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이 신앙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
[질문]
히브리서 10장 22절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
성경에 보면 양심에 대한 부분들이 나오는데 착한 양심, 선한 양심, 청결한 양심, 깨끗한 양심,, 그리고 화인 맞은 양심 등등 여러 가지의 모양들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는 데요.
성령 충만하지 않은 상황. 온전히 성령께서 지배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기의 양심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삶을 산다면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삶과 신앙생활을 하게 될 수 있을까요? "양심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양심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 성도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인 데요.
사도바울은 사도행전에 자신이 지금껏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또 베드로사도는 성도들에게 선한양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한양심과는 다른 모양의 양심이 있다는 것인데...) 또 히브리서에서도 양심에 악을 깨달았다는 말은...
너무 중구난방으로 적은 것 같은 데요~^^;; 정리하자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자연적인 양심의 상태." -- 이것을 사람이 신뢰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양심이 신앙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가 질문의 요지가 되겠습니다.
[답변]
중구난방으로 적은 질문이 아닙니다. 대체로 쉽게 지나치거나 아예 생각지도 못하는 주제임에도 질문자님께선 평소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오래 동안 묵상했던 것 같습니다. 질문 자체에서부터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고픈 열의가 베여 나옴을 익히 알 수 있습니다.
알고 싶은 사항은 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1) 구원 받지 못한 자의 양심과 구원 받은 자의 양심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2) 또 구원 받은 후에도 성령 충만한 상태와 그렇지 못한 상태의 양심이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결국 세 종류의 양심을 - 자연인, 성령 충만한 신자, 그렇지 못한 신자 - 상호 비교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자연인의 양심을 알기 위해선 하나님이 창조 당시에 허락한 양심과 타락 후에 달라진 양심을 비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왕에 인용하신 성경구절에서 뜻하는 양심의 내용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양심(良心, Conscience)을 한 마디로 정의(定意)하자면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아는 도덕적 분별력입니다. 구약성경에선 여러 단어로 다양한 용례(用例)가 나타나지만 주로 이런 사전적 의미를 나타냅니다. 신약에 와선 그 뜻이 상당히 깊고 풍성해집니다. 우선 양심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쉬네이데시스’만 해도 “어떤 것과 비교해서 안다”는(to know with)는 뜻입니다. 단어 자체로도 어떤 절대적 기준에 근거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양심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부여한 고유의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신 창조에서부터 추적해 들어가야 합니다. 타락 이전의 인간 양심이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 이후의 신자에게 요구하는 양심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다는 의미는 다각도로 추적할 수 있지만 본 주제와 연관시키면 바로 양심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지정의(知情意)를 갖춘 인격적인 분으로서 당신의 지정의로 진선미(眞善美)를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아니 하나님 당신이 바로 완전한 지성, 완전한 감성, 완전한 의지를 갖추신 분이자 절대적 진리, 절대적 선, 절대적 아름다움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그런 능력을 인간에게 일부 부여하셨습니다. 일부라는 말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다 주시지 않고 일부를 남겨 두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다는 의미일 뿐이지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수준으로는 완벽하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자연과 법칙 속에 살면서, 얼마든지 지성으로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거짓인지 깨닫고, 감정으로 아름답고 추한 것을 느끼며, 의지로 선하고 악한 일 중에 택하여 행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동물과 달리 인간은 진리를 분별하는 이성적 존재, 아름다움을 느끼는 심미적 존재. 선을 실천하는 도덕적 존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성경적 양심이란 바로 이 세 기능을 다 포괄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선악만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을, 또 아름다움과 추함까지 분별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진리와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세계와 질서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그 진리를 분별하든 못하든, 또 아름다움을 감지하든 못하든 진리와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선악은 성격이 이와 다릅니다. 