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에 쪼들려 믿음에 회의가 옵니다.
[질문]
고민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쓰네요. 가정환경이 계속 어려워져서 힘드네요. 신앙심 강한 엄마는 자영업을 하고 있는데 이 자영업이 안 되다보니까 자꾸 빚만 늘어나고 다시 빚내서 돌려막고 이 와중에도 하나님 역사하시면 장사 잘 되는 건 한순간이라며 믿고 계속 장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 빚의 피해액은 아버지와 저와 누나가 부담하게 되지요. 저도 알바해서 번 돈을 자꾸 쓰지도 않고 집 빚 갚는데 쓰다 보니 그리고 하나님이 침묵 하시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엄마가 잘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듭니다. 가게 때문에 부부싸움은 계속하게 되고 보고 있는 나도 아빠가 엄마를 구박해도 처음에는 엄마 편이었는데 이제는 정도가 심해지니 아버지편이 되네요. 집세 밀리고 수도요금전기요금 전화요금이 밀리고 빚 때문에 공부는 뒷전 알바에 충실하게 되는 삶. 가난해도 좋으니 사랑이 있었으면 하는데 그 사랑이 신앙심 좋은 엄마의 가게가 가로 막고 있는 것 같아서 힘드네요.
모든 상황 가운데서 부르신 곳에서 감사해야 되는데 힘이 드네요. 부모님이 싸우는 걸 보고 있기도 힘들고 돈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힘드네요. 가난하고 사랑이 메마른 가정에서 하나님이 저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으신 걸까요? 나중에는 그 뜻이 무엇인지 알겠지만 지금은 힘들어 감사가 안 나와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저에게 조언이라도 해주세요.
[답변]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질문자의 현실적 형편이 너무 딱하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믿음에 회의가 온다니까 더더욱 그렇습니다. 질문자의 신앙이 연약하기에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믿음 안에서 얼마든지 풍성하고도 아름답게 살 수 있는데도 작금 목회자들이 잘못 가르치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는 전형적인 예를 보는 것 같아서 아주 갑갑하고, 심하게 말해 화가 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본질
“하나님 역사하시면 장사 잘 되는 건 한순간이라며 믿고 계속 장사를 하는 것”을 두고 “신앙심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엄밀히 말해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계속 적자인데도 빚을 자꾸 끌어넣고 식구들의 희생까지 강요하며 하나님의 한방 큰 은혜를 믿고 버티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어리석고도 무모한 억지이자 맹신(盲信)입니다. 성경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아직 믿음조차 생긴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결국이 영혼의 구원”(벧전1:9)이라고 했습니다. 또 구원은 자신의 공로 하나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건짐을 얻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약5:20)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딤후4:18)
하나님이 죽음의 형벌에서 사면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자에게는 성령님이 영원토록 떠나지 않고 내주하십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할 때부터 성령의 간섭이 아니고는 진정한 회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진리는 하나님의 영으로만 깨달을 수 있기에.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구주라 시인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는 천국에 입성할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분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차츰차츰 자라게 하십니다. 내주하신 성령이 간섭하여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을 발하는 삶을 살게끔, 필요하다면 때로는 시련을 주어서라도 이끄십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진 즉, 신앙심이 좋다는 표식은 반드시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첫째는, 본인의 인격이 거룩하게 바뀌면서 주님이 현재 맡겨주신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주신 은사와 달란트를 사용하여 정직하고 성실히 살아서 그가 속한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자신은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더라도 자기로 인하여 주님을 모르는 주위의 불쌍한 영혼들로 사탄의 미혹에서 벗어나 구원 받게끔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쓰임을 받고 있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교회의 통상적 활동에 아무리 경건과 열심과 정성을 다해 참여하고 있어도 상기의 두 가지 모습이 나타나지 않으면 결코 신앙심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자신의 도덕적 영적 우월감을 높이려는 의도도 그 욕심 안에 포함됨, 기독교라는 종교를 수단으로 동원한 것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매순간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말씀과 기도에 전념한다면 날마다 자신을 쳐서 경건의 훈련을 쌓게 됩니다. 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만나는 사람들마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광채가 자기를 통해 반사되게 합니다.
