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 기도를 하는 의미는?
[질문]
금식기도에 관해 질문 드립니다. 믿지 않는 주변 친구가 왜 밥을 굶어 가면서까지 기도를 하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악의는 없이 그냥 순수한 궁금증이었습니다. 저로선 “그냥 내가 해보니 좋더라.” 외에는 딱히 대답해 줄 말이 없더군요. 예전에 3일 금식을 해본 적 있는데 확실히 기도도 많이 하게 되고 금식이 끝나갈수록 영적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먹고 싶은 것들이 자꾸 떠올라서 각기 장단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금식 기간 중에 성경말씀과 목사님 설교에 집중하고 싶어도 금식 끝나고 뭘 먹을지 자꾸 생각나더군요. 그것도 평소에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온갖 것들이 말입니다. 제가 식탐이 좀 강한 편이긴 합니다만....
성경에서도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라는 이사야서의 기록이나, 예수님께서도 40일 금식하셨다는 기록을 보면 금식이 끼치는 유익이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뭔지 명확하게 감을 잡지 못하겠습니다. 금식기도는 왜 하는 것인지, 왜 하필 '밥을 굶으며 기도해야 하는지 성경적인 근거가 궁금합니다. 믿음이 약한 신자 친구나 불신자 친구들에게 합당하게 설명해 주고 싶습니다.
[답변]
금식기도의 의미는 심중하며 그 실제적 유익도 큽니다. 예수님도 공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40일 간 금식했으며, 구약에선 하나님이 특정한 날을 율법으로 정해 시행하라고 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질문하신 대로 많은 신자들이 금식의 의미를 온전히 모르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잘못 가르쳐지고 있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괴롭게 하라. - 구약의 금식
“너희는 영원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이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安息日)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레 16:29-31)
레위기 16장은 일 년에 하루 대제사장이 전 백성의 죄를 속죄하려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속죄일에 관한 규례입니다. 그날은 모든 백성이 하루 금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괴롭게”(afflicting ones's soul)한다는 것이 바로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먹고 마시지 못하는 금식을 뜻합니다. 또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하는 것에는 목욕, 기름 바르는 일, 신발 싣는 것, 일상적 부부관계 등이 포함됩니다.
“큰 안식일”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스라엘은 음력을 지켰기에 칠월 십일이 마침 안식일과 겹치면 이 규례가 기존의 안식일 규정을 대체한다는 뜻입니다. 원어로 “안식의 안식일”이라고 표현되었기에 안식일 중의 안식일 또는 가장 큰 안식을 얻는 안식일이라는 뜻입니다. 대속죄일을 진정으로 신실하게 지키라고 특별히 강조한 것입니다.
또 안식을 속죄와 연결시켰다는 면에서 큰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은 반드시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되어야만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존과 역사 전부를 통치하실 뿐 아니라 모든 선한 것이 그분께로 오기에 죄로 인해 그분과의 관계에 틈과 왜곡이 생기면 안식을 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 큰 안식일이라고 했으니 일상적 안식일도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가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 근본 목적도 바로 공동체나 개인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말로는 “스스로 괴롭게 하라”라고 동작의 대상이나 의미가 분명하지 않지만, 영어 번역은 생각 혹은 마음(soul)을 괴롭게 즉, 진정으로 참회하라는 의미가 드러납니다. (금식은 반드시 기도를 동반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단지 건강상 이유로 절제하는 것에 불과해집니다. 이 답변 글에서 단순히 금식이라고 표현되었어도 금식기도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여러 정황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금식이 행해졌지만 그 기본 맥락은 회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며(왕상21:9, 느9:1), 전쟁을 앞두고(삿20:26, 삼상7:6, 28:7-20), 임박한 국가적 위험을 맞아서(대하 20:3, 렘 36:9, 스 8:21, 느 1:4, 에4:3), 아픈 자의 치유를 위해(삼하12:16, 시35:13), 죽은 자를 애곡하며(삼상31:13, 대상10:12, 삼하2:12) 등의 이유로 금식을 했습니다. 직접적인 회개 말고도 전쟁과 국가적 위험과 질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려면 마땅히 자기들 죄부터 씻어야만 합니다. 