반드시 인간을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지성으로 분별한 진리와 감정으로 인지한 아름다움을 좇아서 자발적인 행동에까지 이어져야 선이 됩니다. 그 반대가 되면 당연히 악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초점은 인간으로 도덕적 존재가 되어 선을 실현케 하는 데에 모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도덕적인 분이기에 인간도 도덕적 존재로 창조하시어 당신의 뜻대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선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양심은 하나님의 관점에선 양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 세계는 선악을 행할 주체가 아니기에 당연히 선악에 대한 책임이 없습니다. 비록 동식물계에 먹이사슬로 이어지는 살육과 때로는 지진, 가뭄, 홍수 같은 자연 재해가 생겨 하나님의 선과 거리가 멀어 보여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들도 하나님이 좋아하실 만큼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단지 당신을 닮은 인격적 존재로는 지음 받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동물의 경우 진선미를 인식, 분별, 시행할 능력이 전무하지 않습니까? 오직 본능을 충족시키어 종족보존만 할 수 있는 초보적 지정의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만 하나님을 닮은 특권을 부여 받은 것은 당신을 대신하여 이 땅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다스리라는(창1:28)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시 8:4-8)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을 대신하는 청지기 직을 받았음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분명히 보아 알도록 에덴동산의 중앙에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당신의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 주신 뜻을 깨달아 오직 당신께만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돌리며 자발적으로 순종케 하려고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인간 본연의 양심은 스스로 도덕적 선을 선택 시행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반드시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선이 실천되어져야만 양심으로서 온전한 가치를 지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의 지정의를 작동하는 것, 특별히 의지가 그분의 절대적 기준대로 선을 행하는 것이 성경적 양심의 본질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타락
불행하게도 현대인은, 정확히는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 당시에 인간에게 소원하셨던 모습의 양심을 지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원인은 죄로 인해 양심이 타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원죄 하에 태어난다고 해서 살인이나 간음 같은 죄악을 밥 먹듯이 저지를 정도로 그 양심이 추악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한 사건의 의미를 양심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봅시다.
우선 금지한 과실의 이름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인 선악과(善惡果)입니다. 또 아담이 범죄 하자 하나님이 한탄 하셨던 내용도 선악을 아는 일 즉, 양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3:22)
그런데 이 한탄이 언뜻 이해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주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담더러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창2:17) 하셨는데 왜 죽지도 않고 오히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중에 하나 같이 되었다고 합니까? 또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되었다면 오히려 너무 좋은 일 아닙니까? 왜 낙원에서 쫓겨나올 만큼 큰 죄가 됩니까? 당신의 명령을 어기고 당신처럼 되었다고 질투하며 분노를 터뜨린 것입니까?
먼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금령부터 다시 자세히 살펴봅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나무와 실과의 역할이 다름을 눈치 채겠습니까?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역할만 하는 대신에, 인간이 그 실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나무는 선악을, 실과는 살고 죽음을 좌우했습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서있는 나무는 언제 어디서라도 보였습니다. 또 모든 인간에게 미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하나님 권위의 표상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나무 실과는 먹어도 되지만 그 실과만은 먹지 말라는 것은, 인간이 이 땅을 그분 대신에 다스리는 동안 무엇이든 해도 되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권능 안에서 벗어나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 때에 선해지고 그렇지 못하면 악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절대 선이므로 그분을 벗어나면 자연히 악의 편에 서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나무를 볼 때마다 나를 지으시고 나에게 복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분의 뜻대로 살면 에덴이 낙원이 된다는 것도 실제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여름휴가 때처럼 무위도식해서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하나님 뜻에 따라 모든 동식물의 이름을 붙이며 즉, 열심히 일하며 다스렸습니다.
