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질문]
성경을 읽다보면 뭔 뜻인지도 모를 때가 많고 또 주석을 봐도 어렵긴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지성적으로 그리 모자라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 교양이나 인생 경험이 일천한 것도 아닌 데도 그렇습니다. 왜 성경을 덮고 나면 지우개로 지운 듯이 머리 속에 빈공간만 남는 걸까요? 컨디션이 좋은 날은 이해가 되다가도 덮으면 또 지우개 현상,,,, 읽고 또 읽어도 기억이 가물가물,, ,치매가 올 나이는 한참 남았는데도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요?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궁금히 여기는 의문조차 저에겐 생기지 않고 전혀 생소하게만 들립니다. 성경 내용이 눈에 안 들어오는 것이 아닌데도 항상 성경책을 읽으면서 뭔지 모르지만 2% 정도 부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읽어도 저는 그냥 책으로 읽고 읽습니다.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소설책 읽듯이 읽고 있는 겁니다, 때로는 혹시 남들 앞에 보이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은 아닌지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읽는 것을 중단한 적도 있습니다, 혹시 저의 책 읽는 습관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아님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걸까요?
그래도 제일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마태복음 4:4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살아가면서 잊지 말고 잘 간직해야할 구절로써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사실 너무 초보적이고 우스운 질문 같습니다만 다른 책을 볼 때는 이런 고민을 전혀 안하다가도 성경만 보면 갈등하게 됩니다. 참고로 저는 교회 다닌 지 7년 째 됩니다만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입니다.
[답변]
우선 절대로 우습고도 초보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아주 많은 신자들이 속으로는 끙끙 앓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내거나 감히 질문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질문자님과 같은 고민조차 안하고 무심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이런 고민을 하고 또 감히 질문을 하셨다는 것만도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질문 가운데 이미 핵심적인 답이 숨겨져 있습니다. 성경이란 책의 특성이 바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당신께서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는 절대적 진리를 계시해놓은 책입니다. 인간이 지은 여타 모든 책과는 그 성격이 아예 다릅니다. 비록 인간 저자들을 동원해서 기록토록 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기에 반드시 성령의 조명에 의지해서 읽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정은 그분의 영으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문자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일반 소설처럼 읽으면 아무래도 그 내용을 알 수 없고 기억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기억은커녕 이해조차 되지 않아도 정말 겸손하고도 순수한 마음으로 읽으셨다면 그 읽는 동안에 사실은 하나님의 영이 독자의 영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언젠가는 깨닫게도 해주시고, 또 기억나게도 해주실 수 있는 신비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설교 중에 졸고 있어도 나중에 그 말씀이 그 당사자의 삶 속에서 은혜롭게 역사하는 경우도 있듯이 말입니다.)
너무 형식적 가식적 의무적으로 읽지는 않는지 겁이 났다는 것만 해도 아주 순수한 영혼임을 입증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많은 신자들은 그렇게 생각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질문자님을 서서히 성경의 진리로 이끌고 계시다는 확신이 듭니다. 이 사이트에 가입한지 오래 되지만 최근에서야 열심히 글을 읽고 또 이런 질문까지 주셨으니 말입니다. 아무리 성경이 당장에는 잘 읽히지 않고 제대로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어려움과 갈등이 있다하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마시고 꾸준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그런 면도 있지만 이런 갈등이 생기게 되는 구체적이고도 보편적 이유 또한 몇 가지 있습니다. "보편적"이란 각 개인마다의 고유한 사정 때문에 성경에 대한 이해부터 다른 경우는 제외한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어릴 적에 교회나 성경에 대한 아주 안 좋은 체험이 있다거나, 정신적 신체적 문제가 있어서 집중력과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과학적으로 세밀하게 따지길 좋아해서 아직도 성경을 잘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이유 등이라면 그 해결책은 각기 사정에 따라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이런 특수한 경우 외에 성경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와 그 해결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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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통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추리소설을 제외하고는 어떤 책이라도 목차와 세부제목과 서문 등을 통해서 그 책의 주제나 스토리에 관한 사전 지식을 갖고 읽게 됩니다. 반면에 성경의 목차라고는 전혀 서로 연관되지 않는 것 같은 66권의 제목뿐입니다. 서문은 아예 없는데다 그런 목차로는 처음 성경을 접하는 자나, 어느 정도 교회를 출석한 신자라도 도무지 그 내용을 짐작조차 못합니다.
