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배고파 죽는 아이도 지옥가나요?
[질문]
무례한 질문 같지만 답변 부탁드립니다.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인 줄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엉터리 같은 질문이지만 항상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누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해오면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어려울 때가 많았습니다.
1. 배고파 죽는 지구상의 어린 자녀들은 천국 가나요. 지옥가나요?
2. 교회도 모르는 북한의 지독한 배고픔으로 죽는 어린아이와 사람은 지옥가나요 천국 가나요?
3. 지옥과 천국을 갔다 왔다는 사람들, 영적으로 뛰어나고 믿음이 넘쳐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사람들, 소위 성령으로 능력 받아 병고치고 쓰러뜨리고 하는 사람들은 천국 가나요?
4. 하나님은 창조유요 만물을 주관 하시는 분인데 왜 지옥에서 자기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을 사탄에게 고통당하게 내벼려 두시는 가요. 지옥의 만유의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 인가요?
5.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평생토록 무릎 닳도록 기도하는 사람과 잘나가는 목사 중 누가 천국 가나요?
[답변]
전혀 무례한 질문이 아닙니다. 일부 교인들마저 북한의 배고파 죽은 아이든 아직 기독교를 접해보지 못한 어른이든 예수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보낸다는 교리에 당혹해 합니다. 불신자들은 당연히 고대의 한국인들처럼 예수를 믿어보려 해도 아예 알 수 있는 가능성마저 차단 된 자를 벌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반발합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충분히 타당한 반발입니다. 저도 불신자 시절에 기독교에 대해 가장 핏대를 세우며 반발했던 부분입니다. 그러나 제가 구원 받은 체험을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본 결과 그 말도 안 되는 엉터리가 말이 될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붙들어야 하는 영원하고도 유일한 절대적 진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외부에서 가졌던 기독교에 대한 의심과 반발을 이왕에 믿게 되었으니까 수정 보완해서 자기 변명으로 삼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완전히 틀렸다”에서 “완전히 옳다”로 바뀌었습니다. 한 쪽의 극단에서 다른 쪽의 극단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일단 믿고 보아야 믿어진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심어주어 그렇게 바뀌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두 진술이 틀렸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외부에선 아주 심각하고 대단하다고 여겼던 반발의 이유들이 제대로 예수를 알고 보니 의외로 쉽게 무너지더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그 동안 예수를 믿는다는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주는 이유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 교리를 받아들이고 계명대로 살지 않았다는 이유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 안 믿었다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심판 받을만한 죄인이니까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든 안 믿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인인데, 배고파 죽는 아이나 오지의 미개인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경우에도 예수를 알고 나서야 만약 내가 그분의 은혜 밖에 계속 있었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음을 진정으로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린아이도 죄인임은 분명하나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입장은 아닙니다. 또 성경이 말하는 바는 구원은 인간의 자격과 조건에 전혀 관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선택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북한의 배고파 죽는 어린아이 가운데도 하나님이 구원 주실 아이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전부다 구원된다든지, 전부다 심판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래에서 설명드리는 내용도 단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원리일 뿐입니다.