그가 실과를 따먹은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 하나를 어긴 도덕적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뜻대로 따르는 것이 싫어서 자기 내면에서 그분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린 것입니다. 무엇이든 자기 기분과 욕심대로 하고 싶은데 동산 중앙의 나무가 방해되었던 것입니다. 아예 하나님을 무시하고 동산의 주인으로 올라서기로 의도적으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과를 먹는 순간 즉, 하나님으로부터 고의로 등을 지고 떠나는 순간 인간은 육체적 사망이라는 형벌 뿐 아니라 영적 사망도 함께 맞게 되었습니다. 사단의 영이 인간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광채가 비취는 것을 여자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막아버렸습니다. 사단이 공중 권세를 잡아 이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지정의를 사용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진선미를 분별, 인식, 시행할 수 있는 능력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단순히 그 능력이 약해진 것이 아닙니다. 사단의 종이 되어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지정의가 작동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을 통해 이 땅에 실현된 진선미에는 왜곡, 모순, 분열, 파괴만 드러났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대로 이 땅을 다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양심에 사단의 화인을 맞은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 당신 중의 하나 같이 되었다는 것도 선악을 완벽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선의 완전한 기준이자 절대적인 선 그 자체입니다. 인간도 그런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완벽하게 선해졌다는 뜻도 당연히 아닙니다. 하나님이라는 선악의 절대적 기준을(to know with the God) 버리고, 순전히 자기 혼자 스스로 판단하고 시행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바로 선악의 절대적 기준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옳고 좋으면 모든 것도 옳고 좋아지며, 또 그 반대로 자기에게 틀렸고 싫으면 모든 것도 틀리고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실종되고 인간의 의만 도덕, 윤리, 관습, 법률, 철학, 사상, 종교 등의 모습을 띄고 이 땅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타락한 양심의 대표적 사례가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지적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타락으로 바뀐 양심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아직 들어오지 못하고 원죄 하에 있는 자연인의 양심 상태의 확실한 윤곽이 드러났습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도덕 윤리에 완전히 둔감해진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런 것은 오히려 자연인의 양심으로 고안해낸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이 땅과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하나님을 외면, 거역, 배반하여 원수의 자리에까지 가버렸습니다. 모든 사고의 판단, 선택, 결정, 시행이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오직 자기중심적으로 행하게 된 양심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9) 하나님은 인간을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달리 당신을 닮게 지은 후에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온전한 지정의를 주어서 진선미를 분별, 인식, 시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어야만 그 지정의가 온전한 참 생명의 길로 작동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기고 그 자리를 사단이 대신 차지하고 앉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피조물로서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과 인식력은 어렴풋이 남아 있기에 참 하나님은 알지 못하고 그를 대신하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십자가 복음만 모를 뿐 어쨌든 종교를 갖고 신에게 경배를 바쳤지 않느냐고 핑계될 수는 절대 없습니다. 우상 숭배란 단순히 미신이나 주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의 둘째 계명이 우상 숭배를 금하는 이유로 “너를 위하여” 섬기지 말라고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스스로 자기 존재와 인생의 주인이 된 인간들이 자기 기분과 욕심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허수아비 신을 만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권능, 위로, 만족, 구원 등을 그분 외의 다른 대상에서 찾으면 그 모두가 우상입니다. 하나님 밖의 돈, 학식, 권력, 명예는 아무리 많아도 우상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도 나름대로 신에게, 실제로는 모두 우상이지만,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간구하는 내용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6:31,32) 이 땅에서의 형통과 풍요만을 염려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그들은 자신과 가족의 안일만 간구한 것입니다.
자연인들의 양심은 결국 자기 종족의 보존과 번식만을 목표로 하는 동물의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리라는 창조 목적을 외면한 필연적 결과입니다. 인간에게만 허용한 하나님의 생기와 형상이 파괴되고 나니까 인간 특유의 고급한 지정의를 갖고도 절대적 진리, 절대적 선, 절대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고 또 못하게 된 것입니다. 대신에 세상의 쾌락과 흑암의 세력을 쫓는데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죽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10-18)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자 그분을 찾지 않게 되었고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분을 거역하는 데로만 향했습니다. 그러나 살인, 간음, 강간, 폭행, 강도, 도적을 행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목구멍이 열린 무덤입니다. 먹고 마실 것에 대한 탐욕에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혀와 입술로 사기, 위계, 조종, 협박 등으로 자신의 배만 채운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이 세상에선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남들의 피를 밟고 일어선 것이라 그 영혼에 평강이 절대 없다고 합니다. 역으로 말해 인간은 하나님 품 안에 있을 때만,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때만, 온전한 평강과 안식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먹고 마실 것을 염려하기 보다는 오직 그분의 의로운 통치를 받는 것을 더 소망하게 됩니다.
