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관한 궁금증(3/4) - 믿기로 결단한 신자
[질문]
교회에서는 처음에 새 친구가 오면 세례 받으며 주님을 영접합니다. 영접 기도 후에 “이제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하지만 그 사람은 아직 유치원 수준의 영적상태이지요. 교회 지각에다 잦은 결석 예배시간에 졸기 등등 . 그러나 교회는 꾸준히 나오는 사람들. 이런 유치원수준이 계속되는 사람이 자기의 결단이 없어서 이런 건가요 아니면 주님이 정하신 때가 오지 않아서 그런 건가요? 저도 또한 그 세례식을 고등학교 때 받았거든요. 물론 고등학교 때 수련회가서 주님께 부르짖으며 회개하고 찬양하고 했지요. 회개도 하고 죄도 짓고 예배도하고 안하기도 하고 .... 제가 고등학교에 죽었더라면 구원 받았을까요?
[답변]
죄의 본질
구원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죄에서 구원입니다. 한 죄인의 영혼을 깨끗케 하여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벧전1:9)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구원 받는다는 의미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을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죄를 단순히 도덕적 하자나 범과(犯過)로만 이해하고 치웁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가 빚어내는 결과이지 죄의 본질은 아닙니다. 죄가 세상에 최초로 들어왔던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선악과 금령을 어긴 것이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 죄의 본질은 아닙니다. 엄격히 말해 그것도 죄로 인한 결과적 행동입니다.
불순종하는 행동을 하기 전에 즉,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아담은 하나님이 귀찮아지고 싫으며 밉기까지 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지어버리고 자기가 에덴동산의 주인이 되어 자기 멋대로 행하려 결정했습니다. 자신의 영혼에서부터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마음속에서 없어지고 나니까 아무 가책 없이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아담은 스스로 두렵고 부끄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형벌이 무섭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영이 하나님의 영으로 호흡해야만 온전한 인간으로써 참 생명이 유지 될 수 있는데도,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김으로써 원천적인 자아의 상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후로는 무엇을 해도 만족 기쁨 평강 안식 자유는 없어지고 갈급함과 허무함만 생기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자신과의 분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어 보았지만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님께 견책을 당하자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순수하게 사랑했던 아담과 이브가 그 잘못을 서로에게 떠넘기기 바빴습니다. 아담의 하나님과의 분리가, 자신과의 분리를 거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리마저 가져온 것입니다.
그 후의 모든 인간은 그런 죄의 본성을 안고서 즉,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되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 존재 자체가 더럽고 추해지는 바람에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고 추하게 만들고 또 어려서부터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다 악하게 된 것입니다. 항상 추악한 범죄를 도모 실행한다는 흉악범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하여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바람에 자신은 물론 이웃과도 분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 눈의 티끌만 잡아내고, 사람 사이에 시기, 질투, 경쟁, 다툼, 분쟁, 저주가 끊이지 않음으로써 윤리적 죄들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세례와 구원
아담 이후로 인간의 본성을 지배하게 된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어떡하든 하나님의 반대편으로만 끌고 가려는 힘, 경향, 습관, 태도 등입니다. 윤리적으로 잘못된 행동은 그 드러난 결과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반드시 죽음으로만 갚아야 할 죄의 본질인줄 모르고 그저 윤리적 죄를 회개하는 정도로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태생적, 습관적으로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라면 구원의 의미는 그 반대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해되어서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러려면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우선 그 동안의 하나님께 거역했던 죄 값을 하나님에게 치러야 합니다. 또 자기중심이었던 자신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깨어져야 합니다.