바울 사도는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고 그의 관심과 염려는 오로지 연약한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있었습니다(고후11:24-29).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害)로 여겼습니다(빌3:7). 대신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약한 것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했습니다(고후12:10). 정말로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만이 사는 일생을 살았습니다(갈2:20).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짜로 신앙심이 좋은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바울과 같은 위대한 인생을 결코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수시로 자신의 정욕과 세상의 죄와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처럼 그리스께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그 방향은 완전히 전환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 중에, 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과 자신의 형통 중에 전자만 추구하기로 말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 실천이 아주 더디고 수시로 주저앉아도 우리 가운데 착한 일을 시작한 이가 우리를 반드시 당신의 목적지로 이끌어서 천국의 영광으로 덧입혀 주실 것을 믿습니다. 천국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며 그리스도를 하나씩 닮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고난을 기도로 버텨내는 것이 믿음(?)
지금 현재 적자가 계속 나는 가게지만 하나님이 한 번에 일으켜 주실 것을 믿고 참고 기도하는 것도 일종의 믿음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관련 당사자가 예수님을 닮아서 날마다 조금씩 거룩하게 바뀌는 일과, 또 그 가게로 인해 누구든지 예수님의 복음 앞으로 진정으로 항복하며 나오는 일이 과연 일어나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성도가 정작 참아야 할 대상은 자신의 고통이 아닙니다. 믿은 후에 주님 가신 길을 따라 세상 풍속, 쾌락, 죄악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감으로써 발생하는 사람들의 멸시와 핍박입니다. 쉬운 예로 공무원이 절대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상관에게 뇌물 상납 등을 하지 않기에 생기는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야말로 신자의 인내입니다. 가게를 하며 저울을 속이지 않고, 절대로 정직하고도 선한 방법으로만 운영하면서, 정해진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사장이 손해를 보더라도 종업원의 복지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와 악은 모든 모양도 다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뿐만 아니라 믿고 난 이후에도 오로지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믿음의 결국이 영혼의 구원이라고 정의를 내린 이유도 그런 믿음이 있어야만 세상과 죄악으로부터의 핍박을 참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5-7)
사도는 초대교회 신자들더러 로마 황제 대신에 예수를 믿음으로써 감내해야 할 순교의 형벌을 참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처럼 소외되고 불쌍한 자들을 섬기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느라 겪는 현실적 멸시와 손해를 기꺼이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자에게는 천국의 구원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세에 나타날 구원이 신자의 개인적 현실적 형통과 안일이 결코 아닙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직접 읽은 초대교회 신자들은 실제 그 권면대로 찬송을 부르면서 기뻐하며 산 채로 맹수에게 죽어 갔습니다. 오늘 날에 비교하면 상관의 미움을 사서 좌천 되던지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해고되더라도 절대로 부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게가 완전히 쫄딱 망하는 일이 있어도 탈세하지 않고 종업원의 복지를 먼저 감안하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죄와 싸우는 것이 신자의 참 인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환난 중에 고통당하는 것을 끝까지 버려둘 만큼 무관심하고 냉혹한 분은 결코 아닙니다. 때로 정말로 기적적인 방법으로 구원해 주십니다. 완전히 생명을 잃거나 신앙마저 포기할 정도의 고통에 그렇습니다. 가게가 적자 나는 것은 신자의 생명을 잃거나 믿음을 포기할 정도의 환난은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기적적 간섭이 아니라도 현실적으로 더 좋은 대체 방안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빨리 손을 털고 문을 닫는 것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무조건 기도한다고 가게가 언젠가는 다시 흥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종으로 부리겠다는 심보입니다. 자신의 거룩한 변화나, 복음의 진보나,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과는 무관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그분의 능력을 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는 특별한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성경의 계시가 절대적 진리임을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반드시 한 죄인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 완전히 엎드리어 항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예수님이 그 수많은 기적을 베푼 목적은 당신이 메시아임을 알게 하고 또 당신을 믿어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문맥을 잘 살피면 기적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기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의 새 생명을 얻기 전입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기적을 바라고 기도한다고 기적을 베푸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바꿔 말해 이미 믿은 자에게는 평생에 한두 번 아주 비상한 경우가 아니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가만히 두면 다른 방안이 없어 완전히 죽게 되었을 때 그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기적 같은 은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다 죽게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이 신자의 순교로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면 그냥 죽게 버려두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질문자 어머님이 현재 버티시는 모습은 비유컨대 아이가 평생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써 활동은 않고 급한 일만 생기면 부모에게 계속 돈 달라고 떼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억지로 돈을 얻어내고서는 우리 부모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 알겠지라고 주위에 자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과연 그 아이와 그 부모를 정상으로 생각하겠습니까?