그리고 만약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예수 믿기 이전에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 확실하다면 상기 다섯 질문의 해답은 거의 다 나온 셈입니다. 따라서 이 공통 주제를 먼저 다룬 후에 각 세부적 문제에 대해 간단히 코멘트 하는 방식으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죄에 대한 근본적 오해
감옥 안에 있는 자들은 감옥 밖에 있는 자들보다 자기들에게 죄가 더 많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밖에 있는 자들은 자칭 교양과 도덕과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살면서 감옥 갈 죄를 지어도 돈과 권력으로 무마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내면도 자기들과 하나 다를 바 없이 더럽고 추악하다고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그들이 기독교를 접했든 아니 했던, 말로 형제를 바보라 해도 살인한 것이며 여자를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게 모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동뿐 아니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죄도 분명 죄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매일 수십 번씩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착한 사람은 천국 가고 악한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야 공평한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그만큼 불공평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우선 말과 생각으로 짓는 죄만 따져도 한 사람도 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그 중에서도 더 착하고 더 악한 자를 판별할 수 있으리라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어떤 심판의 커트라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예컨대 거짓말을 평생 만 번 했던 자까지는 천국 보내고 만에 한 번만 더한 자부터 지옥 보낸다면 도리어 진짜 말도 안 되는 하나님 아닙니까?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죄를 전부 종합해서 적용하면 모두 사형 받아 마땅하다는데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조금 달라 보입니까? 때가 안 묻고 천진난만해서 죄와는 상관없습니까? 너무나 순진한 생각입니다. 과자와 장난감을 두고 서로 독차지하려고, 그것도 친형제끼리 치고받고 싸웁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거짓말이나 남에게 덮어씌우는 짓도 예사로 합니다. 갓난아기도 엄마의 사정은 전혀 봐주지 않고 편하게만 먹고 마시며 지내려 고집합니다. 마음에 안 들면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나면서부터 그럽니다. 윤리 교육을 아직 받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물론 교육이 어느 정도 죄를 제어하는 효과는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 교육이나 윤리를 최초로 제정한 자는 어떻게 죄와 의를 분별할 수 있었습니까? 교육, 관습, 제도, 법률 등과는 상관없이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고 있음을 모두가 인정했기에 죄를 방어할 장치를 만들어야겠다고 합의한 것 아닙니까? 인간은 교육을 안 받아서 법을 몰라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있기 전부터 요람에서 무덤까지 죽 죄를 짓고 있었던 존재입니다.
어린아이가 순진하다는 것은 단지 죄를 짓는 방법을 세부적으로 잘 알지 못한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날이 갈수록 때가 묻는다는 것도 죄를 양적으로 더 많이 짓는다기보다 더 교묘하고 치사하게 짓고도 마치 죄가 아닌 양 속이고 감추고 변명과 핑계를 대는데 익숙해진다는 뜻입니다. 아이는 위선을 떠는데 미숙할 뿐 어른과 동일한 양과 질의 죄를 짓고 있습니다.
확고한 죄의식이 없이 본성적으로 죄를 지을 뿐이므로 아이 탓이 아니라는 항변도 심각한 결점을 내포합니다. 그럼 아이가 죄를 정확히 분별하여 어른이 되는 시점은 대체 언제라는 말입니까? 무죄로 사면시켜줄 연령제한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이 또한 거짓말의 커트라인처럼 어떤 나이를 정해도 애매모호하고 불공평한 판결이 될 것 아닙니까? 아이들의 지능, 감성, 의지와 처해 있는 상황이 다 다른 것까지 감안하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아이들은 죄가 없기에 심판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되려면, 어른은 스스로 죄를 완전히 극복해 내거나 하나님 기준에 합격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많이 양보해서 완전한 선을 행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죄의 본질과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를 정확하게 분별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른과 아이의 구분조차 불가능하기에 아이는 심판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솔직히 죄에서 자유롭거나 하나님의 의에 합격할 만큼 스스로 의로울 수 있는 어른이 과연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평생을 수도해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아니 그 본질이 무엇인지조차 정확히 깨닫지 못하지 않습니까? 착한 자가 천국 가야 한다는 주장이 도리어 하나님을 불공평하게 매도하는 짓이라는 간단한 진리마저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어른이나 아이나 죄와 연관해선 일자 무식꾼이자 사형수 신세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심판 원리를 모르는 것뿐 아니라 죄를 실제로 짓고 있다면 면에서도 동일합니다. 죄라는 기준으로 아이와 어른을 구분 지을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주위에 아이가 어른 같고 그 반대로 어른이 아이 같은 경우가 얼마든지 많지 않습니까?
나아가 인간끼리 스스로 인식하여 판별하는 죄와 의의 기준이 얼마나 굽어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실례는 부지기수입니다. 노벨상 심사위원회는 분명 당대의 세계 최고 석학으로 윤리적으로도 올바른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 자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히틀러가 평화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물론 전쟁 발발 전에 독일을 단결시키고 주위에 화해의 제스처를 보낼 때였지만, 그가 주창하는 게르만 민족의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구호 뒤에 숨겨진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의 사악하고도 무서운 그림자는 전혀 눈치조차 못했던 것입니다.
