 십일조에 의존하게 한 것 아닙니까?
바꿔 말해 십일조 규례를 제정하신 목적 안에는 오히려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핵심 방안이 들어 있습니다. 세상 앞에 교회가 돈 때문에 망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돈을 아예 없애는 것이 결코 능사가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해서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돈을 사랑해 마음이 그곳에 가있는 것이 모든 죄의 씨앗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돈 때문에 망했다면 개혁하려면 역으로 돈으로는 결코 망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돈이 없는 것은 아예 망할 여지조차 없는 것, 사실은 돈이 두려워서 도망간 것이지 돈에게 승리한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돈이 많아도 그 돈 때문에 절대 세상 식으로는 망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혹시 또 교회는 돈을 많이 모아야 한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들부터 구약 율법 식으로 사례로 받은 것의 십일조를 가장 먼저 바쳐야 합니다. 신자와 그 공동체도 돈이 없는 모습이 아니라 정말로 돈에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인용문 2
“신자의 믿음이 가장 잘 흔들리는 부분은 예나 지금이나 금전적 문제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신자가 믿음으로 살 때 주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성경에서 10의 2조, 3조를 바치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자의 현실 생활에 큰 주름살이 끼게 됩니다. 아마 신학자, 목사, 평신도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어떤 교리적 논증을 동원하더라도 그 규정을 폐기 시켰을 것입니다. 반면에 앞에서 말한 대로 2% 5% 같은 수치였다면 믿음과 상관 없이 누구나 아무 부담 느끼지 않고 쉽게 낼 것입니다.
그럼 7.5% 8%, 9%, 9.5% 식으로 규정할 수 있는 데도 왜 꼭 십의 일이 되어야만 했을까요? 물론 첫 째 이유는 기억하기 좋고 계산하기 좋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전에 이미 많은 이방 국가의 우상숭배 종교에서도 십일조가 바쳐졌기에 기독교의 십일조가 이방종교에 영향을 받은 것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십의 일을 바친 것은 인간 상식으로 누구나 그렇게 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단지 십일조를 같이 바쳤다는 이유로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 신을 동격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중략-
다윗이 인구조사로 인하여 형벌을 받은 후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할 때에 그 주인 아라우나가 무상으로 그 타작마당을 왕에게 기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삼하24:24)고 거절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자는 아무 희생 없이 값싸게 드려선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 신자에게 희생을 요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으로 신자가 하나님에게 희생을 바쳐 복을 받으려 해도 진정한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만사에 형통하여 물질적 축복이 넘칠 때는 믿음의 크기와 상관 없이 누구나 쉽게 감사 제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인내하고 연단하여 정금 같이 나온 승리의 체험이 없다면 그 은혜의 깊이를 진정으로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과 상관 없이 그저 받은 것이 많을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쉽게 들고 풍성하게 드리는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믿음은 반드시 고난을 만나야만 그 진위 여부와 세기가 판가름 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최후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하는 자만이 환난 중에 오히려 기뻐하며 소망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롬5:3) 바울 사도가 마게도니야 교회들에 대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을 뿐 아니라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했다고 칭찬했습니다.(고후 8:2) 극한 가난 가운데 힘이 넘치도록 연보 했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가 신자가 십일조를 해야 하는 참 된 이유입니다. 내 힘에 지나치고, 하나님이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 같고, 내고 나면 생활에 큰 불편을 느낄 것 같은 10%를 자원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돈이 내 삶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제 생활을 보장해 주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신자자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았을 때에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은혜를 넘치도록 체험했다는 증거가 바로 십일조입니다. 예배가 신자의 희생과 함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증거를 들고 나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은혜는 재삼 재사 말하지만 십일조를 내었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10%를 떼고 남은 90%로는 도저히 부족하고 쪼들릴 것 같았던 삶이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의외의 지출은 막아지고 이전에 아무 생각 없이 했던 사치와 낭비는 없어지고 이제는 신자답게 검소와 절제로 자족하는 생활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며 살 때에 주님이 삶의 세밀한 부분까지 해결해 주시고 채워 주시는 은혜를 더욱 체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십일조 한다고 다음 달부터 사업이 번창해져 수입이 몇 배로 늘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3/29/2009
때아닌 십일조 논의의 글을 본의 아니게 올리게 되어
방문자님들 모두에게 알게 모르게 힘들게 해드린 것 같아 대단히 죄송합니다.
어떤 면에선 힘들 때에 오히려 돈에 대한 주제를 다루게 됨도 꼭 나쁜 것은 아니며,
이런 와중에도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선하신 섭리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임하기를 간구할 뿐입니다.
이왕에 이 주제가 불거진 마당에 저의 의견을 좀 더 확실히 밝혀야 하고
'아가페'님의 말씀처럼 서로 간에 성경 이해의 폭을 좀 더 넓히자는 뜻임을 양해 바랍니다.
또 '사랑 그리고 편지'님의 말씀대로 최종 판단과 실행은 독자님들에게 달렸을 뿐입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두 분에게 감사 드리며
더 깊은 교제와 이해로 나아가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