사실은 성경 스토리를 축약하거나, 핵심주제를 쉽게 설명한 서문을 작성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계시된 진리가 다양하고 그 의미 또한 심오하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사의 제반 문제와 인류 역사 전반의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에 인간이 서문을 단다는 것 자체가 우습고도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일반 책과 아주 크게 다른 점 또 하나는 평생을 두고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 책은 아주 감명 깊게 읽었거나, 전문분야 책이나 사전류처럼 필요할 때마다 참고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반복해서 읽지 않습니다. 신자는 성경을 계속 반복해 읽음으로써 신앙생활의 지표로서 자신의 삶과 인생을 거룩하게 바꾸는 힘을 얻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사전 지식을 가질 수 없는데다 반드시 반복해서 읽어야만 한다는 치명적(?) 약점을 지녔기에 누구에게나 성경은 어렵게 여겨지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성경 전체에 흐르는 스토리와, 일관된 주제들과, 최소한 각 책별로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기본 개념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붙들고서 읽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한 첫 걸음이자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방도는 반드시 책 전체를 여러 번 통독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문 사역자의 도움을 받아서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병행하면 더욱 좋지만 그보다는 우선 혼자서 계속 통독해야 합니다. 통독을 한두 번이라도 한 후에 성경공부를 해도 묻고 배울 것이 더 명료해지고 많아지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교회 십년, 이십년을 다녀도 한 번도 신구약 성경 66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체계적으로 통독하지 않은 분이 꽤 됩니다. 바꿔 말해 성경 통독을 여러 번 하지 않고서 성경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부터 사실은 어폐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어려운데다 수많은 지명, 이름, 연대, 중첩되면서도 모순되어 보이는 부분 등으로 통독의 진도가 도무지 나아가지 않습니다. 통독에서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꼭 이해를 하고 읽겠다는 태도입니다. 어렵거나 지겨우면, 혹은 매일 할당된 양을 어쩌다 놓치면 바로 거기서 읽기를 중단해버립니다. 그래선 결코 통독을 못합니다. 그 부분은 이해 못한 채, 혹은 건너뛰더라도 무조건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신령한 책이라고 서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 같은 내용도, 아니 전혀 통독하지 못할 것 같은 그 방대한 66권이, 꼭 한번이라도 통독하고야 말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겸손한 마음으로 일단 건너뛰더라도 계속 읽어내려 가면 언젠가는 통독이 됩니다. 또 계속 더 읽고 싶어지고 그렇게 여러 번 통독하고 나면 어려운 부분들이 그런대로 시원히 풀린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체계적 구조를 모른다.