죽은 자를 애곡하는 것도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 앞에 연약한 피조물로서의 겸비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종교적 동기와 별개로 개인적인 사유로 분노에 차서 금식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 브닌나에게 모멸을 당해서(삼상1:7), 요나단은 절친인 다윗에게 사울이 창을 던지자 분노에 차서(삼상20:34),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사지 못해(왕상21:4) 금식한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여 낳은 아들의 치유를 위해 금식한 것은 선지자 나단의 지적을 받고 하나님께 참회했기에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어쨌든 하나님 앞에 참회하려는 직접적 동기가 없었어도 제 삼자(한나와 요나단의 경우), 혹은 본인(아합의 경우)의 죄와 연결된 금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모세는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한 율법을 전수받을 때에 40 주야를 금식했습니다.(출34:28, 신9:9)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온전하게 세워서 그분의 계시를 받으려는 뜻이었습니다. 다니엘도 동일한 의도로 금식했습니다.(단9:3) 모세는 또 산에서 내려왔더니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음란한 죄를 범하자 돌 판을 깬 후에 백성들의 사죄를 받고자 똑 같이 40 주야를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신9:18)
신랑을 잃은 후에 금식하라. - 신약의 금식
우선 예수님은 공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 주야를 금식했습니다. 모세 같은 선지자 즉, 메시아로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사역을 준비한 것입니다. 주님의 예표였던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서 또 백성의 죄를 사하려고 두 번이나 40주야를 금식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사역 전에 한번만 40주야를 금식했지만, 백성의 죄는 당신께서 직접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사해주었던 것입니다.
신약시대를 여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침례 요한의 제자들은 경건의 훈련으로 금식을 시행했습니다.(막2:18, 눅5:33) 반면에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금식에 등한히 한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주님은 신랑을 뺏긴 후에 금식할 때가 온다고 답했습니다.(마9:14, 막2:18,19 눅5:33-35) 예수님의 비참한 십자가 죽음을 애곡하게 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금식을 통해 생명까지 하나님께 바치는 온전한 종들로 준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눅18:12) 경건한 유대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을 금식일로 지켰으며 그 사실을 자랑하며 하나님 앞에서마저 자신의 의로 내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외식적, 위선적, 형식적으로 금식하지 말며 금식할 때는 남들이 알지 못하게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며 더 깨끗케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밀히 행할 때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마6:16-18)
신약에서 금식은 주로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구약의 동기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여 선지자 안나는 성전에서 섬기고 금식하며 메시아 보기를 기다렸고(눅2:37),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금식했고(행9:9), 고넬료는 금식 중에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행10:30)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기 전에 교회는 금식했고(행13:2,3), 기도할 때 부부가 각방을 따로 쓰라는 권면(고전7:5)이 바로 금식하며 부부관계도 갖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당신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야 금식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주로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위선적 금식 말고도 아주 잘못된 금식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일 때까지 금식하기로 결의했습니다.(행23:12,14) 금식한 모습을 자랑하는 것을 넘어 악행을 모의하고는 그 일을 수행할 결의를 높이려는 가증한 죄였습니다. 종교적 경건마저 얼마든지 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예입니다.
왜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가?
