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형통의 절정
신자의 형통이 현실적 고난과 문제가 없어지고 신자가 바라는 대로 일이 잘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어떤 일을 소망한 동기와 목적이 선하고 하나님께 기도한 대로 이뤄졌고 그 일을 이루는 과정이나 결과가 의롭다고 해도 그러합니다. 신자의 형통은 신자 자신의 현실적 형편과 관계없이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억지로 강요받는 쓰임이 아니라 신자 스스로 소원하였고 자신의 현실적 위치가 어떻게 되든 그분께 쓰임 받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해야 형통입니다.
요셉은 이방 땅 보디발 집의 노예가 되었어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어도 그랬습니다. 특별히 주위 사람들에게와 그가 맡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답게 정말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대했습니다. 그 결과 보디발도, 감옥의 전옥도 그에게 모든 일을 맡겨 놓고 아예 신경 쓰지 않을 만큼 그를 온전히 신뢰했습니다. 요셉의 그런 형통은 애굽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바로 왕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세 가지 형통의 공통점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창41:38-40)
흔히들 요셉 인생이 형통한 절정을 애굽에서 총리가 된 사실에 둡니다.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던 과거를 잊고 우상 숭배하는 이방에서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하나님이 심어주신 꿈을 이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적 시각으로 보는 외적 형통의 절정일 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분의 관점에서 형통을 조명해야 합니다.
상기에 인용한 구절이 가장 강조하는 내용도 이전 보디발 집과 감옥에서와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초점은 결론에 모이는데, 바로가 요셉에게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공식적인 계급과 서열만 요셉보다 높지 모든 실제적인 일은 네가 다 처리하라는 뜻입니다. 온전히 다 맡기고 전혀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세 기사의 결론이 똑같지 않습니까? 신자라면 세상 앞에 반드시 드러내 보여야할 하나님이 형통케 하심의 본질입니다. 보디발과 전옥이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함을 보았듯이, 바로도 그가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지 않습니까?
신이 감동했다고 해서 타인의 꿈을 초자연적 능력으로 정확하게 해몽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심어주는 지혜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밝혔다는 것입니다. 고대에 일국의 왕이 꾼 꿈을 해몽하다 자칫 나쁜 해석을 말하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전혀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해몽했습니다.
이는 평소에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면 누가 뭐래도 그대로 전하고 행동했던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확신과 담대함이 없이는 자기 생명이 걸린 일이니까 처음부터 해몽을 하지 못한다고 발뺌부터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은 자기 믿는 바에 비추어 말과 행동이 모순, 상충되는 경우가 전혀 없습니다. 도덕적으로는 100% 정직이요, 신앙적으로 순수한 믿음입니다.
역사의 통치를 담당하는 형통
다시 강조하지만 요셉 혼자만 성실하고 정직하게 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수고하고 힘들더라도 보디발의 집과 전옥에게 유익을 끼쳤습니다. 자기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지금 총리가 되는 시점에선 그런 모습이 더 발전 성숙했습니다. 애굽 전 국민을 상대로 유익을 끼쳤다는 즉, 선행이 질적 양적으로 커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해몽의 지혜도 하나님이 심어준 것이긴 하지만,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었고 또 그에 대한 정확한 대비책을 제시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분입니다. 역사는 하나님 그분이 저작하여 풀어가는 이야기(His-story)입니다. 그분이 역사를 다스리는 유일한 원칙은 인간과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깨끗케 하여서 당신을 찬양 경배하기에 합당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로 타락해 가는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는 원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뿐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역사는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 있는 십자가 진리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 진행되어집니다. 애굽의 바로나 시위대장 보디발도,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인 야곱도, 애굽 총리가 된 요셉도 아닙니다. 오늘 날로 치면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의 지도자 오바마나 시진핑도, 월가의 큰 손들인 워렌 버핏이나 소머스도, IT를 주도하는 애플이나 삼성도 결코 아닙니다.
신자가 역사를 주관해야 하기에 하나님은 신자로 세상 앞에 거룩한 당신의 백성을 넘어서 제사장 나라로 세웠습니다. 한마디로 신자는 자기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서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적 의식을 주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자기 세대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분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이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일에 쓰임 받는 것이 신자 형통의 근본인데, 요셉은 자기를 보는 모든 이로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함을 알게 했습니다. 지금 바로에게는 하나님께서 장래에 행하실 일도 미리 가르쳐 주었고 그 대책까지 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의 주역으로 직접 참여하였기에 형통이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속내까지 알게 되는 형통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아직까지도 형통의 절정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가 장래 대책을 세웠고 또 그래서 애굽의 역사를 주도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렀지만 그 일에 숨겨진 하나님의 깊은 속내까지는 미처 몰랐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고 있음은 알고 기꺼이 그 일에 헌신하고는 있었어도 말입니다.
