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죄를 지으면 믿음이 없는 표시인가요?
[질문]
요일 3:6: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계속하여 죄를 짓는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진정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알았다고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일 3:9: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그의 자녀로 삼으셨을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삶의 씨가 그의 안에 머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죄를 짓고 살 수 없습니다.”
요일 3:10: “이것으로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누가 마귀의 자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올바른 일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바입니다. 만약에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칭 메시아라고 하는 이단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요한일서 3장에 나오는 말씀들은 어떻게 해석을 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비교적 쉬운 주제라 간단하게 답변 드리겠습니다. 신자라면 십자가 복음의 기본적인 뜻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도무지 들 수 없는 죄인입니다. 세상 쾌락과 죄악을 쫓기에 바빴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찾지도 않고 그분과는 반대편에 서있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아무도 도덕적 죄에서마저 자유로운 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진심으로 믿고 그 앞에 겸비하게 엎드린 자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주십니다. 인간에게 구원받을 만한 자질, 조건, 선행, 공적, 하나 없음에도 오직 당신의 무한한 긍휼에 기인하여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여전히 죄의 본성은 살아 있지만 단지 하나님 쪽으로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방향을 전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하나님만 주인으로 삼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등졌던 원죄의 형벌로 따라오는 영원한 심판에서 제외된 것이지 아직은 죄의 권세를 이겨내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죄를 이겨내는 싸움을 자신의 책임 하에 평생토록 벌려야 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하며(히12:4), “항상 복종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성화의) 구원을”(빌2:12)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 믿어 구원 받고도 죽을 때까지 알게 모르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칭 메시아라고 하는 이단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의 성경말씀은 복음을 부인하는 것 같아 당혹스럽습니다.
요한 사도는 6절과 9절에선 특별히 신자가 되고도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평생을 두고 죄지을 수밖에 없다는 시간적 의미가 아닙니다. 동일한 죄를 습관적으로, 의도적으로, 즐겨가며, 반복해서 짓는 것을 뜻합니다. (개역성경에는 범죄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는데 헬라 원어의 시제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동작을 의미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는 알기 쉽도록 “계속해서”라고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죄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에 의한 중생(重生)도 자신이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철두철미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외에는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없음을 절감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난 이후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가장 우선적인 변화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실천 여부와 그 열매는 더딜지라도 말입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을 닮아 가려면 습관적, 의도적, 반복적으로 짓는 죄부터 먼저 없애려 들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또 성령이 내주하시기에 혹시 그런 죄를 짓게 되면 영적인 피폐함과 죄책감을 아주 민감하게 느끼게 됩니다. 물론 단번에 성공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조금씩 고쳐나갑니다. 남들이 볼 때는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본인은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성전에서 하늘도 우러러 보지 못하고 회개하는 세리가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자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두 번째 특징은 죄만 안 지을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고자하는 소원과 열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오직 세상이 전부임을 알아서 자기와 가족을 위해 먹고 마시는 것에 풍족함만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가 있고 그곳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닮아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삶이 훨씬 더, 아니 유일하게 참된 인생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실천과 열매는 더딜지라도 최소한 그런 결단을 하여 열심히 섬기려 노력합니다.
특이하게도 신자가 선을 행하지 못하면 영적인 충만을 결코 온전히 느끼지 못합니다. 혹시 죄를 짓게 되어도 죄책감이 더 민감하게 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에게 내주하신 성령님의 독촉, 권면, 강권, 대신 기도함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었음에도 신자에게 성령을 평생 내주케 하신 이유가 바로 혼자선 사랑을 실천하기는커녕 죄에서도 절대 해방되지 못함을 아시기 때문 아닙니까?
요한 사도는 특별히 이 서신을 신자에게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저작했습니다. 그 전체 주제는 사랑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연결해서 설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사랑의 기원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이기에 그분의 품 안에 있다면 자연히 죄를 멀리하고 사랑을 행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3:10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슨 죄라도 짓거나 의를 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 사단의 자식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그분과의 교제를 등한히 하여 은혜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서신 말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5:16) 교회 안에 성도가 범죄 즉, 반복적으로 죄를 짓더라도 중보기도해 주라고 권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온전히 회심한 후였음에도 바울 사도는 자기 속에 있는 죄악과 싸우면서 자꾸 패배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처절하게 울부짖었지 않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런데 그 답을 어디에서 찾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롬8:2) 줄 것만 간구했지 않습니까?
결론을 내리자면, 복음이 모든 죄를 용서하는 것은 분명 맞습니다. 그러나 습관적, 반복적, 의도적으로 동일한 죄를 즐기면서 짓고 있다면 복음 안에 들어오지 않은 것도 분명합니다. 최소한 죄에 민감해져 있어야 함에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을 따라가며 의와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아무런 소원이 없다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증거임도 확실합니다. 성령이 내주하고는 그런 상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24/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