물론 성경 통독을 여러 번 했다고 해서 전체나 일부라도 완전하게는 물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성경의 전체 구조에 대해서도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앞에서 성경에는 목차, 세부제목, 서문, 각 책별 주제와 저자의 저작 의도 같은 것들이 없다고 했는데 바로 그런 지식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지식으로 성경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통독을 먼저 권한 이유는 성경의 특성상 그러합니다. 첫째, 이미 말씀드린 대로 통독을 여러 번 하면 자연히 그런 지식까지 알게 됩니다. 둘째는 그와 반대로 그런 지식을 갖고도 성경 읽기에 큰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객관적으로 수용하는 데는 그런 사전 지식은 필수적이고 큰 도움이 됩니다. 반면에 성경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각자의 때와 상황에 맞추어 개인적으로 직접 말씀하시는 경우에는 그런 지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통독하기 전이나 과정 중에, 아니면 통독 후라도 반드시 한 번은 전체 구조를 아셔야 합니다. 최근에는 이와 관련해서 아주 좋은 책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또 일반 성도를 대상으로 하는 관련 세미나도 개별 교회에서나, 제삼의 개인 혹은 기관 주최로 자주 열립니다. 그런 세미나에 꼭 한번은 참여하고, 또 책도 구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대충 훑어보기로라도 한 번은 통독한 후에 그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래야 관련 책이나 세미나가 가르치는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또 최근에는 책별로 서문과 어려운 구절에 대한 주석이 달린 Self- Study 용 성경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가능한 이런 성경을 구해서 반드시 서문은 사전에, 주석은 병행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사실상 질문자님이 갖고 계신 고민의 절반 이상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 전체의 맥을 잡는 관련 (책보다는) 세미나에 꼭 한번 참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책으로 읽는 것보다 세미나에서 전문가의 설명을 듣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또 스터디 성경은 각 책별로 서문은 있으나 그 전체를 이어주는 해설이 없기 때문입니다.
-To be continued.-
성경의 일관된 주제를 모른다.
그런데 간혹 그런 세미나마저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스터디 성경의 서문에 이미 다 나와 있는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고 또 신구약 66권의 외적인 연결구조만 가르치는데 그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책별 주제는 일일이 구분해서 가르치지만 성경 전체를 이어주는 일관된 주제는 놓치거나, 아주 간략하게 겉만 훑고 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전체 스토리를 한 문장으로 간략히 줄이면 "죄에 빠진 인간들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내용적으로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인간의 '창조', 인간의 '타락', 십자가를 통한 '구원', 구원 받은 자의 영광된 '완성'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게 인간을 만들어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최초 인간이 하나님을 고의로 배역하여서 그 후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끊어지는 대신에 사탄의 미혹에 묶이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때가 차매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여 그 죄 값을 치르게 하여서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주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는 하늘에 생명책에 그 이름이 오르고 영생을 이미 이 땅에서부터 얻게 됩니다. 주님이 오신 이후로는 더 많은 죄인의 회개를 긍휼로 기다려 주는 은혜의 시대이지만, 언젠가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인류 역사를 마감하고 최후의 심판과 구원을 완성시킬 것입니다.
성경 66권에 각기 고유한 주제도 있지만 그 책들의 저변에 흐르는 맥은 상기에 설명한 내용대로 전개 됩니다. 요컨대 성경의 주인공은 하나님, 특별히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인간이 창조된 후에 예수님이 꼭 오시어 구원해 주어야만 할 인간의 상황을, 신약은 그분이 오셔서 하신 일과 그 결과와 장래 다시 오심에 대한 계시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해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를 밝힌 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을 어떻게 구원해가시며 결국은 어떻게 결론지어질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읽어야만 합니다.
또 성경이 전체적으로 구원에 관한 책이고 개별 책마다 주제가 있긴 하지만, 모든 구절에 하나님의 그 사랑에 신자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에 관한 세부적인 가르침도 있습니다.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구원, 인간, 죄, 종말, 교회 등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놓았습니다. 따라서 이런 기독교 교리를 알지 않고는, 최소한 알아가려는 소원 없이는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그냥 이스라엘 역사서나 도덕적 계명에 불과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분적 교리에 대한 이해도 반드시 하나님의 구속사에 비추어서 재해석 적용되어져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 성경의 구절별, 책별, 혹은 서로 종합한 어떤 해석이라도 반드시 십자가 복음에 따라 검증되어지고 또 적용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 해석의 키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복음과 그에 따른 핵심 교리를 배우는 일이 성경 읽기와 반드시 병행되어져야만 합니다.