또 자기 나라를 세계에 위대하게 부각시킨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 대한 최근의 러시아의 여론 조사에서 스탈린이 3위로 뽑혔지 않습니까? 이순신 장군이 한국에선 영웅이지만 일본인들은 우리가 도요토미를 생각할 때처럼 똑 같이 원수로 여길 것 아닙니까? 아니 우리 국민들 사이에도 박정희는 나라를 부강하게 일군 의로운 영웅과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악한 독재자로 그 평가가 나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단 하나 악을 행하지 않고 오직 선만 베풀었는데도 당시의 도덕적으로 가장 의로운 사회 지도층들이 앞장서서 죽였지 않습니까?
인간이 몽땅 죄인이라는 실증을 들자면 도무지 끝이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는 너무나 보잘것없고 추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인간은 죄의 본질마저 제대로 깨닫지도 못합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몸에 죄의 본성이 완전히 베여져 있기에 심판에서 차별을 둘 정도의 어린이와 어른의 구분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단 한 명도 구원받을 만큼 의롭지 못합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일 뿐입니다.
모두가 죄인이라면?
어른 아이 구분 없이, 그것도 커트라인을 도무지 정할 수조차 없이, 모두가 죄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구원이 가능합니까? 인간 스스로 노력하여 구원 받을만한 의에 이르기가 전혀 불가능하다면 당연히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모두 죽이든지, 모두 살리든지 두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죽이면 죄의 문제는 해결되는데 사랑은 아예 배제 됩니다. 인간을 창조하여 이 땅을 대신 다스리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완전 수포로 돌아갑니다. 반대로 모두 살리면 죄는 그대로 살아 있기에 공의가 실종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왜곡된 상태 그대로 지속됩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직접 그 죄책을 다 감당하셔서 죽는 대신에 인간 죄인들을 살려 주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신 의도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들에게 창조의 목적을 당신께서 직접 다시 바로 잡아주시고 또 그들을 통해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릴 것을 전제로 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으로선 유일한 구원책입니다.
이는 인간 사회에서도, 특별히 나쁜 행동을 저지른 아이에게 가장 좋은 구원책이 됩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율곡이 잘못하자 어머니 신사임당이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두드렸던 일화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됩니다. 야단만 치면 도리어 반발할 것이며, 가만 놔두면 더 방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죄를 대신 짊어짐으로써 자식에 대한 사랑과 공의가 실현되듯이 예수님의 죽으심도 동일합니다. 십자가에서 인류 전체의 죄책에 대한 공의와 사랑을 완전히 충족시킨 예수를 믿는 자라야 구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객관적 교리로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나를 대신해 그분이 죽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자기 내면의 실체가 정말로 썩어빠져 너무나 더러울 뿐 아니라 인간적 방안으로는 그 추함을 씻을 길이 전혀 없다고 온전하게 실토하는 것입니다. 선행, 수도, 고행, 회개, 심지어 종교에 아무리 의존해 봐도 진정한 평강과 안락을 누릴 길이 없음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실현한 사랑에 완전히 항복하고 그분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자칫 이마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종교적 관념론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완전히 썩어빠진 존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스스로 이해하여 그분 앞에 항복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이 선행(先行) 되어 그 내면의 썩은 실체를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동안 사단에게 묶여 있던 인간의 영에 작동해 나면서부터 죄인인 자를 새로운 피조물로 바꿔주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의식하든 못하든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인격적 만남이 먼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도무지 이해 안 되고 아무 이유 없이 싫고 미웠던 예수가 불현듯 그저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나 같은 죽을 죄인도 사랑하시어 먼저 찾아와 나를 받아 주셨고 앞으로 영원토록 나와 동행해 주시리라는 사실은 분명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그 크신 사랑 앞에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 아니 당장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저절로 고백케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생각, 말, 행동으로 지은 윤리적 죄를 도덕적으로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 전부가 전적으로 타락해 있었음을 실토하게 됩니다. 차후로는 예수님의 사랑과 인도 없이는 도무지 살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짝하고 지낸 세상 형통과 안락은 뒷전으로 완전히 밀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소망하게 됩니다. 남들에게 논리적 설명이 불가함은 물론 그 구체적 과정을 자신마저 알 수 없는 이런 변화야말로 바로 성령의 간섭임을 입증하지 않습니까?