성경은 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선을 행하는 자연인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 성경의 진술이 틀린 것입니까?
불신자도 선을 행할 수 있는 이유는 우선 하나님의 형상이 희미하게나마 도덕적 양심의 형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인간들은 누구나 보편적인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이 인생의 중요 내지 최우선 과제가 되지 못합니다. 자기에게 남는 것으로 적선(積善)만 합니다. 자기 여유가 줄면 돕지 못합니다. 항상 자기의 먹고 마실 것만 우선인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선을 이룰 소망과 열심과 능력이 아예 없습니다.
간혹 자기 것을 희생하며 이타적 선을 베푸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도 결국은 자기 의일 뿐입니다. 구체적으로 의식은 못해도 남들 앞에 자기를 나타내고 싶은 욕구에 따른 결과입니다. 설령 그런 교만 없이 선을 행해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본인은 순수했을지라도 그 본인의 의로움과 위대함으로만 세상에 알려질 뿐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 윤리도 인간이 인간을 위하여 스스로 만든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특정 사회가 그 존속과 번영을 방해하는 악을 방지하는 데에 목표를 둔 것입니다. 그러니 문화, 지역, 민족, 나라마다 도덕률이 다르며 그것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됩니다. 상대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인 도덕입니다.
흔히들 종교마다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인간이 반드시 따라야 할 절대적 기준인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한 데서 기인합니다. 그런 너그러운 종교인들도 막상 자기 민족, 나라, 종교의 이익이 상당히 침해될 수 있다고 여기면 지난 역사가 증명하고 작금의 국제정세가 말하듯이 절대로 그 관용을 계속 유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쟁을 불사합니다. 각각의 종교의 신의 뜻이라고 강변하면서 말입니다. 이 또한 개인의 안락만 목표로 하는 자연인의 양심이 공동체 단위로 확대 적용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세상 윤리와 불신자의 양심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바로 간음이나 동성애 같이 성(性)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이는 개인과 한 사회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방해하는 악이 아닙니다. 남들에게 (크게) 피해를 주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당사자의 기분과 욕구대로 은밀히 즐기는 사적 문제일 뿐으로, 죄악이 아니라 오히려 권장해야 할 권리와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분이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명령과는 더더욱 담을 쌓은 것입니다. 이처럼 자연인에게 남아 있는 도덕적 양심은 오로지 자기가 편할 때만 작동될 뿐입니다.
구원 받은 자의 양심
그럼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의 양심은 어떻게 달라집니까? 불신자의 것과 완전히 정 반대가 됩니까? 말하자면 선을 행할 소망과 열심과 능력이 완전하게 생겨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도 구원 이후의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실토했지 않습니까?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18-21)
여전히 악을 행하고 자기 속에 악이 함께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선을 행할 소망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가 된 후의 양심이 달라진 유일한 내용입니다. 그럼 질문자님이 궁금해 하신 대로 불신자에게도 선을 행할 소망도 있고 가끔 행하기도 하는데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이며, 또 성령 충만하지 않은 신자가 단순히 양심에 따라 살아도 크게 문제 삼을 것이 없는 것입니까? 나아가 제가 서두에서 선을 행하지 않는 양심은 죽은 양심이라고 한 언급이 틀린 것입니까?