아직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4-16)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해서 당신이 가르치는 천국의 비밀을 알아듣는 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말하자면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해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성경은 완전히 닫힌 책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로 구원 얻어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당연히 활짝 열린 책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기독교에서만은 구원을 얻어야만 온전한 믿음이 생기지, 믿음만 갖고선 구원이 생겼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고 열심히 믿어보려 한다고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구원이 되고 또 온전한 믿음 가운데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지적은 결국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야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면 비로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신(요16장) 그대로입니다.
바울도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고 했는데, 그 깊은 것은 바로 한 죄인이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모시고 살게 되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해서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니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그럼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주라 시인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예수를 믿기로 하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철두철미 추하고 더러운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이 자기 대신에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모든 죄가 양털같이 희어졌고 새 생명을 받았다는 체험적 고백입니다.
다른 말로 정말 예수님께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를 완전히 걸고서 오직 그분 가시는 길을 따라가겠다고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이전과 정반대로 완전히 전환한(참 회개) 자라야, 성경의 진리가 제대로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성경은 전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자 또 그 해석하는 키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한 까닭입니다.
역으로 말해 이런 온전한 믿음이 없이는 성경은 여전히 닫혀 있거나 어려운 책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경 읽기를 포기해선 결코 안 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또 들음은 반드시 성경을 통해야만 합니다. 개인적으로 전도 받거나, 교리 공부를 하더라도 반드시 성경에 근거해야 합니다. 혹시 온전한 믿음이 아직 없더라도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공부하다가 구원의 놀라운 역사는 얼마든지 아니, 자주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照明)을 구하지 않는다.
"먼저 알 것은 경(經)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感動)하심으로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0,21)
성령으로 거듭나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해서 성경을 읽으면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기록될 때에는 인간저자들이 성경의 감동(inspiration)으로 기록했습니다. 후대의 독자들도 성경의 조명(illumination)을 받아 읽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사상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계시이기에, 성령이 가르쳐주어야만 그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초자연적으로 신비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성령님이 말씀의 뜻을 깨우쳐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읽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대해야 합니다. 또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계속 반복해서 읽으면서 앞뒤 문맥에 비추어서 깊이 묵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5-27)
예수님은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푼 고을에서 오히려 회개하는 자가 적은 이유에 대하여 인간적 지혜로만 해석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대신에 아버지의 소원대로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그 권능을 바라보아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성경을 보는 자세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온전히 믿고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적 판단으로 따지려 들어선 잘 이해도 안 되고 미로를 헤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독교의 경전으로만 간주하여서 자신의 교회 생활에 지침이 될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만 얻으려 해선 성령의 조명이 비취지 않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야만 아버지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복음 안에서 온전히 거듭난 신자가 진정으로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기 소원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또 그분의 가신 길을 따라가며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비취는 자로 살겠다는 전적 헌신과 실천을 위해서 성경을 묵상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살아계신 예수님이 지금 바로 나에게 직접 대놓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두렵고 떨리는 확신을 갖고 읽어야 합니다. "주님 지금 제게 말씀하시옵소서. 주님 가라는 곳에 가며, 하라고 하는 일을 하겠습니다. 주님 저를 들어 사용해 주시옵소서."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단지 기독교인이기에 임무로 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동역자로서 나를 통해 그분의 은혜와 권능이 작동하여 당신의 영광만 드러나길 갈망하는 심정으로 읽어야 합니다.
결국은 성경관이 문제다.