죄를 지어 죄인이 되었다면 그 지은 구체적 죄를 회개하고 보상하면 구원이 됩니다. 그러나 나면서 죄에 물든 죄인이었다면 이미 그런 죄인이 되어있는 인간 스스로는 도무지 어쩔 방도가 없습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거듭나게 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요컨대 죄의 진짜 본질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단절되어 그 영혼이 타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내면의 썩어빠진 실체에서 모든 악한 생각이, 또 그 악한 생각에서 추한 말이, 또 그런 생각과 말들이 더러운 행동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쪽에서 먼저 간섭하여 타락된 영혼을 깨끗케 해주어서 당신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참 의미입니다.
물에서 건짐을 받은 자의 입장
밤중에 찾아와 구원의 길을 물은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후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 받은 것이니라.”(요3:16-18)
성령의 간섭으로 당신을 믿어서 영생을 얻는다는 의미를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특별히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심판이지 따로 더 받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날 때부터 하나님을 거부하고 원수 된 채로 태어나서 그분의 진노 아래 있었는데 예수를 믿지 않았기에 그 상태가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채 그대로 죽으니까 끝까지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생전에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심판을 별도로 더해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가 지옥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뜻이 (따로) 심판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구원을 주기 위한 목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북한의 배고파 죽는 아이가 심판을 받는 것도 그가 행동으로 행한 죄악이나 예수를 믿지 못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의 은혜가 그에게는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비유컨대 모든 인간은 나자마자 죄와 사단과 사망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다 죽는 신분입니다. 도저히 그 바다에서 건짐을 받을 길이라고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북한의 배고파 죽는 아이나, 남한의 도덕적으로 의로운 비기독교인 어른이나 똑 같이 그러합니다. 그중에 예수님이 구원을 주실 자는 물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따로 심판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바다에 그냥 잠겨 있는 채 죽는 것입니다.
인간이 처한 이런 비참한 상황은 아담이 원죄로 인해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담이 낙원에서 쫓겨나오는 벌을 받지 않고 남아서 생명나무를 따먹었다면 인간 구원의 길은 영영 없어졌을 것입니다. 선택에 의해 바다에서 일부라도 건질 방도조차 원천적으로 차단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죄악의 바다에 빠지더라도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기로 계획한 바가 있었기에 생명나무를 천국으로 옮긴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모든 인간이 죄악의 바다에 빠져 있는 것은 벌이 아니라 복입니다.
그 원죄마저 없게, 즉 아담의 타락마저 막아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흔히 듣는 항변도 아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을 자유의지가 전혀 없는 로봇이나, 죄와는 완전히 무관한 말하자면 예수님(하나님) 같이 만들어주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차라리 인간으로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것을 아시고도 자유의지를 허락한 것은 인간더러 오히려 선을 적극적으로 기뻐하며 기꺼이 실천케 하려는 방도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그 기대를 무참히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성령의 거듭남으로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을 알고 누리게 된 신자들로 세상에 그런 선을 실천케 하려는 것이 그분의 십자가의 진정한 뜻인 것입니다.
왜 나머지 모두를 선택해 주지 않느냐고, 최소한 죄 없는(?) 어린이라도 물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나님께 따질 수는 없습니다. 이미 설명한 대로 어린이의 구원 받을 연령과 상태를 어디까지로 정할 것인지가 하나님에게마저 애매합니다. 예컨대 젓 떼기 전까지로 정하면 방금 젓 뗀 어린이는 구원 안 해 주어도 된다는 또 다른 불공평이 나타납니다. 그 반대로 아이가 의롭지 않은데 단지 어리다는 이유로 구원해주었다면 이제 의롭게 사는 어른이 불공평을 당하는 셈입니다.
어리거나 늙은 노인이거나 죄인으로 태어나긴 마찬가지라는 뜻이 모든 인간이 포악한 성품과 악하고 추한 습성만 갖고 출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끊어진 상태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을 멀리한 상태이기에 모든 도덕적 죄악도 따라오게 된다는 것이며 당연히 그런 죄악을 씻을 길도 하나님께로 온전히 항복하고 돌아가는 길 뿐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설명해 주어도 이해는커녕 도무지 말도 안 된다는 반발만 부릅니다. 반면에 죽을 죄인이었던 자신에게 공로라고는 전혀 없었음에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거듭나는 체험을 실제로 한 자에게는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진리가 됩니다. (중생은 분명히 했는데도 말씀을 공부하지 못해 구원받은 의미를 미처 모르는 교인은 있을 수 있습니다.)
