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9편에도 복음이 있는가?

조회 수 4259 추천 수 87 2009.04.17 19:01:11
시편 109편에도 복음이 있는가?


[질문]


베드로전서와 갈라디아서를 보면서 복음의 위대함을 되새기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도 묵상하려고 성경을 펼치는데 우연히 시편109편이 펼쳐졌습니다. 다윗이 쓴 시편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바로 전에 읽었던 베드로전서와 갈라디아서의 내용과 너무나도 달라서 당혹스러웠습니다. 다윗의 해당 시편을 복음의 내용과 어떻게 조화시키며 읽어야 될까요?

[답변]

시편의 해석 원리


구약성경에는 가끔 십자가 복음과는 완전히 상치되는 것 같은 표현들이 나타납니다. 심지어 에스더서처럼 책 한 권이 전부 다 그렇게 여겨져 정경화할 때에 논란이 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예의 시편처럼 신자의 영성을 성장시킬 수 있는 지혜서에서, 그것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저작한 글에서조차 그런 표현이 나오면 적잖이 당황됩니다.

그러나 그런 진술을 앞뒤 문맥과 저작 당시 상황과 성경 전체에 흐르는 일관된 뜻과 연결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도리어 복음이 보석 같이 숨겨져 있기에 그것을 발견해 내면 더 큰 은혜로 다가옵니다. (성경문답 사이트 # 18 “에스더서에도 복음이 있는가?”의 글도 참조 바랍니다.)  

그런 부분을 복음과 연관해 해석할 때는 몇 가지 사항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완전한 것이 오기 전이라 복음을 예표 하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상징, 비유, 예언 등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십자가 진리를 향한 계시가 점진적으로 구체화 되어 갑니다. 어렴풋이 상징만 하다가, 비슷하게 닮아 다가가, 완전한 복음으로 명료하게 드러날 때도 있습니다. 주의할 사항은 순차적이 아니라 교차적으로 곳곳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간혹 복음을 직간접으로 계시하지 않고 단지 예수님의 복음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사실만 드러내주는 표현도 있습니다. 또 그러려면 죄악이, 특별히 인간 본성의 부패함이 여실히 드러나야 하기에 언뜻 보면 복음과 상치되어 보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일시적으로 죄에 빠져 있는 신자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표현된 부분은 무슨 뜻인지조차 이해하기 힘듭니다.

나아가 성경을 볼 때는 반드시 문법적 구조 분석을 선행한 후에 세부적으로 각 구절에 접근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어디서 어디까지가 한 문단이며, 각 문단의 내용은 무엇이며, 문단과 문단은 어떻게 연결되어서 전체적으로 무슨 뜻을 나타내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특별히 시편의 경우는 더더욱 이런 분석이 필수적입니다. 찬양, 감사, 기원, 회개, 창조, 승리, 성경 등 다양한 주제로 쓰인 시편은 사실 각각의 한 편이 별도의 책 한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통적 주제를 다루는 시편들을 함께 모아 편집되어 있지만 여전히 서로 연결된 스토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해석상의 전제들을 감안하여 시편 109편을 구조분석부터 한 후에 전체적으로 연결된 의미를 상고해보기로 합시다. 이 시는 다윗이 그의 대적들에게서 아주 심한 핍박을 받을 때에 쓴 것으로 자신의 영적 비참함과 대적에 대한 분노와 저주를 토로한 것입니다. 비탄, 간구, 승리, 찬양 등이 교차되는 다윗 시편의 공통점이 이 시편에도 여전히 나타나 있지만 전체 주제는 적대자에 대한 저주를 담고 있는 비탄시 혹은 저주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적을 “저희”라는 복수형으로 표현했을 뿐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시대적 배경을 따져 보면 사울, 도엑, 아히도벨, 시므이 등으로 추측이 가능하지만 확실치 않습니다. 복수인지라 개인이 아니라 여럿이라는 것과, 또 대적도 기도하고 있으므로(7절) 같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과, 무엇보다 이렇게 저주를 토로할 만큼 대적으로부터 현실적, 정신적, 영적 괴로움을 아주 많이 당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내용에 따라 문단은 크게 넷으로 나눠집니다. 서론 격으로 먼저 대적의 악행을 이제부터 하나님께 고하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1-5절), 대적에 대한 저주를 토설하며 하나님께 멸망을 간구하는 본론이 이어집니다.(6-20절),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야 할 근거로 자신의 무능 연약함을 제시하고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에 대한 고백인데 본론에 반하는 내용으로 전환됩니다.(21-29절)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는 찬송으로 끝을 맺었습니다.(30,31절)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는 전적 문학수법이 여실히 응용된 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둘째 단락으로 다윗이 악인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저주를 하나님더러 대신 갚아달라고 기도한 것에 있습니다. 과연 신자가 그래도 되는지, 또 하나님이 그런 기도에 응답을 해주시는지 의아합니다. 나아가 응답을 확신하며 그분을 찬송하며 결론을 지은 시편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도 그렇게 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인간을 심판하는 하나님이지 십자가 복음의 하나님이 아니지 않느냐는 당혹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일일이 고해바쳐라.  