먼저 죄 값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감당해주었습니다. 그분의 거룩하고 완전한 공로와 의를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자기중심으로 철저히 부패했던 영혼이 철저하게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자기밖에 몰라 자기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자신하는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를 철저히 깰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하나님이 새 생명을 그 영에 부어 넣어주셔서 새롭게 거듭나게 해주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면 죄 값을 대신 치른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한 죄인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부활하심으로 죄의 삯인 죽음을 이겨내는 첫 본을 보였습니다. 또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각 죄인에게 보내주심으로써 한 죄인의 영혼을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기까지 했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서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는 소원과 결단과 실천이 따르게 해준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다는, 정확히 말해선 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새 사람으로 거듭났음을 교회 공동체 앞에서 증언하고, 또 이제부턴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기꺼이 동참 헌신하겠다는 서약의 표시가 세례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3-5)
한마디로 세례는 구원을 얻은 후에 그 표시로 받는 것이지, 세례 받는 것으로 구원을 받거나, 구원으로 가는 과정이거나, 심지어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외적 선행여부나 영적열매와 마찬가지로 성실한 종교 활동이 구원의 증표는 되어도 그 수단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본인의 철저한 깨어짐으로 삶과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 것으로만 구원이 결정되는데 하나님과 본인만이, 때로는 본인도 모르거나 자신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례 받았는데도 형식적 종교생활만 하면서 열매가 없다는 이유로 구원 받지 못했다고 함부로 판단하지 못하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이유가 본인이 결단하지 않았거나, 하나님의 때가 아직 안 되어서 그런 상태에 있다고도 말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본인의 깨어짐이 있었느냐는 여부는 제 삼자가 판단할 몫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접 기도와 구원
다시 강조하지만 본인이 분명 성령으로의 거듭남의 과정을 거쳤다면 그 후에는 그런 열매가 없거나 심지어 죄를 지어도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에 아직도 자기가 자신의 주인으로 남아 있으면 아무리 기독교적인 종교 활동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어도 구원 전이라고 봐야 합니다.
제 삼자가 사람의 내면까지 완벽히 확인할 수는 없기에 교회에선 차선의 방안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를 줄 때에 기독교 구원교리에 대한 학습이나, 자신의 구원 간증문 등을 통해 그 믿음을 확인하는 절차를 반드시 갖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는 심령의 깊은 내면까지 즉, 새로운 영이 되었는지 분별할 수는 없기에, 단순히 기독교 교리에 동의하고 믿는지 점검하고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가 나를 위해 내 죄를 감당했다는 사실을 믿느냐는 한 가지 질문에만 초점이 모입니다.
어떤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그 믿음이 자신의 삶에 진리로서 실현되어져야 합니다. 예컨대 사장이 비서를 믿는다면 인감도장을 맡기고 통장의 비밀번호도 다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뜻은 더 이상 죄가 즉, 자기중심적인 삶의 경향이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로 헌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거나, 최소한 살아가려는 태세와 소망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최근 교회에서 복음을 가르치는 내용들이 너무 피상적입니다. 자신의 철저한 깨어짐과 새로운 삶으로의 방향전환에 대한 강조가 없거나 많이 부족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대속 죽음 교리에 대한 이성적 동의와 앞으로 기독교적 종교생활에 충실히 하겠다는 서약으로 구원이 된 것처럼 가르칩니다. 복음의 일부만 형식적으로 가르치고는 구원 받았다고 선포하고 세례를 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또 그럼으로써 아직 실제로 구원 받지 못한 자가 그 본인은 물론 주위 성도들에게 마치 구원 받은 것 같은 인식을 심어줍니다. 교회가 신자를 거룩하게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일에 충성하는 종교인만 양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례 받고 교회 일에 열심을 보이나 정작 삶의 방향이 전환되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충성하는 교인은 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영접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핵심 교리에 대한 문답을 거친 후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결단을 하면 구원을 얻었다고 선포합니다. 물론 그런 과정 중에도 성령이 간섭하여 영혼이 새롭게 되는 중생의 역사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접기도 한 번으로 자기 내면의 철저한 깨어짐이 일어날 확률은 너무나 낫습니다.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세례문답이나 신앙간증문 하나로 본인의 중생여부를 교회가 완전히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로선, 넓게 적용하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심중을 완벽하게 확인할 수 없기에 현재처럼 차선의 방안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례를 주기 전에는 물론, 제자훈련이든 설교든 교회가 구원의 복음을 소개할 때는 반드시 그 심령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 둘 다에 연합하여 인생의 방향전환이 실제로 일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자세히 가르쳐야만 합니다.
질문자께서 고등학교 때에 회개도 하고 결단도 했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는 실제적인 인생의 방향전환은 일어나지 않은 채 단순히 기독교 교리에 수긍만 했다면 아직은 구원 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약 구원으로 예정한 사람이라면 죽음을 허락하기 전에 반드시 당신의 인도와 섭리로 중생의 체험을 겪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에 대해선 다음 4번 답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6/30/2013
어렸을 때 그림 성경을 가장 먼저 읽었지만, 그리스로마신화도 재미있게 읽어서 그런지 선악과(타락) 개념이 자꾸 판도라의 상자로 받아들여져 고역이었습니다. 타락 담화(성경의 맥을 잡자)가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