비유컨대 모두 물에 빠져 폭포로 떠내려가고 있는데 헬리콥터가 와서 던져준 구명 튜브로 목숨을 건진 자라면 구조대에게 나머지 사람들은 왜 건져주지 않느냐고 절대 항변하지 않습니다. 평생을 두고 은인으로 삼아 자신이 구조 받은 것만 감사할 따름입니다. 물론 아직 건져지지 않은 자들을 자연히 아주 불쌍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구조대 대원으로 자원해서 평생을 바쳐 헌신하게 됩니다. 반대로 물에 여전히 빠져 있는 자의 입장에선 왜 저 사람만 구조해주느냐, 왜 단지 예수 믿었다는 이유로 천국 보내고 우리는 지옥 보내느냐고 항변하게 마련입니다. 물에 빠져 있는 이유가 순전히 자신들의 잘못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믿지 않는 것으로 심판을 이미 받았고 따로 더 받을 벌이 없다고 말씀하신 후에 무슨 말씀을 덧붙였습니까?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19-21)
불신자들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렇다는 뜻이지 정작 당사자들은 그 안에서 아주 즐기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않고 구태여 알아보려 시도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도 종교적 합리성의 부족이 이유가 아니라 세상의 형통과 쾌락을 따라 살기에 영원한 심판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둠 속에서 죽을 때까지 살기로 의도적으로 작정한 자들이기에 죽은 후에도 어둠 속에 영원히 갇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련하고 걸림돌이 되는 십자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된 자만이 십자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신자가 불신자보다 도덕적으로 더 성결하거나 영적으로 더 신령하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당연히 아이들 포함해) 죄악의 바다에 빠져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구명 튜브를 던져주는 순간 즉, 성령이 자신의 영에 간섭하게 되면 그 바다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사실은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다르고도 올바른 인생이 이 땅에서도 예수님의 품 안에서 충분히 가능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온 자신의 지난 삶이 얼마나 헛되었는지 절감하게 됩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아무리 풍족하고 화려하게 채워도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리며 사는 한에는 온전한 평강과 위로와 자유가 없었음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있는 자신의 진정한 실체가 도저히 구제 받을 수 없는 추악한 죄인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지난 실패와 허물과 죄악들 전부가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았던 데서 파생된 것임을 철두철미 알게 됩니다.
사단의 종이 되어 지옥으로 바로 떨어져야 했던 사형수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의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올라갔을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인생도 오직 그분의 은혜와 권능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극적 반전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했던 자신이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섭리로 구원 받았기에,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평생을 두고 그분께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돌릴 수 있게 됩니다. 누가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아도 기꺼이 오직 예수님의 뜻을 좇아 완전히 새롭게 바뀐 방식으로 살게 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성령으로 거듭나는 은혜 가운데 들지 못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기에 누구나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모두가 지옥으로 떨어질 천하의 죄인이며, 굶어서 죽는 어린아이까지도 그렇다고 하는데 누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는 자신의 영적 실체가 단 하나도 선하고 의로운 구석이라고는 없었기에 하나님이 베푸신 일방적이고도 무한한 사랑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실토하는 자입니다. 더 이상 낮아질 데가 없이 심령이 가난해져 애통해 하는 자가 천국을 보는 복이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는 오직 옛 사람이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어진 자에게만 덧입혀집니다.
바꿔 말해 지금껏 드린 제 설명을 불신자들에게 아무리 전해봐야 소귀에 경 읽기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불신자들의 반발에 대한 신자 자신의 확신의 근거로 삼아야 합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의미를 자신의 체험을 성경과 대비하여 구원을 얻은 온전한 지혜로 소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벧전3:15) 해야 합니다.