결국은 성경을 진짜 하나님이 직접 나에게 말씀하시고 있다고 확신하는 바탕에서 보는지, 아니면 교회 생활에 도움이 되는 종교 경전 정도로 보는지에 따라 성경을 읽는 자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가장 흔하지만 정확한 비유로, 대통령이 친필로 보낸 편지라면 읽고 또 읽고 심지어 액자에 넣어서 벽에 붙여 놓고 아침저녁으로 외우다시피 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나에게 친필로 쓴 연애편지입니다. 골고다 십자가로 그 사랑이 완전하게 확증되었고 또 성령의 거듭남에 따라 그 사랑이 넘치도록 신자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서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이 거룩하고 아름답게 바뀌기를 진정으로 소원한다면 어찌 성경을 아침저녁으로 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침 목회자를 지향하는 대학생이 며칠 전에 "성경을 어떤 관점에서 읽어야 하며, 주관적이 아닌 객관적인 시각으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를 아직 잘 모르겠다."는 질문을 주셨습니다. 본 질문과 사실상 같은 주제인지라 그 답변을 조금 수정 보완하여 아래에 인용하겠습니다.
성경을 읽고 이해 판단 적용하는 방식은 결국 성경이 어떤 책이라고 생각하는지 본인의 성경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우선 성경관은 크게 둘로 나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로서 오늘 날 모든 신자가 믿고 따라야만 한다는 입장과, 이스라엘과 초대교회 사람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체험을 기록한 기독교라는 종교의 경전으로만 간주하는 입장입니다.
각각의 입장에도 다시 둘로 세분화 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로 보아도, 객관적 종교적 진리로서 기독교 교리만 나열한 것인지, 아니면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여 지금도 나에게 직접 말씀하실 수 있다고 보는지에 따라 그 읽는 방식이 달라질 것입니다.
둘째로 단지 인간이 저작한 종교의 경전으로 볼 때에도 그 교리와 계명과 규범이 충분히 선한 모범이 되기에 그대로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보는지, 아니면 인간의 저작인지라 어차피 오류가 많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자기 판단에 옳은 것만 믿고 따르면 된다고 보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당신께서 절대적이고도 변치 않으면서 영원한 진리를 오류 하나 없이 계시해놓은 책입니다.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그분이 성경을 통해 직접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또 그래서 항상 성경에 기록된 객관적 진리를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 자기 인생의 주관적 길잡이로 전환 해석하여서 자신의 믿음과 현실의 삶에 그대로 적용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대해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옳은지?"가 아니라, "성경이란 책이 무엇인지?"여야 합니다. 요컨대 이 질문은 성경관에 따라 그 답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로 지금도 나에게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라고 확신한다면 그 읽는 방식도 자동적으로 정해질 것입니다.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고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진리로 겸비하게 그대로 받아들여서 실현할 것입니다.
질문에서 주관적 혹은 객관적 시각이라고 단순히 구별하셨는데 그것만으로는 조금 애매하고 부족합니다. 성경을 자기 느낌, 기분, 지식, 해석에 따라 읽는 것이 주관적인 해석이라면 마땅히 그래선 안 됩니다. 이는 성경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다 해당되는 말입니다. 객관적인 시각도 위에서 말한 대로 단순히 종교적 계명으로만 보느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읽는 태도가 전혀 달라지니까 말입니다.
반면에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임을 확신하면서도 하나님의 입장(객관적)과 신자의 입장(주관적)에서 각기 다르게 읽혀질 수도 있습니다. 전자는 그분의 은혜, 권능, 주권, 섭리에 치중하면서 해석하는 것이며, 후자는 신자의 도덕적 종교적 의무, 실천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는 어느 쪽이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인간의 순종 헌신 중에 신앙에서 어느 쪽이 더 비중이 높다고 생각하는지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한 쪽에 더 치중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구절은 양쪽 입장을 다 감안하여, 비록 구절에 따라 어느 한 쪽이 더 강조된 것이 있긴 하지만, 해석해야만 합니다. 쉽게 말하면 전자는 하나님의 진리이고, 후자는 삶에의 적용이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성경을 제대로 읽고 해석하려면 성경에 대한, 정확하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대한 믿음이 선결과제입니다. 기술적으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어와 있기에 지금도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말씀을 통해 공급받고자 하는 진정하고도 순수한 열망이 앞서야 합니다.