우선 다윗이 대적에 대한 분노와 저주를 품은 것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분노가 생기는 것은 자연적 반응으로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또 저주를 품을 정도라면 대적이 계속해서 집요하게 괴롭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4,5절) 다윗은 대적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선으로 갚으려고 오랜 기간 무진 애를 썼음에도 대적은 오히려 악으로만 갚았다는 것입니다. 또 평소 그를 위해 계속 기도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복수는커녕 맞상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도저히 인내의 한계가 찼으니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그를 벌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뜻입니다.  
  
이 4,5절에 사실은 복음의 진수가 다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신자는 원수를 직접 상대하지 말아야 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며, 오직 하나님이 원수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신약 신자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예수님의 수훈을 다윗은 이미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는 무엇이든 하나님께 토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과 용서는커녕 분노만 끓어올라도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일일이 상대의 잘못을 고해바쳐도 되고, 미워하는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고백해도 되며, 당신께서 대신 벌해 달라고 간구해도 됩니다. 무엇보다 상대와 맞상대를 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 아주 잘하는 짓입니다. 또 기도의 능력을 확실히 믿고서  자기가 직접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린다는 뜻에서 아주 좋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능력을 단순히 기도만 하면 응답된다는 도깨비 방망이 식으로 믿어선 절대 안 됩니다. 그럼 하나님을 시켜서 미워하는 사람에게 신나게 복수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당신의 하실 일이 아니면 결코 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절대적 선이므로 궁극적으로 절대적 선으로만, 비록 신자의 눈에는 그렇게 안보이고 이해마저 안 되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이뤄지게 하십니다. 요컨대 전지와 전능이 항상 함께 하시는 것이지 전능만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미워하는 내용과 심지어 대신 벌해달라고까지 일일이 하나님께 고해야 할 이유는 신자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신자부터 영적으로 바로 세워주십니다. 구체적으로 입술로 토로하는 가운데 미처 몰랐던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고 상대의 어쩔 수 없는 사정과 불쌍한 점도 느껴지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도록 자신을 채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최소한 모든 처분을 하나님께 의탁했으니 기도자의 영혼을 미움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물론 한 번의 기도로는 안 되고 응답의 확신을 얻고 영혼이 완전히 평강해질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또한 신자더러 그렇게 하기를 요구하십니다.  

다윗의 이 시편에도, 그의 다른 시편도 거의 다 그렇지만, 신자가 기도를 통해 겪는 내면의 영적 소생 과정을 표현하는 부분이 나옵니다.(21-31절) 그의 시편에는 심지어 하나님께  불신하며 원망하는 마음을 직접 토로하며 기도를 시작했다가 결국에는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다시 확인하고 감사와 찬양으로 끝내는 경우도 왕왕 있지 않습니까?(13, 22, 74 편 등)

기도 중에 바뀐 다윗

다윗으로선 자기 대적에 대해 신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선이 도저히 통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대신 벌을 주라고 간구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계속 기도한 후에 이제 일종의 최후 담판을 벌리자는 기도였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에 과격한 표현들이 담길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으로 기록된 말씀이라고 무조건 하나님의 진리라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이 본론(6-20절) 부분은 다윗이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자기 내면의 감정까지 전부 하나님께 쏟아 부은 개인적 기도였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저희 기념을 땅에서 끊으소서.”(14,15절)와 같은 복음과 상치되는 구절마저 포함된 것입니다. 대적을 지옥에 보내달라고 기도한 셈인데 만약 그가 사적인 감정으로 특정 개인을 저주한 것이라면 분명 잘못입니다. 기도할 때에 감정이 격해서 그렇게 될 수는 있겠지만 성경적으로 따지면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대적을 “저희”라는 복수로 칭했습니다. 따라서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현재 자신을 괴롭히는 악인들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 원리에 호소한 것입니다.  정작 살펴보아야 할 것은 평생의 가장 큰 대적이라 할 수 있는 사울마저 끝까지 하나님의 처분에 맡겼던 다윗이 이렇게까지 과격하게 간구할 정도라면 저희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여부입니다.    