반면에 지금까지 그 숱한 고난에 함께 하시어 그를 형통케 하신 하나님이, 그를 그 수준에 머물러 둘 리는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 가는 세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미리 하나님의 계획가 뜻을 알려주었듯이, 자기 형편과 상관없이 진심으로 순종 헌신하는 요셉에게 당신의 깊은 속내를 감추실 리 없습니다. 나중에라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실 수 있는 하나님이지만 만약 당신의 종이 당신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면 시행착오가 이어질 것입니다. 또 그 일을 담당하고 있는 당신의 종은 지치고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일방적 결단과 헌신만 강요하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먼저 신자가 헌신해야 그 모습을 보고서 보상을 베푸시는 분도 아닙니다. 신자더러 정말로 기쁨과 감사함으로 당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 더 정확히는 다른 모든 것을 희생 포기하더라도, 당신만 따르도록 해주십니다. 쉽게 말해 당신과 당신의 종은 범사에 함께 윈윈(win-win)합니다. 또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총리가 되었어도 요셉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가 둘 남았습니다. 먼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 아버지 야곱과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을 상봉하는 것입니다. 또 형제들과의 화해도 반드시 선하게 이뤄져야 했습니다. 비록 애굽 전체를 살리는 하나님의 큰 형통의 일을 수행해도, 이 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개인적으로는 어떤 만족과 기쁨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마저 다 선하게 예비해놓으셨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5-8)
우여곡절 끝에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임을 밝힌 후에 한 고백입니다. 형들 원망도 많이 했지만 결국 이 자리에 이른 것은 자기들 가문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증조부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후손을 창대케 해서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는 언약을 그분께서 달성해 나가고 있는 필연적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일들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의도까지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 속내를 삶에 적용할 줄 아는 형통
요셉의 형통은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업(業)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창46:33,34)
요셉은 형들을 애굽 사회와 격리된 고센 땅에 거하게 합니다. 그렇게 한 까닭은 물론 야곱이 먼저 그곳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창46:28) 야곱이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아주 현실적이었습니다. 목축하기에 좋고, 가나안 땅과 가까운 국경지대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가길 원했던 것입니다.
총리 요셉은 그 변방에 거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부모 형제와 재회했기에 자기 거주하는 곳에 모셔서 자주 만나며 더 풍요롭고도 안락한 여건을 마련해 주고 싶은 개인적 소망이 생겼을 것입니다. 바로가 모든 정사를 그에게 일임한 상태라 가족을 최고 수준으로 살게 해줄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자기 의견을 내세우면 가족을 기근에서 구한데다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들을 주님의 긍휼로 용서했으니 어느 누구도 반발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쩌면 형들도 당시 세계 최강국인 애굽의 도성에서 호사스럽게 살고 싶은 생각도 은근히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야곱의 뜻을 따르려는 효심도 있었겠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속내를 깨달았기에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또 형들로선 겪지도, 아니 상상도 못하는 모진 고난들을 거치면서 현실적 여건이 결코 중요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에 참 생명이 달렸음을 절감했습니다. 여호와 없는 애굽 도성에서 풍요롭고 안락한 천일의 도시생활보다, 건조한 목초지에서 들판의 이슬을 맞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루가 훨씬 더 소중하고 고귀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고센 같은 변방이라야 우상숭배에 물들지 않고 여호와 신앙을 순전하게 이어갈 수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또 애굽 사람이 목축을 가증하게 여기니까 그곳을 방문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방의 문화, 관습, 제도에 물들 염려 없이 여호와 신앙은 물론 이스라엘 고유의 문화와 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곳입니다.
말하자면 세계 최강 애굽의 보호를 받지만 애굽의 악한 관습과는 격리된 채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창건 번창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만약 70 명 남짓의 야곱 가문이 가나안 땅에 계속 우거했다면 종족끼리 전쟁과 약탈이 성행하던 당시 상황에서 한 민족으로 생존하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가나안 족속과 결혼하여 동화된 백부 에서의 전철을 밟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절묘한 계획으로 고센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사람보다 더 창성하도록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요셉이 그런 먼 장래의 결과까지는 몰랐어도, 고센 땅이 자기들 가문을 성결하게 보존하는데 최적지임을 알고 그대로 실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후손들을 세상에 두시려고 자기를 앞서 보냈음”을 확신하고 그분의 계획을 자신의 현실 삶에 적용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가 요셉의 형통의 절정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신자를 통해서 거룩하게 일하고 계심을 주위 사람이 다 보아 알게 하는 것이 신자의 형통입니다. 신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형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신자가 형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10/18/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