아무리 불신자들이 선뜻 이해하고 동의는 못할지언정 위와 같은 내용들로 변증하려 시도는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어 그런 설명이 이해될 수 있게끔 하는 일은 오직 성령님의 몫입니다. 신자는 단지 불신자를 진정으로 불쌍히 여겨 유일하고도 영원한 십자가 진리를 두려움과 온유로 전하되 계속해서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섬겨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가 먼저이고 그에 따른 인간의 반응이 합쳐진 것입니다. 갓난아이를 포함해 모든 사람은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그 중에 구원 받고 안 받고는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달렸습니다. 그럼에도 구원 받은 죄인 쪽에선 자신이 완전히 깨어지는 체험과 예수님을 스승이 아닌 구주로 모시는 믿음의 결단이 반드시 따릅니다. 이 둘 외에 다른 어떤 조건, 자격, 신분, 공적도 구원을 성립시킬, 아니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요소조차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상기 다섯 질문에 묘사된 인간의 상태는 단지 외적 조건일 뿐으로 구원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한 가지 이유로 심판 받는 것이 인간의 눈에 불공평해보일지 몰라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단 한 치도 손상을 주지 못합니다. 구원 받지 못한 자는 처음부터 죽을 운명이기에 죽게 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구원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방도는 그래서 더더욱 예수를 시급히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에 반박하는 불신자들을 너무나 자주 마주칩니다. 아니 신자 자신이 이전에는 바로 그랬습니다. 그런 문제에 정확하게 대답할 자신이 없으면 안 하셔도 되고 솔직히 모른다고 대답해도 됩니다. 반면에 그들에게 꼭 권해야 할 말이 따로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구원 받고 못 받고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지금 급한 것은 오히려 당신이지 않느냐? 당신의 영적 실체를 진짜 솔직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그분의 사랑과 공의에 비추어 살펴보라. 정말 하늘을 우러러 죄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느냐? 말로 생각으로 지은 죄는 어떠하냐? 아니 최소한 감옥에 있는 자보다 더 의롭다고 자신할 수 있느냐? 그리고 그 죄를 당신이 씻을 수 있느냐? 나아가 과연 왜 이 땅에 이런 모습으로 살게 되었는지에 관한 해답은 갖고 있느냐? 진지하게 따져 보기라도 했는가? 그래서 지금 정말 참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느냐?”
말하자면 상대가 아무리 많은 반발을 하고 또 신자가 제대로 변증을 못해도 정작 본인이 구원 받는 문제는 그런 것과는 별도로 궁극적으로 하나님 그분께 달렸다는 것을 주지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전혀 필요 없을 정도로 의로운지,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스스로 의로워질 자신이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보라고 촉구하셔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어린이를 포함해 모든 이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다면 아이들마저 심판 받는 것을 두고 구태여 문제 삼을 것 없습니다. 벌 받아 마땅한 이에게 벌 주는 것을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죽어 마땅한 자를 아무 공적 없이 영생을 주시는 것이 도리어 불공평한 것 아닙니까?
만약 모든 이가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이 안 되면 어떤 설명으로도 상기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지 못합니다. 반면에 그 사실이 납득이 된다면 다섯 질문의 기본적인 답은 이미 다 나온 셈입니다. 이런 전제 하에 궁금해 하신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선 간단하게 답을 드리겠습니다.
다섯 질문에 대한 답변
1. 배고파 죽는 지구상의 어린 자녀들은 천국 가나요. 지옥가나요? / 2. 교회도 모르는 북한의 지독한 배고픔으로 죽는 어린아이와 사람은 지옥가나요 천국 가나요?
이 두 질문은 같은 맥락입니다. 우선 서두에서 말한대로 하나님의 절대적 선택에 의해 구원받을 아이는 분명 있을 것이며 그것은 오직 그분의 신비와 은혜에 속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배고파 일찍 죽는 아이들도 달리 고려할 요소가 없다면 지옥으로 갑니다. 모든 인간이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전제가 인정이 되지 않으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답변입니다.
만약 그 반대로 모든 인간이 본질상 선하게 태어났거나, 하나님의 기준에 들만큼 충분히 선해질 수 있다고 하면 예수님이 구태여 인간으로 오셔서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당신께서 인간의 죄책을 모두 감당하는 대신에 당신 앞으로 돌아오는 죄인은 구원주시기로 한 은혜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배고파 죽는 아이들이 언제 구원을 얻을 만한 조건을 스스로 이룰 수 있습니까? 오히려 모두 도적질하기 바쁠 것 아닙니까? 흥미롭게도 불신자의 반발이 타당하다고 쳐도 예수님의 은혜가 더 필요한 것 아닙니까?
이 두 질문을 달리 표현하자면 예수를 믿을 여유도 없이 일찍 배고파 죽게 만든 것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이들이 배고파 죽도록 방치하지 않았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어떤 죄악도 몽땅 없애달라는 주문입니다.