살펴본 대로 금식은 개인이든 공동체든 간에 일상적인 경우보다 비상 상황에서 이뤄졌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 혹은 간섭이 절실하거나, 그분의 뜻을 간절히 묻거나 계시를 받고자 할 때에, 주의 종으로서 그분의 일에 충성하려는 결의 내지 준비로 행했습니다. 또 그런 동기들이 달성되려면 무엇보다 그분과의 관계를 바로 세워야 하기에 모든 금식 기도에는 자신과 공동체의 죄를 참회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비상상황의 기도에서 금식의 방식을 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 요소입니다. 그것마저 금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 즉, 전부를 온전히 주님께 의탁한다는 온전한 헌신의 표식입니다. 살고 죽음 자체가 주님께 있듯이 이 큰 문제의 해결 내지 응답 또한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임박한 전쟁 같은 경우에 금식하는 이유도 꼭 승리하게 해달라는 간구이기도 하지만, 생사가 달린 전쟁을 오직 하나님이 주관해 주시고 자기들 목숨도 주님께 완전히 의탁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바치려면 죄가 남은 채로는 불가능하며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차 강조하지만 철저한 회개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구약시대에 재를 뒤집어쓰거나, 굵은 베를 걸치거나, 옷을 찢는 행동이 바로 처절한 회개의 상징이었습니다. 참회와 무관하게 개인적 헌신의 표시이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거나, 특별한 기도 응답을 바랄 때는 구태여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금식 때마다 그런 형식을, 최소한 재를 뒤집어썼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금식할 때에 얼굴을 일부러 흉하게 하지 말며,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지적한 까닭입니다. 또 신약 시대에선 심령으로 진정한 회개를 하면 되지 구태여 그런 의식을 곁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기록으로는 최초의 금식기도는 모세가 행했습니다. 율법을 받기 전에 40 주야를 금식했습니다. 그리고서 율법의 대속죄일의 금식 규례를 받습니다. 어떤 뜻이 됩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전에 금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성령의 특별한 인도를 받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미 그전에 금식기도의 관습이 일반화되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생전 처음 하는 금식부터 40일이나 하라고 성령이 지시할 수는 없습니다.
추측컨대 금식의 유익을 많은 이들이 오래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현대 의학도 식사를 하지 않으면 피가 배 대신에 머리로 몰린다고 증명하듯이 소식 내지 금식하면 머리가 아주 맑아집니다. 고대에는 먹을 것이 부족해 굶는 일이 다반사라 누구나 쉽게 그런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고래로 모든 종교에서 경건의 훈련에 금식기도가 포함되는 까닭입니다. 머리가 맑아진 상태에서 참회는 물론 기도가 더 잘 될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또 금식기도하며 진심으로 참회하며 헌신되었다면 자연히 영적 충만감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충만이 깊어지면 초자연적 체험도 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40일 금식으로 자기 육신적 죄의 본성과 정욕은 물론 일상생각마저 다 죽이고서 그 영으로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거룩한 율법을 수여했습니다. 예수님도 40일 금식을 마치자 당신의 메시아 직분과 앞으로 행할 사역에 관해 사단이 시험을 걸어온 것입니다.
잘못된 금식과 그 부작용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면서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하면서 금식하면 하나님과 영과 영으로 소통이 가능케 됩니다. 이런 유익을 많이 체험한 유대인들로선 필연적으로 금식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은 초기 유대인들도 이전 습관대로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되 유대교와 차별하기 위해 수요일과 금요일에 행했습니다. 초대교부 중의 한 사람인 클레멘트는 심지어 기도보다 금식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무엇이나 과유불급이듯이 금식의 유익이 강조되면 새로운 결점도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살인 모의를 위한 금식이나 바리새인의 위선적 금식 말고도, 금식 자체를 너무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마치 금식 기도만 하면 기도 응답이 잘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순수하고 진정한 금식을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고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했다면 응답이 잘 되는 것이지, 금식이라는 형식을 취했다고 응답이 잘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럼 금식 자체에 기도를 응답시키는 능력이 있는 셈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달린 것입니다.
또 습관적 의무적 형식적 금식을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함으로써 자신들의 종교적 경건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 앞에 뽐내게 됩니다. 금식을 얼마나 자주 또 오래 했는지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신의 의로 내세웁니다. 금식이라는 종교적 형식에만 치중한 것입니다. 그럼 금식만 하면 그만이기에 금식 중에 다른 나쁜 짓을 자행해도 된다는 이상한 논리로 흐르게 됩니다.