그런 의아심은 자꾸만 양심을 도덕적 분별력으로만 한정해서 이해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물론 그것이 주이긴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신자의 도덕적 선은 신자의 양심이 겉으로 드러난 여러 결과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신자가 구원 받은 후에 갖게 되는 양심은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그분을 대신하여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겠다는 마음입니다. 창조 당시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소원했던 그 마음 상태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자면 선을 행할 소원은 있으나 사단에게 더럽혀졌던 양심의 잔재 즉, 죄의 본성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아담이 온전한 지정의를 받았지만 선악과와 사단의 유혹 앞에 놓여 있는 상태와 유사합니다. 아담에게는 죄악이 자기 밖에 있었지만, 신자에게는 타락된 흔적으로 자기 속에 있는 것만 다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로 선을 기꺼이 혹은 악을 얼마든지 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동일합니다.
불신자 시절에는 사단이 인간을 농락하는 영역인 죄악과 흑암과 죽음 쪽으로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이 완전히 묶여 있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의와 빛과 생명의 나라를 향해 방향이 완전히 전환된 것입니다. 아니 그 나라 안에 이미 들어와 있음에도 죄의 본성 때문에 자꾸 그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마다 믿음에 따라 의의 열매를 맺는 정도는 다 다르며 심지어 방향만 바뀐 채 여전히 출발선 상에 있는 자도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신자들도 자기와 가족의 안녕과 형통만이 목표였습니다. 자기가 소속한 사회의 존속과 번영에 폐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무엇이든 해도 되었습니다. 남들에게 고의로 피해 준 적이 없기에 의인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기독교인이 당신은 죄인이라고 전도하면 남들 돈 한 푼 떼먹은 적이 없는데 왜 내가 죄인이냐고, 오히려 신자들이 뒷구멍에서 호박씨 까더라고 반발했습니다. 자연인으로선 단지 도덕적 선악만, 그것도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윤리만으로 기준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성령으로 거듭나면서 하나님을 등진 것이 죽을 죄였음을 철저히 통회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이제 그분만 믿고 따르겠다고 스스로 판단, 선택, 결정, 또 기꺼이 헌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의 기도 내용도 달라집니다. 불신자들처럼 우상 앞에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빌지 않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로서 회복된 양심의 본질입니다.
사단에게 묶였던 영혼이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게 된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귀며 동행하는 것을 인생의 최우선, 아니 유일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존재와 삶과 인생에 그분의 거룩한 통치가 임하길 소원하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온전한 지정의를 사용해 절대적 진리를 분별하여 따르고, 절대적 아름다움을 느껴서 누리며, 절대적 선을 자발적으로 행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요컨대 이제 하나님이 절대적 기준이(to know with) 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양심
그러나 바울의 고백대로 신자가 되어도 악은 여전히 그 속에 남아 있습니다. 구원 받은 후의 양심은 이전에는 없었던 선악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생긴 것뿐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절대적 계시인 성경으로 진선미를 분별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망은 분명히 생겼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할 열심과 능력까지는 완전히 생기지 않았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2-25) 자기 속에 있던 죄에게 자꾸 졌던 바울이 찾은 해결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4)
신자는 우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의 모든 죄악을 감당하여 대신 죽으셨기에 이제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아니 성령으로 거듭난 순간 자연히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그 후로는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의 인도만 충실히 따르면 율법의 요구 즉, 도덕적인 선을 행할 열망과 능력도 생깁니다.