성공 장담은 악(惡)한 일
가게가 적자인데도 계속 빚을 끌어넣는 것은 적절한 현실적 대책도 아닙니다. 물론 현재 최선을 다해 가게를 운영하겠지만 모든 상황을 정확하고도 철저히 분석하여서 올바른 경영 대책부터 세워야 합니다. 수요예측, 소비자와 시장분석, 경쟁자 비교, 현금수지, 손익계산, 투자대비 수익률 등등을 세밀하게 계산하여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으로 가게를 운영하는 것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여행에 내보면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고 당부했습니다. 그 이유가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탐욕과 죄악으로 가득 차있기에 신자가 그런 안에서 사업을 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순결한 목적과 방법을 채택해야 합니다. 또 제반 여건을 냉철하게 분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성과 지성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이성과 지성을 초월하는 것이긴 해도 상충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나겠느냐”(눅14:28), 또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눅14:31)라고 했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세상의 모든 것과 당신을 맞바꿔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일과 주님을 따르는 일 중에 정말로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철저히 따져보라는 뜻입니다. 또 싸움에 도무지 승산이 없다고 예상되면 화친을 청하라고(32절) 덧붙였습니다. 이를 사업에 적용하면 범사에 냉철하게 계획하되 도무지 가능성이 없으면 문을 닫으라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한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3-16)
장래의 일은 오직 하나님 손에 달렸으므로 미리부터 장담 내지 맹세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은 허탄한 자랑이며 악한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재물을 얻는 능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사업을 사람이 계획할지라도 실제로 인도하시는 이도 하나님입니다. 범사에 주님의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주권이 역사함을 온전히 믿고 겸손히 맡겨야 합니다. 생명마저 잠간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 같은데, 사업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하루아침에도 완전히 망하게 하십니다. 반드시 기적적 방안으로 크게 흥하게 해주실 것만 믿고 계속 빚을 얻는 것은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악한 짓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4:11-14)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권면입니다. 아무리 궁핍해도 자족하면서 검소하게 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고 했습니다. 풍부와 궁핍에 상관없이 믿음으로 사는 비결을 터득했다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하면 대박으로 응답된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풍부와 궁핍 같은 외부 여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이는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보낸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하는 인사말입니다. 그들에게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현실적으로 힘든데 그들이 동참했으니 그들 사정도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던.”(고후8:2)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신자의 현실적 궁핍을 제거해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궁핍하든 풍부하든 신자가 함께 힘을 합쳐 당신의 나라를 확장시키도록 하는 것이며, 또 그 일에 필요하다면 풍요도 주지만 궁핍은 물론 때로는 완전히 망하게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현실 형편이 어떠하든 오직 십자가 복음만이 더 편만하게 증거되는 일에 충성하는 것이 신자가 좋은 신앙심으로 행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믿음의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열매
하나님은 교회를 만들기 전에 먼저 가정을 세웠습니다. 인간더러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며 살되 당신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소명을 가정에서부터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믿음의 실제적 열매가 우선적으로 맺혀야 할 곳 즉,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가장 먼저 드려질 곳이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신자 부모는 자기 자녀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구원 받게 한 후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자라서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가 되도록 양육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현재의 유대인들도 모세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구절은 ‘쉐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이 구절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6,7절) 했습니다. 자녀들도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자로 키우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2:7)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의 그 뜻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권면도 아이들의 인격과 자존심과 감정을 존중해주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과 같이 아이를 노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길러서 그들로 주님의 사랑의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자기들 안에 충만케 만들게 해야 합니다.