먼저 거짓된 혀와 미워하는 말로 무고하게 다윗을 공격했습니다. 대적이 오히려 다윗을 미워하는 사적 감정으로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허위로 지어내어 참소했습니다.(2,3절) 결정적으로는 아래 구절이 그들을 잘 설명해줍니다.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한 연고니이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16-18절)

저주로 옷을 입은 자라고 합니다. 또 가난하고 궁핍하며 마음 상한 자를 죽이려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신자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밥 먹듯이 자행한 자들입니다. 특별히 긍휼하고 가난하며 마음 상한 자들을 대상으로 그런 짓을 했으니 다윗의 개인적 원수라기보다 세상에서 설쳐대는 사단의 하수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처음에는 자신의 비탄한 처지와 분통함으로 기도했지만 도중에 성령의 인도로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일반적 악인에서부터 흑암의 세력 전체를 두고, 실은 후자 쪽에  포커스를 더 맞추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간구하게 된 셈입니다.  

그런 저주의 탄원이 끝나고 어떤 내용으로 간구가 이어집니까?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에 호소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21절) 자신은 너무나 연약한데다 지금껏 최선을 다해 대적을 선대했지만 오히려 핍박은 더해가니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겸허히 고백했습니다.

또 악인의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주의 손인 줄을 저희로 알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이것을 행하셨나이다.”(27절) 자기가 대적을 직접 맞상대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만 할 테니 자신에겐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이 있게 하고 대적을 심판하시되 그런 사실을 대적들이 깨닫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세상사의 선악간도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모든 사람, 특별히 악인들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구원과 대적의 심판 방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기도 했습니까?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저희는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찌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나의 대적으로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같이 입게 하소서.”(28,29절)

대적은 여전히 다윗을 저주하고 욕하고 있습니다. 그럼 외적으로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다윗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비탄과 분노에 차서 저주의 기도까지 할 정도였지만 이제 대적의 어떤 저주를 받더라도 하나님만 바라보기에 자신의 영혼에 오히려 평강뿐 아니라 기쁨까지 넘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대적은 여전히 욕과 저주의 옷을 입고서 그 저주와 욕으로 인해 스스로 수치를 당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아예 지옥에 보내달라고까지 기도했지만 이제는 그들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그냥 놓아두고 단지 자신의 영혼만 소생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대적을 저주하려 했던 간구가 정작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만 바로 선다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찬송하겠다고 결론 맺었습니다.(30,31절)  

하나님의 악인에 대한 심판의 원칙은, 아주 특별한 경우나 당신의 인내의 한도가 차지 않는 한, 따로 벌주어 당장 망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마음의 정욕대로”,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는 것입니다.(롬1:22-32) 악의 구렁텅이에 계속 빠져 끝까지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이 사는 것이 바로 심판이며 그 종착역 또한 자동으로 지옥인 것입니다.

살펴 본대로 본 시편에는 복음과 상충되는 내용이 없습니다. 다윗이 대적의 죄악을 도말하지 말라고까지 기도했지만 그 부분은 개인 내면의 토설(吐說)에 해당됩니다. 또 그런 기도가 나중에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일임하고 심지어 대적은 그냥 두고 자신의 영혼만 소생되는 것으로 끝이 났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기도의 모든 과정에 성령이 역사하였기에 하나님이 다윗을 오히려 복음으로 인도했습니다. 또 그 모든 과정을 여과 없이 성경으로 기록케 한 것도 신자의 기도의 내용과 믿음의 자세가 다윗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17/2009

첨언: 상기에서 설명한 해석의 원리를 다른 시편에도 적용하면 그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Joseph

2009.04.18 07:56:15
*.251.198.11

대단히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라의 웃음

2013.02.21 22:21:59
*.109.85.156

시편해석의 원리를 섬세히 설명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자주 하나님께 고자질하곤 돌아서면 그게 또 그리도 죄송스럽기도 하고요~~ 또 하나님께만 맡긴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나서서 한 마디하며 해결할 때도 많고요~~, 사람의 맘은 일관되지 않기에 스스로도 혼란스러울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맘까지 모두 하나님 앞에 토설하며 도우심을 구할 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흔들거리며 뒤뚱일지라도 신자의 모습으로 다듬어 가시는 분이시기에 내면의 모든 것들을 늘 고백하고 토설하며 기도함이 중요한 일임을 배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락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있음이 너무도 귀한 축복임을 다시금 되새기며 감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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