이 땅의 죄악은 거의 전부가 죄에 찌든 인간과 그 인간들을 멋대로 조종하는 사단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연단하여 그 믿음을 정금같이 만드시려는 시험이나, 구원 주기로 선택한 불신자를 강권적으로 간섭하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 쪽에서 환난을 일부러 계획 내지 시행하지는 않습니다. (자연적 재앙은 다른 의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먹고 남을 정도의 생존 여건을 이미 충족하게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런 여건을 망친 쪽은 인간입니다. 자기 가족, 가문, 사회, 민족, 나라가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서로 많이 손쉽게 먼저 좋은 것으로 차지하려는 경쟁 때문에 굶어 죽습니다.
실감나게 설명하면 미국의 버리는 음식으로 아프리카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남한의 버리는 음식으로 북한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나 북한이 농사를 전혀 짓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런데도 세계 각국에서 보낸 구호식량이 북한의 군량미나 특권층의 사치에, 아프리카의 경우 독재자의 치부에 전용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과연 아이들이 굶어죽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 중에 누구의 탓입니까?
그럼 그런 악독한 자들마저 하나님이 다 막아주셔야 하지 않느냐는 것은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순환논법 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어야 했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주지 말았어야 했고, 인간은 아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결론 밖에 도달하지 않습니다. 아무 이유 없어 보이는 재앙도 사실은 인간의 잘못이 대부분입니다. (이 주제에 관해선 특별히 성경문답 사이트의 # 113 글 “재앙을 방관하는 하나님을 못 믿겠다고 합니다.”를 참조 바랍니다.)
북한의 굶어 죽는 아이들에 대해 세상의 반응 내지 대책은 두 가지입니다. 구호식량이 다른 용도로 빠져나갈지라도 결국은 북한 주민이 먹으니까 구태여 따지지 말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과, 그보다는 북한 체제를 하루 속히 자유민주체제로 유도 전환시키는 것이 더 근본적인 대책이 된다고 합니다. 신자들도 둘 중 어느 쪽이 더 성경적인지 논쟁하느라 바쁩니다.
그러나 전자의 대책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북한 정권을 연장시켜주는, 다른 말로 악한 세력을 도와주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후자는 근본적 대책은 될지언정 시간이 걸리고 자칫 남북 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역효과가 따릅니다. 인간의 불완전한 지혜에서 나온 대책은 아무리 좋아보여도 여전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입장은 조금 다릅니다. 아무도 예상치 않은 시기와 방식으로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것처럼 반드시 하나님이 간섭하셔야 남북 간의 전쟁도 방지되고 북한이 변화되며 기아 문제까지 한꺼번에 완벽하게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역사를 주관하고 세상을 통치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 두 가지 대책을 세워 추진하기 이전에 북한의 인권, 자유, 경제를 위해서 아니 그보다는 복음화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만의 방식과 때에 따라 북한 주민을 해방시켜 주십니다. 북한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주민이 예수를 모른 채 영원한 심판으로 향해 가는 것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더더욱 북한 선교와 자유화를 위해 기도하고 또 직접 돕고 섬기는 사역에 나서야 합니다. 탈북주민 중에 복음 안에서 진정으로 변화된 자들이 목숨을 걸고 다시 북한으로 되돌아가지 않습니까?
북한의 상태는 죄의 바다에 빠진 인간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빚어진 불행입니다. 하나님 쪽에 책임이 전혀 귀착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되 당신의 십자가 진리를 제대로 알고 따르는 신자들을 통해 구원하려고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역사에 적극적으로, 혹시 여유와 기회가 안 닿으면 최소한 기도로라도, 동참해야 합니다.
3. 지옥과 천국을 갔다 왔다는 사람들, 영적으로 뛰어나고 믿음이 넘쳐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사람들, 소위 성령으로 능력 받아 병고치고 쓰러뜨리고 하는 사람들은 천국 가나요?