지금 바울은 성령이 없는 불신자의 양심은 육신을 좇는 수준이라고 설명합니다. 육신(flesh)이 단순히 육체적(bodily)인 욕망(desire)이 아닙니다. 순전히 자기 뜻과 기분대로만 판단, 결정, 시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배제했기에 이 땅에서 먹고 마실 것만 목표로 사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믿어서 그 삶의 목표가 완전히 바뀐 자입니다. 하나님도 창조 당시에 당신께서 소원했던 그런 인간이 되라고 신자에게 성령을 내주케 해주었습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를 주로 모시고 그분을 따르게 합니다. 날마다 자기(육신)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머리 둘 곳이 없어도 즉, 세상에 먹고 마실 것에 궁핍하든 부요하든 오직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그분의 향기를 이 땅에 드러내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신자의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충만을 구하여 그분의 인도만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 변하고(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습으로 회복되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역사(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청지기의 소명)가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께 항상 복종하여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죄악과는 평생을 두고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자기를 괴롭히는 죄의 본성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겨내야 하며, 선을 행할 열심과 능력도 그분께 받아서 의지해야 합니다. 이를 게을리 하면 즉, 성령 충만한 양심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 성령이 신자의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고 때로는 강권도 하시는 것입니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신자는 양심을 더 이상 일반적인 도덕과 연관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적 양심은 오직 절대적 기준이자 절대적 진선미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여서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육신)를 죽이고 예수(성령)를 쫓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연인의 양심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윤리, 도덕, 관습, 법률만 좇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리 때로는 보편적 선을 행해도, 자신의 뜻과 기분을(육신) 따를 뿐입니다. 따라서 불신자의 양심이 바로 신자의 비양심(非良心)입니다. 예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 가는 길을 따른 것만이 신자의 양심입니다.
운전을 하면서 존 맥아더(*) 목사가 “자신의 양심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죄가 절대로 완전하게 씻어지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설교 방송 하는 것을 언뜻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제가 위에서 설명한 의미로 말한 것이라 감히 짐작합니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더 선해지고자 하는 정도로는 기독교 믿음이 결코 아닙니다. 자칫 바리새인의 율법적 형식적 위선적 선으로 흐르고 맙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이 앞섭니다. 무엇보다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선해질 수 있다는 교만은 십자가에 가장 반(反)하는 것으로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지 못할 죄입니다.
나아가 스스로 판단한 양심에만 따르는 것은 자기 즉, 육신을 좇는 것에 해당됩니다. 성령의 인도가 없습니다. 사단의 조종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양심을 따르는 자체가 바울처럼 죄의 법 아래로 자기를 사로잡아 오는 것의 일종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는 신자의 양심도 수시로 죄악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바울과 동일한 고백을 저절로 하고 있는 자여야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날마다 되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 들어와 있는 신분과 특권을 상기해야 합니다. 또 내주하신 성령님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한지 깨달아 전적으로 자기를 죽이며 그분께만 의지해야 합니다.
요컨대 예수 없이는 신자의 양심도 순식간에 비양심 즉, 불신자의 양심으로 돌아가 세상에서 자기를 풍요케 해줄 먹고 마실 것을 이방인처럼 구하게 됩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들 정말로 궁급한 일용할 양식이 아닌 이상, 또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지 않는 이상 응답이 될 리는 없습니다. 나아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도 그는 신자가 아니라 단지 인간 세상에서나 통하는 의인일 뿐입니다.
양심과 관련 된 성경 구절들
마지막으로 양심과 관련해 인용하신 성경 구절들의 의미를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브리서 10:22)
참으로 성경 표현이 재미있고 오묘하지 않습니까? “양심의 악”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아니 양심에 악이 개입될 수 있습니까? 있다면 도대체 무슨 악입니까?
성경은 본문 앞에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인해 어떤 죄인도 지성소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럼 양심의 악이란 마음에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지 못한 자의 양심 상태를 말하는 셈입니다.
위에서 말한 불신자의 양심 상태일 뿐 아니라, 특별히 유대인들이 동물 제사로 의로워져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종교적 양심입니다. 스스로 율법을 준수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교만과 또 그렇게 행했기에 의롭다고 세상 앞에 내세우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더 고급하고 심오한 윤리 계명을 지닌 종교로만 이해해선 안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형제를 말로 바보라고 모욕해도 살인한 것이며,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오히려 기도해주라고도 했습니다. 아주 고급하고 심오한 도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바울마저 선을 행할 소원만 있었지 자주 죄의 법 아래로 끌려갔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의 절대적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내신 긍휼이 필요 없는 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스스로 도덕적으로 선해지고 종교적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하나님 앞에서 큰 죄는 없습니다.