지금 질문자의 상황은 성경의 이런 권면과는 정반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족들끼리 어려운 상황을 힘을 합해 이겨나가는 모습은 분명히 선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각자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있는 모습에서 기쁨으로 자원해야 하고 또 그런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당연히 서로 희생하며 힘에 넘치도록 섬길 수 있습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모든 면에서 가족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가게를 돕는 것은 너무나 선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딘가 잘못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억지로 힘을 합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거나, 아니면 가족 중 어떤 사람의 신앙이나 정신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질문자님의 상황은 그 둘 다입니다. 우선 안 되는 사업을 가족의 희생을 강요하며 억지로 끌고 가는 것부터 잘못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사업성이 충분하고 곧 회생될 조짐이 보인다면 당연히 불경기를 참고 사업을 계속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과감히 정리하든지, 최소한의 손해만 보게끔 구조조정과 비용절감 등의 혁신을 감행해야 합니다. 또 새로운 아이템을 보충하든지 호경기가 다가올 때를 대비하여 미래지향적 경영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일으켜주실 것이라는 맹신만으로 사업을 경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업은 믿음이 좋다고 성공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업가적 자질, 경륜, 경험, 지혜, 분별력, 담력 등이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발휘되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부모의 첫째 책임은 자녀를 말씀으로 키워서 혼자서 스스로 온전한 신앙인이자 사회인으로 독립하게끔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또 부모 쪽에서 그 일을 위해 마땅히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질문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학업을 계속하도록 해주어야 하고 누님도 회사 생활에서 능력을 발휘하게 하고 장래 가정을 꾸릴 준비를 하도록 최선을 다해 후원해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보기에도 도무지 가망 없는 일에 자녀들의 정상생활까지 방해 받으며 번 돈까지 끌어넣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옳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끝까지 책임지는 것은 몰라도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버티다 호경기로 바뀌든지, 기적적으로 사업이 불같이 일어나 단 번에 모든 부채가 해결되어서 그 동안의 고생이 감사로 바뀌는 일이 안 일어난다고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도우시면 이런 큰일도 일어나는가보다 간증거리가 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번창이 단순히 사업여건이 바뀐데 기인하는데도 하나님의 뜻인 양 착각할 수 있습니다. 설령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증거일 뿐이지, 그분의 거룩한 뜻을 실현한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힘들 때마다 기도해서 문제를 해결 받는 것만이 믿음이 하는 역할의 전부라면,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만 증명한 것뿐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아이가 사탕을 주어야만 부모로 인정하겠다는 뜻이며 또 주위 아이들에게 나에게는 힘들 때마다 사탕을 주는 부모가 있다고 자랑한 꼴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해결책은?
무엇보다 가족의 마음이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모든 식구가 엄마처럼 빚을 내어서라도 견디고 있으면 한 번에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정말 믿는다면 이런 질문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마음이 되어서 계속 밀어붙였지만 실패로 끝난다 해도 한마음으로 그렇게 했다면 반드시 그 실패 가운데서 얻는 신앙적 유익이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지금처럼 가족의 생각이 제 가각이라는 것 자체가 벌써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것이며, 신앙을 떠나 상식적으로만 따져도 정상적 가족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실은 무리하게 빚을 내어 사업하는 것부터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하나가 되어 믿음으로 밀어붙인다고 하나님이 해결해주시지 않습니다. 현재 공공요금조차 밀릴 정도라면 더 이상 가게를 끌고 갈 현실적 이유도 없습니다.