재차 강조하지만 인간의, 심지어 기독교인 중에서도, 외적 조건이나 행함으로는 구원 받았는지 또 받을 수 있는지 여부를 판별할 수 없습니다. 초자연적 능력과 체험은 사단도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무당도 신령한 체험을 하고 병 고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구원 받은 여부는 오직 하나님과 본인만 알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자신의 영적 실체가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 안에 있고 신령한 체험을 했고 병 고치는 능력을 발휘한다고 다 구원을 받았다고 보증하지 못합니다. 구원 받은 자 중에 그런 체험을 하고 은사를 받은 자는 있을 수 있더라도 말입니다.
만약 진정한 중생은 없이 신령한 체험과 능력만 있다면 천국과는 거리가 멉니다. 중생을 판별하는 기준은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지 여부입니다. 자기의 의와 명예와 권세와 부는 뒷전이고, 아니 바울 사도처럼 아예 관심도 없이, 오직 이 땅의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또 성도들의 모임 뿐 아니라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주님의 사랑을 확장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는 죽되 남을 살리며 교회의 덕을 높이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말로는 기독교나 예수를 강조해도 사람들로 예수를 믿고 따르게 하는 일과는 관계없고 오히려 그들 사이에 분열 반목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단순히 외적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의 중생의 체험만이 구원의 기준입니다.
4. 하나님은 창조유요 만물을 주관 하시는 분인데 왜 지옥에 자기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을 지옥의 사탄에게 고통당하게 내벼려 두시는 가요. 지옥의 만유의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 인가요?
우선 모든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 인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게 만들어진 형상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분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 즉 끊어졌던 인간과의 관계를 다시 잇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 먼저 성령으로 간섭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는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던 그 형상이 회복되어지지 않은 상태로 계속 이어지는 것뿐입니다.
만약에 그것마저 막아 주어야 한다면 몇 번 이야기 한 대로 다시 순환논법으로 돌아가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의 창조마저 부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창조를 부인하는 진화론자들은 도무지 예수님을, 아니 구원과 심판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예 알아볼 생각도 않습니다. 구원과 심판을 무시하고 이 땅을 전부로만 알고 사는 자마저 형상을 회복시켜 천국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만유의 주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즉,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거부한 자들을 지옥에 보내어 심판하십니다. 지옥의 사탄은 그 지옥의 실제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만들어 놓은 영역 안에서 한정적으로 주인 행세하도록 위임 받았을 뿐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는 사단도 함께 영원한 불 못으로 떨어집니다.
5.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평생토록 무릎 닳도록 기도하는 사람과 잘나가는 목사 중 누가 천국 가나요?
재삼재사 말하지만 구원은 인간의 외적 조건으로 절대 결정되지 않습니다. 오직 본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 완전히 항복했는지 여부에 달렸습니다. 아무리 잘 나가는 목사라 해도 그런 중생의 체험이 없으면 구원을 아직 받지 않았고 예수님을 종교 교리로만 알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서 제대로 구원 받지 않은 목사의 목회는 언젠가는 반드시 그 부작용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절대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그 영광을 당신 스스로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평생토록 무릎 닳도록 기도하는 사람은, 그 표현이 모호하긴 해도, 구원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 당신과 또 그분의 십자가에 드러나는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경륜만이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란 바로 그 진리를 알고 믿고 소유하고 있는 자입니다. 따로 진리를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처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귀하기에 세상의 모든 것들은 배설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소유한 이후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예수님께 구원 받은 뜻을 순종하며 헌신하는 일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고 자신을 통해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 평생을 두고 무릎이 닳도록 기도하게 됩니다.
물론 교회 안에는 아직도 중생을 하지 않아서 믿음을 갖고자, 말하자면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엄밀히 말해 신자(信者)가 아니라 교회의 멤버로서 교인(敎人)이자, 아직 진리를 찾고 있는 구도자(求道者 Truth Seeker)일 뿐입니다.
만약 질문의 의도가 구원은 외모보다 심령의 진실성에 달렸다는 의미라면 맞습니다. 그렇지 않고 정말 인간 스스로 도를 닦고 수양하듯 진리를 추구한다는 의미라면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만 구원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며, 또 그렇게 하는 이유도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스스로는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영적으로 완전히 부패해 있기 때문입니다.
2/2/2009
이 사이트에 이미 게재한 비슷한 주제의 아래 글들을 함께 참조하시면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145 원죄가 과연 유전되는지요?
123 기독교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도 지옥 갑니까?
113 재앙을 방관하는 하나님을 못 믿겠다고 합니다.
48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나요? 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