불신자도 자기 양심으로 선에 대한 일반적 인식과 소원이 분명히 있으며 때로는 행하려고 노력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른 통치를 받기를 아예 거부합니다. 바로 이것이 양심의 악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항복하지 않고는 그 악이 제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피 뿌림을 받아 그 양심의 악을 제거한 자는 그 중생과 믿음의 표시로 물로 씻음 받는 것입니다. 또 어떤 형편에, 특별히 아무리 비참한 영적 상태에 처해 있든 담대하게 하나님의 지성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標)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니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1)
베드로가 말하는 “선한 양심”이 도덕적으로 선한 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양심이란 단어 자체에 이미 그런 의미는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항상 앞뒤 문맥과 성경 전체의 뜻과 연결해 해석해야 합니다. 이 두 구절에서 그가 뜻하는 바도 단지 도덕적 인식만 할 줄 아는 불신자와는 달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신자의 바뀐 양심입니다.
먼저 본문의 앞부분을 봅시다.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3:13-15)
세상에서 도덕적 선행을 열심히 행하는 자를 두고 어느 누구도 잘못했다고 비난, 핍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인으로 칭송해 줍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만이 주라고 선언하면서 불신자더러 죄를 회개하라고 권하면 핍박이 따라옵니다. 따라서 본문의 표현 그대로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천국에서 영화롭게 될 것을 소망하는 마음”이 선한 양심인 것입니다.
당연히 그 반대인 “악한 양심”도 죄를 짓겠다는 소원과 열심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지 않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없는 마음입니다. 자연인이라고 의도적으로 악한 양심 즉, 도덕적으로 흉악한 마음을 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여 사단의 노예가 된 영혼의 영향을 받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땅이 전부인 줄 알기에 먹고 마실 것만 서로 많이 차지하려다 죄를 짓고, 또 죄가 주는 쾌락에 탐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도덕적 양심을 가지고도 신자가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라는 권면에 대해서도 비방합니다. 전혀 잘못한 것 없고 오히려 그들을 좋은 쪽으로 인도하겠다는 데도 말입니다. 사단에 묶인 영혼을 구원해주려는 전도야말로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큰 선행이지 않습니까? 또 신자들이 자기들처럼 어둠을 사랑하지 않고 빛 가운데서 사니까 자연히 질시와 비방과 조소가 따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모이지 않는 자는 누구라도 하나님의 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부모 자식 간에 싸움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또 21절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바로 믿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하여 새사람이 되었다는 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두고 단순히 육체가 지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을 어긴, 더러움을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으로 바뀌었다는 고백이라고 설명합니다. 선한 양심은 본문 설명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 외에도 유난히 바울 사도가 양심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는데 앞뒤 문맥의 의미를 잘 살피면 단순한 도덕적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의를 따르는 양심을 말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 사나 죽으나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양심을 뜻함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7-9)
이 말씀 전에 그는 세상의 윤리, 관습, 법률, 종교로 따져서 자기만큼 의로운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자연인의 양심으로 최선을 다해, 심지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선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도덕적 양심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할 뿐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앞에 오니까 오히려 자기야말로 세상 죄인 중의 괴수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만 의로워지고 또 온전한 선행도 실천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스스로 도덕적 양심에 살고 있는 자는 구원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존 맥아더 목사의 양심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한 죄가 씻어지지 않는다는 선언이 성립되는 대목입니다. 자신의 심령이 가난함을 철두철미 깨달아 애통하는 죄인만이 천국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우리 심령은 그렇게 가난한 상태이지만 이제는 골고다 십자가로 인해 담대하게 주님의 긍휼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신자에게 맡겨진 일은 성령의 도우심을 강구하며 그 인도를 따라 참 경건에 이르는 훈련뿐입니다.
2/23/2009
(*)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
현재 미국 LA 지역에서 Grace Community Church를 40년째 섬기면서, 성경이 절대적으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또 하나님의 절대적 의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는 자에게 덧입혀지는 것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일관되게 선포하는 보수복음주의의 거장입니다.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 가능한 프린트 아웃해서 천천히
읽어봐 주시기를 감히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