최근에 가족 간의 사랑은 실종되고 학생인데도 제대로 공부도 못하는 바람에 신앙에 회의가 들고 돈 때문에 집안에 분쟁이 잘 날이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되어져 가는 상황이 그 사업을 그만두라는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요? 질문자님 말씀대로 돈보다 가족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우선입니다. 지금은 믿음의 본질과 목적은 뒷전이고 개인적 희망 내지 욕심이 앞에 나섰습니다. 하나님과 재물 중에 재물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은 그 재물의 주인을 섬기는 종으로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라는 종교 행위를 뜨겁게 해도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 리는 없습니다.
행간의 의미를 살펴볼 때에 아버지의 믿음도 아직 온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금 같은 행태가 지속된다면 아버지의 믿음의 성숙은 더 늦어질 수 있습니다. 제가 잘못 판단하여 온전한 믿음이 있다 해도 이런 일로 인해 믿음은 오히려 퇴보할 것입니다. 질문자부터 이미 그렇게 되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가족 모두가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일정 기간을 정해서 가게를 계속할 것인지와 각자의 앞으로의 진로를 두고 기도해 보십시오. 그리고 각자가 성령의 미세한 음성으로 응답을 받았거나 말씀으로 깨우친 대로 함께 모여서 진솔하게 토의를 하십시오. 특별히 엄마의 무리한 억지와 고집이 바뀌도록 겸손하며 온유하게 설득해 보십시오. 어떤 결론이 내려졌던 가족이 진심으로 동의하는 대책으로 하나가 되면 그대로 따르십시오.
만약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본인이 기도하여 응답 받은 혹은 깨우친 대책대로 엄마나 가족의 반대가 있어도 실행하십시오. 질문자의 경우는 최우선적으로 공부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경비를 제외하고는,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계속해서 부모를 도와주어도 됩니다.
공부에 우선하라고 해서 하나님을 뒷전으로 하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독립하기 위해서 현실적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을 통해 믿음이 다가오는 세대에 계속 전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매진하라는 것입니다.
어머님에게는 자신의 뜻을 오해하지 않도록 자세하고도 솔직하게 전하십시오. 필요하다면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가게에 도와주지 못하고 제 공부하는 일에 쓰겠다고 선언하십시오. 엄마를 배반하거나 가족의 어려움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래야만 엄마가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고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헨리 클라우드와 존 타운센드가 공동 저작한 “No라고 말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좋은 씨앗 출간”이라는 책도 참조해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1-4)
성경은 환난이 끝나고 좋은 일이 생기면 즐거워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살전5:18,16). 본문에서도 환난 중에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믿음과 상관없이 누구나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환난의 고통을 겪는 와중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 첫째 이유는 하나님과 화해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나중에 즐거운 일로 바꿔줄 것을 믿기에 감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들어온 신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가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이 땅의 현실과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여 없습니다. 역으로 말해 세상에서 몸은 죽을 수 있어도 즉, 사업은 망할 수 있어도 하나님 안에선 신자의 영혼은 천국의 영광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신앙심이 좋은 것입니다.
9/6/2013
믿음 좋다, 신앙 좋다라는 칭찬 듣기 좋아하며 끊임없이 허탄한 자랑을 좆았기에 탐욕 채워주시라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제 욕심 채우는 일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던 무수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욕심이 물질이던 명예이던 종교성이던, 하나님을 이용하여 그 욕심 채우려는 것은 사탕 달라 떼 쓰면 사탕 주시는 아버지가, 돈 달라 떼쓰면 돈 주시는 이가 내 아버지라 이웃들에게 자랑하려는 허탄한 자랑의 죄악임을.... 떼 씀을 믿음이라, 기도라 종교성으로 포장하였던 수많았던 일들...
귀한 말씀으로 아직 죄인되었을 때 십자가 보혈로 구원해 주신 그 사랑안에서 옛사람에서 벗어나고, 벗어나며 또 벗아나며 썩어질 구습을 좆길 좋아하는 본성들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사람으로. 새사람으로 지어 주십사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