나아가 금식의 유익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잘못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해져서 초자연적 체험을 하는 즐거움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금식(기도) 중에 떠오르는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계시로 착각하기도 하며, 일상사를 완전히 끊고 금식을 너무 오래 하다보면 사단의 훼방이 아주 심해지고, 심지어 사단에게 잡혀 넘어가는 경우마저 생깁니다. 예수님이나 모세 같이 영적으로 바로 서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시고 붙들고 계신 금식을 한다면 경우가 당연히 다릅니다. 반면에 영성이 뒤떨어지고 말씀의 분별력이 없으면서도 금식으로 영적 체험만 추구하다 보면 오히려 사단에게 악용당합니다.
일반 평신도로선 삼일 정도까지의 금식은 몰라도 그 이상 넘어가는 장기 금식은 반드시 전문사역자와 상의하고 건강상의 문제도 철저히 체크한 후에 해야 합니다. 가족은 물론 주위 사람들의 이해와 협조도 구해야 합니다. 반드시 누군가에게 금식기도 계획을 알려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며, 금식 후에도 조심스럽게 체계적 보양식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클레멘트와는 반대로 금식보다 기도가 우선입니다. 금식은 기도를 순수하고도 온전히 하기 위한 방도입니다. 금식의 이런 근본 목적을 이루려면 식음료만 금할 것이 아니라 모든 일상사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기도에만 메달리는 것이 좋습니다. 단순히 식사만 금하고 기도에 전무하기보다는 일상사를 계속하면 온전한 금식이 아닙니다. 물론 일상업무를 수행하면서 전적으로 헌신 기도할 수 있으며 또 건강이나 체질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육식을 금한 다니엘처럼 일부만 금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분 금식의 경우도 일을 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맞추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사58:6-10)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에 관해 말했습니다. 먼저 지적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흉악의 결박”과 “멍에의 줄”을 사단이 죄인을 묶고 있는 영적 사슬로 이해해선 안 됩니다. 귀신을 쫓거나, 사단의 방해를 물리치거나,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있는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선 꼭 금식 기도를 해야 한다고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쫓을 수 있는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는다고 했지(막9:29) 금식기도를 해야만 나간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신자들이 모인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천국 열쇠를 이미 받았습니다.(마16:18,19) 따라서 주님의 뜻은 귀신을 쫓거나 불신자 전도를 위해선 교회가 즉, 교인들이 함께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상기 본문은 유대인들이 금식 기도를 했는데도 왜 응답이 안 되는지 의아해한 것에 대한 답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까”(58:3) 서두에 설명한 대로 “마음을 괴롭게 한” 것이 바로 금식인데 같은 말을 반복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한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 즉,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것이 사단을 대적하는 기도라면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불합리한 해석이 됩니다.
흉악의 결박은 권세를 이용해 타인의 권리나 유익을 유린하는 잔악한 행위를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멍에의 줄에 묶인 것은 그런 부당하고 강제적 억압을 당하는 것입니다. 결국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것은 모든 폭력과 압제 등 사회적 부당한 행위를 그만두게 하거나, 그런 상태에서 노예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약자를 구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린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나 궁핍한 친척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선지자가 말하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식음을 전폐하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금식은 그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금식하는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식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안 되는 이유를 금식하면서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고, 다투고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아무리 대속죄일에 머리를 숙이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칠해도 하나님께 전혀 열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3-5절)
결론적으로 금식을 종교적 형식에 치우치거나, 자기 기도만 빨리 응답 받으려는 이기적 욕심으로 하거나, 죄를 참회하여 자신의 영혼을 순화할 동기 내지 의도가 없거나, 주변 이웃과 공동체의 아픔을 외면하거나,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 충성하려는 의지가 없으며, 그분의 계시와 소명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께 책망 받는 금식이 될 것입니다. 그 반대는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 기도일 뿐 아니라, 또 그런 금식 기도를 하면 반드시 이웃 사랑과 사회적 선행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6/26/2012
(*): Pictoral Encyclopedia of the Bible Vol. 2 p. 504 (Zondervan,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