그런 믿음과 열망이 없이는 성경을 오류가 없는 절대적 진리이자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라고 보지 못합니다. 또 성경이 진정 주님이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당연히 그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면서 성령의 조명을 간구하면서 읽게 됩니다.
나아가 반드시 성경의 사대 주제인 인간의 "창조와 타락과 구원과 완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해야 하고 또 그 이해가 자신의 실제적인 신앙체험으로 전환된 바탕위에서만 읽어야 합니다. 최소한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면서 공부, 연구, 묵상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 66권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그분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외적 구조 및 각 책별로 주제 분석 등은 이런 믿음과 자세가 갖추어진 다음에 필요한 절차입니다. 나아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은 차츰 더 세분화 구체화 되어져야만 합니다. 각 저자의 저작 의도는 물론 당시의 문화, 사회, 경제, 종교적 상황에 견주어 해석해야 하고 문법적 분석 등도 병행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전문 사역자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만 최근에는 주석이 붙은 스터디 성경으로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한국 신자들은 앞뒤 문맥에 비추어 해석하는 면이 너무 부족한 것 같습니다. 한두 구절만 대충 읽고서, 심하면 한두 단어만으로, 문자적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치우는 경향이 너무 농후합니다. 반드시 그 책의 전체 주제와 연결해야 하며, 앞뒤 문맥은 물론, 최소한 그 말씀이 속한 문단 안에서의 뜻은 헤아려야 합니다.
어쨌든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는 왕도(王道)가 없습니다. 통독을 계속 반복하셔야 합니다. 겸손하게 기도하면서 앞뒤 문맥에 비추어 깊이 묵상하셔야 합니다. 의심나는 부분은 주위 성도나 사역자게에 물어서 반드시 납득할 만한 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삶에 실천하여 실제로 증험되는 은혜와 권능을 맛보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성경도 읽는 것이 실제로 재미있어야만 자주, 많이, 계속해서, 깊이 읽게 됩니다. 스스로의 통독과 묵상과 연구와 학습으로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었고 또 그 뜻대로 적용했더니 은혜를 받게 되면 성경 읽기가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읽는 것이 바로 성령이 조명한 것이자, 하나님이 실제로 나에게 직접 말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 읽는 동안 직접 음성으로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뜻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 따라서 상기에 지적한 잘못된 이유들이 한두 개, 아니면 전부 다 해당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성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 구원을 더 깊이 알아야겠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읽으면 됩니다. 처음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어도 겸비함과 진정성을 갖고 읽고 또 읽으면 반드시 성령이 역사하여서 항상 곁에 두는 손때 묻은 성경으로 바뀔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최근에는 성경 읽기가 아주 등한시 되고 있습니다. 정말 말씀이 갈하고 하나님의 묵시가 드물어진 세대입니다. 성경 없이도 하나님이 주시기로만 하면 구원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성숙은 물론,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 제대로 실현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손해가 결코 아닙니다. 그 믿음이 십자가 복음의 말씀 안에서 오직 예수로 바뀌지 않으면 신자의 실제적 삶이 아주 궁핍해집니다. 그저 어떡하든 자기 현실 문제만 해결 받으려는 영적으로 너무나 가난하고 힘들고 지겹고 쳇바퀴 도는 신앙생활, 아니 종교생활 밖에 못하게 됩니다.
특별히 이미지, 감성, 개인주의적 성향에 완전히 젖어버린 젊은이들은 기독교 진리를 알려고도 않고, 아예 성경 자체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모르고 어찌 바른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또 믿음의 올바른 실천이 가능하겠습니까? 개인이 구원받아 천국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라면 예수님이 구태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라곤 없습니다. 참으로 십자가 진리가 바로 선포되어지고 또 선포된 그대로 실현해야할 책임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모든 신자가, 특별히 목회자부터 성경 바로 읽기가 시급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3/11/2011
중간에 "To be continued" 를 그대로 두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